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은 불법이다. 개인의 자유라고 마약을 투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마약은 한 사람의 인생을 파멸 시키기 때문이다. 19세기 영국에서 수입된 아편이 중국 전역에 퍼졌을 때 중국 당국은 고심했다. 길거리에 아편에 중독되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폐인들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아편보다 중독성이 심한 마약은 널리고 널렸다. 


영화 <레퀴엠>은 마약으로 인해 파멸의 길을 걸어가는 네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해리, 해리의 어머니(사라 골드팝), 해리의 여자친구(마리온), 해리의 친구(타이론)은 모두 영화의 끝 부분에서 파국을 맞이한다. 


아무런 생산적인 일도 하지 않는 해리는 친구 타이론과 함께 마약으로 돈을 벌어보려다가 마약에 중독된다. 해리의 여자친구 마리온 또한 마찬가지다. 어머니 사라는 TV쇼에 당첨되었다는 전화를 듣고 빨간 드레스를 입으려는 생각에 마약의 일환인 식욕 감퇴제를 먹다가 마약에 중독되고 만다.


영화는 끝을 향해 갈 수록 광기 그 자체로 변모한다. 영화 내내 들려오는 배경 음악은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게 만들어 준다. 점점 더 마약에 취해가는 사람들. 그들은 마약 없이는 한 순간도 견딜 수 없는 폐인이 되어 간다.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을 했던 해리와 마리온의 추억은 파편이 되어 버린다. 마약이 사라진 공간 속에서 해리와 마리온의 관계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몸을 팔더라도 돈을 구해오라고 말하는 해리. 마약을 구해오지 못하는 해리에게 분노하는 마리온. 그들은 결국 마약 앞에서 별 볼일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영화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들은 오직 처음 뿐이다. 등장 인물들의 삶은 시간에 따라 계속해서 하향 곡선을 그린다.



해리의 아버지가 죽고 난 이후로 외로움 속에서 살아가던 '사라 골드팝' 

그녀에게 남은 건 오직 해리 뿐이었다. 


하지만 해리도 사라를 떠나가고.

사라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TV출연은 그녀의 고독과 외로움을 사라지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다이어트에 성공해

대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아들과 남편과의 사랑과 영광을 꿈꾸는

사라 골드팝.


하지만 그녀는 다이어트약과 함께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몸을 팔며 마약에 쩌든 마리온.

마약을 꽂은 혈관의 세균 감염으로 팔을 자르게 된 해리.

감옥에 갇혀 마약 부작용으로 고통받는 타이론.

더 이상 회복될 수 없는 정신병자가 되어 버린 사라 골드팝.


영화는 선명하게 말한다. '마약 하지마..'

또한 말한다. 쾌락과 허영된 상상은 이토록 별볼일 없는 파국으로 가게 된다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봤다.

영화를 두 세번 감아서 볼 정도로

마지막 20분은 내내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아름답고 무섭다. 

광기 그 자체다.


마약을 흡입할 때 마다 등장하는 연결된 시퀀스는 꿈에 나올 정도로 인상깊다..


<레퀴엠>은 광기와 파멸을 향해 가는 열차다.

탑승 순간에만 '조금' 평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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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출간된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한국에서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을 만큼 숱한 논란의 저서로 한국에서 자리 매김 해왔다. 누구나 한 번쯤음 들어봤을 법한 "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과정,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p.46)"은 이 책에 적혀있는 글귀다.


◆역사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


랑케 사학에서는 모든 사실들을 기록하는 것이 역사가의 의무라고 말하지만, EH카는 이러한 생각에 반대한다. 모든 사실은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사실과 '에반'이라는 평범한 사람이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는 사실 중 무엇이 더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 걸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자라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 건넘으로써 역사가 뒤바뀌었지만 후자의 경우엔 아무런 역사적 가치가 없는 사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역사적 사실들은 추측에 의거해 기록 될 때가 많다. 중세 시대의 모든 기록들은 띄엄 띄엄 존재한다. 그리고 역사가들이 해야 할 일은 이러한 기록 사이의 공백을 매우는 일이며, 이 중에서도 가치있는 기록들은 선별하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역사가가 소설가는 아니다. 무한한 상상력으로 역사를 꾸며내선 안되고 사실에 근거 해 역사를 기록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사실과 해석사이의 무한한 변증법. 그것만이 역사가의 의무이며 역사 자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저자는 말한다.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과정,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p.46)"


◆개인은 언제나 사회 속에 존재한다.


