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좌파의 생각이 어떻게 상식이 되었는지를 연대기에 따라 서술하고 있다. 좌파의 이론은 우리의 일상에 무의식적으로 의식적으로 스며들어 '공통감각'을 형성한다. 예를 들어 과거엔 '젠더'라는 개념 자체가 모호했다. 하지만 오늘날엔 젠더라는 개념은 일상화 되어 있을 뿐아니라, 젠더에 무지한 사람은 사회에 무관심한 차별주의라고 생각되곤 한다.


소외, 자본주의의 모순, 인종차별, 가부장제, 성적 지향과 같은 것들이 모두 좌파의 생각이 우리 일상에 공통감각이 된 것들이다.


프롤로그 철학에 대한 지식 없이 철학하기

1장 혁명에 대해 말해보자
오늘날 우리는 왜, 어떤 식으로든 마르크스주의자일까?
그런데 왜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닐까?

2장 혁명까지 할 필요는 없다
종종걸음으로 이상향에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런데 오늘날 누가 과연 이상을 품고 있는가?

3장 그람시 씨가 기꺼이 헤게모니를 장악했다면……
지배자는 어떻게 지배하며,
억압받는 자의 뇌와 심장은 어떻게 투쟁에 이를까

4장 누가 비판적 비판을 하는가?
아도르노 씨는 항상 기분이 나빴다.
계몽과 진보를 둘러싼 갑론을박.

5장 나 자신으로부터의 반란, 그리고 성 혁명에 이르기까지
마르크스 씨는 소외되지 않는 인간을 원하지만,
“도대체 인간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마찬가지로 버틀러 씨가 과연 여성이 존재하는지
의심하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6장 인간은 식민화된 물건이 됐다
억압은 억압받는 사람들을 만들어낸다.
“완전히 하찮은 존재가 된 사람들은 절대로 말을 하지 못한다”라는 사실을 스피박 씨는 발견한다. 만약 말할 수 있게 된다면, 그들은 더 이상 하찮은 존재가 아닐 것이다.

7장 말은 곧 투쟁이다
푸코 씨는 권력을 탐구하다가 담론을 발견했다.
또는 그 반대이거나!

8장 서로 네트워크를 이루어라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떻게 구좌파를 해체하고
이론을 재조립했는가

에필로그 의문을 품으며 우리는 전진한다!

참고문헌






좌파 이론에 낯선 사람은 책의 목차가 상당히 난잡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처음에만 낯설 뿐 그리 복잡하지 않다. 

- 서구 마르크스 주의(안토니오 그람시, 루카치) 

- 구조주의 (레비스트로스, 소쉬르)

- 실존주의 (사르트르, 까뮈)

- 신좌익, 프랑크푸르트 학파(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

- 포스트 구조주의, 탈구조주의(데리다, 푸코, 들뢰즈, 주디스 버틀러, 라캉, 보드리야르)

- 포스트 모더니즘, 탈근대주의(데리다, 리오타르, 보드리야르)


19세기에 마르크스를 출발점으로 좌파운동이 시작되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을 통한 공산주의의 도래를 주장했지만  실제로 이뤄지지 않았고 마르크스주의는 실패로 돌아가는 듯 했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레닌과 스탈린에 의해 권위주의 극좌파가 들어서게 되었는데, 이 때 쯔음에 서구 유럽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수정하여 연구했던 그람시와 루카치가 있었다. 그람시는 헤게모니 작전을 통한 진지전을 통해 공산주의 혁명을 은밀히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존주의 자체가 좌파 이론은 아니지만 대표 주자였던 사르트르와 알베르 카뮈가 좌파적 이념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나 사르트르는 공산당원으로서 활동했다. 


구조주의는 195-60년대에 유행하게 되었는데 그 출발점은 소쉬르의 언어 분석이었다. 기표와 기의의 자의성을 통해 세계는 언어와 개념을 통해 표상된다는 생각을 발전시켜 사상가들은 세계의 보편적 구조에 대해서 탐구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어 언어가 실재(real)을 표상할 수 없다는 생각이 힘을 받으면서 탈구조주의가 힘을 받게 된게 되었다. 이 때 등장한 이론가들이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주디스 버틀러다. 미시 권력, 담론, 통치성에 대한 주제를 연구한 푸코 또한 해당된다.


