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로 읽는 성서 3 - 인간의 아들 예수 편
미하엘 쾰마이어 지음, 송용구 옮김 / 현암사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IMG1@ ‘<성서>의 출발점은 천지창조이다. 성서는 천지창조 이야기로 시작한다. 고대인이 신화를 믿는 것만큼, 현대인은 물리학을 철썩 같이 믿는다. 현대인이 아무리 물리학을 믿어도 시공을 초월하는 첫 창조 행위를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은 매력적인 일임이 틀림없다.’

과학자들은 성경에 위배된 자연현상과 진화론을 증명해 냈다. 그들의 노력으로 인해 신은 정말 죽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아직도 종교적 기반으로 뭉친 세력들 간의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인간이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영원히 자신들이 믿는 신을 위해 싸울지도 모른다.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성서의 하느님은 굳이 평화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나의 어설픈 종교관은 어떠한가, 어린시절 친구 손에 이끌려, 교회와 성당에서 들었던 하느님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고 기억하고 있는가, 지금 생각해보니 설교자의 의도와는 달리 너무나도 자위적으로 해석하고 기억하고 있었다. ‘하느님은 절대자로 완벽한 자이다. 하느님은 세상만물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이 모든 걸 뜻대로 하실 수 있으며 모든 걸 정하신다.’ 여기까지는 별문제 없이 하느님을 이해 한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아 다음과 같은 오류가 생겨난다. ‘하느님은 선하고 정의롭고 모든 인간을 사랑한다. 그래서 세상을 옳게 이끄신다.’라는 가당치도 않은 정의를 만든 것이다.

절대자 하느님에 대해서 새롭게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소설로 읽는 성서’ 덕분이다. 이 책은 정통신학도 아니고 성서의 일부를 그리스, 이집트, 이스라엘 신화와 함께 근거로 삼았다. 다분히 작가의 주관적인 견해가 들어간 소설일 뿐이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 하느님에 대해서 비로소 알 수 있었다고 말한다면 또 다른 어설픔만 보이는 꼴이 된다. 그러니 내가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은 ‘절대자의 의미’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소설로 읽는 성서’는 모두 세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1권에는 천지창조에서 이집트에 정착한 요셉까지이고 2권은 모세의 탄생배경과 인간적인 고뇌와 죽음까지 보여주고 있다. 3권은 기록자 도마유다의 시선을 따라 예수와 이스카리오트 유다를 바라보는 1,2권과는 좀 다른 각도로 예수죽음을 그리고 있다.

절대자 하느님에 대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1,2권에서였다. 작가는 하느님을 그리스 신들처럼 인격화 하고 있다. 그래서 하느님은 자신의 창조물이 오직 당신만 사랑하길 바라는 질투의 신으로 끊임없이 인간을 시험한다. 아브라함에겐 사랑하는 아들을 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하고 노아와 모세에게 인내를 요구한다.

왜 하느님은 인간에게 시험에 들게 하고 구원하는가?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지에 대해선 몇 가지로 해명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느님은 완벽한 절대자이다. 선악의 구분은 인간의 것이다. 고통 또한 인간의 것이지, 하느님의 것이 아니다. 만약, 하느님이 인간이 고통 받는 것을 아파한다면 그것은 예방접종과 같은 것이다.
 
@IMG2@긴 역사 속에 인간을 지켜보는 하느님에게 고통은 단지, 다음을 살아내기 위한 따끔한 주사바늘과 같은 것. 순간의 고통 따위에 하느님의 의지를 방해 받을 필요가 없다. 고통은 인간 개개에게 이르렀을 때 크게 느껴지는 것뿐이다. 마치 인간이 무심코 걷는 발 아래서 개미집단이 고통 받듯이 말이다.

또, 정의라는 단어는 하느님께 사용한다는 것은 온당치 않다. 하느님은 정의로울 이유가 없다. 그래서 정의를 행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우직하고 성실한 카인을 버리시고 지혜로운 아벨을 사랑했다. 형의 장자권을 빼앗은 야곱을 방관하고 가까이 하셨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고 교만 하는 요셉을 선택하여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세웠다. 하느님은 오직 당신의 뜻대로 하신다. 교만, 약탈, 성실, 지혜 이 모든 것은 인간이 만든 언어의 허상이다. 모든 것, 위에 존재하는 하느님은 모르는 것들이다.

