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맛이 좋기로 유명한 어떤 커피 전문점 사장님이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자기가 커피전문점을 내기 위해서 커피 맛이 좋다고 소문난 집들을 다니면서 맛을 보기 시작했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때마다 아무리 새로운 맛을 느껴보려고 해도 잘 느껴지지가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러다가 한번은 친구와 이야기를 하면서 커피를 마시다 보니 아 그 맛이 아주 일품이더래요. 햐, 이 집 커피 맛 참 좋다. 여기가 어디지? 하고 보니 전에 자기가 들렀던 곳이거든요. 그 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 무엇을 의무로 할 때와 즐거움으로 할 때 이렇게 차이가 나는구나 했답니다. 너무 "정신 차려" 하고 있었을 때는 미각도 긴장을 해서 그 기능을 다 하지 못하고, 그것을 자꾸 이성으로(맛을 느끼는 것은 감각인데요) 판단을 하려 하니 어려웠던 것이지요. 그랬던 것이 편안한 마음으로 커피를 즐기자 미각도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놀이"는 아이들에게 아주 중요한 생활입니다. 그 놀이를 하면서 아이들은 즐거움을 만끽합니다. 또 신체를 단련시키고 발달시키는 데에 "놀이"처럼 좋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놀이를 하면서 "나는 지금 신체를 단련시키고 있어." 하고 생각하는 아이는 아마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저 놀이 안에 빠져서 목마른 것도 배고픈 것도 추운 것도 느낄 틈이 없도 없습니다. 어떤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즐거움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원리가 학습에 적용되면 좋겠다 생각합니다. 교육은 의무라는 생각 대신에 배우는 것은 기쁨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도록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요? 그런데 오늘날 아이들에게 퍼져 있는 배운다는 것에 대한 느낌은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아마 감옥 같은 무엇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이 "지금 나는 배우고 있어."라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면 교육 방식에 뭔가 잘못이 있다고 생각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어떤 일을 즐겁게 하고 나서 "아, 내가 참 좋은 것을 배웠구나." 하고 느낄 때 그 지적 희열은 더 커지리라 생각합니다.

가르치는 사람들도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어떤 직업적인 태도에서 조금 자유로웠으면 좋겠습니다.
독서나 글쓰기 교육은 수학 같이 어떤 공식을 적용하고 준비된 해답을 얻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밖에서 들어온 자극을 수렴해야 하는 부분도 있지만, 못지 않게 내 안의 것을 발산하고 확산시키는 일도 아주 중요하지요. 마치 자기 안에서 솟아올라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바깥 세계로 흘러 넘치게 하는 샘물 같이 되도록....

편안한 마음으로 마치 놀이하듯이 빠져드는 교육,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사이의 친밀한 신뢰감이 형성되었을 때 성큼 한 걸음 다가갈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가르치겠다는 욕심은 잠시 수면 아래 내려놓고 아이들의 처지에 서서 아이들의 마음을 읽고 헤아려 주는 일부터 시작해보면 참 좋겠다 싶습니다.
 

-이가령 해야 해야 중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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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어른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면서 자랍니다. 어른들은 알게 모르게 아이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본을 보이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우리 아이들이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을 귀하게 여기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나길 바라기도 합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마음, 정말 중요한 것이 아닐까요? 작은 생명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큰 생명도 소중히 여길 줄 알게 되는 것이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이 어쩌다 나무나 꽃을 꺽게 되면 "꽃도 꺾이면 아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 일이 자꾸 되풀이되면 엄하게 꾸짖기도 하면서 아이들의 나쁜 버릇을 고쳐주려고도 합니다.

하지만 만약에 지도하는 사람은 정작 꽃이 꺾이건 밟히건 전혀 가엾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말로만 가르치려고 한다면 그것은 교육적인 효과로 연결되지 못한다고 하지요. 아이는 표면적으로는 어른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 같지만, 그 사람이 실제로 슬퍼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느낌으로 압니다. 그러니 그런 입으로만 하는 가르침을 진심이라고 납득하진 않는다는 것입니다. 납득하지 못하는 않는 일이 몸으로 구현될 리가 없습니다. 진실로 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어린이가 꽃을 꺾었을 때 문득 나타낸 노여움이나 슬픔의 표정이 절로 어린이에게 무엇인가를 전달하게 마련입니다.

