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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2008.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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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 주제 사라마구
영화한다고 돌아다니는 친구놈이 추천한 책이라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최근 인터넷 몇 군데서 눈에 걸리기에 읽게 되었다.
98년엔 노벨상도 받은 이 포르투갈 늦둥이 작가는 거의 예순 때 주목받기 시작했고 이 소설도 74세 때(1995년) 발표했다. 괴테의 파우스트가 일흔인가에 쓰여졌다고 기억하는데, 나이 먹고 나서야 나이값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나 보다.
책의 표지 안쪽 작가 설명엔 '마르케스, 보르헤스와 함께 20세기 세계문학의 거장으로 꼽'힌다는 꼭 검증받아야 할 방언으로 작가를 소개하면서 '환상적 리얼리즘'이라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문학용어까지 제공한다.글쎄, 환상과 리얼리즘이 대체 같은 방에서 이불 덮고 잘 수 있는 사이인지는 모르겠는데 원나잇스탠드도 아니고 부부도 아닌 것이 참 안 어울리는 파트너라 여겨진다. 작품 뒤의 해설을 사라마구의 '돌뗏목'이란 작품이 이베리아 반도가 유럽에서 떨어져 나가는 상상 이야기라며 '환상적 리얼리즘'을 운운하는데 환상과 상상의 차이도 모호하거니와 듣고 나서 감흥도 없는 저런 용어는 쓰지 않았으면 싶다.
책 얘기로 넘어가면...
전반전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는데 후반으로 갈수록 체력이 달려서 전반전만큼 뛰지 못하는 경기 같았다. 주인공인 의사 부인을 제외한 다른 사람 모두가 눈이 멀어버린다-그것도 실명 전염병이라는 '환상'적인 소재로-는 설정은 카프카의 변신을 떠올리게도 하는데, "대체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하려고 작품을 이렇게 별여놨지?" 했던 호기심이 슬슬 후반전으로 갈수록 "경기는 밀리는데 교체 선수가 마땅치 않네..." 라는 의심으로 변해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설마 그 선수로 바꾸려는 건 아니겠지?"라는 의심이 맞을 것이다. 작가의 하고픈 얘기가 고등학생 정도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도덕적, 관념적, 보편 인류 타당적인 것이라면, 애써 월드컵에 출전하지 않아도 될 일 아니었을까 싶은 마음이다. 벌려 놓은 판이 아깝다. 차에 탄 채 신호대기 중이었던 남자가 그냥 아무 이유없이 눈이 멀어버리고 그 남자를 진료한 의사가 연이어 눈이 멀게 되는 스토리로 시작되는 소설의 흡입력이 아깝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라서 그런가, 더 크리에이티브한 무언가로 연결시켰더라면 정말 엄청난 소설이 나올 수 있었으리란 아쉬움이 가득하다. 마치 골을 향해 전력질주하는 전성기의 호나우두를 보는 듯한 스피드로 전개되다가 넘어져버린 느낌이랄까. 수용소로 격리 조치가 되고, 그 안에서 벌어졌던 일, 주인공이 벌인 최후의 사건,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 후반부로 갈수록 스피드는 힘에 부치고 패스할 곳이 마땅치 않아 볼을 돌리고 있다가 뺏기고 만다.
철저하게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일관한 구성이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데 담백하면서도 적절한 비유와 설명으로 스토리는 재미있게 이어져 갔고, 문장 부호도 없이 대화 표시도 없이 챕터도 숫자나 소제목 없이, 제목이 눈먼 자들의 도시니까, 써내려간 것이 부담이 안될 정도니까 '재미'라는 한 골은 분명 넣었던 것 같다. 문장력도 좋고, 어쩌면 참 교훈적으로 들리는 말-할아버지라 그런지-도 무지 많이 들어 있는 것 같다. 소개하면, "물어뜯는 이빨을 가진 양심"(32쪽), "인간은 원래 그렇게 만들어진 거야, 반은 무관심으로, 반은 악의로."(52쪽), "우리가 완전히 인간답게 살 수 없다면, 적어도 완전히 동물처럼 살지는 않도록"(166쪽), "가장 심하게 눈이 먼 사람은 보이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419쪽), "다른 사람들과 사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야,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거지"(423쪽),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시간이에요, 시간은 도박판에서 우리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상대예요. 그런데 혼자 손에 모든 카드를 쥐고 있어요. 우리는 삶에서 이길 수 있는 카드들이 어떤 것인지 추측할 수밖에 없죠, 그게 우리 인생이에요."(449쪽),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461쪽) 등이다.
어쨋든, 내 기준으로 별 4개니 추천하는 책으로 일독을 권한다. 수도 없이 눈먼 상태를 상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경험일 테니. 눈이 먼다...눈이 먼다...사라마구 양반, 저기 청기와 쪽 좀 다 멀게 해 줄 수 없겠소? 정말 너무나 참을 수 없는 짓거리를 창피한 줄도 모르고 저지르는 인간같지 않은 양반이 있어서 말이오. 뭐라고? 벌써 그쪽은 눈먼 자들의 도시라고? 아...방금 당신이 한 말을 써놓고도 몰랐소.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것이 눈먼 사람들이라는...고맙소, 내가 깜박했소이다. 아직 늙은 것도 아닌데 건망증은...소설 잘 읽었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