이후, 탈구조주의에 영향을 받은 이론이 탈근대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모더니즘은 이성의 확실성을 전제로 실재(real)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언어의 표상이 자의적이고 담론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탈구조주의에 의해 타격을 받았고, 그로 인해 나온 사조가 포스트 모더니즘이다.


일반적으로 좌파는 변혁을 꿈꾸고, 의심하고, 세계를 뒤집으려 한다. 그들은 비판의 대가들이며 의심의 자식들이다. 좌파는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의심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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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시계 태엽 오렌지>는 추악한 인간의 모습을 제어하려는 정부의 시도를 그려내고 있다.  주인공 알렉스는 어려서부터 온갖 범죄를 저지르며 사회를 어지럽히는 인물이다. 결국 동료들과 강도를 저지르다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감옥에 투옥된다. 수감 중 우연히 알게된 정부의 비밀 실험에 지원하게 되는 데, 실험은 반사회적 행동을 저지를 수 없도록 인간을 개조 시키는 프로그램이었다. 일명 '루도비코 갱생 프로그램'이다.


알렉스의 눈을 고정시키고 일련의 영상들을 보여주는 실험자들. 뒤편에선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이 흘러나온다. 실험은 대성공하게 되고 알렉스는 더 이상 반사회적 범죄를 저지를 수 없게 된다. 알렉스는 여자를 보고 탐하려는 욕구는 존재하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다. 상대방을 공격할 수도 없다. 알렉스의 몸은 반 사회적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설정된다.


이 실험의 주도자인 장관은 알렉스의 모습을 보고 실험 결과에 대만족한다. 범죄를 없애고 말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내걸었던 장관은 이를 확장하려 한다. 하지만 여론의 뭇매를 맞게 되고 루드비코 갱생 프로그램을 철회하게 된다.


선악설


영화는 초반부부터 알렉스가 얼마나 못된 인간인지를 섬뜩하게 그려내고 있다. 범죄를 저질러도 반성하지 않는 싸이코패스 알렉스는 흔히 말하는 성악설의 전형적인 표본이다. 루드비코 갱생 프로그램을 통해 정부는 사회에 적합하지 않은 범죄자를 말 그래도 '갱생'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영화는 후반부에 알렉스에 대한 어떤 '불쌍함'을 그려내고 있는데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알렉스의 모습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결국 알렉스는 장관에게 루드비코 갱생 프로그램의 강제성과 부작용은 없다고 말하는 대신 다시 자신의 본성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장관에게 약속을 받는다. 자신의 악한 측면대로 살고 싶다는 이야기다. 인간이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인간이 아니다. 


과연 알렉스는 자신의 과오에 대해서 진정으로 반성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불분명하지만, 자신의 본성으로 다시 택하길 바란다는 점에서 자신의 과거 모습에 후회는 없는 듯 하다.


권력의 범위


정부는 어디까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 할 수 있는가? 현대 국가에서 쟁점이 되는 부분 중 하나는 헌법 상 보장된 기본권을 공권력이 어느정도 까지 침해할 수 있는지다. 알렉스와 같은 범죄자들이 다시 사회에 나와 범죄를 저지를 수 있기 때문에 국가 공권력이 이들이 다시는 범죄를 저지를 수 없도록 하는 '루드비코 갱생 프로그램'은 정당화 될 수 있을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공권력은 허용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왜냐면 인간을 모두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회공학적 접근은 반인륜적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바꿔서 우리의 일상으로 돌아와 보자. CCTV와 같은 촬영 장비들은 사회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더 이상 집을 제외하고 사생활을 지키는 것은 점점 더 어렵게 되어가고 있다. 도로 곳곳의 차량들은 블랙박스를 통해 촬영하고 있고 CCTV 예산 또한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우려를 표하긴 하지만 범죄를 막을 수 있다는 공익이 더 크기에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조두순


얼마 전, 조두순이 출소 했다. 나영이 사건의 주범인 조두순은 어린 아이를 성폭행해 장기를 훼손시켜 평생을 아프게 살아가도록 만들었다. 검사의 실수로 인해 형량이 대폭 줄어 조두순은 무기 징역이 아닌 12년 형을 받고 만기 출소했다. 국민들은 분노했다. 싸이코 패스 성향이 매우 높게 나왔던 조두순은 또 다시 범죄를 저지를 확률이 높았지만 결국 출소 했다. 


