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이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말하는데 1-20대를 칭할때가 많다. 이팔청춘이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벚꽃이 활짝 피는 시기이며 개나리가 꽃피우는 봄은 전형적인 청춘을 상징한다.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시기라고 해서 가장 행복한 시기라는 건 아니다. 젊지만 미성숙하기에 청춘은 표류한다. 처음부터 자기가 가야할 길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지의 거장, 다치바나 다카시는 <청춘표류>를 통해 11명의 청춘의 모습을 보여준다. 칠기 장인, 나이프 제작, 원숭이 조련, 정육 기술자, 사진작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은 의도치 않았지만 인생의 결정적 순간에 후회없는 결정을 했고 청춘을 아름답게 가로질러 나가고 있다. 


책에 등장하는 11명의 공통점은 다치바나 다카시의 청춘관에 걸맞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지의 거장이라고 불리우는 다치바나 다카시는 청춘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부끄러움 없는 청춘, 실패 없는 청춘은 청춘이라 이름할 수 없다. 자신에게 대담한 삶을 꿈꿀수록 부끄러움도 실패도 많아지기 마련이다.(p.6)" 우리가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 청춘은 흘러가고 있다. 지나간 세월은 돌이킬 수 없다. "실패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그가 아무리 대담한 삶을 살았다고 해도 결국 무모하게 살았을 뿐이다. 실패의 가능성을 침착하게 바라보면서 대담하게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청춘을 제대로 산 것이다.(p.6)

누군가 '너는 왜 청춘을 낭비하니? 열심히 좀 살아라' 라고 말하면 여간 눈꼴시리지 않을 수 없다. 누가 청춘을 정의할 수 있으며, 올바른 청춘에 대해서 조언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저자 다치바나 다카시는 똑바로 살라는 흔해 빠진 조언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저 이런 청춘들이 있었다고 말할 뿐이다. 저자는 자신 또한 부끄러운 인생을 살았으며 무모하고 변변치 못한 삶을 살았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도전하지 않고 안락한 현실만을 추구하는 청춘들에게 말한다. "하지만 어느날, 자신에게 또 다른 인생이 있지 않았을까 하며 도전과 가능성의 시기를 그냥 지나쳐왔음을 후회할 순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p.8)"


사이클 운동선수로 10대를 보내다 우연한 사고로 뇌 장애를 갖게 되는 바람에 절망감으로 살아가다 사이클 프레임 제작자가 된 사람에서 부터, 두 번의 병마로 인해 자살 충동 속에서 살아가다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꿈이었던 동물 사진가로서 활동하는 사람 등 이들 모두는 방황했고 좌절했지만 결국 자신의 꿈을 이뤄낸 사람들이다. 이들은 안락함만을 추구하지 않았고 자신의 인생을 건 게임에 임한 사람들이다. 

 수수께끼의 청춘시대


일본엔 고호 대사가 있다. 전설적인 문필가인데 그는 어려서 대학에서 낙제를 했었다. 낙심한 구카이(고호 대사)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된다. 홀로 산 속에서 10년 넘게 수련을 했는 데 정확히 구카이가 그 당시 무엇을 했는 지 알려진 것은 없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구카이는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가게 되는데 뛰어난 두각을 보여 유학승 중 최고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중국의 승려들을 제치고 유학생의 지위로 최고의 지식인으로서 중국에서 인정받은 것이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구카이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홀로 수련한 시간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시간은 일명 '수수께끼의 청춘시대'다. 책 <청춘표류>는 11명의 '수수께끼의 청춘시대'를 기록한 것이다. 누구나 청춘의 시기엔 표류하기 마련이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시기다. 그런 고뇌의 시기에 스스로를 연마하고 단련했을 때 시간이 흐르면 자신의 방향과 목표를 정할 수 있게 된다. 그 시기에 고민을 피하고 속절없이 보낸다면 결국 자신의 인생을 놓치는 꼴이 되어 버린다.