참으로 두렵게도, 지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감성. 인격, 기량, 덕성 등의 정도 이상으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에게 내가 전달해 주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미리 내가 안에 품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누군가를 가르치겠다는 마음을 먹은 사람들이 꼭 새겨두어야 할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펌- 이가령의 해야해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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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관심 먼저 꿰뚫어라"

1. 아이들이 좋고 싫음을 표현하기 시작하면 직접 책을 고르도록 돕는다.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자신을 위한 책을 자신이 직접 고르게 한다.

2. 지역 도서관의 어린이 도서 코너를 면밀히 조사하고 어린이 책 전문 사서에게 조언을 구한다. 어린이 책 사서는 책과 어린이 양쪽을 두루 잘 알고 있어 많은 도움이 된다.

3. 아이들의 관심을 먼저 꿰뚫어 보고 난 다음에 아이들이 관심을 나타내는 책이 있는 곳으로 이끈다.

4.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그들의 자녀들이 재미있게 읽었던 책에 대해 조언을 구한다. 가끔씩 책을 교환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5. 아들, 딸이 책을 좋아하지 않으면 그대로 내버려두라. 강제로 책 읽기를 권하면 역효과만 날 뿐이다.

6. 아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책은 읽고 또 읽는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어렸을 때 읽었던 책을 읽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이해하라.

7. 여러 도서 관련 단체에서 추천한 책의 목록을 눈여겨 본다.

8. 다양한 장르의 책을 소개하고 아이들의 반응을 잘 살펴야 한다. 가슴으로 느껴지는 책이 아이에게는 좋은 책이다.

9. 열심히 크게 소리내어 읽을 수 있는 책을 찾아라.

10. 부모의 역할은 아이들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가르켜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LA 중앙 (http://la.joongangusa.com)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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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버닝햄의 생애와 작품 

  존 버닝햄은, 좋아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외국 작가로서는 우리 나라에 팬이 가장 많은 그림책 작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간혹 여러 사람 앞에서 그림책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버닝햄의 『지각대장 존』을 보여 주면, 이미 그 책을 본 사람들도 꽤 있지만, 처음 보는 사람들은 벌린 입이 도대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즐거워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 반응에 나 또한 즐겁고 행복해지는 덕분에 『지각대장 존』은 내 그림책 이야기의 단골 소재가 됐습니다.
그림책이 주는 즐거움의 종류는 작가에 따라서 각각 다릅니다. 훌륭한 작가일수록 놀라울 정도로 남다르고 여운이 오래 남는 즐거움을 주지요. 버닝햄이 주는 즐거움 역시 특별한 데가 있습니다. 나의 경우 그것은 현실과 환상의 발랄하면서도 깊이있는 조화,파격적이면서도 안정감있는 조화가 주는 즐거움입니다.버닝햄의 책에는 유난히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학교 가는 길에 악어와 사자를 만나고 홍수에 휩쓸리는 바람에 만날 지각해서 거짓말쟁이 소리를 듣는 아이(『지각대장 존』), 시장 갔다 오는 길에 온갖 동물을 만나 장에서 사온 물건들을 하나씩 빼앗기는 아이(『장바구니』), 하루에도 몇 차례씩 나일강에도 가고 아마존에도 가고 사막에도 가는 아이(『줄리우스는 어디 있지? Where's Julius?』), 목욕하는 내내 퍼부어지는 엄마의 잔소리를 들으며 중세로 돌아가 갖가지 신나는 모험을 벌이는 아이(『목욕 끝낼 시간이다, 셜리 Time to get out of the bath, Shirley』) 등등……. 
 