앞으로 몇 년이내 또 다른 희생자가 나올지도 모른자. 왜 국가는 이런 범죄자를 방치해야만 하는가? 이는 전적으로 영화 <시계 태엽 오렌지>의 딜레마와 연결된다. 


몇 명의 자유를 침해하는 대가로 공동체는 안전을 얻는다. 이는 정당화 될 수 있는가? 혹은 전국 곳곳에 CCTV를 설치함으로써 치안을 유지할 수 있다면 이는 정당화 될 수 있을까? 


정규분포


모든 인간은 평등하기에 선천적으로 싸이코패스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서 자유를 자의적으로 침해하는 것은 부당한 일것이다. 그 침해를 대가로 큰 공익을 얻을 수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이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떠올리게 하는데 공리주의를 대가로 개인의 존엄성을 해치는 것이 허용되냐는 사고실험과 맥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거진 모든 사회현상은 정규분포를 따른다. 양 극단에서 일어나는 이탈 행위들을 온전히 막을 수는 없다. 그러한 사회공학적 사고는 위험할 뿐더러 불가능하다. 때문에 조두순과 같은 흉악 범죄자들에 대한 완전 격리를 시도하더라도 곳곳에서 부작용은 터져나올 것이다. 권력의 남용 문제는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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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시점, 한국의 우파는 지리멸렬한 상황이다. 더 이상 우파는 민의를 대표하지 못할 것만 같다. 탄핵의 강은 길고도 길다. 청년층에게 우파는 혐오의 대상이다. 우파는 부패하고, 탐욕적이고, 이기적 집단이 되어 버렸다. 우파는 어떻게 다시 보수의 본질을 찾을 것인가? 우파는 어떻게 민심을 잡을 것인가?


여기 2011년에 출간된 좌파 비판서가 있다. 대표적인 보수 논객인 전원책 변호사가 집필한 책이다. 좌파를 비판하며 보수의 본질을 밝히고 있는 이 책은 여러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 

1부 누가 진실을 죽였는가
01 국가 : 애국심이란 남을 공격하거나 자신을 변명할 때 가장 유용하게 쓰이는 무기이다
02 쿠데타 : 비참하게도, 인간은 늘 '정의'를 바꿀 준비가 되어 있다
03 혁명 : 인류를 진보하게 한 수단은 폭력이다
04 자살 : 모든 자살은 '타살他殺'이다
05 칭찬 : 칭찬은 고래를 불구로 만든다
06 신앙 : 인간은 논증되는 사실들은 믿지 않고 논증이 불가능한 것들을 믿는다
07 진실 : 거짓은 동지를 만들지만, 진실은 적敵을 만든다
08 과학 :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대부분은 최종적인 해답을 구하지 못한 것들이다
09 중간 : 중간은 편한 곳이지만 아무 소득도 없는 곳이다


2부 마르크스의 개
10 계량화 : 타인의 심장을 냉혹하게 저울에 얹으면서도, 자신의 양심을 저울에 얹는 좌파는 없다
11 유행 : 인간은 자신의 영혼을 파는 데도 돈을 쓴다
12 동지 : 함께 우산을 쓰면 연인이 되지만, 함께 비를 맞으면 동지가 된다
13 관용 : 좌파의 관용이란 비아냥이거나 조소이며, 우파의 관용은 무관심이거나 체념이다
14 약속 : 맹세가 굳은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15 정직 : 배운 자들에 비해 못 배운 자들이 더 정직한 것은, 그들이 진실을 감추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16 대학 : 대개 대학이란, 교수들의 직장에 불과하다
17 지식인 : 지식인이란, 쇼 윈도우 안에서 팔리기를 기다리는 창녀와 같다. 자신이 팔리지 않았을 때 먼저 팔린 동료를 비웃는 것이 다를 뿐이다
18 상 : 권위 있는 상일수록, 업적이 아닌 명성에 주는 것이다. 그 명성이란 대개 선전으로 만들어진다


3부 인간은 짐승처럼 도덕적이지 않다
19 선전 : 선전이 요란할수록 선전에 넘어간 사람이 치러야 할 대가는 크다
20 공정 : 짐승은 약자를 죽이면서 웃지 않는다. 주린 배를 채우는 것 이상의 먹이를 탐하지도 않는다
21 평화 : 평화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불안한 시간'이다
22 경쟁 : 인간도 짐승처럼 먹이를 놓고 싸우지만, 짐승과 다른 점은 그 방식이 비겁하다는 것이다
23 자유 : 자유는 늘 권력의 편에 서 있다
24 양면성 : 인간과 짐승의 차이는, 인간은 흉포하지만 생존을 위해 선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비해, 짐승은 생존을 위해서만 흉포해진다는 점이다
25 편견 : 편견은, 별다른 이견異見을 내세울 수 없는 의견을 공격할 때 쓰는 말이다
26 양심 : 양심을 파는 자는 예외 없이 양심이 없는 자들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없는 것을 판다


