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호퍼의 1951년 작 <맹신자들>이다. 이 책은 대중 운동의 본질을 125개의 단상을 통해서 분석하고 있는데, 2차 세계 대전 이 전까지 일어났던 광기의 대중 운동을 적나라하게 파헤쳤다는 호평을 받았다. 1983년 에릭 호퍼가 사망한 이후,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호퍼에게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했다.
대의 민주주의가 위기를 받고 있다는 사람들의 평가가 힘을 받고 있다. 정치인들은 민의를 대표하지 못하고 정당은 당파적 이익만을 위해 움직인다는 생각은 통념이 되어 버렸다. 때문에 국민들은 직접 광장에 나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광화문은 언제나 떠들석하다. 사람들은 집회를 열고 투쟁한다.
한국을 움직인 건 언제나 대중운동이었다. 2002년 미순이 사건, 2009년 광우병 소고기 집회, 2016년 대통령 하야 집회. 언제나 한국의 중심엔 광화문이 있었고 촛불이 있었다. 이는 긍정적으로 국민의 주권을 바로 세우는 데도 일조하지만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존재한다. 대중 운동의 주체는 어리숙하고 선동당하기 쉽기 때문이다. <맹신자들>은 대중운동이 어떠한 메커니즘을 통해서 발생되는지에 대해서 분석하고 있다.
이 책은 대중운동이 나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 개혁, 청교도 개혁, 미국 남북 전쟁, 나치즘, 러시아 혁명, 시오니즘, 인도 독립 운동 모두 대중 운동의 일환이었다. 링컨과 간디는 대중 운동의 지도자였으며 그 운동의 목적이 실현되었을 때 자발적으로 대중 운동의 열기를 가라앉혔다. 하지만 문제는 스탈린과 히틀러같은 지도자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대중을 선동하는 사람들로 인해 대중 운동은 사회를 파괴시키게 된다.
맹신자들의 심리 상태
저자는 맹신자들의 심리 상태를 단 몇 줄로 완벽하게 표현해낸다. "그들의 가장 깊숙한 열망은 어떤 숭고한 대의와 자신을 일치시킨으로써 새로운 삶-갱생-을 사는 것이며, 혹은 이것에 실패하더라도 자부심, 자신감, 희망, 목적의식,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는 의식 등 새로운 본령을 획득할 기회를 좇는다. ·· (중략) 좌절한 사람들에게 대중운동은 자기의 삶을 통째로 대체하는 무언가, 혹은 삶을 견딜 만하게 만들어주는, 그러나 자시 혼자 힘으로는 이끌어 낼 수 없는 무언가가 된다(p30)"
우리 모두는 조금 힘들다. 하지만 그럼에도 삶이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혹은 살아야 하는 이유가 존재하거나, 죽을 용기가 나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살아간다. 맹신자들은 우리보다 삶에 희망을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일 확률이 높다. 더 이상 자신의 인생은 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신으로부터 회피하려는 심리가 맹신자들 심리 깊은 곳에 내재되어 있다. 그들은 '대의'를 위해선 자신의 목숨을 바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숭고한 대의가 없다면 자신이 붕괴될 것임을 알기에, 자신은 그 대의를 위해서 모든 것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한다. "숭고한 의무를 제거하면 보잘것없고 의미 없는 삶이 되고 만다.(p.33)"
사회의 불평분자들
맹신자들이 될 가능성이 높은 몇몇 범주들이 존재한다. 1. 빈민 2. 부적응자 3. 부랑자 4. 소수자 5. 청소년 6. 야심가 7. 강박을 가지고 있는 자 8. 무능한 사람들 9. 과도한 이기주의자 10. 이기주의자 11. 죄인들 로 저자는 구분하고 있다. 사회에서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은 현재를 비하한다. 더 아름다운 미래가 도래할 거라는 생각 속에서 현재를 파괴하려고 한다. 어차피 그들에겐 현재란 아무런 소득도 없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재에 만족하는 사람들을 혐오한다.