현실과 환상이 그렇게 서로 뚜렷이 구별되면서도 또한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이야기 구조가 그림책에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환상적 요소가 많은 게 그림책의 특성이지만, 환상은 완전히 현실화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그런데 버닝햄은 그 둘을 확연히 분리시키면서도 아주 편안하게 뒤섞습니다. 현실은 억압적이거나 불만족스러워 보이지 않고, 환상으로의 진입과 진출은 힘겨워 보이지 않습니다. 아이는 이 놀이에서 저 놀이로 옮겨 노는 것처럼 두 세계 사이를 왔다갔다합니다. 그러면서 버닝햄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그 두 세계의 뒤섞임이 얼마나 자유롭고 풍요로운 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입니다. 환상에서 현실로 왔다갔다하는 일이 얼마나 재미있으면서 의미있을 수 있는가를 그는 참으로 군더더기없이, 극적으로 그려 냅니다. 『지각대장 존』은 존 버닝햄의 그런 이야기 솜씨를 대표적으로 보여 줍니다. 흑백이나 어두운 색조의 화면으로 보여 주는 현실과 밝고 현란한 색채로 보여 주는 환상 장면이 경쾌하게 엇갈려 나옵니다. 학교로 가는 머나먼 길, 거짓말하지 말라며 길길이 날뛰고 혹독하게 벌을 주는 선생님이 나오는 현실의 장면은 무채색에 그리다 만 듯 허술해 보입니다. 그러나 악어와 사자와 홍수가 나오는 환상 장면은 밝고 풍요롭고 행복한 색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얼핏 보면 이 이야기는 풀 죽은 아이와 매정한 선생님, 풍성한 환상과 메마른 현실 사이의 대비, 더 나아가 대결인 듯 싶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이해 못 하고 심하게 구는 선생님은 뭔가 깨우침을 얻게 되고 아이에게는 빛이 더해진다는 희망적인 결말로 끝맺는 것 같습니다. 그런 면도 없지 않지만, 내게는 버닝햄의 세계가 거기서 한 발 더 나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바로 현실과 환상 양면의 전면적인 수락입니다. 앞서 나는 버닝햄의 책에서 ‘현실은 억압적이거나 불만족스러워 보이지 않고, 환상으로의 진입과 진출은 힘겨워 보이지 않는다’고 썼습니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실제로는 그렇다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현실은 억압적이고 불만족스럽습니다. 환상으로 들어가는 것도 그렇지만 환상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정말 힘겨운 일입니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존이 얼마나 학교에 가기 싫은지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은 어둡고 학교 가는 길은 구불구불 한없이 뻗어 있습니다. 그러나 존은 그 심정을 무표정한 얼굴에 숨깁니다. 환상 세계로 들어가 악어(아마도 개울가의 개구리겠죠)와 사자(아마 길에서 만난 강아지겠죠)와 놀다가 거기서 빠져나와 학교로 가야 하는 일이 얼마나 힘겨운지도 그림에는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장갑을 빼앗기고 바지를 찢기는, 그러니까 뭔가가 떨어져나가는 듯한 대가를 치뤄야 하는 일입니다. 존은 그 일 역시 무표정한 얼굴로 날마다 해 내고 있습니다. 어느 한 쪽을 포기하거나 어느 한 쪽으로 숨어 버리지 않고 그 싸움을 매일 싸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얻은 승리는, 그 두 세계의 만남입니다.
선생님이 고릴라에게 붙잡혀 천장에 매달려 있는 장면이 무채색인 것이 그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때까지의 버닝햄 문법으로 보자면 그 장면은 현실이어야 하는데, 내용은 환상입니다. 현실과 환상이 뒤바뀌고, 학생과 선생 사이의 대립 양상도 뒤바뀝니다. 여기서 이제 현실과 환상 사이의 경계는 무의미해집니다. 존의 삶에서도 선생님의 삶에서도, 그 둘에는 이제 똑같은 무게가 실립니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 페이지, 존이 또다시 학교에 가는 길에는 분홍빛 햇살이 뻗어 있습니다. 환상과 현실이 자유롭게 교류하는 경험을 해 본 아이, 그 둘 사이의 균형 잡기를 이루어낸 아이에게 삶은 좀 더 희망적인 것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환상은, 억압적이고 불만족스러운 현실이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습니다. 현실이 만족스러운 사람은 꿈을 꿀 필요가 없을 테니까요. 인간이 육체와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듯이 삶은 현실과 환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른이든 아이든 등장인물 대부분이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두 세계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균형을 잡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 버닝햄의 책은, 그 기발하고 천연덕스러운 넘나듦이 주는 즐거움과 함께 묵직한 안도감을 줍니다. 많은 일을 겪고 풍상을 넘어서 인생을 너무나 잘 아는 사람에게서 느끼는 신뢰감 같은 것이겠지요. 『우리 할아버지』가 그토록 가슴 찡하게 읽힐 수 있는 까닭도 그가 삶과 죽음 양면을 전폭적으로, 긍정적으로 수락하면서 관찰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할아버지와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그림책들이 몇 권 있지만 『우리 할아버지』만큼 깊은 울림을 주는 책은 그다지 흔하지 않은 듯합니다.
버닝햄은, 심지어 아이들에게 알파벳과 색깔과 숫자와 반대말을 가르치는 책에서조차 그런 삶에 대한 성찰과 균형 감각 섞인 드라마를 보여 줍니다. 『첫 발자국First Steps』은 버닝햄의 책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입니다. 단어 몇 개가 토막토막 나오는 알파벳 코너에서부터 노란 밀짚모자를 쓴 사내아이가 계속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면서 코끼리를 번쩍 들어올리고, 산양에게 엉덩이를 찔리고, 두 손 가득 아이스크림을 든 채 행복해하고, 우산 들고 하늘을 날고, 친구들과 나무에 올라갔다가 호랑이에게 쫓겨 내려오고, 언덕길에서 하마를 끙끙 밀어올리고……. 온갖 놀이를 펼칩니다. 알파벳 한 자, 색깔 하나 알려 주면서도 거기에 그야말로 환상과 현실이 뒤섞인 풍요로운 놀이판을 펼쳐 놓는 것입니다.

