그림책은 그림과 글이 어깨동무를 하고 사이좋게 걸어가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림과 글이 조화를 이루며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고 그림 그자체가 내용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기 때문에 마쯔이 다다시 같은 분은 ‘이야기가 담겨진 그림이 있는 책’이라고 정의하고 있어요. 때로는 그림만으로도 멋지게 이야기를 세계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훌륭하다는 평을 받는 그림책은 메시지가 훌륭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 그림이 훌륭한 것입니다.
이런 조사가 있었습니다. 같은 화가가 그린 아이 그림과 노파그림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어떤 것이 더 좋은가? 하고 물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이 그림에 동그라미를 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루벤스라는 화가가 자기 아들과 어머니를 그린 그림들이었습니다. 밝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그림 취향을 보여주는 결과라 할 수 있겠지요. 이 결과에 대해 런던 대학의 곰부리치( Ernst Hans Josef Goombrich)교수는 이 두 그림이 다 훌륭한 것이라고 하면서 ‘그림’ 으로 좋아할 수 있는 것은 다 훌륭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내가 익숙한 것을 부담없이 아이들에게도 권하게 되고 아이들도 그것을 좋아해 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어른들은 흔히 얼핏 보고 귀엽게 느껴지는 그림이나 눈을 끄는 색채에 더 마음에 끌리는 듯합니다. 사실 이런 그림들은 보는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을 띠게 만드는 일이 많아요. 하지만 귀엽다는 것은 어른의 감정이지 아이들은 자기가 귀여운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자기를 귀엽다고 한다면 어른의 관점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지요. 인간과 자연을 꿰뚫는 눈으로 진실을 표현한 그림책은 오히려 이 귀여운 이미지와 멀리 있기 쉽지요.
그림책은 세상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 다양한 생각들을 그림을 매개로 해서 보여줍니다. 거기에는 귀여운 것도 있고 무시무시한 것도 있고 즐거움도 슬픔도, 질감이나 촉감도 있고 어떤 분위기 심지어는 의미화 할 수 없는 조형 그 자체의 아름다움까지 모두 녹아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크게 사랑받는 작가 하야시 아끼꼬의 《이슬이의 첫 심부름》은 현실 생활에서 실제로 있음직한 이야기를 사실적인 그림으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림 안의 아이가 곧바로 내 아이 같은 생각이 들어 마음이 편안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른 아이 모두에게 폭넓은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반면에 토미 웅거러의 《제랄다와 거인》을 보면 거인이 피 묻은 식칼을 들고 아이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장면이 나오니 처음 보는 사람들이 기겁을 하고 도망치려 하지요. 이런 책들은 아이들 정서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서에도 나쁜 영향을 줄 것이라는 걱정 때문에 이 책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기를 꺼리는 사람들이 많아요. 하지만 아이들은 어른들의 걱정과는 달리 오히려 무척 재미있어 합니다. 그저 이야기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처럼 책 속의 이야기를 실제 현상과 연상하여 생각하지 않는 것이지요. 아이들의 정서는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다양하며 어떤 현상을 유연하게 받아들일 줄 압니다. 밝은 것을 좋아하는 것만큼 어두운 것도 받아들일 줄 안다는 것입니다.
《지각대장 존》은 억압기제에 대한 반항의 메시지를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이 책의 언어적 메시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고 복잡합니다. 그것을 전하는 아이의 표정이나 분위기는 이 책의 그림에서 살아납니다. 이 책의 그림은 마치 그리다 만듯합니다. 하지만 그림으로서의 분위기나 정서는 대단히 훌륭하다는 평을 받고 있지요. 권윤덕의《엄마, 난 이 옷이 좋아요》를 보면 이 책은 바지나 점퍼 하나하나가 살아 있습니다. 옷마다 느낌이 있고 아이들이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제이라면 주제라고 할 수 있겠지요. 특히 필요한 부분부분 꼼꼼하게 옷감의 재질까지도 느낄 수 있도록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그림에서 질감을 느낄 수 있게 해 놓은 것입니다.
