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지음, 박현주 옮김 / 마음산책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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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2
페터 회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 * * * *
2005(08 초19) 마음산책

소설이 아닌 빙하를 보다

충격적이다. 소설이란 장르 안에서 이렇게 완벽한 작품이 있었던가.
충격적이다. 히치콕도 울고 갈 플롯, 우라사와 나오키 뺨을 칠 사건 전개.
충격적이다. 작가의 자연과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 일상에서 녹아 흐르는 깊은 통찰력.
충격적이다. 내가 이런 작품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

이 작품은 빙하다. 빙하를 직접 본 적이 있는가? 이 책을 읽고 나서 난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난 빙하를 봤다. 맘모스처럼 거대한 빙하. 보이는 것보다 바다 밑 보이지 않는 부분이 훨씬 더 거대한 빙하. 600 페이지가 넘는 책의 분량보다 훨씬 더 엄청난 이야기를 품고 있는 빙하 같은 작품.

기본적으로는 히치콕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를 연상시킬 정도로 꽝꽝 얼려진 긴장감과 극의 전개를 유지하면서도, 스밀라의 냉소어린 말투와 반어법, 각 인물들의 살아 있는 캐릭터, 그리고 작품 전반에서 녹아 흐르는 작가의 삶에 대한 미묘한 통찰은 자연과학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과 더불어 이완의 기술을 완성한다. 차디찬 얼음이었다가 어느새 흐르는 물이 되면서 씨줄로는 조여주고 날줄로는 풀어주는 최상의 직조 기술!

"우리는 얼음을 이길 수 없다."는 스밀라의 말과는 반대로 그녀는 "그 아이의 죽음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그 죽음에 대해 물러설 수, 질 수 없었고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모성(母性)의 마음으로 부성(父性)의 힘을 보여준다고 할까. “사람들이 팔과 다리를 꺽어버려도 도로 걷어차 줄 방법을 찾아낼 여자”로서 그녀는 도시에서 바다 그리고 얼음으로 이어지는 긴 여정에 발을 내딛는다. 소설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캐릭터의 탄생이며 다이내믹한 배경의 출현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덴마크와 그린란드, 유클리드의 원론, 자본론, 핌불의 겨울, 빙하 도식학에 대한 통계, 해수빙으로 인한 염수 배수법을 위한 수학적 모형 등 하나의 단락만으로도 논의의 깊은 심해까지 들어갈 수 있는 요소들이 잘 배치되어 있는 점도 특이할 만하다. 더욱이 이해하기에 힘이 드는 것들인데도 호기심을 자극하게 되니까 말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세상의 종말을 위한 시나리오는 확고하게 세워져 있다. 처음에는 극도로 추운 겨울이 세 번 닥쳐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면 호수, 강, 바다가 얼어버린다. 태양은 식어버려 더 이상 여름은 오지 않을 것이며 눈은 무자비할 정도로 하얀 영겁의 세월 동안 계속 내릴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길고 끝없는 겨울이 오고 마침내 스콜이라는 늑대가 태양을 집어삼켜버린다. 달과 별들은 소멸되고, 끝을 알 수 없는 암흑이 지배하게 된다. 핌불의 겨울(북구의 전설에 나오는 신들의 몰락, 세상의 황혼을 뜻한다-옮긴이). 기독교인들이 와서 세상은 불에 타 멸망할 것이라고 가르쳐주기 전에는 북구인들은 이런 식으로 세계의 종말을 상상했다는 것을 학교에서 배웠다.”

