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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 한국 현대사를 말하다
이범준 지음 / 궁리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칭찬에 인색한 나, 친구의 책을 칭찬하다
09 1227 이범준 <헌법재판소, 한국현대사를 말하다> 궁리 2009 ****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이지만 내 대학친구가 저자라는 이유때문에 재미없는 책을 억지로 읽어줄 만큼 내 팔은 유연하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기자질을 때려치며 준비했고 기록만 1만 장을, 인터뷰만 100시간을 했다는 그의 피와 땀이 고스란히 베어 있는 그의 첫 작품에 힘찬 박수를 보내는 것은 진심이며 립서비스가 아니다.
그래도 내가 광고밥을 먹고 있다고, 메신저로 책 제목을 물어보는 친구에게 ‘헌법재판소 해부학’, ‘헌법재판소를 재판하라’라고 순간 대답했던 건, 첫째는 자극적인 제목이었으면 하는 세속적인 바람때문이었고, 둘째는 책의 내용을 잘 몰라 넘겨짚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지금처럼 책을 완독한 상태에서 물어왔다면 혹 이렇게 말해주지 않았을까 싶다. ‘헌법재판소 제 1막 30장’
30가지 헌재 이야기로 구성된 본저는 TV나 보면서 하루를 소일했던 초창기 헌법재판소 연구원들의 풍경부터 시작, 재동에 단독 사옥을 확보하고 점차 자신의 영역을 구축해나가는 과정을 거쳐 그 위상이 상한가를 치게 해 주었던 최근의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과 행정수도 헌법소원까지를 생생하게 다룬 최초의 헌재 보고서라는 데 큰 가치가 있다고 본다.
기능적으로 구역을 나눠본다면, 정치적으로는 그 두 사건을 포함해서 5•18 불기소 헌법소원, 국회 날치기 사건 권한쟁의 등을, 사회적으로는 야간 집회를 금지한 집시법 문제, 영화와 음반의 사전심의 문제 등을, 개인적으로는 간통 논쟁과 동성동본 금혼 문제 등을, 그리고 헌재 자신으로는 대법원과의 영역 다툼 문제, 그리고 헌법적 판단과 정치적 판단의 시소타기 등을 다룬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높이 평가하고 싶은 것은 이런 기능적인 구분보다는, 다소 딱딱해 보일 수도 있는 이런 소재들이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저자의 문체는 기자라는 저자의 전직이 말해주듯 군더더기 없고 명확하다. 어떤 부문에선 이렇게까지 자세히 얘기해 줄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집요하기까지 하다. 또한 저자의 문체는 국문학과라는 저자의 전공을 속일 수 없듯 적절한 비유와 표현이 살아 있다. <7인의 사무라이>를 인용하는 장면에선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번질 정도다.
날이 잔뜩 선 칼로 생선의 머리부터 꼬리까지 날카롭게 회를 뜬 문장, 더구나 신경을 건드리지 않고 베어냈기에 죽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 있어 맛있는 문장-이것이 내가 가장 간략하게 이 책을 칭찬할 수 있는 표현이다.
또한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보는 듯한 장면 묘사, 각 챕터마다 핵심을 파고드는 컨셉, 군더더기 없는 인터뷰의 배치까지 책을 쓴 의도와 구성이 적절하게 버무려져 있음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더불어 헌재를 이렇게 공론의 장으로 데리고 나온 전례가 없다는 희소성 역시 저자에게 돌아가야 할 칭찬의 몫일 것이다.
책 다 쓰고 뭐하냐는 질문에, 아기를 낳은 산모에게 산후 우울증이 오는 것처럼 자신도 탈고 후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한다. 어느 자식인들 배 아파 나오지 않았겠는가. 속히 우울증을 벗어던지고 다음 작품을 잉태하길 바란다. 이 책이 “글쓴이의 평생 프로젝트인 대한민국 법조사 테트랄로지의 제1부다”(들어가며 中)라는 저자의 말대로 쌍둥이라도 좋을 다음 작품을 기대해본다.
# 사족
기억에 남는 헌법재판관으로-여러 장면 등장해 개성을 표출했던, 김대중 대통령 지명 재판관 변정수와 전두환, 노태우를 감형하며 ‘자고로 항장降將 불살不殺 공화共和를 위해 감일등 減一等 하지 않을 수 없다’(273쪽)고 했다는 권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