돈, 명예를 가지지 못해서 사회를 파괴시키려는 맹신자들 또한 위험하지만, 무엇보다 위험한 존재는 자신이 비창조적이라는 걸 깨달은 야심가들이다. 히틀러는 예술과 건축에 빠졌었고 자신이 소질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깨닫고 창조력의 한계를 깨닫자 사회를 혐오하게 되었다. 히틀러의 국가 사회주의 주창은 전적으로 패배한 야심가의 잘못된 분노다. "그는 자신의 삶은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고 이 세계는 영원히 어그러졌다고 여긴다. 그는 혼돈 속에서 비로소 안온하다(p.211)"
대중운동의 주도자들
대중운동을 활발하게 만들어내는 자들이 존재한다. 앞서 말했듯 긍정적인 의미에서 대중운동을 이끌어 낼 수도 있지만 이를 악용할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이들은 좌절한 사람들의 심리 고유의 경향과 대응 방식을 대중들에게 주입시키려 한다. 왜냐하면 맹신자들은 주로 좌절한 사람들이 반응하는 과정에서 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희망을 가지지 못하고 패배하고 삶에 지루함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숭고한 대의'를 주입시켜라! 불가능한 목표를 가져다 주면 줄수록 그들은 광신도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대의를 위해서 움직이는 '기계'가 된다.
대중운동의 전략가들은 대중들에게서 '개인'을 사라지게 만든다. 그들은 오직 집단의 일원으로서만 존재해야 한다. '영구 불멸의 위대한 가치'의 낱알이 되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수구주의자, 급진주의자
이들은 사회를 파괴하려 한다. 자유주의자, 회의주의자, 보수주의자는 미래에 모든 것을 걸지 않고 현재를 지켜야할 것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수주, 급진주의자들은 현재를 파괴하고, 전자는 과거로 회귀하기를 바라며 후자는 유토피아를 꿈꾼다. 때문에 현재는 사라져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결코 만족할 줄을 모른다. 다른 미래가 오더라도 맹신자들 대부분이 사회에 적응할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테러리스트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자신의 목숨을 버려가며 테러를 일으킨다. 숭고한 대의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이들은 전형적으로 수구주의자의 심리 상태이며 현재를 파괴시켜가며 과거가 지속되기를 바란다. 이슬람의 교리가 위협받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9.11 테러와 같은 대형 범죄를 통해 발생되는 수 많은 희생자들은 이들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호모 코레아니쿠스
www.youtube.com/watch?v=Ht_tj8etLlo
에릭 호퍼는 책의 마지막에 '맹신자들'의 양면성에 대해서 설명한다. 기독교가 발명될 수 있었던 이유는 광신주의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인류는 영원히 회복될 수 없는 영혼의 질병을 얻었으니 아이러니한 상황이란 것이다. 맹신자들은 사회를 진보시키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그 만큼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진중권 교수는 한국인의 특성 중 하나로 '동질감'을 꼽고 있다. 반만년의 단일 민족으로서 단일 언어를 쓰고 있는 한국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동질성이 강하다. 한 곳에서 문제가 터져나오면 한국인 전체가 그 문제에 대해 울분을 토하는 경우가 많다. 그 만큼 한국인들은 대중 운동 또한 활발히 이루어진다. 때문에 한국인들은 선동에 취약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선택을 할 가능성도 높다. 동시에 사회를 변혁시키는 힘 또한 다른 국가에 비해서 강하다. 대중운동의 부정적인 측면이 아닌 긍정적인 측면을 활용하는 것은 전적으로 한국인의 몫이다. 동시 사회 지도자의 윤리가 요구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수요 집회
작년, 위안부 할머니들이 수요 집회에 나서지 않겠다고 기자회견을 했다. 시민단체가 자신들을 이용한다는 이유에서 였다. 윤미향을 비롯한 시민단체 일원들은 전적으로 그런일이 없으며 할머니들의 착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수요집회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한다고 야당과 기자들을 비판했다. 수요 집회는 인권을 유린한 일본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는 신성한 집회라는 이유에서 였다.
이 사건에 <맹신자들>의 고찰이 정확히 부합하고 있다. 이들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와 인권 유린 회복이라는 대의를 위해서 매주 수요 집회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건 자신들의 행동은 숭고한 행위라는 것이다. 자신들을 비판하는 것은 정치적 음모라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선'은 좋은 명분을 위해서 존재한다. 하지만 동시에 생각해보야 할 점은 이러한 대중 운동을 통해 '이득'을 얻는 몇몇 선동꾼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마 이러한 집회가 숭고한 목표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순진무구하게 믿는 사람들은 젊은 청년들일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맹신자들이 된지도 모른 채 맹신자들이 되고 만 것이다.
호밀밭의 파수꾼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에 나오는 다음 대목이 맹신자들의 심리 상태를 아주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앤톨리니 선생님이 방황하고 있는 10대 홀든에게 어떤 글귀를 소개해주는 장면이다.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어떤 이유를 위해 고귀하게 죽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동일한 상황에서 묵묵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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