"청춘이란 언젠가는 찾아올 출범을 준비할 수 있는 수수께끼의 공백시대인 것이다. 그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언가를 '하려는 의지'이다. 그것이 없다면 '수수께끼의 공백시대'를 무기력하고 나태하게 보내게 되고, 결국은 당연한 귀결로서 출범을 맞이할 수 없다. 그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상황에 휩쓸려가는 인생 뿐이다. 무언가를 추구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고투하고 있을 여러분들에게, 언젠가는 훌륭한 출범할 날이 찾아올 것을 바라면서 이제는 펜을 놓고자 한다.(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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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은 누구나 한 번쯤은 봤을 영화 매트릭스에 영감을 준 책이다. 가상이 실재(real)가 되는 것. 이것이 책 <시뮬라시옹>을 한 마디로 압축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미지(image)라는 것은 실재를 모방한 것이다. 서양 철학의 시초인 플라톤은 이것을 이데아의 모방이며 진실을 얕게 가지고 있는것이라고 보았다. 구체적으로 현실 세계가 이미지이다. 그리고 이미지의 이미지는 예술 작품이다.


서양 철학의 역사는 '실재'를 탐구하는 것이다. 앞서 말한 플라톤은 이데아가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했고 아리스텔레스는 원인을 무한 소급했을 때 거슬러 올라가는 부동의 동자가 실재라고 주장했다. 칸트에 이르면 물자체라고 하여 실재는 알 수 없다는 주장에 이른다. 그러다 20세기 후반, 장보드리야르는 포스트-모더니스트(post-modernist)로서 활동하게 되는데 이는 간략하게 우리가 '매트릭스'안에 살 수 있는 확률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실재 자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확실한 회의론자라고 말하면 될까? 아니면 실재를 창조하는 자라고 하면 될까? 보드리야르는 우리가 만들어내는 가상현실과 이미지가 실재 자체를 만들어낸다고 주장하고 있다. 확실히 포스트 모너니즘을 대표하는 사상가 답다.


Matrix


영화 매트릭스의 배경은 기계가 인간 세계를 지배해버리는 바람에, 인간들은 기계들이 만들어 놓은 가상 세계 '매트릭스'안에 살게 되는 설정이다. 인간은 가공품처럼 만들어져 기계의 건전지로 활용된다. 인간은 에너지가 다 할 때까지 눈을 뜨지 못한 채 매트릭스라는 관념의 감옥에서 살아가게 된다. 인간은 매트릭스를 '실재'라고 생각하게 된다.


여기서 '생각하게 된다'라는 부분은 적합한 표현인가? 매트릭스 안에 살아가는 존재는 자신의 세계가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매트릭스 밖에 존재하는 기계들과 인간들은 알고 있다. 그것은 기계가 만들어낸 가공의 세계라는 걸.


우리 또한 가공의 세계에 살고 있다.


관람석에 앉아 영화 매트릭스를 보고 있으면 재미가 있다. 필름이 돌아가고 수많은 장면들이 쏟아진다. 스토리 또한 흥미롭다. 매트릭스에서 빠져나오려는 인간들의 투쟁을 그리는 스토리는 꽤나 섬뜩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와 별개의 문제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또한 매트릭스라면?


철학에 있어서 정해진 대답은 없다. 각자 자기만의 모험을 할 뿐이다. 우리가 관념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 철학적으로는 말이다. 때문에 우리는 동시에 가공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문화산업


매년 쏟아지는 어벤져스 영화를 보며 우리는 열광한다. 토르와 아이언맨을 비롯한 어벤져스가 타노스를 무찔렀을 때 우리는 얼마나 기뻤는가. 전 세계에서 몇 억명이 보는 이 영화는 우리를 가상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 보드리야르는 디즈니랜드를 통해서 가상의 세계가 실재를 형성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영화가 만들어내는 가상 세계는 전적으로 허구에 불과하지만, 우리는 종종 그 가상 세계가 현실인것 처럼 생각하곤 한다. 특히 어린 아이들이 해리포터의 마법 주문을 외치며 노는 걸 보고 있으면, 가상의 현실 침투력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음을 느끼곤 한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가 문화산업이다. 문화산업에 대한 비판은 사상가들에 의해 많이 파헤쳐 졌다. <계몽의 변증법>, <일차원적 인간>이 대표적이다.


