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5도살장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080831
커트 보네거트 <제5도살장> * * * *
Kurt Vonnegut, SLAUGHTERHOUSE-FIVE
이문구의 <관촌수필>을 최고로 꼽는다는 박찬욱 감독이 외국 작가로는 ‘커트 보네거트’를 추천했을 때 난 그가 누군지 몰랐다. 그래서 그의 가장 유명한 대표작을 먼저 읽어보자고 생각했고, 여름 휴가 기간에 읽었다.
<제5도살장>은 문체가 가볍고 전개가 빠르지만 쉽게 읽혀지지 않는다. 시간의 순서가 뒤죽박죽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실제 작가가 경험했던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졌지만 주인공이 트라팔마도어인(외계인)을 만나는 등 비현실적인 내용이 혼합되어 있다. 그래서 읽기가 수월치 않다. 한 페이지에서도 사방팔방 타임머신이 가동되어 젊은 시절 전쟁 시기, 후에 검안사가 된 시기, 트라팔마도어인과 얽혀 있는 시기, 비행기 사고가 난 시기 등 독자를 혼란에 빠뜨리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정신 없이 패스를 주고 받는다. 대체 왜 그는 이런 작법으로 소설을 썼을까?
“23년 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집에 돌아왔을 때에는 드레스덴 파괴에 대해 쉽게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당시에는 드레스덴에 대해 그리 많은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지금도 마찬가지다.”(11쪽) 작가는 스물 한 살 때 드레스덴 폭격의 현장에 있었다. 물론 포로로. 나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드레스덴 폭격은 연합군에 의해 “재래식 무기를 이용한 공습으로도 135,000명이 죽었”(220쪽)던 무자비한 사건으로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투하했을 때 죽은 사람은 71,379명”(220쪽)과 비교해 보아도 거의 2배의 사망자를 일으킨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런데 왜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을까?
그것은 바로 우리나라의 노근리 사건을 생각해보면 쉽게 유추해볼 수 있다. 승자에 의해 저질러진 반칙 플레이는 승자의 힘으로 가려지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인터넷 검색해본 결과로도 1945년 2월의 드레스덴 폭격은 그다지 실익이 크지 않은 폭격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미 그로기 상태의 적을 굳이 한 대 치지 않아도 제 힘으로 설 수조차 어려운 적에게 원투 스트레이트를 남발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게 ‘엘베강의 피렌체’라는 드레스덴은 작살이 났고, 포로가 되어 제5도살장에 갇혀 있던 작가는 살아남게 되었다. ‘유럽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학살’(252쪽,역자)을 경험한 미치광이가 정상적인 작법으로 소설을 썼다면 그것도 이상할 것이다. 무려 23년이 지난 후에야 소설을 완성할 수 있었던 Kurt Vonnegut에게 시간의 전후 역시 폭격의 굉음만큼이나 ‘엿 먹이는’ 소리였을 것이다. “볼 수 있는 것이라곤 파이프 끝의 작은 점뿐이”(138쪽)며 “파이프를 통해 무엇을 보든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저게 인생이야” ”(138쪽)라는 보네거트의 냉소는 트랄파마도어 인의 충고에서 절정을 이룬다. “열심히 노력만 한다면 지구인들도 그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거요. 끔찍한 시간은 외면해 버리고 좋은 시간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오.”(141쪽) 트라팔마도어 인의 충고가 요긴한 줄 알겠는데 인터넷에서 드레스덴 폭격 사진을 몇 장 본 나로선 외면의 기술보다 맨인블랙의 기억 상실 버튼이 더 요긴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하긴 그게 안되서 인간이란 끊임없이 반성하고 비판하며 악다구니 쓰는 종족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