작가는 끝없이 스밀라를 통해서 그녀의 생각을 녹였다가 얼리고 다시 녹였다가 얼린다. 눈이 얼어 빙하 결정이 되었다가 “부서져 바깥으로 떠내려가다가 녹아서 흩어져버리고 바다에 흡수”되고 “언젠가 다시 올라가 새로 눈이 되”듯이 “삶의 본질은 온기”라는 말을 위해 차디찬 얼음을 말하고 있다는 듯이…

북유럽의 추운 나라, 사회 복지가 완벽한 나라 정도로만 알고 있던 덴마크. 조금 더 해도 안데르센의 나라에서 멈추고 말았던 덴마크는 이제 나에게 페터 회의 나라로 북마크 될 것 같다. 무용수, 배우, 선원, 펜싱선수, 등산가 등 작가의 전력치고는 이름만큼이나 생소한 그는 세 번째 소설인<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으로 ‘덴마크 올해의 작가상(1992)’, ‘덴마크 비평가상(1993)’. ‘전국 서점협회 황금면류관상(1993)’, 타임지 선정 ‘올해의 책’(1993) 등등 책표지에 개재된 상만 7개를 수상했다. 때론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많다. 일독을 권한다. 적극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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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 움베르토 에코의 세상 비틀어 보기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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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8.19
움베르토 에코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 * * * *

제목이 다소 긴 이 책은 낙성대 헌책방에서 먼저 구입했다. 에코라는 네임 밸류와 목차만 보고 집었는데 읽다 보니 의외의 대어를 낚은 것 같은 생각에 헌책에서 나오는 지워지지 않는 담배 냄새를 영원히 없애기 위해 알라딘에서 새 책을 주문해서 끝까지 읽게 됐다.

다작인 에코의 책에서 유일하게 ‘장미의 이름’을 읽은 나로선 작가의 위트와 풍자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박학다식한 이야기꾼 정도로 치부했던 내가 부끄러울 정도로 본작은 대단하다는 칭찬이 오히려 멋쩍을 지경이다.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일들을 ‘세관을 통과하는 방법’, ‘도둑맞은 운전 면허증을 재발급받는 방법’등으로 실날하게 풍자한 에코는 ‘말줄임표를 사용하는 방법’, ‘TV 사회자가 되는 방법’ 등으로 풍자의 영역을 확장하며 ‘성조기’, ‘카코페디아 발췌 항목’ 등에서는 특유의 상상력이 아우토반을 시원하게 달려간다. 놀랍다. 그리고 부럽다.

예를 들어 “세계 어느 곳을 가든 택시 운전사를 알아보는 확실한 방법이 하나 있다. 잔돈을 일절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 그가 바로 택시 운전사이다.”(37쪽)라고 일갈하는 그의 냉소적 풍자는 애교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에 출몰하고 있다.>(…)만일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하나의……유령이 유럽에 출몰하고 있다.>라고 썼다면 어땠을까? 그것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았을 것이다. 고작해야 공산주의가 유령처럼 무시무시하고 실체를 포착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을 테니 말이다.(…)<유럽에 하나의 유령이…… 출몰하고 있다.>그랬다면 여러 가지 의문이 생겨났으리라. 유령이 나온다는 것일까 안 나온다는 것일까? 그 유령은 어느 한곳에 머물러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거기가 어디인가?(…)<하나의 유령이 출몰하고 있다……유럽에.> 그랬다면 그들은 자기들이 과장하고 있다는 뜻을, 유령은 그저 독일의 트리어라는 도시에 나타날 뿐이니 다른 곳 사람들은 마음 푹 놓고 잠을 자도 된다는 뜻을 그 말줄임표에 담으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109쪽)
다소 장황하게 인용한 이 부분에서 그의 냉철한 풍자는 칼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어떻게 지내십니까>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방법’(279쪽)에서는 “이카루스, 한바탕 곤두박질을 치고 난 기분입니다. 탈레스, 물 흐르듯 살고 있습니다. 칸트, 비판적인 질문이군요.” 등등 한 가지 대답으로 그 사람의 전체를 꿰뚫는 위트의 진수를 보여준다. 세어 보진 않았지만 거의 200여 명의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아래 각주를 읽지 않고 에코가 대신한 대답이 이해가 된다면 당신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위트와 풍자, 유머와 진실을 얄미울 정도로 완벽하게 표현했다. 에코가 밉다. 부러울 정도로 밉다. 그의 지식이 부럽다기 보다 그걸 요리할 줄 아는 실력과 통찰력이.