dry와 wet를 가르치는 페이지를 한 번 볼까요? dry에서는 예의 그 사내아이와 노란 수영복 입은 고양이가 물이 가득 들어 있는 빨간 양동이, 초록 양동이를 든 채 서로 노려보고 서 있습니다. 그리고 wet에서는 서로를 향해 좌악, 양동이의 물을 퍼붓습니다. 물을 뒤집어쓴 그 둘의 표정은 너무나 느긋해 보입니다. hard와 soft 역시 같은 인물이 나옵니다. 낙엽 뒹구는 벤치에서 신문지 덮고 잠들어 있는 노숙자 신세의 hard, 커다랗고 포근한 소파에서 따뜻한 이불 덮고 잠들어 있는 soft. 가장 드라마틱한 한 인생의 단면이 이렇게 간단하면서도 예리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맨 마지막 페이지 open과 shut는 정말 압권입니다. 아이가 커다랗게 벌려져 있는 악어의 입 속을 들여다봅니다. 한 쪽으로 쏠린 악어의 눈동자, 빨간 혀와 분홍색 입 천정! 사태의 추이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과연, 아래 그림에서 악어의 입은 닫혀 있고, 눈은 흐뭇한 듯 감겨 있습니다. 그리고 입 끝에는 아이의 노란 밀짚모자가 걸려 있습니다.
아이가 악어에게 잡아먹히는 장면을 보여 주는 끔찍한 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버닝햄 식으로 보면 이것은 완벽하고 극적인 퇴장을 보여 주는 장치로 읽을 수 있습니다. 아이는 이제 이 책에서의 할 일을 모두 끝냈고, 한쪽 눈을 찡긋하며 화염 속으로 사라지는 마술사처럼 악어 입 속으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사람을 톱으로 자르는 마술을 보며 끔찍해할 필요가 없듯이 아이가 악어 입 속으로 사라지는 그림을 보며 끔찍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원한다면, 첫 장면으로 얼마든지 다시 돌아가서 살려 낼 수 있으니까요. 이 책을 보면서 나는 이렇게 유쾌하게 극적인 그림들, 그 천연덕스러운 유머와 무표정 속에 숨어 있는 장난기 덕분에 아이들은 숫자나 색깔이나 글자뿐 아니라 삶과 죽음, 인생의 짐과 희망, 이끔과 이끌림, 아름다움과 추함 같은 개념들을 자기도 모르게 익힐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버닝햄은 1936년 영국의 서리 지방에서 태어났습니다. 학교에 적응 못 해 섬머힐 스쿨에 다녔고, 군대 가기 싫어서 일종의 공익 근무 요원으로 근무했고, 이스라엘까지 가서 산림 감시원이라든가 청소원 같은 궂은일을 했습니다. 일종의 사회 부적응자, 아웃사이더였지요.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 잘 몰라 이 일 저 일 기웃거리다 처음으로 만든 그림책 『깃털 없는 기러기 보르카』로 1963년에는 덜컥 케이트 그린어웨이 상을 받았습니다. 그런 뒤 본격적으로 그림책 작가의 길로 들어섰고, 1970년 『검피 아저씨의 뱃놀이』로 다시 케이트 그린어웨이 상을 받았습니다. 찰스 키핑, 브라이언 와일드스미스와 함께 영국의 3대 그림책 작가로 불린다고 합니다. 『곰 사냥을 떠나자』로 역시 국내에 팬이 많은 그림책 작가 헬렌 옥슨버리와 부부라는 사실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버닝햄의 책을 보면 주인공의 생김새가 비슷한 경우가 많습니다. 검피 아저씨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동글납작한 데다 무표정한 얼굴. 이 얼굴이 어른이 되기도 하고 아이가 되기도 합니다. 동그란 밀짚모자를 즐겨 쓰지요. 기분 좋으면 미소를 띠지만, 기분 나쁘거나 기운 빠지거나 하면 얼굴이 길쭉해지기도 합니다. 학교 가는 존처럼요. 아마 이 존은 버닝햄의 어린 시절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책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나의 어린 시절, 당신의 어린 시절이기도 할 것입니다. 왜 아니겠어요. 버닝햄을 좋아하는 사람이 유난히 많은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이 아닐까요.
김서정 / 1959년에 태어나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고 독일 뮌헨 대학에서 수학했습니다. 한국프뢰벨 유아교육연구소의 수석 연구원과 공주 영상 정보 대학 아동 학습 지도과 교수를 지냈습니다. 동화 작가와 아동 문학 평론가, 번역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동화『믿거나 말거나 동물 이야기』『유령들의 회의』를 썼고,『내가 아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세요?』『행복한 하하호호 가족』『용감한 아이린』『어린이 문학의 즐거움』(시리즈)『용의 아이들』등 옮긴 책이 아주 많습니다.  출처 오픈키드