책은 좌파 비판서라는 부제를 내걸고 있지만 반드시 그런것만은 아니다. 26가지 주제에서 주로 좌파 학자들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그 결론이 반드시 보수의 이념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며 좌파의 생각 자체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자유의 적


저자는 서문에서 자유의 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진실을 회피하고 정의를 파괴하는 자들은 자신의 야망을 채우기 위해 무엇이든 하는 정상배들과 권력에 부역하는 교수, 학자, 언론인, 법률가, 성직자들이다. 이 시대에 지식인으로 불리는 그들이 시민의 저이자 자유의 적이다(p11)"


좌파는 주로 평등이라는 이념아래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좌파와 진보는 동의어는 아니지만 맥을 같이 한다. 이들은 이론을 좋아하고 대중들의 힘을 믿는다. 하지만 좌파 지식인들은 선동가로서 활동할 뿐 양심이 없다. 특히 저자는 사르트르를 대표적인 자유의 적으로 간주하고 있다. 사르트르는 잘 알려진 대로 '실존은 본질에 선한다'라는 구호를 내걸었던 실존주의자인데, 공산주의를 지지했던 좌파였다. 그는 생전에 스탈린과 카스트로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훗날 스탈린이 수 백만명을 죽이고,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의 피비릿내나는 광기를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르트르는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희생이 공산주의 혁명이 도래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과정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진실을 외면한 자유의 적이다. 


기회주의자들


원칙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상황에 맞게 적당한 처세술을 부리는 정치인들 또한 자유의 적이다. 저자는 중도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개진하고 있는데 중도란 본디 이성의 쉼터이기 때문이다. 원칙도 없이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소신이 없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기회주의자에 불과하다. 


정직의 역설


정치인은 반드시 정직해야만 한다고 말하지만, 그런식으론 정책이 제대로 된 효과를 가질 수 없을 때가 많다. 왜냐하면 어떤 정책이건 손해를 보는 쪽이 존재하기 마련이며, 그들의 반발을 감추기 위해선 좋은 말로 포장해야 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유신 헌법에 동의하는 국민들은 90퍼센트가 넘었다. 어째서 대중은 독재에 힘을 실어줬는가. 무지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대중은 선동당하기 쉬우며 취약한 집단이다. 히틀러 또한 선출된 권력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대중의 의지는 민주주의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저자는 보수 논객 답게 대의 민주주의를 옹호하며 정치인의 부정직에 대해서 어느정도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정치인들이 대중을 속인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 아닌가? 하지만 저자는 그것은 역사가 판단해줄 일이라고 말한다. 정치인의 선의는 당대에는 알 수 없으며 먼 훗날 시간이 흘러 그것이 선의 였는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였는지 알수 있다는 것이다. 


선동하는 교수들

지식인 계층에는 진보적인 사람들이 많다. 많은 공부를 했기 때문에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을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또 현 시점 인문/사회 과학 분야에는 좌파적 교수들이 많은 파이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의 문제는 학생들을 좌파적 이념으로 물들인다는 점이다. 대학은 스스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힘들 길러주는 곳이다. 하지만 좌파적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주입시키고 물들인다. 스스로 좌파적 이념을 선택한 사람은 빠져나오는 것도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선동당한 이는 자신이 선동당한지도 모르게 된다. 때문에 빠져나올 수도 없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안타깝게 생각한다. 누구나 20대에는 휴머니즘을 가질 수 있다. 다만, 이것은 전적으로 스스로 선택한 것이어야만 한다. 청춘들을 선동하는 대학 교수들은 자유의 적이다. 


