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보낸 3주일
장정일 지음 / 청하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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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절판된 책을 구해 읽다

09 0410 장정일 <서울에서 보낸 3주일> 청하 1988 *****

절판된 이 책을 인터넷 중고서점에서 택배비를 물고도 비싸지 않게 구매했다. 운이 좋았다. 재미있는 시들이 많다. 가령 이런 것들-

집 안에 떠도는/고소한 생선 굽는 냄새는/나에게 시가 무엇인지/가르쳐 준다.
보이지도/잡히지도 않는/저 즐거운 공기 너머에/생선이 실재한다./삶이 실재한다.
(“즐거운 공기” 中)

왜 푸른하늘 흰구름을 보며 휘파람을 부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왜 호수의 비단잉어에게 도시락을 덜어 주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Job 뉴스” 中)

가금 포르노를 보러 여관엘 가요. 물론 혼자서지요.(…)누군가의 부름으로 내가 이 방으로 왔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아님, 내가 누굴 부를 수도 있겠죠.
(“프로이트식 치료를 받는 여고사 9” 中)

소수의 설탕독점자와/살인자들에게/훈장을 수여하는 것/그것이/인간의 역사다
누가 말했다/암닭은 한 달걀이 다른 달걀을 낳는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고/그것이/인간들이 자랑하는/선거제도이다
(“촌충 9” 中)

장정일의 절판된 시집들 중 없는 게 많다. 언젠가는 다 가질 수 있겠지. 절판된 책을 헌책으로 구할 때의 매력은 안된다고 정해진 것을 전복시키는 쾌감에 있다. 만질 수 없는 여자의 다리를 만지게 되면 이처럼 즐거울까. 하물며 그 다리가 아주 늘씬하고 섹시하다면 무얼 더 바랄진저.
정말 쉽게 시를 쓰는 그의 필력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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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영탄 2009-12-22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월의 이틀' 독자평을 보고 이 자리까지 따라 왔습니다.
날카로운 서평에 단번의 님의 실력을 알아봤달까... 아무튼 반갑습니다. ^^
장정일씨의 말처럼 어느 순간부터 그는 시를 쓰는 방법을 진실로 잃어 버렸나봅니다. 아울러 가난한 은행원이 자신에게 딸린 식구들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해 좌절하던 그 태생적 아픔도 함께 잊은듯도 하구요... 막힌 글을 쥐어짜내주던 싸구려 위스키들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이제는 아무 소용이 없어진 걸까 두렵기마져 합니다.

그를 너무 아끼던 광팬으로 오랜 시간을 살았는데 '구월의 이틀'을 읽고 너무나 큰 충격에서 헤어나질 못하다가, 오늘 필요한 책을 사는 길에 문득 나와는 다른 이들의 서평을 듣고 싶어 장정일씨 작품의 언저리를 기웃 거리다 괜한 푸념 몇자 적고 갑니다.
정말 오랜 시간 제 마음의 고삐였던 장정일씨를 이젠 놓아줘야 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삼중당 문고'를 복사해 항시 지갑속에 넣고 다니며, 아직도 처음 그 시를 접했던 설레임에 두근거리는 독자가 있다는 걸, 그에게 다시 한 번 조용히 말해주고 싶습니다... ㅠㅠ
 
배꼽 창비시선 286
문인수 지음 / 창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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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910
문인수 <배꼽> * * * * *

단연코 대학을 졸업한 이후 읽었던 시 중 최고라고 헹가래를 쳐주고 싶다.

“문인수의 시를 읽고 누웠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황지우 시인-

“다른 말이 필요 없다. 꿈틀거리며 질펀하게 번지는 절창 시편들! ” -황동규 시인-

“그 목소리는 낮지만 겸손한 진정성과 섬세한 미학성이 잘 결합된 수작이다.” -미당문학상 심사평-

황지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난 머리카락이 벌떡 서 버리더라. 어디서 이런 시인이 튀어나왔는지 어디서 이런 시구가 튀어나왔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먼발치서 보는 것 같다가도 어느새 코 앞에 와 있고, 넉넉한 너털웃음을 보이면서도 한 올 한 올 한 터럭도 빠뜨리지 않는 치밀함을 보여주며, 그러면서도 내내 가슴 깊은 곳에서 절절히 번져오는 진정성의 울림에 머리가 띵 할 정도다.
<만금이 절창이다>,<배꼽>,<녹음>,<쇠똥구리 청년>,<흔들리는 무덤>-일단 눈에 들어온다.
시를 논함이 무슨 소용있단 말인가, 직접 몸으로 읽고 느껴야지. <만금이 절창이다> 전문 소개로 글을 마친다.

물들기 전에 개펄을 빠져나오는 저 사람들 행렬이 느릿하다.
물밀려 걸어들어간 자국 따라 무겁게 되밀려나오는 시간이다. 하루하루 수장되는 길, 그리 길지 않지만
지상에서 가장 긴 무척추동물 배밀이 같기도 하다, 등짐이 박아넣는 것인지,
뻘이 빨아들이는 것인지 정강이까지 빠지는 침묵. 개펄은 무슨 엄숙한 식장 같다, 어디서 저런,
삶이 몸소 긋는 자심한 선을 보랴. 여인네들......여남은 명 누더기누더기 다가온다. 흑백
무성영화처럼 내내 아무런 말, 소리 없다. 최후처럼 쿵,
트럭 옆 땅바닥에다 조갯짐 망태를 부린다. 내동댕이 치듯 벗어놓으며 저 할머니, 정색이다.
"죽는 거시 낫겄어야, 참말로" 참말로
늙은 연명이 뱉은 절창이구나, 질펀하게 번지는 만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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