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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전쟁 ㅣ 행복한책읽기 SF 총서 11
조 홀드먼 지음, 강수백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5년 11월
평점 :
품절
인간 시간 전쟁, 도올선생께 배운 중용의 時中에 관해
12_0424_조 홀드먼_김상훈_영원한 전쟁_행복한 책읽기_*****
휴고상. 네뷸러상. 디트머상 최우수 장편상 수상작.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 책이, 몇 편의 장단편을 끌어모아 장편으로 개작-SF업계 용어로 ‘fix-up’-하여 1974년 <The Forever War>란 제목으로 발표하기까지 무려 18곳의 출판사부터 거절당했단 사실이다. 자신에게 엿을 준 출판사들의 면상 앞에 다수의 트로피를 진열함으로써 보란듯이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든 셈.
작가는 1968년 베트남 전쟁에 파견되어 백여 개의 폭탄 파편을 몸에 떠안고 명예 재대하게 되는데 이 작품의 메타포는 당연히 베트남 전쟁이다. ‘토오란’이라 불리는 외계 종족과의 전쟁에서 토오란의 기지 내지 행성을 찾아가 싸우게 되는 장면은 베트남 파병의 치환이며, 잘 모르는 미지의 적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의 심리상태는 그당시 미국의 젊은이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아시아 국가에 투입되어 적으로 싸워야 하는 베트콩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의 대구이다. 생명이 공처럼 발로 차이는 우주전쟁에서 ‘파이팅 슈트’가 보호하는 건 병사들의 서푼짜리 존엄이 아니라 영원한 전쟁의 궁색한 이유일 것이다. 베트남이든, 토오란의 행성이든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영원한 전쟁이 영원한 분단으로 슈트를 갈아 입었을 뿐.
무엇보다 내가 흥미로웠던 것은 ‘시간’ 개념을 무력화시킨 상대성 이론에 근거한 소설의 전개 방식이다. 소설에선 ‘콜랩서’라는 일종의 블랙홀을 이용하여 시공을 초월해 이동하는데, 광속으로 이동하면 지구에선 몇 백 년이 흘러도 그 비행선에 탄 병사는 얼마 정도밖에 나이 먹지 않는다는 상대성 이론, 다들 알고 있겠지? 모르면 아인슈타인에게 물어보도록.
‘스타게이트’에서 ‘콜랩서’를 통해 이동해서 전투 좀 하다 운 좋게 지구에 살아돌아오면 달력이 수백에서 수천장씩 넘어가 있는 것이다. 대체 지구에 날 아는 사람이 누가 남아 있겠는가. 사랑하는 사람과 ‘콜랩서’에서 조금이라도 다르게 이동된다면 다시 만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약속시간 넘어 30분만 기다려도 눈에 불을 켜는 우리가 아닌가. 하물며 200년, 300년은 기다릴 수조차 없다! 눈을 깜빡하면 내 주변에서 날 아는 사람이 죄다 사라져버린다는 생각…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김태희를, 버스커버스커를, 순대국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세상보다는 70살이 넘어 0급으로 판정받으면 아무런 의료혜택을 받을 수 없는 세상이나 인공자궁으로 생명을 관리하고 10억 명의 동성애자로 구성된 세상에 적응하는 게 차라리 더 쉽겠지.
아, 이게 혹시 도올선생이 <중용 인간의 맛>강의에서 말한 “時中” 의 의미는 아닐까?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위는 시간 속에 있으며 그럴 때에만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진리는 시時 속에 있다””시간 속의 것이 덧없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 있기 때문에 영원할 수 있는 것이다”(103쪽, 중용 인간의 맛)고 도올선생은 말한다. 소설을 보자. ‘콜랩서’를 통해 시간을 넘나든다. 난 별로 나이든 게 없는데 우주에서 돌아온 지구는 몇 십 년씩, 몇 백 년씩 시간이 흘러가 있다. 시간 속에 있지만 그 시간과 함께 하지 못하는 처절한 아이러니. 전쟁이 그런 것 아니겠는가. 시간 속에 있지만 그 속에 인간이 있지 못하게 하는 압도적인 폭력. 인간 사이에 있지만 그 속에 시간이 흐르지 못하게 하는 잔인한 상처. 요약하면, 전쟁은 인간에게서 시간을 빼앗아버리는 것. 인간과 함께 흘러가는 시간 속에 전쟁이 기웃거린다면, 하물며 영원에 가까운 전쟁이 자리를 잡는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우주를 부유할 것이다. 텅 빈 플랫폼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을, 시간이란 열차를 기다리며.
1143년간 계속된 전쟁은 허위에 의해 시작되었고, 두 종족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했던 고로, 계속되었다.
처음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해졌을 때, 제일 먼저 나온 질문은 “왜 너는 그런 일을 시작했지?” 였고, 대답은 “내가?” 였다.(355쪽)
후회할 수는 있어도 돌이킬 수는 없다. 시간도 인간도 전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