사회(역사)에 영향을 받지 않는 인물이 존재할까? 우리는 니체라는 철학자의 생애를 생각해볼 수 있다. 니체는 시대에 완전한 반동을 가한 인물이었다. 동시대 사람들은 환멸하고 그가 살던 시대를 노골적으로 비난했던 니체는 개인으로서 존재했는가? 그렇지 않다. 니체는 시대가 만들어낸 전형적인 인물로서 반시대라는 것 자체는 시대의 산물이다.


역사가들은 역사적 사건들의 인과성을 밝혀내야 한다. 개인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특별한 사건들만을 어떻게 역사가들이 기록할 수 있겠는가. 역사의 필연적 인과 법칙이 성립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도한 것이 아닌가. 저자는 역사가들은 역사에 다양한 원인들 중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원인을 찾아내려 노력하는 것이 역사가들의 임무라고 말한다. 때문에 우연성으로 인해 역사를 분석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나 회의적인 사고이다. 역사가는 과학과 같이 일반적 법칙을 찾아내려는 데 노력해야 하며, 역사의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 엄밀히 파악하려 노력해야 한다.


◆역사는 진보한다.


 훌륭한 역사가는 '왜' 뿐만 아니라 '어디로'를 추적하려 한다. 역사는 어디로 향해 나아가는가? 헤겔과 마르크스는 역사주의를 통해 역사의 일반 법칙에 대해 말했지만 이는 포퍼에 의해 비판받은 적 있다. 반박할 수 없는 주장은 이데올로기에 의한 공허한 다툼만 가져올 뿐이다. 


저자는 역사의 '진보'라는 개념에 대해서 묻는다. 진보란 무엇인가? 인간의 역사는 진보했는가? 역사는 퇴보했는가? 역사에 대한 진보는 가능성에 대한 신념을 말한다. "진보에 대한 신념은 자동적이거나 필연적인 과정에 대한 신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잠재력의 부단한 발전에 대한 신념을 말한다.(p.164)" 


랑케 사학과 같은 사실을 중시하는 역사가들은 사실(is)에서 당위(ought)가 나올 수 없다고 강조하지만, 이는 전적으로 역사가의 길을 잘못 든것이다. 역사는 미래에 대학 가능성을 탐색하면서 과거를 재고찰하는 것이다. 때문에 역사에 대한 사실적 진술들은 그 자체로 의미가 없다. 역사가들이 해야 할 일은 역사의 미래를 예측하며 과거를 재해석하는 일이다. "역사가는 사실과 해석, 사실과 가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사람이다. 그는 그것들을 분리시킬 수 없다. 여러분은 정적인 세계에서라면 어쩔 수 없이 사실과 가치의 구별을 선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정적인 세계에서는 무의미하다. 역사는 그 본질상 변화이며, 운동이며, 혹은 - 만일 여러분이 낡은 투의 단어에 트집을 잡지 않는다면 - 진보이다(p180)"


정치 엘리트들이 만들어낸 역사에 대한 회의주의와 비관론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서유럽의 역사가 몰락하고 있다고 해서 전 세계의 역사가 몰락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역사가 진보한다고 믿어야 하며, 반드시 역사는 진보해야만 한다. "나의 결론은, 파괴와 쇠퇴 이외에는 아무것도 내다보지 않으면서 진보에 대한 모든 신념과 인류의 더 나은 진보에 대한 모든 전망을 어리석은 짓이라고 배제해버리는 오늘날의 회의주의와 절망의 조류가 엘리트주의의 한 형태 - 위기로 인해서 자신들의 안전과 특권ㅇ르 가장 현저하게 침식당해온 엘리트 사회집단의 산물, 그리고 한동안 세계의 나머지 지역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확실한 지배권을 박탈당한 엘리트 국가들의 산물 - 라는 것이다.(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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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s Search for Meaning


인간은 의미 없이 살아갈 수 없다. 자신이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를 알아야만 고통스러운 현실을 참아가며 살아갈 수 있다.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니체는 말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고.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아야 하는 이유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삶의 활력을 잃은 채 살아가는 좀비와 같을 것이다. 이 시대에 좀비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건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저자 빅터 프랭클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 슈비츠에서 몇 년간 강제 노역을 했다. 노동력으로서 가치가 없는 인간은 곧 바로 가스실에 보내져 죽임을 당하고, 겨우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빵 몇조각만이 식단으로 나오는 곳에서 빅터 프랭클은 인간성의 끝을 보았다.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일상으로 돌아온 프랭클은 지난 날을 회고하며 이 책을 썼다. 그리고 의미를 통해 삶의 회복을 만드는 '로고테라피(logotheraphy)' 치료를 만들어 냈다. "로고테라피는 인간 존재의 의미는 물론, 그 의미를 찾아 나가는 인간 의지에 초점을 맞춘 이론이다. 로고테라피 이론에서는 인간의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인간의 원초적 동력으로 본다.(p.151)" "인간이 의미를 찾고자 하는 마음은 그 사람의 삶에서 근본적으로 우러나오는 것이지 본능적인 욕구를 2차적으로 합리화시키려고 생기는 것은 아니다(p.151)" 인간이라면 누구나 의미를 추구하기에 그것을 살리는 것이 로고테라피의 본질적인 측면이다.