존 버닝햄은 현재 가장 주목받는 그림동화 작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1931년 영국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학교에 데려다 놓아도 친구들하고 어울리지 않고 무심한 얼굴로 자기 혼자 세계에 빠져 있는 아이였고, 청년시절에는 병역을 기피하면서까지 세상의 소란으로부터 완강히 자신을 지키는 좀 독특한 성향의 사람이었다. 
 초등학교는, 관습을 거스리는 것을 정상으로 받아들이기로 유명한 닐 섬머힐 학교를 다녔다. 미술공부는 런던의 센트럴 스쿨 오브 아트에서 했는데, 거기서 헬린 옥슨버리를 만나 1964년에 혼인하게 된다. 같은 해에 1964년 첫 번째 그림책인『보르카(Borca)』로 영국에서 그 해 가장 뛰어난 그림책에 주는 케이트 그린어웨이상을 받았으며, 1970년『검피아저씨의 뱃돌이』로 같은 상을 한번 더 받았다. 그리고 『우리 할아버지』 작품으로 쿠르트 마슐러 상을 받았다. 그는 간결한 글과 자유로운 그림으로 심오한 주제를 표현하는 작가이다.

▶ 작품 세계

 


그의 독특한 내면세계는 곧 그림책의 특징으로 이어지는데 그의 그림책의 인물들이 하나같이 표정이 없는 것이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존 버닝햄의 그림은 그 자체가 어린이의 그림을 닮아 있다. 그러나 여기에 나타난 어린이의 이미지는 귀엽고 밝게 함박웃음짓는 어린이가 아니다. 버닝햄의 어린이는 웃을 줄 모른다. 그는 자신의 그림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얼굴에서 표정을 지워버린다. 그리고 어린이 그림처럼, 서툰 형태의 그림처럼, 예전의 자신을 어린 시절로 돌려 보냈을 때에 우러나오는 느낌을 그대로 옮긴 것 같다.

 그는 그림책 한 권에 여러 가지 질감의 재료를 마구 섞어서 버무린다. 믈감, 크레용, 고무 수채 물감, 파스텔. 먹물, 갖가지 재료들이 모두 그의 그림책의 세계에 들어가 있다. 버닝햄은 대개 그림책 하나를 구상하고 완성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길게 잡는 작가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가 오랜 습작 끝에 자신의 스타일을 구축하게 되었음을 알게된다.