애프터서비스 :
‘<어떻게 지내십니까>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방법’은 무한히 응용 가능한 질문 방법이다. “이명박, 거짓말하는 사람 물대포 쏘고 있습니다. 강만수, 환율 이 너무 낮아 걱정입니다. 이건희, 차명계좌 차라리 스위스로 돌릴까 생각 중입니다. 이용대, 한 쪽 눈 감고 살아요. 박태환, 축구장 물 찰 때까지 기다려요” 등등. 한번 해 보기 바란다. 은근히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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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 창비시선 286
문인수 지음 / 창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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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910
문인수 <배꼽> * * * * *

단연코 대학을 졸업한 이후 읽었던 시 중 최고라고 헹가래를 쳐주고 싶다.

“문인수의 시를 읽고 누웠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황지우 시인-

“다른 말이 필요 없다. 꿈틀거리며 질펀하게 번지는 절창 시편들! ” -황동규 시인-

“그 목소리는 낮지만 겸손한 진정성과 섬세한 미학성이 잘 결합된 수작이다.” -미당문학상 심사평-

황지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난 머리카락이 벌떡 서 버리더라. 어디서 이런 시인이 튀어나왔는지 어디서 이런 시구가 튀어나왔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먼발치서 보는 것 같다가도 어느새 코 앞에 와 있고, 넉넉한 너털웃음을 보이면서도 한 올 한 올 한 터럭도 빠뜨리지 않는 치밀함을 보여주며, 그러면서도 내내 가슴 깊은 곳에서 절절히 번져오는 진정성의 울림에 머리가 띵 할 정도다.
<만금이 절창이다>,<배꼽>,<녹음>,<쇠똥구리 청년>,<흔들리는 무덤>-일단 눈에 들어온다.
시를 논함이 무슨 소용있단 말인가, 직접 몸으로 읽고 느껴야지. <만금이 절창이다> 전문 소개로 글을 마친다.

물들기 전에 개펄을 빠져나오는 저 사람들 행렬이 느릿하다.
물밀려 걸어들어간 자국 따라 무겁게 되밀려나오는 시간이다. 하루하루 수장되는 길, 그리 길지 않지만
지상에서 가장 긴 무척추동물 배밀이 같기도 하다, 등짐이 박아넣는 것인지,
뻘이 빨아들이는 것인지 정강이까지 빠지는 침묵. 개펄은 무슨 엄숙한 식장 같다, 어디서 저런,
삶이 몸소 긋는 자심한 선을 보랴. 여인네들......여남은 명 누더기누더기 다가온다. 흑백
무성영화처럼 내내 아무런 말, 소리 없다. 최후처럼 쿵,
트럭 옆 땅바닥에다 조갯짐 망태를 부린다. 내동댕이 치듯 벗어놓으며 저 할머니, 정색이다.
"죽는 거시 낫겄어야, 참말로" 참말로
늙은 연명이 뱉은 절창이구나, 질펀하게 번지는 만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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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도살장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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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831
커트 보네거트 <제5도살장> * * * *
Kurt Vonnegut, SLAUGHTERHOUSE-FIVE

이문구의 <관촌수필>을 최고로 꼽는다는 박찬욱 감독이 외국 작가로는 ‘커트 보네거트’를 추천했을 때 난 그가 누군지 몰랐다. 그래서 그의 가장 유명한 대표작을 먼저 읽어보자고 생각했고, 여름 휴가 기간에 읽었다.

<제5도살장>은 문체가 가볍고 전개가 빠르지만 쉽게 읽혀지지 않는다. 시간의 순서가 뒤죽박죽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실제 작가가 경험했던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졌지만 주인공이 트라팔마도어인(외계인)을 만나는 등 비현실적인 내용이 혼합되어 있다. 그래서 읽기가 수월치 않다. 한 페이지에서도 사방팔방 타임머신이 가동되어 젊은 시절 전쟁 시기, 후에 검안사가 된 시기, 트라팔마도어인과 얽혀 있는 시기, 비행기 사고가 난 시기 등 독자를 혼란에 빠뜨리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정신 없이 패스를 주고 받는다. 대체 왜 그는 이런 작법으로 소설을 썼을까?