자살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더 이상 삶에 희망이 없다고 느낀다는 점이다. 좌절하고 절망한다. 그들에겐 살아야 하는 이유가 결핍되어 있다. 그것이 질병이건 실존적 위기이건 그들은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가지지 못한다. 나치 수용소에서도 마찬가지 였다. 그곳은 너무나 열악하고 힘들었다. 매일 같이 잣행해지는 지옥같은 노동은 수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강제로 죽임을 당하거나 건강이 악화되 죽는 사람도 있었지만 삶에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이내 곧 죽는다는 사실을 프랭클은 발견했다. 


그러나 수용소에서 언젠가는 풀려나 사랑하는 가족을 만날 수 있을거라는 희망을 품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버텨냈다. 삶에 대한 '당위성'이 인간의 삶을 연장시켜 준것이다. 나치에게 채찍을 맞으며 고통을 받아도 몇몇 사람은 사랑하는 가족과의 추억을 상상하며 고통스러운 현실을 이겨냈다. 


◆의미를 찾는 세 가지 방법


로고테라피를 통해서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둘째, 어떤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셋째,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p.166)"



첫번 째와 두번 째는 적극적 자유의 표지로서 성숙한 인간이 만들어내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반드시 무언가를 창조하거나 무엇가를 경험하고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의미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치 수용소에 있었던 사람들이 절망과 시련속에서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굴복하지 않고 삶에 희망을 찾아가려고 했던 태도 때문이었다. 


◆초의미


과잉 강박이라던지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 내부에서 빠져나오고 있지 못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다. 로고테라피는 의미를 통해서 이들을 치료하는데 자신을 넘어선 '초의미'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 과잉 강박과 불안에 떨고 있는 이들을 치료할 수 있다.


자신을 넘어서 자기 자신에 대해 웃을 수 있는 상태를 알려줌으로써 이들을 치료한다는 소리다. 정신 병에 걸린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인데 강박에 걸려있는 사람들은 특히나 그러하다. 불면증에 걸린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 잡혀 있는 사람들이다. 로고테라피는 이들에게 일부러 자지 않으려고 해보라고 시도함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해 조소할 수 있도록 만든다. 이것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빠져 나오게 만드는 것으로써 '초의미'로 연결시키는 것이다.


선과 악의 교차성


프랭클은 나치 중에서도 수감자들에게 연민의 감정을 보였던 사람들이 있었으며, 같은 수감자들 사이에서도 같은 수감자들을 괴롭힌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한다. 즉, 선과 악의 이분법은 단순한 사고라는 것이다. 


의미가 사라진 현재


전쟁이 사라진 오늘 날, 사람들은 행복할까? 역설적으로 힘들고 고달팠던 시기에 의미를 찾으며 자신의 삶에 충만하게 살았던 사람들이 많았으며 오늘날엔 물질적 풍요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에도 의미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표적인게 '일요병'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열심히 일을 하다가, 주말만 되면 공허한 자신의 실존에 대해서 방황하는 증세를 말한다. 이 일요병이라는 유령은 현대인들의 병폐적인 증상에 대해 대표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가? 우리는 반드시 인생의 의미를 찾아야 만 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어떤 인생을 살라고 빅터 프랭클은 말하지 않지만 삶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삶에 의미를 찾은 그 순간엔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갈 수 있다는 니체의 글귀를 말해준다. 또한 인생을 두 번 사는 것 처럼 살아보라고 제시한다.


"두 번째 인생을 사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당신이 지금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p.215)"


또한 삶의 의미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만약 그렇게 쉬운거라면 모든 인간이 충만한 삶을 살아갈 텐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나 스피노자의 격언은 우리에게 힘을 준다. "모든 위대한 것은 그것을 발견하는 것 만큼이나 실현시키는 것도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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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각광받고 있는 진화심리학은 우리 행동을 설명해주는 열쇠가 되곤 한다. 예를 들어 남자는 허리와 골반의 비율이 0.7인 몸매를 가진 여성을 선호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런 몸매를 가지고 있는 여성이 아이를 많이 나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성의 이런 선호는 전세계적으로 보편적으로 관찰되고 있는 특성이기 때문에 진화심리학은 분명 이러한 생각 자체가 인간의 몸 속에 내재화 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류의 주장이 진화심리학의 주장 중 하나다.