헬린 옥슨버리도 남편의 영향을 받아 그림책을 만들기 시작해서, 뛰어난 그림책 일러스트레이터의 한 사람이 되었다. 버닝햄은 브라이언 와일드 스미스, 찰스 키핑과 더불어 영국 3대 일러스트레이터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으며, 현재 가장 주목받는 그림책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 대표작

검피 아저씨의 드라이브 (시공사)

야, 우리기차에서 내려 (비룡소), 구름나라 ( 비룡소)

사계절 ( 시공주니어), 크리스마스 선물 ( 시공사)

알도 (시공사), 검피아저씨의 뱃놀이 (시공사)

장바구니 (보림), 우리 할아버지 ( 비룡소)

지각대장 존 (비룡소), 내 친구 커트니 (비룡소)

깃털 없는 기러기 보르카 (비룡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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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센닥(Maurice Sendak)

미국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그림책 작가로, 1928년 뉴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상상력이 풍부한 옛날 이야기를 듣고 자란 그는, 이미 네다섯 살 때에 장차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겠다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하퍼콜린스 사의 유명한 어린이 책 편집자인 어쉴러 노드스트롬의 눈에 들어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간결하지만 치밀한 그림과 풍부한 상상력이 어우러진 판타지를 창조하는 작가입니다. 우리 시대 최고의 그림책 작가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1964년에『괴물들이 사는 나라』로 칼데콧 상을 받은 것을 비롯하여, 로라 잉걸스 와일더 상, 1970년 안데르상 상 등을 받았습니다. 작품으로『깊은 밤 부엌에서』『꼬마 곰』『꼬마 곰에게 뽀뽀를』『꼬마 곰의 방문』『사랑하는 밀리』『창문 밖 저 건너 Outside Over There』『돼지의 호수 Swine lake』『케니의 창문 Kenny's window』등 많은 작품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작가]

모리스 센닥 

 

모리스 센닥은 아주 유명하고 중요한 그림책 작가입니다. 혹시, 나한테만 그런 건 아닌가요? 지금부터 칠 년쯤 전에, 모리스 센닥이 뭐 하는 사람인지도 잘 모르고 있을 때, 오로지 모리스 센닥 한 사람에 관한 연구가 엄청 두툼한 책으로 나와 있는 걸 보고는 무척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 뒤에야 『괴물들이 사는 나라』를 보게 되었지요.

솔직히, 그 책을 처음 보고, 재미는 있었지만 그다지 황홀해지거나 (맥클로스키의『기적의 시간』처럼) , 무릎을 탁 치면서 웃음을 터뜨리게 되거나 (토니 로스의 『오스카만 야단맞아』처럼), 코끝이 찡해지거나 (욜런과 쇤헤르의 『부엉이와 보름달』처럼), 가슴이 묵직해지면서 생각에 잠기게 되거나 (스타이그의 『아모스와 보리스』처럼) 하지는 않았습니다. 유연하면서도 힘있는 인물들의 동작, 촘촘하지만 답답하지 않고 다채롭지만 어지럽지 않은 묘사, 여백이 많음에도 꽉 찬 듯한 화면 등이 뭔지 대가 같다고 느꼈을 뿐, 이야기 자체는 그다지 매혹적인 것이 아니었던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책을 냈을 때 센닥의 나이는 ‘겨우’ 서른 다섯 살이었습니다. 서른 다섯에 대가를 느끼게 하다니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책은 자꾸만 들춰보게 됐습니다. 보면 볼수록 새롭게 발견되는 것들, 깨달아지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림책에 관한 이론 글에도 이 책은 자주 언급됐습니다. 그림책 분야의 일을 하고 공부를 하는 사람들 입에도 자주 오르내렸습니다. 급기야 일반 독자들 사이에서도 꽤 널리 알려지게 됐습니다. 그림책 공부를 할 때는 정말 할말 많은 교재 노릇을 노상 톡톡히 해 주었습니다. 이 책은 칼데콧 상을 받았고, 북아메리카 지역의 어린이문학 연구자들 학회인 ChLA(Children's Literature Association)가 선정한 그림책 분야 ‘시금석’ 열 다섯 권 중 하나로 뽑혔습니다. 월터 크레인, 랜돌프 칼데콧, 케이트 그린어웨이 등 19세기 그림책 선구자들부터 현대 작가들까지 망라한 목록에 들어갔으니, 굉장하지요. 물론, 영국과 미국 쪽의 그림책으로 한정되어 있다는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요. 센닥은 어린이문학계의 노벨 상이라고 할 수 있는 안데르센 상까지 받았습니다. 
 