따라서 세상에 이루어진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정의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승리의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지지 않는, 믿는 곳에 승리를 안겨주는, 그 승리가 행복이나 안락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은 이름을 드높이기를 원한다. 하느님은 사랑하는 모세가 다른 이들의 아픔으로 괴로워 해도 이집트 왕을 이기기 위해 연거푸 재앙을 내린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현세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인간의 고통이나 목숨은 중요하지 않다. 실제로 모세에게 하느님은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자들을 모두 없애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노아에게 보인 대홍수를 아무 거리낌 없이 재현하려한 것이다. 

하느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 인간의 잣대에 휘둘릴 필요가 있겠는가, 말이다. 인간을 사랑한다하여 현세의 안락을 보장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의심스러운 것은 왜 하느님은 굳이 인간 앞에 나타나려 하시는가, 그리고 왜 갑자기  예수를 보내 인간을 구원하려 했을까,

1,2권에서 하느님이 굳이 정의로울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3권에서 예수의 맞이했다. 예수의 등장은 앞의 정의를 다시 혼란스럽게 했다. 예수는 선을 말했고 정의를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의로움의 본질에 다가서는 해안을 갖고 있었다. 예수는 이때까지 하느님과는 달리 성자에 가깝다. 하느님은 왜 예수를 성자로 만들어 십자가를 짊어지고 죽게 했을까?

하느님은 고정불변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라면 가능한 일이다. 하느님은 절대 권력을 갖고 있지만 사마엘, 루시퍼, 하와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또 지상의 인간과 교류하고 대화하기를 원한다. 그 결과로 하느님은 성자인 예수를 보낸 것이다. 인간의 변화에 하느님이 반응을 보인 사건이다. 하느님은 이제 인간에게 정의와 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어머니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나의 어머니는 즐겨 <성서>를 읽으셨는데, 특히 루터 판 <성서>를 애독하셨다. 물론 어머니는 ’신약성서‘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갖고 계셨다. ’구약성서‘는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은 언짢게 했기 때문이다. 나는 장난삼아 하느님의 잔혹함, 그분의 불공정함, 알다가도 모를 그분의 행동, 그분의 소심함, 그분의 성급함을 입증하는 구절들만 일부로 골라내서 어머니께 보여주기도 했다.
“‘구약성서’이야기를 읽다보면 사람들만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도 그렇게 성장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단다.”

작가의 어머니의 말이 정답은 아닐지라도 하느님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일 수는 있을 것 같다.
 
세상에서 제일 많이 읽히는 책이 성경책이라지만, 비 기독교이 성경을 읽기란 쉽지 않다. 성경책을 완독하지 못한 나는 그들의 맹목적인 믿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성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고 여긴 탓이다. 잠시, 소설로 나마 절대자의 힘을 느꼈고 그 힘 앞에 이성이란 얼마나 나약한가, 인간의 선악의 판단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힘은 기록을 통해 생기고 이어진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 같다. 하느님은 선택한자에게 승리를 안겨주고 기록을 남겼다. 우리가 하느님을 알 수 있는 것은 기록에 의해서이고 기록은 결국 하느님이 선택한 인간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구약성서>뿐만 아니라 역사는 언제나 승자에 의해 기록되었다. 하느님의 역사가 승자의 역사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따라서 하느님을 믿으면 승리자가 된다는 것은 정당한 귀납적 논증의 자료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객관적인 판단을 떠나 한 인간이 자신의지에 따라 뜻을 세워 승리를 이루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믿음이 필요하다. 성취하려는 것이 절대 신인 하느님의 뜻이라는 믿음은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이런 믿음은 선악을 분별하지 않아, 더욱 힘이 있고 그래서 위험하다. 구약성서에서 보여주는 하느님이 힘이 이러한 것이기에 경이로움과 두려움이 느껴진다.