돌연변이


다윈에서 부터 시작한 진화론은 창조론을 밀어내고 상식이 되어가고 있다. 우연히 자연에서 발생한 돌연변이가 생존에 유리한 특성을 가졌을 경우 그 돌연변이는 번식할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기린이 목이 긴 이유는 우연적으로 목이 긴 기린 돌연변이가 나왔고 그 기린이 높은 곳에 있는 풀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더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진 것이 누적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은 창조론의 비판을 계속 받아왔는데 왜냐하면 눈과 같은 복잡한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는 장기는 돌연변이를 통해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매우 복잡하다는 것이다. 이 확률은 토네이도가 고물상을 지나갔을 때 보잉707이 자동으로 만들어질 확률과 같다고 한다.


하지만 <이기적 유전자>를 집필한 리처드 도킨스는 '눈 먼 시계공'이라는 사고실험을 통해 눈이 돌연변이를 통해 만들어 질 수 있음을 설명한다. 자연은 한 번에 복잡한 돌연변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순간에 맞게 생존에 우월한 돌연변이가 누적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계공은 눈이 먼 상태에서 복잡한 시계(눈)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수 많은 모듈들


진화의 과정을 거치며 우리의 몸 속엔 수많은 진화의 산물들이 내재되어 있다. 그리고 진화심리학자들은 특정 메커니즘들을 모듈이라 칭한다. 600만년 전, 아프리카를 누비던 인류의 시초들에서부터 누적된 모듈은 현대인의 모듈과 거의 같다. 


인간이 배가 불러도 지방과 당분이 있는 음식들을 자꾸 먹게 되는 이유는 아프리카를 떠 돌던 인간들은 먹을 게 귀했기 때문에 항상 배고픔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칼로리의 지방과 당분을 찾아 다녔고 우연한 기회로 먹이를 찾았을 땐 쉽게 찾아오는 기회가 아니기에 과식을 했을 게 뻔하다. 그러한 연유로 우리 또한 배가 불러도 끊임없이 지방과 당분을 찾는 것이다. 물질적 풍요 속에서 살 고 있는 현대인들이 비만에 시달리는 이유는 자연스럽게 설명된다.


족벌주의 또한 진화심리학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리처드 도킨스에 따르면 진화의 메커니즘은 '유전자'의 증식을 통해 설명되어야 하는데 자기 자신은 유전자 100퍼센트를 가지고 있고, 직계존속은 50퍼센트다. 그리고 형제는 25퍼센트다. 이러한 연유로 우리는 처음 보는 사람보다 자식을 챙기고 형제들을 챙기게 된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족벌주의가 진화심리학을 통해 잘 설명된다고 해서 족벌주의가 도덕적으로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니다. 


여성이 남성에 대한 설명은 책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남성이 어린 여성을 선호하는 이유는 젊은 여자가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남성은 여성의 나이에 집착한다. 반면 여성은 남성에 비해 나이에 집착하지 않는다. 여성은 남성의 능력을 많이 고려하는데, 왜냐하면 아이를 낳았을 때 안정적인 지원을 해줄 수 있은 배우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진화 심리학의 도덕적 정당성


진화 심리학이 현 시점의 현상을 설명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도덕적으로 정당화 된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진화심리학은 설명해줄 뿐이다.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우리 몸속의 모듈의 방향은 다를 수 있다.


나치즘은 다윈의 진화론을 적극적으로 차용한 스펜서의 사회 진화론을 통해 아리안 족의 우월성을 주장했다. 이는 전적으로 진화 생물학이 이념에 의해 왜곡된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동시에 진화 생물학은 좌파적 이념에도 사용될 수 있는데, 인간 본성이 부의 불균형에 불만을 품는 방향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진화 생물학은 좌파적, 우파적 이념에 사용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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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숭고한 경험이다. 사랑은 모든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경험이다. 사랑을 하지 못한 자는 인생에 대해서 논할 수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에 대한 찬미는 언제나 어디서나 행해졌다. 그만큼 사랑이라는 것은 유일무이한 경험이다. 그것은 자신의 의식을 완전히 바깥으로 빼내는 하나의 활동이다. 사랑의 영역에 나르시시스트가 존재할 곳은 없다. '절대적 타자성'을 경험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한병철 교수의 <에로스의 종말>은 더 이상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외치고 있다. 자본의 증폭은 사랑을 섹시함으로 바꾸어 버린다. 섹시함은 증폭할 수 있는 자본이 되어 버린다.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침투하고 있는 자본의 영역은 에로스를 숭고한 경험에서 구입할 수 있는 체험으로 만들고 있다.