하지만 참 신기한 건, 그렇게 대단한 작가이면서 정작 유명한 작품, 독자들에게 두루 사랑받는 작품은 딱 하나, 『괴물들이 사는 나라』뿐인 것 같다는 점입니다. 물론 『깊은 밤 부엌에서』도 있고 『토끼 아저씨와 멋진 생일 선물』도 있기는 하지만, 『토끼 아저씨와 멋진 생일 선물』은 글쓴이가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온전한 센닥의 창작으로 보기가 어렵고요 (그리고 약간 지루하고 어렵다는 평도 들려 옵니다), 『깊은 밤 부엌에서』는 활달하고 사랑스러운 작품이지만 60년대 미국의 생활과 대중 문화 코드가 너무 강렬하기 때문에 우리는 약간의 거리감을 두고 바라보게 됩니다. 그 외에 그림 형제의 전래동화나 마더 구스 전래동요를 텍스트로 삼은 책, 미나릭 같은 어린이 책 작가에서 아이작 싱어 같은 노벨 상 수상 소설가의 글에 일러스트를 맡은 책들도 있고, 동네 꼬마들이 천진난만하게 노는 이야기를 쓰고 그린 책도 있지만, “센닥은, ‘괴물들’ 그거 하나야!” 하는 단호한 소리가 나올 정도로 『괴물들이 사는 나라』는 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존 버닝햄이나 레오 리오니 같은 경우와는 아주 다르지요. 
 

왜 그럴까요. 나는 그 이유가, 센닥이 이 작품에 자기 자신을 너무나 온전히, 노골적으로, 있는 힘껏 모두 쏟아부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인공 맥스의 심리, 그의 환상, 괴물들의 캐릭터는 어린 시절 작가 자신, 주위 인물들에게서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그의 책에 나오는 아이들의 얼굴이 모두 어느 정도 작가 자신의 얼굴을 닮았다는 비평가들의 지적에 센닥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일종의 자기 캐리커쳐라는 것이었습니다. 센닥의 인물들은 삼등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짜리몽땅’한 걸로 유명한데, 그는 그들이 “머리를 두들겨 맞고 또 맞고 해서 더 이상 자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고 자평했습니다. 못이 삐져나오지 않도록 망치로 두들기는 장면이 연상되는, 좀 험악한 비유이기는 하지만, 그 안에는 센닥이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일종의 ‘강박관념’이 들어 있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십니까, 나는 옛날 어린 아이였던 내가 지금의 나로 자라났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 아이는 여전히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내게는 가장 생동감 있고 graphic, 창조적이고 plastic, 육체적인 phisical 방식으로 말입니다. 나는 그 아이에 대해 엄청난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 아이와 커뮤니케이션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내게 가장 두려운 것은, 그 아이와의 연락이 끊어지는 일입니다.”

어린 시절의 자기를 지키기 위해 이토록 혼신의 힘을 다한다는 그림책 작가의 강변은 들어 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그 아이를 자기 안에 가둬 놓고 자기의 일부분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독립적인 거리를 두면서 생생하고 창조적이고 육체적인 존재로 간주하면서, 어른으로서의 자신과 대등하게 커뮤니케이션을 하려고 노력하는 자세는 정말 놀랍고 새롭습니다. 바로 그런 자세가, 막연히 관념적으로 어린이를 그리는 책, 단순한 회고담을 펼치는 책들과 센닥의 책을 구별해 주면서, 그의 책을 어린이 책 분야를 넘어서는 독특한 경지의 예술 작품으로 끌어올리는 요인일 것입니다.