신기하게도, 저자는 진보적이지 않은 20대에게 희망을 걸수 없다고 말한다. 인상적인데 달리 말하면 보수적인 20대에게는 희망을 걸수 없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젊은 한때는 누구나 휴머니스트가 된다. 휴머니즘은 청춘의 특권이다. 그리고 젊은 세대가 변화를 구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 또한 청춘의 특질이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진보적이지 않은' 20대에 희망을 걸 수는 없다. (p.276)"


새로운 새 시대를 열어갈 특권은 청춘에게 있다. 다만, 그 길은 스스로 택해야 한다. 누군가에게 주입된 사상의 틀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청춘이 아닌 스스로 진보를 택한 청춘만이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다. 


사회공학 비판

1948년 이후 헌법 전문 중 "각기의 기회의 균등"이라는 구절은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누구나 성실하게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는 사회는 헌법과 대한민국이 일관되게 추구해오던 가치였다. 한 마디로 공정의 실현이다.


어떤 정치인들은 혈연, 지연, 학연이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사회공학적 사고는 전체주의를 내포하고 있을 뿐아니라 위험한 생각이다. 모두가 개인이 되고 연결과 접점이 없는 사회는 불가능하다. 다만 그러한 사회적 자본이 고착화 되는 것을 막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며, 전반적으로는 국민의 '민도' 문제다.


르상티망 그리고 도덕성


어떤 사람이 돈, 명예, 명성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이 진심으로 그런 말을 주장하고 있는지 의심을 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물질적인 요소는 중요하며 사람이 사람답게 살게 만드는 기본적인 요인이다. 때문에 사회에서 인정받는 지위와 부를 부정하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니체에 따르면 르상티망이다. 진보주의자들은 스스로를 도덕적이라고 포장하며 정의와 평등을 내세우지만 대다수는 위선적인 사람들이 많다.


사람은 누구나 양면적이며 완전무결한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인사청문회에 나와 검증받는 정치인들이 가지는 이중성에 실망을 하곤 한다. 하지만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은 사회에서 성공하기 힘들다. 성공한 사람들은 어느정도 양심을 거스르고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투쟁한 사람들이다. 괴테는 모든 행동하는 사람들은 양심을 거스르는 자라고 말했다. 


스스로를 도덕적이라고 포장하는 사람들도 문제이지만, 정치인들에게 매우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강요하는 것도 문제다. 그렇게 된다면 능력있는 사람들은 고위 공무직에 나서려고 하지 않을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저자 전원책은 고위공직자에게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했는지, 돈에 있어서 깨끗한지 여부만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해 가장 추악한 자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공직을 희망한다면 젊은 시절부터 자신을 관리하라고 충고하는 자들이 있다. 청문히에서 '추함'이 드러나지 않은 자는 과연 선하거나, 깨끗한 현자인가? 나는 다시 말하겠다. 미래에 맡을지도 모를 공직을 목표로 자신을 관리하는 자야말로, 가장 추악한 자이다.(p408)"



저자는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상태를 잘 알고 있고 솔직하게 글을 적어냈다. 보수의 중심엔 '도덕성'이 있다는 말처럼 전원책은 내가 보기에 누구보다도 솔직하고 양심적이다. 자신을 포장하고 자신이 정의롭다고 내세우지 않는다. 하지만 텍스트에서 묻어나는 솔직함은 그 누구보다도 양심적이며 매력적이다. 


보수의 두 대통령이 현재 감옥에 가 있는 상황에서, 보수의 이미지는 더 이상 도덕적이지 않다. 기득권을 옹호하는 부자 정당이며, 탐욕적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보수가 다시 일어나기 위해선 스스로 엄격해져야 한다. 양심적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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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4월 30일. 히틀러가 자살했다. 2차 세계 대전이 독일의 패망으로 기정 확실시 된 시점에서 히틀러는 연합군에 의해 체포되는 자신의 상황을 인정할 수 없었다. 생존보다 명예를 선택한 히틀러였다. 영화 <다운 폴>은 2차 세계대전 마지막 며칠 간을 다루고 있다. 전선들이 계속해서 무너지고 베를린의 중심으로 파고드는 연합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독일군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국가 사회주의와 광기


영화 내내 히틀러를 비롯한 군인들은 절대 독일이 항복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차라리 항복 할 바에야 자살을 택하겠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들도 사람이기에 점점 포위해오는 소련군과 연합군의 모습을 보며 초연함을 잃는 모습은 인지부조화의 끝을 보여준다. 술을 흥청망청으로 마시며 극도의 불안을 잠재우는 장성들. 대중 선동의 일등 공신이었던 괴벨스는 큰 소리치며 절대 항복은 안된다고 소리친다. 몇몇 제 정신이 박힌 장교들은 항복과 함께 정치적 협상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듣는 사람은 없다. 수 천 수 만명의 군인들은 그 사이에도 죽어나가고 있었다. 수 천의 젊은 장교가 몰살 당했다고 보고 받은 히틀러는 황당무계한 말을 내놓는다. "젊은이들은 원래 그래야 하지 않나?"


