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숭고한 경험이다. 사랑은 모든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경험이다. 사랑을 하지 못한 자는 인생에 대해서 논할 수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에 대한 찬미는 언제나 어디서나 행해졌다. 그만큼 사랑이라는 것은 유일무이한 경험이다. 그것은 자신의 의식을 완전히 바깥으로 빼내는 하나의 활동이다. 사랑의 영역에 나르시시스트가 존재할 곳은 없다. '절대적 타자성'을 경험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한병철 교수의 <에로스의 종말>은 더 이상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외치고 있다. 자본의 증폭은 사랑을 섹시함으로 바꾸어 버린다. 섹시함은 증폭할 수 있는 자본이 되어 버린다.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침투하고 있는 자본의 영역은 에로스를 숭고한 경험에서 구입할 수 있는 체험으로 만들고 있다.


현대인이 만연하게 겪고있는 질병인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가질 수 밖에 없는 나르시시즘의 병폐적 증상이다. 현대인은 타자성을 경험하지 못한 채, 모든 일을 자신의 일로 치환시키는 성과주체의 노예들이다. 자의식이 과잉되어 있으며 끝없는 경쟁 속에서 자신 밖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들은 내면이라는 미로에 갇혀 허우적 거린다. 


부정성(negativity)


에로스는 전적으로 나르시시즘과 반대되는 것이다. 그리고 에로스의 경험은 우울증을 만들어낼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타자라는 부정성을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첫 눈에 반한 이성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더 이상 당신에게 당신은 중요하지 않다. 그녀에게 인식되는 자신의 모습이 중요하며, 그녀라는 타자만이 중요하다. 자의식에서 비롯되었던 질병들은 금세 사라진다.


하지만 더 이상 순수하고 숭고한의미에서의 에로스는 불가능해졌다. SNS을 통해 알 수 있는 그녀에 대한 정보는 우리들로 하여금 완전한 타자성을 손실시키도록 한다. 디지털 미디어는 거리를 가깝게 만들었다기 보단 거리 자체를 상실시키게 만든다. 당신은 SNS를 통해서 그녀에 대한 정보를 알고 가까워졌다고 생각하지만, 메신저를 통해 연락을 주고 받으며 가까워졌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실제로 가까워진게 아니다.


그럴 때가 있다. 메신저는 주고 받는 사이지만, 실제로 만났을 때 할 이야기가 없는 상황말이다. 온라인에서는 친하지만 오프라인에서는 친하지 않은 경우는 무언가 주객전도된 상황이다. 미디어에 사로잡힌 밀레니얼 세대에겐 점점 더 이런 경험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이미지를 통한 허위적 사랑만이 가능해지고 있다.

할 수 있을 수 없음


타자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대상이다. 타자는 부정이다. 성과사회에서 살아가는 개인은 <할 수 있음>이라는 조동사 속에서 살아가고 그 때문에 타자 또한 어떻게 <할 수 있을 수 있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돈이면 다 된다는 식의 사고다. '돈이라면 불가능 한 게 없어'라는 사고는 우리가 타자에 대한 조종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다. 


그러한 성과 사회에서 타자는 더 이상 독립적 주체로서 존재하지 못한다. 돈을 통해서 조종할 수 있고 수 많은 개인 중 그저 '개인'으로 존재할 뿐이다. 이들은 몰개성화 된 소비 사회의 일원일 뿐이다. "오늘날 사랑은 긍정화되고 그 결과 성과주의의 지배 아래 놓여 있는 성애로 변질된다. 섹시함은 증식되어야 하는 자본이다.(p.41)"


때문에 에로스에서 가장 중요한 절대적 부정성은 더 이상 경험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현대 사회에서 그 누가 '경이'를 느낄 수 있단 말인가. 타자는 메신저 속 프로필 사진에 불과할 뿐이고 인맥 중 하나가 되어버릴 뿐이다. 이들에겐 부정성이 없다. "모든 삶의 영역이 긍정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가운데 사랑도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과잉이나 광기에 빠지지 않은 채 즐길 수 있는 소비의 공식에 따라 길들여진다. 모든 부정성, 모든 부정의 감정은 회피된다. 고통과 열정은 안락한 감정과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흥분에 자리를 내준다. 속성 섹스의 시대, 즉흥적 섹스, 긴장 해소를 위한 섹스가 가능한 시대에는 성애 역시 모든 부정성을 상실한다.(p.51)"


절대적 타자성으로


그럼에도 한 번이라도 사랑을 해 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으리라. 사랑이란 자신을 내바치는 경험이라는 것을. 사랑은 순간을 영원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경험이다. "사랑의 행복은 시간의 영원을 품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p.64)" 

그렇기에 저자는 사랑을 재발명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나르시시즘이라는 질병을 넘어서 완전한 타자성으로 가는 길을 찾아야만 한다. 사랑이 불구가 되어버린 시대엔 더 이상 희망이 없을것이기 때문이다. 



https://larus3.tistory.com/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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