현대인이 만연하게 겪고있는 질병인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가질 수 밖에 없는 나르시시즘의 병폐적 증상이다. 현대인은 타자성을 경험하지 못한 채, 모든 일을 자신의 일로 치환시키는 성과주체의 노예들이다. 자의식이 과잉되어 있으며 끝없는 경쟁 속에서 자신 밖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들은 내면이라는 미로에 갇혀 허우적 거린다. 


부정성(negativity)


에로스는 전적으로 나르시시즘과 반대되는 것이다. 그리고 에로스의 경험은 우울증을 만들어낼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타자라는 부정성을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첫 눈에 반한 이성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더 이상 당신에게 당신은 중요하지 않다. 그녀에게 인식되는 자신의 모습이 중요하며, 그녀라는 타자만이 중요하다. 자의식에서 비롯되었던 질병들은 금세 사라진다.


하지만 더 이상 순수하고 숭고한의미에서의 에로스는 불가능해졌다. SNS을 통해 알 수 있는 그녀에 대한 정보는 우리들로 하여금 완전한 타자성을 손실시키도록 한다. 디지털 미디어는 거리를 가깝게 만들었다기 보단 거리 자체를 상실시키게 만든다. 당신은 SNS를 통해서 그녀에 대한 정보를 알고 가까워졌다고 생각하지만, 메신저를 통해 연락을 주고 받으며 가까워졌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실제로 가까워진게 아니다.


그럴 때가 있다. 메신저는 주고 받는 사이지만, 실제로 만났을 때 할 이야기가 없는 상황말이다. 온라인에서는 친하지만 오프라인에서는 친하지 않은 경우는 무언가 주객전도된 상황이다. 미디어에 사로잡힌 밀레니얼 세대에겐 점점 더 이런 경험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이미지를 통한 허위적 사랑만이 가능해지고 있다.

할 수 있을 수 없음


타자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대상이다. 타자는 부정이다. 성과사회에서 살아가는 개인은 <할 수 있음>이라는 조동사 속에서 살아가고 그 때문에 타자 또한 어떻게 <할 수 있을 수 있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돈이면 다 된다는 식의 사고다. '돈이라면 불가능 한 게 없어'라는 사고는 우리가 타자에 대한 조종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다. 


그러한 성과 사회에서 타자는 더 이상 독립적 주체로서 존재하지 못한다. 돈을 통해서 조종할 수 있고 수 많은 개인 중 그저 '개인'으로 존재할 뿐이다. 이들은 몰개성화 된 소비 사회의 일원일 뿐이다. "오늘날 사랑은 긍정화되고 그 결과 성과주의의 지배 아래 놓여 있는 성애로 변질된다. 섹시함은 증식되어야 하는 자본이다.(p.41)"


때문에 에로스에서 가장 중요한 절대적 부정성은 더 이상 경험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현대 사회에서 그 누가 '경이'를 느낄 수 있단 말인가. 타자는 메신저 속 프로필 사진에 불과할 뿐이고 인맥 중 하나가 되어버릴 뿐이다. 이들에겐 부정성이 없다. "모든 삶의 영역이 긍정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가운데 사랑도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과잉이나 광기에 빠지지 않은 채 즐길 수 있는 소비의 공식에 따라 길들여진다. 모든 부정성, 모든 부정의 감정은 회피된다. 고통과 열정은 안락한 감정과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흥분에 자리를 내준다. 속성 섹스의 시대, 즉흥적 섹스, 긴장 해소를 위한 섹스가 가능한 시대에는 성애 역시 모든 부정성을 상실한다.(p.51)"


절대적 타자성으로


그럼에도 한 번이라도 사랑을 해 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으리라. 사랑이란 자신을 내바치는 경험이라는 것을. 사랑은 순간을 영원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경험이다. "사랑의 행복은 시간의 영원을 품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p.64)" 

그렇기에 저자는 사랑을 재발명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나르시시즘이라는 질병을 넘어서 완전한 타자성으로 가는 길을 찾아야만 한다. 사랑이 불구가 되어버린 시대엔 더 이상 희망이 없을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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