꼼꼼하게 그린 것으로 빼 놓을 수 없는《우리 순이 어디가니?》를 보면 봄의 아련한 풍경이 그대로 살아있는 듯 눈앞에 펼쳐집니다. 작가의 꼼꼼하고 치밀한 취재를 바탕으로 의미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섬세한 터치로 봄날의 색감뿐만이 한가로움 속에서 바삐 움직이는 농촌의 분위기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아련한 분위기를 맛보게 하기도 하고 많은 지식과 정보를 함께 담아 보여줍니다. 《노랑 우산》은 글자 없는 그림책으로 이 책에는 우산만 나옵니다. 한장한장 넘기면서 노랑우산이 파란우산 만나고, 돌다리도 지나고 계단도 내려가면서 우산이 늘어나고 화면의 색이 변화해 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책은 분위기를 즐기는 책이지요.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면 감상에 방해가 되는 책입니다. 우산이 나타나니 분명 비오는 날인데 빗줄기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비오는 날이 아니구나 하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작가는 빗줄기를 그리지 않고도 비가 오는 날의 습한 느낌과 색감을 연구한 것입니다. 이 책의 작가 역시 정밀한 취재의 과정을 거치고 나서 그림을 그렸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를 전달하기 보다는 조형으로만 구실을 합니다. 그럼으로써 말로 나타내지 않은 기분, 정서, 리듬 같은 추상적인 여러 가지를 오히려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루이스 브라운의《씨앗은 어디로 갔을까?》도 그림으로 촉감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씨앗 하나가 해바라기로 자라기까지의 과정을 다 보여주는데 쓰인 단어는 채 50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생명의 탄생이며 성장이라는 대자연의 신비를 훌륭하게 담아냈습니다. 해바라기 씨를 심는 그림을 보면 씨앗을 파종할 때 땅의 축축한 느낌이 짙은 흙색으로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마치 금방이라도 손에 진득한 흙이 묻어나올 것 같습니다.
성경 창세기의 내용을 바탕으로 만든 제인 레이의 《세상은 이렇게 시작되었단다》를 보면 현대의 놀라운 옵셋 인쇄기술을 즐기기라도 하듯 화려하고 다양한 색의 잔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녹색만 해도 금빛이 감도는 녹색, 짙푸른 녹색, 연두에 가까운 녹색... 다양한 녹색이 아이들의 눈을 사로잡습니다. 이런 책을 보면 색을 잘 쓴다는 것이 울긋불긋 원색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중간색을 잘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하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반면에 그림책의 그림은 반드시 색채가 다양해야 할 이유도, 예쁘고 화사해야 할 이유도 없다는 것이지요. 흑백의 그림도 그 그림이 이야기의 내용과 일치할 때 아이들은 충분히 받아드리거든요. 삽화 색채나 스타일은 그것이 얼마나 화려한가 혹은 얼마나 꼼꼼한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이야기의 내용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 하는 점이 중요합니다.
거즈 윌리엄즈의 《하얀 토끼와 검은 토끼》라는 그림책에는 노란 민들레 외에는 검은 색과 엷은 하늘색, 노랑색 정도의 색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숲속의 하얀 토끼와 검은 토끼의 사랑을 그린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의 분위기가 그런 색으로 나타내기에 더욱 적합한 것이었겠지요. 만약 여기에 울긋불긋 채색된 빨간 꽃이나 초록색 나무를 잔뜩 그렸다면 이야기의 조용한 분위기도, 독자를 끌어넣는 효과도 잃어버렸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매리 홀 옛츠의 《숲속》이라는 그림책이 있는데 이것은 흑백 그림입니다. 아이들은 이 그림책을 빨려들어가듯이 읽어요. 그런 것을 보면 어린이의 마음 속 세계를 그려내는 데에는 흑백이 정말 효과적이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해줍니다. 내용에 부합되는 것이라면 어두운 톤의 그림이라도 아이들은 크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아요. 단색으로 된 그림책이라도 그림과 내용이 흥미롭다면 충분히 아이들을 사로 잡을 수 있습니다.
흑백, 혹은 제한된 색채로 오히려 이야기를 잘 살려 낸 책들도 아주 많아요. 때로는 억제된 색상, 억제된 표현이 더 이야기를 살려낼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코를 킁킁》이나 윈더가그의 《백만마리 고양이》, 맥클로스키의 《아기 오리들에게 길을 비켜주세요》같은 책은 흑백 그림으로 보여주는 또 다른 대개의 어른들이 어린이들은 밝은 색채만을 좋아한다든가 귀엽고 예쁜 그림을 좋아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어린이들은 글과 그림을 통해 받아들이는 이야기 자체를 즐깁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잘 전달하는 그림은 흑백그림이든 채색한 그림이든, 세밀하게 그린 그림이든 약화시킨 그림이든 스타일에 관계없이 받아들입니다.
정승각 선생님의 《강아지똥》은 원작 ‘강아지똥’의 인기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권정생 선생님의 원작도 우리 아동문학사에 길이 남을 명작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림책 《강아지똥》이 좋은 책이라는 평을 받는 것은 원작이 좋은 책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원작을 다시 해석해서 다시 그린 ‘그림책으로서’ 평가받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림언어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다시말해 훌륭한 이야기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상상력으로 새로운 그림으로 해석해 냈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라는 것이지요.
이렇듯 그림책은 다양함을 수단으로 해서 무엇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함 그 자체가 목적인 책입니다. 어린이들이 다양한 세계와 만나는 즐거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익숙한 것이 아니라는 잣대’로 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몰라서 권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이가령<해야해야>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