장 보드리야르는 <시뮬라시옹>을 통해 가상이 실재가 되어버린 상황을 철학적으로 기술하고 있지만 이는 앞서 말한 것 처럼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가상의 이미지에 점철된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알게 모르게 수동적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탈출구


우리가 이런 시뮬라크르라는 허위와 가상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이 허구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매트릭스 안에 살던 네오가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모피어스가 이곳 세계가 허구임을 알려줘 깨달았기 때문이다. 모피어스라는 존재는 어떻게 매트릭스의 틈을 찾아냈는지는 의문이지만, 우리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가상의 것들이 점점 침투해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때문에 이러한 허무적 가치를 올바르게 응시하고 자신만의 가치를 세우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고 그 길은 이 시뮬라크르의 시대에서 벗어나 진실을 찾아낼 탈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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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봉기 (대중의 반역, 대중의 반란)
La rebelión de las masas (The Revolt of the Masses, 1930)

출처 : 위키백과


스페인은 철학이 발전하지 않는 유럽 국가 중 하나다. 프랑스나 독일에 비하면 말이다. 그런 스페인에 가장 유명한 철학 자 중 한명이 오르테가 이 가세트다. 또 오르테가의 작품 중 가장 많이 읽힌 저서는 <대중의 반역>이다. 한글로 읽으면 반역이라는 의미가 정확하지 않은거 같아서 영어로 한번 보자면 'The Revolt of the Masses'다. 


에릭 호퍼의 <맹신자들>에 이은 대중을 탐구하는 저서에 대한 포스팅이다. 대중은 오늘날에 긍정적인 의미로 생각되곤 한다. 왜냐하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의 주체라고 헌법에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권력은 선출된 권력이다. 때문에 대중들의 힘은 신성한것이라는 관념이 널리 퍼져있다. 하지만 동전엔 양면이 있듯 대중은 선동당하기 쉽다. 악의적인 지도자에 의해 대중 운동은 사회를 파괴시키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으며, 대중의 지혜는 그리 믿을 만한게 못될때가 많다. 루소의 일반의지를 따라가다간 공동체가 이도 저도 아닌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 


오르테가는 <대중의 반역>을 통해 오늘날에 급속도로 사회 전반에 나타난 대중의 심리를 분석하면서, 사회가 올바르게  굴러가기 위해선 대중이 정치 엘리트에 복종하고 연대 책임을 져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다. "창조적인 삶이란 정력적인 삶이고 정력적인 삶이란 다음 둘 중의 한 상황에 있을 때만 가능하다. 곧 지배자이든지 아니면 지배의 전권을 인정받은 사람이 지배하는 세계에 살든지. 다시 말해서 지배하거나 복종하거나 둘 중 하나다. 여기서 복종한다는 것은 잠자코 지내는 것이 아니고 - 잠자코 지낸다는 것은 비천한 것이다 - 그와는 반대로 지배자를 존중하고 그를 추종하며 그와 연대 책임을 지고 그의 깃발 아래 열정적으로 동참하는 것이다(p.199)"


대중의 등장


대중이 사회에 등장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만 해도 대중은 역사에서 존재감이 없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의 확대는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헌법을 통해 기술하고 법 앞에 평등을 지시함으로써 개인 모두가 똑같은 영향력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전적으로 인류 사회가 처음으로 직면하는 상황이다. 


모든 인간이 법률적으로 똑같다고 해서 정말로 똑같을까? 오르테가는 인간의 외양적 지위가 아닌 내부적 심리 상태를 통해 고귀한 인간을 찾아내려 노력하고 있다. 인간은 두 종류가 있는데 스스로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인간이 첫 번째고, 그저 살아가는 대로 살아가는 인간이 두번째다. 오르테가에게는 니체의 냄새가 난다. '인간이란 극복되어야 하는 그 어떤 것!'이라고 주장하며 생의 철학을 주창했던 니체와 같이 오르테가는 모든 인간이 똑같은 지위를 가지고 있지만 퇴폐적인 인간과 고귀한 인간은 구분되기 마련이라고 한다.