영화 곳곳에서 광기는 발견된다. 국가 사회주의가 없는 독일에서 아이들을 키울 수 없다고 말하는 괴벨스의 아내가 대표적이다. 괴벨스와 그의 아내는 자신의 아이들을 수면제로 잠재운 후 신경계와 호흡계를 마비시키는 알약으로 죽이고 만다. 히틀러의 자살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태연하게 자신의 아이들을 죽이는 괴벨스의 아내였다.


식사 도중 수류탄을 몰래 터뜨려 아내와 자식들을 죽이는 군인 또한 광기로 점철되어 있었다. 독일 패망 이후 힘들게 살아가야 하는 아내와 자식들의 상황을 멋대로 판단한 군인은 다같이 자살을 택하자는 말도 없이 몰래 수류탄을 터뜨렸다. 


라이히, 에리히 프롬, 한나 아렌트

당시 독일 국민들의 심리에 대한 분석은 이미 여러 각도에서 이뤄졌다. 대표적으로 라이히, 에리히 프롬, 한나 아렌트가 있다. 라이히는 <대중 심리와 파시즘>이라는 책을 통해 프로이트적 관점에서 파시즘을 분석했다. 우수한 혈통을 이어가는 아리안 족이라는 신화 속에서 이뤄지는 성 억압이 수동적 국민을 양산시키는 메커니즘으로 작동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독일 국민들은 아리안 족의 우월성을 토대로 독일 제국의 정당성을 전적으로 믿게 된다. 또한 약한 인간들은 죽어도 되며 유대인들은 혐오의 대상이다. 영화 속 전쟁에 불필요한 환자들을 몰살 시키고, 노인들에게 식량도 주지 않은 채 가둬두는 장면은 이러한 독일 국민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10살 남짓된 꼬마는 히틀러의 칭찬을 받고 전쟁에 나가 더 많은 연합군들을 죽이겠노라고 결심한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통해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권력과 국가에 자유를 내줬다고 주장한 에리히 프롬의 분석 또한 영화 곳곳에서 포착된다. 히틀러에게 선물받은 독약을 성스럽게 여기며 독일 제국의 항복을 볼 바에 자살을 택하고, 수적 열세에 반드시 죽게 될거라는 자신의 운명을 알더라도 총을 들고 명예롭게 죽겠다는 군인들은 모두 자유를 국가에 헌납한 사람들이다. 

동시에 영화 초반 히틀러의 비서일을 하며 나치에 공헌했던 여성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장면은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말했던 악의 평범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녀는 국가 원수인 히틀러의 곁에서 일한다는 자긍심을 가졌지만, 먼 훗날 자신의 일이 홀로코스트에 봉사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났을 때 자신의 무지함을 이유로 자신의 잘못이 정당화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의 투쟁


히틀러의 자서전인 <나의 투쟁>에는 히틀러의 국가 사회주의에 대한 확신이 담겨있다. 유대인에 대한 분노와 독일인의 우월성을 믿었던 히틀러는 전 세계에 독일의 위대함을 똑똑히 보여주려 했다. 그리고 자살하기 전까지도 이십여년간 국가 사회주의에 대한 자신의 확신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보이고 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모습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독일 제국을 위해서라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치하에 사람들은 그저 부품에 불과했다.


나치는 사라졌는가?


광기가 일상화되는 나치는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사라졌지만, 정말로 사라졌는지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 자유를 헌납하고 공동체에 자신을 투영시키는 사고는 오늘날에도 살아있다.