“23년 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집에 돌아왔을 때에는 드레스덴 파괴에 대해 쉽게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당시에는 드레스덴에 대해 그리 많은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지금도 마찬가지다.”(11쪽) 작가는 스물 한 살 때 드레스덴 폭격의 현장에 있었다. 물론 포로로. 나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드레스덴 폭격은 연합군에 의해 “재래식 무기를 이용한 공습으로도 135,000명이 죽었”(220쪽)던 무자비한 사건으로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투하했을 때 죽은 사람은 71,379명”(220쪽)과 비교해 보아도 거의 2배의 사망자를 일으킨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런데 왜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을까?

그것은 바로 우리나라의 노근리 사건을 생각해보면 쉽게 유추해볼 수 있다. 승자에 의해 저질러진 반칙 플레이는 승자의 힘으로 가려지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인터넷 검색해본 결과로도 1945년 2월의 드레스덴 폭격은 그다지 실익이 크지 않은 폭격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미 그로기 상태의 적을 굳이 한 대 치지 않아도 제 힘으로 설 수조차 어려운 적에게 원투 스트레이트를 남발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게 ‘엘베강의 피렌체’라는 드레스덴은 작살이 났고, 포로가 되어 제5도살장에 갇혀 있던 작가는 살아남게 되었다. ‘유럽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학살’(252쪽,역자)을 경험한 미치광이가 정상적인 작법으로 소설을 썼다면 그것도 이상할 것이다. 무려 23년이 지난 후에야 소설을 완성할 수 있었던 Kurt Vonnegut에게 시간의 전후 역시 폭격의 굉음만큼이나 ‘엿 먹이는’ 소리였을 것이다. “볼 수 있는 것이라곤 파이프 끝의 작은 점뿐이”(138쪽)며 “파이프를 통해 무엇을 보든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저게 인생이야” ”(138쪽)라는 보네거트의 냉소는 트랄파마도어 인의 충고에서 절정을 이룬다. “열심히 노력만 한다면 지구인들도 그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거요. 끔찍한 시간은 외면해 버리고 좋은 시간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오.”(141쪽) 트라팔마도어 인의 충고가 요긴한 줄 알겠는데 인터넷에서 드레스덴 폭격 사진을 몇 장 본 나로선 외면의 기술보다 맨인블랙의 기억 상실 버튼이 더 요긴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하긴 그게 안되서 인간이란 끊임없이 반성하고 비판하며 악다구니 쓰는 종족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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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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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6

****

눈먼 자들의 도시 - 주제 사라마구

영화한다고 돌아다니는 친구놈이 추천한 책이라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최근 인터넷 몇 군데서 눈에 걸리기에 읽게 되었다. 

 98년엔 노벨상도 받은 이 포르투갈 늦둥이 작가는 거의 예순 때 주목받기 시작했고 이 소설도 74세 때(1995년) 발표했다. 괴테의 파우스트가 일흔인가에 쓰여졌다고 기억하는데, 나이 먹고 나서야 나이값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나 보다. 

책의 표지 안쪽 작가 설명엔 '마르케스, 보르헤스와 함께 20세기 세계문학의 거장으로 꼽'힌다는 꼭 검증받아야 할 방언으로 작가를 소개하면서 '환상적 리얼리즘'이라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문학용어까지 제공한다.글쎄, 환상과 리얼리즘이 대체 같은 방에서 이불 덮고 잘 수 있는 사이인지는 모르겠는데 원나잇스탠드도 아니고 부부도 아닌 것이 참 안 어울리는 파트너라 여겨진다. 작품 뒤의 해설을 사라마구의 '돌뗏목'이란 작품이 이베리아 반도가 유럽에서 떨어져 나가는 상상 이야기라며 '환상적 리얼리즘'을 운운하는데 환상과 상상의 차이도 모호하거니와 듣고 나서 감흥도 없는 저런 용어는 쓰지 않았으면 싶다.