책이 쓰여진 시기는 1930년인데 이 당시는 파시즘과 나치즘이라는 씨앗이 꿈틀대는 시기였다. 한 마디로 대중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있는 동시에 대중들이 선동당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오르테가는 이러한 상황을 간파하고 <대중의 반역>을 통해 대중의 아이러니를 말하려 했다.


과도민주주의


고귀한 인간은 적고 우매한 대중들은 넘쳐난다. 후자의 인간들은 매 사에 참견하며 자신의 생각이 확실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상황에서 과도 민주주의라는 문제점이 발생한다. 정책이라는 것은 충분한 숙고를 통해서 발의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대중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숙고하지도 않은채 우발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우기기도 한다. 이러한 연유로 대중이 만들어내는 민주주의는 왜곡되기 쉬우며 과도한 참여로 국가 정책이 꼬꾸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물질적 상태는 나날이 좋아져 이제 모든 대중들은 과거 루이 15세 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물질적 풍요는 정신적인 허영심을 불러일으키고 과도한 참견을 낳는다. 다만, 이들이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다. 


데카당스와 공허한 대중들


이들의 정신 상태는 전적으로 혼란의 상태다. 산다는 것은 선택의 연속이고 책임을 지는 것이지만 대중은 책임지기를 회피한다. 단지 권리만을 주장할 뿐이다. 과거로부터 배울 것은 없다고 생각하며 전통을 무시한다. 자신의 물질적 풍요가 과거 세대의 산물이라는 것 또한 인정하지 않으며 감사하지 않는다. 전통을 무시하지만 그렇다고 뚜렷한 도덕 관념을 가지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정신적 혼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개성을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몰개성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오르테가는 삶에 대한 지침을 언급한다. 


"인간의 삶은 영광스런 것이든 소박한 것이든, 찬란한 운명이든 평범한 운명이든,
본질적으로 뭔가에 자신을 바쳐야 한다.
이것은 이상하긴 하지만 우리의 실존에 새겨진 피할 수 없는 조건이다.
삶이란 한편으로는 각 개인이 자신을 위해 그리고 자신 때문에 행하는 그 무엇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삶이 오직 내게만 중요하다고 해서 다른 것에 투신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긴장도 없고 '형태'도 없이 헐거워 진다(p195)"


"요즈음 수많은 인생들이 투신할 곳이 없이 자신만의 미로에 빠져
헤메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다.

(중략)

각자의 삶이 해방을 얻긴 했지만 자기 자신을 사일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공허한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뭔가를 채워야하기 때문에 내키는 대로 자기 자신을 위장하고 내면의 진실에서
나온것이 아닌 헛된 것에 몰두한다. 

(중략)

삶이란 뭔가를 향해 질주하는 것이며
목표를 향해 길을 가는 것이다.
목표는 내 길이 아니고 내 삶도 아니다.
그것은 내 삶을 제공해주는,
따라서 내 삶 밖의 저 멀리에 있는 그 무엇이다. 
내가 이기적으로 내 삶의 내부에서만 걷기로 한다면,
나는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그 어느 곳에도 이르지 못한다.
이것이 아무 곳으로도 인도하지 않는, 그 내부를 거닐다가 길을 잃게 만드는 미로다.(p156)"