정당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로 나타나는 속칭 '문빠'들과 탄핵을 부정하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향수로 나타나는 태극기 부대들이 대표적이다. 사유가 사라지고 자유를 헌납하고 살아갈 때 나치는 부활한다. 히틀러는 선출된 권력이었다. 정당성을 앞세우며 사법과 입법 모두를 장악했던 국가사회주의당은 결국 6천만명이라는 사상자를 대참사를 가져온 시발점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아직 기회가 있다. 전체주의라는 유령이 다시 부활하기를 노리지만 우리가 자유를 쟁취하려는 노력과 사유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 유령은 쉽게 부활하지 못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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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힐러리가 손 쉽게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할 거라는 모두의 예견을 뒤집고 트럼프가 당선되었다. 이로 인해 지난 몇 년간 전 세계는 많이 달라졌는데 트럼프가 추구하는 우파적 포퓰리즘은 중국과의 신냉전을 촉발 시켰고, 세계 경찰로서의 미국의 지위는 사라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미국인들은 이런 포퓰리스트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게 된걸까? 아니, 선거 내내 압도적인 언론의 도움과 초기 미국인들의 강력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힐러리는 지게 된걸까?


정치적 올바름


영어로는 ‘Political Correctness’이다. 일반적인 선의 관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예를 들어 인종차별은 나쁜 것이다. 남녀차별은 나쁜 것이다. 소수자에 대한 억압은 나쁜 것이다. 이런 류의 올바름은 직관적으로 올바르게 느껴질뿐더러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문명인들이라면 대부분은 동의할 수 밖에 없는 내용이다.


이런 정치적 올바름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유토피아적이기 때문에 현실성이 결여되어있으며 공격의 무기로 사용되고, 또 사익의 수단으로도 사용되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와 같은 과거의 잘못은 끝없이 파해쳐진다. 왜냐하면 그 현상들은 반성되어야만 하는 사실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정치적 올바름 문제를 가져오면 위안부 문제와 비슷하다.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일본과의 갈등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매번 정치권에서는 선거철이 되면 반일 운동을 벌인다. 이것이 과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런것인지, 아니면 선거 표를 얻기 위해 선동하는 것인지 불명확하다.


프랑크 푸르트 학파, 포스트 모더니즘


마르크스를 추종하던 자들은 20세기에도 내내 있었다. 안토니오 그람시와 루카치와 같은 서구 마르크스주의자 후에 프랑크 푸르트 학파가 있었다. 잘 알려진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벤야민, 마르쿠제, 하버마스가 이곳 소속이다. 이들은 서구 문명을 억압의 역사로 보았던 마르크스의 사상을 변형시켜 문화적 요인에 억압이 내재화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이 대표적이다.


이들의 사상은 20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68혁명에 큰 영향을 끼쳤다.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라는 구호를 내걸며 사회 곳곳에 숨겨진 권력 관계를 무너뜨리려는 시도였다.


그리고 이 때 쯔음, 구조주의에 반기를 들며 정해진 중심과 도식은 없다고 주장하는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이 등장했다. 이들 또한 기존의 권력관계를 허물고 새로운 모습을 만들려 시도했다.


우리는 상대주의와 PC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좌익들의 이론들은 청년 세대들을 매혹시켰고, 상대주의와 정치적 올바름을 내재화한 사람들이 정치권에 진출하자 많은 것이 달라졌다. 남녀, 노동, 난민, 인종, 제 3세계와 같은 문제들은 급격히 왼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결과의 평등을 추구하는 좌익들의 정치적 시도는 군중들의 표를 얻어냈다.


이들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좌파적 이념들을 몸 속에 내재화 하게 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가치는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일 뿐이다. 백인 남성으로 태어난 아니는 선천적으로 억압 구조의 계승자이다.


허무주의라는 유령


저자 홍지수는 상대주의와 다문화 주의가 가져오는 문제점을 약 반페이지에 걸쳐 기술하는데 압권이다. 인상적이기에 그대로 옮긴다.


“… 그러나 모든 가치체계와 사회적 구조에는 현명한 군주와 폭군이라는 양면이 존재한다. 그런데 데리다는 가치체계에는 오직 폭군적인 요소만 있다고 보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가치체계는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삶에서 나아가야 할 방향이나 추구해야 할 목표가 없으면 아무 것도 다른 것에 우선하지 않으므로 삶은 무의미해진다. 고통은 인생에 내재되어 있고 벗어날 방법도 없는 인간의 숙명이다. 이에 맞서려면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방법 밖에 없다. 문제는 개인이 목표 지향적인 가치구조 안에서 노력을 해야 하기 때문에 제약을 받게 되고 자신의 일부를 억누르고 다른 사람들 일부를 배제하게 된다. 가치체계의 배타성과 다른 사람들을 그 체계에 포용하려는 욕구 사이에는 끊임없는 긴장관계가 존재한다. 그런데 가치체계를 파괴해버리면 달성하려고 노력해야할 목표도 없고 삶은 무의미해지므로 모든 것이 밋밋하고 무감각해지고 오로지 고통만 남게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에는 바로 이러한 깊은 허무주의가 내재되어 있다.(p56)”