센닥은 1928년 뉴욕 브룩클린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폴란드 사람이었는데, 센닥이라는 이름은 히브리 어로 ‘대부’ 혹은 ‘스폰서’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야기와 유대 전래 동화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나중에 아이작 싱어가 다시 쓴 유대 민담에 그린 일러스트는 무섭고, 우습고, 유쾌하고, 슬픈 이야기의 분위기를 정말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병약했던 센닥은 주로 침대에 누워 책을 읽거나 공상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좀 큰 다음에는 『오페라의 유령』 같은 으스스한 분위기의 영화를 보러 다니기 좋아했다는군요. 어린 시절부터 센닥의 마음 속에는 공포, 특히 ‘잡아먹히는’ 공포에 대한 강박관념이 꽤 컸던 것 같습니다. 보통 아이들이라면 그냥 지나쳤을, 친척들의 ‘깨물어 먹고 싶다’는 비유적 표현에도, 엄마가 밥을 조금만 늦게 내오면 진짜로 잡아먹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졌다고 하니까요. 그리고 또, 아시다시피 『괴물들이 사는 나라』에서 가장 논란이 되었던 게 맥스가 엄마를 잡아먹어 버리겠다고 협박하는 대사지요. 나중에 그림 형제의 전래동화 몇 편을 골라 책으로 만들면서 붙인 제목도, 그림 동화 중에서 가장 잔인한, 그래서 웬만한 번역본에서는 아예 빼 버리는 『노간주 나무』였습니다. 그건 새엄마가 의붓아들의 목을 댕강 잘라 죽이고, 친딸에게 살인 누명을 씌우고, 죽은 의붓아들을 요리해서 남편 그러니까 아이 아버지에게 먹이는 끔찍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뭔가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 대상을 그만큼 심각하고 진지하게, 비중 있게 받아들인다는 말이 되겠지요. 센닥은 그 공포에 항복하지 않고 그것을 진지한 탐구의 대상으로 삼아 밀고나갔던 것 같습니다. 앞서 인용한 글에서도 ‘두려움fear’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게 범상하게 넘어가지를 않습니다. 그건 그냥 단순히 무서움을 느낀다는 감정 토로가 아니라,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사력을 다하겠다는 결의의 표현으로 읽힙니다. 그래서 센닥의 책은 잡아먹힘의 모티프가 그렇게 많으면서도 정작 독자들에게는 공포를 넘어서는 즐거움과 안도의 절묘한 카타르시스를 주는 것 같습니다. 맥스가 엄마를 잡아먹겠다고 협박하는 말이나, 괴물들이 맥스를 잡아먹겠다고 협박하는 말이, 진짜 잡아먹겠다는 게 전혀 아니라 오히려 지극한 사랑에서 나온 경쾌한 유머로 들리는 것입니다. 나중에 집에 돌아온 맥스의 방에 따뜻한 저녁밥이 차려져 있다는 대목에서는 정말로 마음 훈훈해지는 안도감을 한껏 즐길 수 있습니다.

『깊은 밤 부엌에서』에도, 밀가루 반죽 통에 빠진 미키를 예의 그 삼등신인 어른 요리사들이 신나게 휘젓는 장면이 나옵니다. 휘젓기만 하는 정도가 아니라 맛있는 ‘미키 케익’을 만들려고 오븐에 넣어 굽기까지 합니다. 오븐에서는 김이 무럭무럭 나고, 빵이 갈색으로 구워지면서 냄새까지 솔솔 납니다. 이제 곧 미키는 커다란 요리사 아저씨들 입 속으로 들어갈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미키가 오븐에서 톡 튀어나옵니다. 별이 반짝이는 신비한 보라색 밤하늘을 배경으로 반죽 옷을 입은 미키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오븐에서 튀어나오는 장면은, 난처한 표정의 요리사 아저씨들, milk와 mickey를 이용한 말놀이 대사와 어울려 한껏 유쾌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어린 아이다운 공포와 활기가 뒤섞인, 그리고 환상과 현실이 뒤섞인 센닥의 책들은 아주 독특한 매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괴물들이 사는 나라』는 캐릭터, 문장, 편집과 디자인 등 모든 요소에서 20세기 그림책의 한 표본을 보여 주는 책으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센닥에 대해 조금 알고 나니, 그 책을 보면 볼수록 어린 시절의 자신에 깊은 애정과 자부심을 갖고 거기서 하나의 완벽한 세계를 끌어내기 위해 최대한 노력한 한 예술가의 강력한 힘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마냥 행복하고 자랑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가난한 집안, 병약한 몸, 끔찍히 싫은 학교……. 우울하고 두려운 날들이 많았겠지요. 그러나 센닥은 그런 어린 자신을 너무나 소중히 간직하면서 그것을 자기 예술의 원천으로 삼았습니다. 위대한 어린이 책 작가들의 위대한 점은 바로 거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이 어쨌든 간에 우리는 그것을 자기 발견과 자기 발전의 훌륭한 밑거름으로 삼을 수 있다는 점을 가르쳐 준다는 데에 말입니다.
(출처 오픈키드 김서정 | 2002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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