지배자에 복종하라


오르테가는 이러한 인간의 실존적 어려움을 바탕으로 좋은 삶을 이끌어 낸다. 목표를 정하고 달려가면서 무언가를 위해 봉사했을 때 인생의 의미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원자화 된 개인은 대중으로서 살아가게 되면 명확한 목표도 없이 흐지부지하게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앞서 말했던 데카당스적 개인이다. 이런 상태는 사회를 어지럽게 만들고 스스로에게도 도움이 안되는 상태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철학에 대한 논의를 통해 개인은 지배자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지배자에 복종하지 않고 모든 개인이 원자화 되게 된다면 유럽은 덕과 영광을 모두 잃어야만 할 것이고 이는 모든 인간을 공허한 상태로 만들어 놓을것이기 때문이다. 대중은 지배자에게 복종함으로써 삶의 방향을 찾아나갈 수 있다. 하지만 무조건적 복종을 의미하는게 아니다. 연대하고 책임을 치는 동시적 참여를 하라고 오르테가는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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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인간을 호르몬을 통해 설명하려는 것에 불쾌감을 느낄 때가 많다. 세로토닌이니, 테스토스테론이니, 도파민이니.. 하는 전문가들의 말은 듣는이로 하여금 기계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은 정신병원에서 처방하는 약에 거부감을 느끼며 우울증과 같은 병에 걸려도 병원에 가지 않는다. 하지만 호르몬을 통한 인간의 심리 상태를 설명하는 의학은 점점 더 정교해지고 있고 정확해지고 있다. 점집에 가서 무당의 말을 믿느니 정신과 병원에 가는 것이 훨씬 낫다.


도파민


우리의 행동에 많은 영향을 주는 호르몬이 있다. 바로 '도파민'이다. 저자 대니얼 리버먼은 <도파민형 인간>을 통해 인간 행동의 대부분을 도파민을 통해 설명한다. 도파민은 미래 지향적인 녀석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욕망하는 이유는 '더 더 더!'를 외치는 이 녀석 때문이다. 근사한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는 상상, 좋은 대학에 가는 상상, 저녁에 맛있는 치킨을 먹을 상상은 모두 도파민을 활성화 시키고, 이 도파민은 우리가 그런 욕망을 끊임없이 추구하도록 만든다.


행동심리학의 대가 스키너가 했던 유명한 심리 실험이 있다. 비둘기에게 스위치를 누르면 먹이를 주는 것을 통해 학습을 시키는 실험이었는데, 보상의 강도를 어떻게 설정했을 때 비둘기가 가장 잘 학습했을까? 정답은 '랜덤으로' 주어졌을 때다. 먹이를 똑같이 주게 되면 쉽게 흥미를 잃어버리고, 점점 더 많이 주어도 마찬가지다. 한 번은 많이 줬다가 다음 번에는 조금 주고 그 다음에 갑자기 많이 주면 비둘기는 스위치에 빠르게 반응하게 된다.


이러한 배경에는 앞서 말했듯 도파민이 있다. 도파민은 미래에 올 것을 상상하며 분비되는 호르몬이기 때문에 쉽사리 예측할 수 있다면 그렇게 많이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알 수 없는 미래가 행복을 가져다 줄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도파민을 풍부하게 발생시킨다. 이런 연유로 우리는 스마트폰에 중독되고 게임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다. 핸드폰 속 메신저는 누가 어떤 답장을 할지 모른다. 때문에 우리는 수시로 메신저에 들어가 누구에게 답장이 왔는지 확인한다. 끝임없이 흘러오는 컴퓨터면 속 콘텐츠도 마찬가지다. 챔피언들이 마약을 복용에 경기에 참가하는 것도 승리에 대한 상상이 분비하는 도파민 때문이다.

노력과 삶의 희망은 도파민에서 나온다


이거 너무 도파민을 통해 세상 만사 설명하는 거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저자는 도파민이 없다면 삶의 희망도 생기지 않을것이며 노력도 하지 않게 된다고 말한다. 인간이 행동할 수 있는 이유는 상상하기 때문이고, 그 행동이 우리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도파민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인류가 진보할 수 있는 3대 욕구는 승리욕, 식욕, 성욕이다. 본질적인 욕구다. 도파민에 중독되어 있는 사람은 이 세 가지 욕구가 강하다. 도파민에 반응이 낮은 사람들은 자연스레 승리욕, 식욕, 성욕이 강하다. 주변에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일 중독인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도파민에 중독되어 있으며 자신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임무에 도파민을 느낀다.