세계에 내던져진 인간이라는 존재는 방향을 정하지 못하면 살지 못한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은 정의라는 명목하에 모든 것을 해체하고 있으니 허무주의가 기승을 부릴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비판이란 인류의 진보를 가능하게 만드는 인간 이성이 아니던가? 허무주의로 인해 삶이 망가지더라도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인류의 고귀한 목표가 아닌가? 하지만 이런 사회 철학과 정치 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개인에게 요구하는 바는 추상적일뿐더러 개인의 심성이란 복잡해서 왠만한 인격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경지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그런 탓에 이런 사회 철학은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악용될 수 있는 여지 또한 존재한다.


세뇌되는 청년들 그리고 이슬람


앞서 말했듯 좌파에 장악당한 문화, 교육, 예술계는 청년들을 PC로 물들인다. 좌파적 이념은 통념이 되었다.(이것에 사람들이 동의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연유로 페미니즘과 다문화주의가 득세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직관에 의지한 채 논리와 현실성을 무시하는 직관 이성의 횡포는 우리 시대를 괴롭히고 있다. 


그 어떤 종교보다도 여성 혐오적이고 배타적인 이슬람은 상대주의와 다문화주의라는 이름 하에 서구 사회에서 보호의 대상이 되고 있다. 누구보다 난민을 받아드렸던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은 지금 고통 받고 있다. 이슬람들이 자기들만의 커뮤니티를 만들며 국가의 일원이 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꽁짜 복지혜택만을 누리며 각종 범죄를 누리고 있다. 강간, 살인과 같은 흉악 범죄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주로 이슬람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언론에 보도되지 않고 있다. 좌파적 이념에 물들은 언론은 사회를 정화시키는 커녕 더욱 어지럽히고 있다. 


좌경화된 언론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힐러리를 치켜세우고 트럼프에 대한 악의적인 보도를 하는 언론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미국의 언론 지형은 좌경화 되었기에 트럼프에 대해 악의적으로 누락하고 왜곡하는 기사들이 많았다.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가짜 보도들이 트럼프를 당선시키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PC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 때문이었다. 


PC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날린 미국 국민들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는 좌우 진영 정치계, 재계, 언론계, 연예계 등 기득권층 전체의 위선과 이중성에 넌더리가 난 국민들이, 그들의 숭고한 포용적, 인도주의적 정책, 국경 없는 유토피아 정책에 우려를 표하자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매도당한 국민들이, 그들의 비현실적인 이상주의가 초래한 후유증을 겪고 뒷감당을 해야 하는 국민들이, 이슬람 앞에 앞 다퉈 무릎을 꿇고 서구 문명의 가치와 피 흘려 얻은 자유를 헌신짝처럼 던져버리는 서구진영의 모든 기득권세력에게 보란 듯이 하늘을 향해 찌른 커다란 가운데 손가락이라고 본다. '엿 먹어, PC도(Fuck you, fuck PC too)'라고"(p.493)


인간은 누구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고 그런 측면엔 선악의 판단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그리고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매 순간 희생하고 관용의 정신을 베풀수도 없다. 우리 시대의 병 중의 하나인 위선이 폐혜가 서구에서 이미 드러났다. 한국에서도 PC의 폐해가 조만간 선거를 통해 드러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한국의 PC도 어느정도 책임감있는 제도와 정책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한국 또한 PC 테제가 급격히 유입되고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 좌파와 우파는 새의 날개와 비슷하다고 한다. 한 쪽만 득세해서는 새가 잘 날아갈 수 없다. 오른쪽으로 기울었던 과거의 한국 정치 지형은 대통령 탄핵을 기점으로 급속도로 왼쪽으로 기울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좌파 진영이 너무 PC 테제에 매몰 되는 순간 미국과 비슷하게 우파 포퓰리스트에게 표심이 갈 수 있을 듯 하다. 




*참고

유튜브에서 정치적 올바름에 과도할 때 벌어지는 일을 풍자하는 영상이 있어 링크를 건다.

www.youtube.com/watch?v=SDQ8CVZ51fM




https://larus3.tistory.com/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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