책 얘기로 넘어가면...

전반전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는데 후반으로 갈수록 체력이 달려서 전반전만큼 뛰지 못하는 경기 같았다. 주인공인 의사 부인을 제외한 다른 사람 모두가 눈이 멀어버린다-그것도 실명 전염병이라는 '환상'적인 소재로-는 설정은 카프카의 변신을 떠올리게도 하는데, "대체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하려고 작품을 이렇게 별여놨지?" 했던 호기심이 슬슬 후반전으로 갈수록 "경기는 밀리는데 교체 선수가 마땅치 않네..." 라는 의심으로 변해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설마 그 선수로 바꾸려는 건 아니겠지?"라는 의심이 맞을 것이다. 작가의 하고픈 얘기가 고등학생 정도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도덕적, 관념적, 보편 인류 타당적인 것이라면, 애써 월드컵에 출전하지 않아도 될 일 아니었을까 싶은 마음이다. 벌려 놓은 판이 아깝다. 차에 탄 채 신호대기 중이었던 남자가 그냥 아무 이유없이 눈이 멀어버리고 그 남자를 진료한 의사가 연이어 눈이 멀게 되는 스토리로 시작되는 소설의 흡입력이 아깝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라서 그런가, 더 크리에이티브한 무언가로 연결시켰더라면 정말 엄청난 소설이 나올 수 있었으리란 아쉬움이 가득하다. 마치 골을 향해 전력질주하는 전성기의 호나우두를 보는 듯한 스피드로 전개되다가 넘어져버린 느낌이랄까. 수용소로 격리 조치가 되고, 그 안에서 벌어졌던 일, 주인공이 벌인 최후의 사건,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 후반부로 갈수록 스피드는 힘에 부치고 패스할  곳이 마땅치 않아 볼을 돌리고 있다가 뺏기고 만다. 

철저하게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일관한 구성이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데 담백하면서도 적절한 비유와 설명으로 스토리는 재미있게 이어져 갔고, 문장 부호도 없이 대화 표시도  없이 챕터도 숫자나 소제목 없이, 제목이 눈먼 자들의 도시니까, 써내려간 것이 부담이  안될 정도니까 '재미'라는 한 골은 분명 넣었던 것 같다. 문장력도 좋고, 어쩌면 참  교훈적으로 들리는 말-할아버지라 그런지-도 무지 많이 들어 있는 것 같다. 소개하면,  "물어뜯는 이빨을 가진 양심"(32쪽), "인간은 원래 그렇게 만들어진 거야, 반은 무관심으로,  반은 악의로."(52쪽), "우리가 완전히 인간답게 살 수 없다면, 적어도 완전히 동물처럼 살지는  않도록"(166쪽), "가장 심하게 눈이 먼 사람은 보이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419쪽), "다른 사람들과 사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야,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거지"(423쪽),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시간이에요, 시간은 도박판에서 우리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상대예요. 그런데 혼자 손에 모든 카드를 쥐고 있어요. 우리는 삶에서 이길 수 있는 카드들이 어떤 것인지 추측할 수밖에 없죠, 그게 우리 인생이에요."(449쪽),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461쪽) 등이다.

어쨋든, 내 기준으로 별 4개니 추천하는 책으로 일독을 권한다. 수도 없이 눈먼 상태를 상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경험일 테니. 눈이 먼다...눈이 먼다...사라마구 양반, 저기 청기와 쪽  좀 다 멀게 해 줄 수 없겠소? 정말 너무나 참을 수 없는 짓거리를 창피한 줄도 모르고 저지르는 인간같지 않은 양반이 있어서 말이오. 뭐라고? 벌써 그쪽은 눈먼 자들의 도시라고? 아...방금 당신이 한 말을 써놓고도 몰랐소.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것이 눈먼 사람들이라는...고맙소, 내가 깜박했소이다. 아직 늙은 것도 아닌데 건망증은...소설 잘 읽었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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