그러나 도파민이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도파민에 중독되어 있는 사람은 행복할까? 그렇지 않다. 우리가 뷔페에 가서 끊임없이 음식을 먹는 것은 도파민 때문인데, 과식하고 나서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자명하다. 넘치는 양을 먹고 절제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이다. 너무 많이 먹어 몸에 무리가 오는 것 또한 당연하다.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승리욕이 강한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이들은 과연 행복할까? 이들은 도파민 중독이며 일 중독이다. 그들은 막상 무언가를 쟁취했을 때 그것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도 끊임없이 '더 더 더'를 외친다. 성욕에 굴복해 끊임없이 이성을 찾아 다니는 사람들도 막상 이성을 차지해 성관계를 맺었을 때 허무감을 느끼는 건 이때문이다.


욕망은 '애호'와 다르다.


애호는 좋아하고 선호하는 것이다. 우리가 잠자리에 누워 한 시간만 유튜브를 봐야겠다고 결심하지만 두 세시간을 훌쩍 넘어 사용할 때가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도파민에 굴복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죄책감에 사무치고 좋지 않는 감정을 느낀다. 마음 속으로 '절제했어야 했는데.'라고 후회한다. 결론적으로 욕망은 '애호'와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침대에서 밤 늦게 까지 유튜브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좋지 않은 행동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나 도파민에 굴복한 우리는 매일 밤마다 후회를 하게 된다.


도파민의 영향력 : 진보주의자 VS 보수주의자


추상적인 사고는 도파민을 발생한다. 때문에 평생동안 지식을 만들기 위해 시간을 보내는 학자들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추상적인 사고를 통해 도파민을 느끼게 된다. 이런 연유로 대학 뿐 아니라 IQ가 높은 사람들은 진보주의자일 가능성이 높다. 반면 전형적인 보수주의자들은 변화를 싫어하며 안정적인 것을 좋아하는데 도파민에 무던한 사람들이 많다. 이는 추상적 사고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해볼 수 있는데 그런 연유로 IQ는 진보주의자 보다 낮다. 실험적으로 나타난 사실이다.


도파민은 인류를 어디로 데려갈까?


그럼에도 도파민은 지금까지 인류를 진보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미개척지를 갈망하는 이유는 도파민 때문이다. 문명 이전 우월한 힘을 가진자가 도파민 중독으로 유전자를 널리 퍼뜨릴 수 있었기 때문에 우월한 인간들이 문명을 개척할 수 있었다. 도파민은 앞으로로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가상현실은 촉각과 미각을 자극시켜 도파민을 더욱 발생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이 뿐아니라 문명의 발전은 도파민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조화


도파민과 세로토닌에겐 조화가 필요하다. 미래를 먹고 사는 도파민을 추구하다간 거지 꼴을 면치 못한다. 도파민에 반응하지 않는다면 무감증에 걸릴지도 모른다. 저자는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비결 한 가지를 말해주는 데 그것은 취미다. 취미 중에서도 '현물'을 만들수 있는 취미다.


일반적으로 목수는 행복하다. 왜냐하면 머리속으로 상상한(도파민) 물건을 실제로(세로토닌)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도파민과 세로토닌의 적절한 조합은 우리를 행복과 충만함으로 이끌어준다. 그러니 저자는 악보를 그리고 음악을 만들든, 그림을 그리든 생산적인 일을 하기를 주문한다. 상상과 현실이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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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호퍼의 1951년 작 <맹신자들>이다. 이 책은 대중 운동의 본질을 125개의 단상을 통해서 분석하고 있는데, 2차 세계 대전 이 전까지 일어났던 광기의 대중 운동을 적나라하게 파헤쳤다는 호평을 받았다. 1983년 에릭 호퍼가 사망한 이후,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호퍼에게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했다.


대의 민주주의가 위기를 받고 있다는 사람들의 평가가 힘을 받고 있다. 정치인들은 민의를 대표하지 못하고 정당은 당파적 이익만을 위해 움직인다는 생각은 통념이 되어 버렸다. 때문에 국민들은 직접 광장에 나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광화문은 언제나 떠들석하다. 사람들은 집회를 열고 투쟁한다.

한국을 움직인 건 언제나 대중운동이었다. 2002년 미순이 사건, 2009년 광우병 소고기 집회, 2016년 대통령 하야 집회. 언제나 한국의 중심엔 광화문이 있었고 촛불이 있었다. 이는 긍정적으로 국민의 주권을 바로 세우는 데도 일조하지만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존재한다. 대중 운동의 주체는 어리숙하고 선동당하기 쉽기 때문이다. <맹신자들>은 대중운동이 어떠한 메커니즘을 통해서 발생되는지에 대해서 분석하고 있다.


이 책은 대중운동이 나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 개혁, 청교도 개혁, 미국 남북 전쟁, 나치즘, 러시아 혁명, 시오니즘, 인도 독립 운동 모두 대중 운동의 일환이었다. 링컨과 간디는 대중 운동의 지도자였으며 그 운동의 목적이 실현되었을 때 자발적으로 대중 운동의 열기를 가라앉혔다. 하지만 문제는 스탈린과 히틀러같은 지도자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대중을 선동하는 사람들로 인해 대중 운동은 사회를 파괴시키게 된다.


맹신자들의 심리 상태


저자는 맹신자들의 심리 상태를 단 몇 줄로 완벽하게 표현해낸다. "그들의 가장 깊숙한 열망은 어떤 숭고한 대의와 자신을 일치시킨으로써 새로운 삶-갱생-을 사는 것이며, 혹은 이것에 실패하더라도 자부심, 자신감, 희망, 목적의식,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는 의식 등 새로운 본령을 획득할 기회를 좇는다. ··  (중략) 좌절한 사람들에게 대중운동은 자기의 삶을 통째로 대체하는 무언가, 혹은 삶을 견딜 만하게 만들어주는, 그러나 자시 혼자 힘으로는 이끌어 낼 수 없는 무언가가 된다(p30)"


우리 모두는 조금 힘들다. 하지만 그럼에도 삶이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혹은 살아야 하는 이유가 존재하거나, 죽을 용기가 나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살아간다. 맹신자들은 우리보다 삶에 희망을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일 확률이 높다. 더 이상 자신의 인생은 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신으로부터 회피하려는 심리가 맹신자들 심리 깊은 곳에 내재되어 있다. 그들은 '대의'를 위해선 자신의 목숨을 바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숭고한 대의가 없다면 자신이 붕괴될 것임을 알기에, 자신은 그 대의를 위해서 모든 것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한다. "숭고한 의무를 제거하면 보잘것없고 의미 없는 삶이 되고 만다.(p.33)"


사회의 불평분자들


맹신자들이 될 가능성이 높은 몇몇 범주들이 존재한다. 1. 빈민 2. 부적응자 3. 부랑자 4. 소수자 5. 청소년 6. 야심가 7. 강박을 가지고 있는 자 8. 무능한 사람들 9. 과도한 이기주의자 10. 이기주의자 11. 죄인들 로 저자는 구분하고 있다. 사회에서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은 현재를 비하한다. 더 아름다운 미래가 도래할 거라는 생각 속에서 현재를 파괴하려고 한다. 어차피 그들에겐 현재란 아무런 소득도 없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재에 만족하는 사람들을 혐오한다. 


돈, 명예를 가지지 못해서 사회를 파괴시키려는 맹신자들 또한 위험하지만, 무엇보다 위험한 존재는 자신이 비창조적이라는 걸 깨달은 야심가들이다. 히틀러는 예술과 건축에 빠졌었고 자신이 소질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깨닫고 창조력의 한계를 깨닫자 사회를 혐오하게 되었다. 히틀러의 국가 사회주의 주창은 전적으로 패배한 야심가의 잘못된 분노다. "그는 자신의 삶은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고 이 세계는 영원히 어그러졌다고 여긴다. 그는 혼돈 속에서 비로소 안온하다(p.211)"


대중운동의 주도자들


대중운동을 활발하게 만들어내는 자들이 존재한다. 앞서 말했듯 긍정적인 의미에서 대중운동을 이끌어 낼 수도 있지만 이를 악용할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이들은 좌절한 사람들의 심리 고유의 경향과 대응 방식을 대중들에게 주입시키려 한다. 왜냐하면 맹신자들은 주로 좌절한 사람들이 반응하는 과정에서 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희망을 가지지 못하고 패배하고 삶에 지루함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숭고한 대의'를 주입시켜라! 불가능한 목표를 가져다 주면 줄수록 그들은 광신도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대의를 위해서 움직이는 '기계'가 된다.


대중운동의 전략가들은 대중들에게서 '개인'을 사라지게 만든다. 그들은 오직 집단의 일원으로서만 존재해야 한다. '영구 불멸의 위대한 가치'의 낱알이 되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수구주의자, 급진주의자


이들은 사회를 파괴하려 한다. 자유주의자, 회의주의자, 보수주의자는 미래에 모든 것을 걸지 않고 현재를 지켜야할 것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수주, 급진주의자들은 현재를 파괴하고, 전자는 과거로 회귀하기를 바라며 후자는 유토피아를 꿈꾼다. 때문에 현재는 사라져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결코 만족할 줄을 모른다. 다른 미래가 오더라도 맹신자들 대부분이 사회에 적응할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테러리스트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자신의 목숨을 버려가며 테러를 일으킨다. 숭고한 대의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이들은 전형적으로 수구주의자의 심리 상태이며 현재를 파괴시켜가며 과거가 지속되기를 바란다. 이슬람의 교리가 위협받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9.11 테러와 같은 대형 범죄를 통해 발생되는 수 많은 희생자들은 이들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호모 코레아니쿠스

www.youtube.com/watch?v=Ht_tj8etLlo


에릭 호퍼는 책의 마지막에 '맹신자들'의 양면성에 대해서 설명한다. 기독교가 발명될 수 있었던 이유는 광신주의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인류는 영원히 회복될 수 없는 영혼의 질병을 얻었으니 아이러니한 상황이란 것이다. 맹신자들은 사회를 진보시키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그 만큼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진중권 교수는 한국인의 특성 중 하나로 '동질감'을 꼽고 있다. 반만년의 단일 민족으로서 단일 언어를 쓰고 있는 한국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동질성이 강하다. 한 곳에서 문제가 터져나오면 한국인 전체가 그 문제에 대해 울분을 토하는 경우가 많다. 그 만큼 한국인들은 대중 운동 또한 활발히 이루어진다. 때문에 한국인들은 선동에 취약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선택을 할 가능성도 높다. 동시에 사회를 변혁시키는 힘 또한 다른 국가에 비해서 강하다. 대중운동의 부정적인 측면이 아닌 긍정적인 측면을 활용하는 것은 전적으로 한국인의 몫이다. 동시 사회 지도자의 윤리가 요구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수요 집회


작년, 위안부 할머니들이 수요 집회에 나서지 않겠다고 기자회견을 했다. 시민단체가 자신들을 이용한다는 이유에서 였다. 윤미향을 비롯한 시민단체 일원들은 전적으로 그런일이 없으며 할머니들의 착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수요집회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한다고 야당과 기자들을 비판했다. 수요 집회는 인권을 유린한 일본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는 신성한 집회라는 이유에서 였다.


이 사건에 <맹신자들>의 고찰이 정확히 부합하고 있다. 이들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와 인권 유린 회복이라는 대의를 위해서 매주 수요 집회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건 자신들의 행동은 숭고한 행위라는 것이다. 자신들을 비판하는 것은 정치적 음모라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선'은 좋은 명분을 위해서 존재한다. 하지만 동시에 생각해보야 할 점은 이러한 대중 운동을 통해 '이득'을 얻는 몇몇 선동꾼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마 이러한 집회가 숭고한 목표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순진무구하게 믿는 사람들은 젊은 청년들일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맹신자들이 된지도 모른 채 맹신자들이 되고 만 것이다.


호밀밭의 파수꾼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에 나오는 다음 대목이 맹신자들의 심리 상태를 아주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앤톨리니 선생님이 방황하고 있는 10대 홀든에게 어떤 글귀를 소개해주는 장면이다.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어떤 이유를 위해 고귀하게 죽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동일한 상황에서 묵묵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https://larus3.tistory.com/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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