그에 비해 예수는 성자와 같은 세련된 인격체로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다. 기록은 또 하나의 하느님을 모습을 현세화 시킨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어머니의 말을 빌어 성장하는 하느님을 만들었다. 작가의 말처럼 하느님도 인간과 더불어 성장한다면 지금쯤 다시 한번 예수의 탄생 같은 종교혁명을 꿈꿀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모든 종교가 하느님 앞에 화합하고 각자의 관습에 따라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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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읽는 성서 2 - 모세 편
미하엘 쾰마이어 지음, 송용구 옮김 / 현암사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IMG1@ ‘<성서>의 출발점은 천지창조이다. 성서는 천지창조 이야기로 시작한다. 고대인이 신화를 믿는 것만큼, 현대인은 물리학을 철썩 같이 믿는다. 현대인이 아무리 물리학을 믿어도 시공을 초월하는 첫 창조 행위를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은 매력적인 일임이 틀림없다.’

과학자들은 성경에 위배된 자연현상과 진화론을 증명해 냈다. 그들의 노력으로 인해 신은 정말 죽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아직도 종교적 기반으로 뭉친 세력들 간의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인간이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영원히 자신들이 믿는 신을 위해 싸울지도 모른다.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성서의 하느님은 굳이 평화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나의 어설픈 종교관은 어떠한가, 어린시절 친구 손에 이끌려, 교회와 성당에서 들었던 하느님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고 기억하고 있는가, 지금 생각해보니 설교자의 의도와는 달리 너무나도 자위적으로 해석하고 기억하고 있었다. ‘하느님은 절대자로 완벽한 자이다. 하느님은 세상만물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이 모든 걸 뜻대로 하실 수 있으며 모든 걸 정하신다.’ 여기까지는 별문제 없이 하느님을 이해 한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아 다음과 같은 오류가 생겨난다. ‘하느님은 선하고 정의롭고 모든 인간을 사랑한다. 그래서 세상을 옳게 이끄신다.’라는 가당치도 않은 정의를 만든 것이다.

절대자 하느님에 대해서 새롭게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소설로 읽는 성서’ 덕분이다. 이 책은 정통신학도 아니고 성서의 일부를 그리스, 이집트, 이스라엘 신화와 함께 근거로 삼았다. 다분히 작가의 주관적인 견해가 들어간 소설일 뿐이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 하느님에 대해서 비로소 알 수 있었다고 말한다면 또 다른 어설픔만 보이는 꼴이 된다. 그러니 내가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은 ‘절대자의 의미’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소설로 읽는 성서’는 모두 세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1권에는 천지창조에서 이집트에 정착한 요셉까지이고 2권은 모세의 탄생배경과 인간적인 고뇌와 죽음까지 보여주고 있다. 3권은 기록자 도마유다의 시선을 따라 예수와 이스카리오트 유다를 바라보는 1,2권과는 좀 다른 각도로 예수죽음을 그리고 있다.

절대자 하느님에 대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1,2권에서였다. 작가는 하느님을 그리스 신들처럼 인격화 하고 있다. 그래서 하느님은 자신의 창조물이 오직 당신만 사랑하길 바라는 질투의 신으로 끊임없이 인간을 시험한다. 아브라함에겐 사랑하는 아들을 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하고 노아와 모세에게 인내를 요구한다.

왜 하느님은 인간에게 시험에 들게 하고 구원하는가?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지에 대해선 몇 가지로 해명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느님은 완벽한 절대자이다. 선악의 구분은 인간의 것이다. 고통 또한 인간의 것이지, 하느님의 것이 아니다. 만약, 하느님이 인간이 고통 받는 것을 아파한다면 그것은 예방접종과 같은 것이다.
 
@IMG2@긴 역사 속에 인간을 지켜보는 하느님에게 고통은 단지, 다음을 살아내기 위한 따끔한 주사바늘과 같은 것. 순간의 고통 따위에 하느님의 의지를 방해 받을 필요가 없다. 고통은 인간 개개에게 이르렀을 때 크게 느껴지는 것뿐이다. 마치 인간이 무심코 걷는 발 아래서 개미집단이 고통 받듯이 말이다.

또, 정의라는 단어는 하느님께 사용한다는 것은 온당치 않다. 하느님은 정의로울 이유가 없다. 그래서 정의를 행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우직하고 성실한 카인을 버리시고 지혜로운 아벨을 사랑했다. 형의 장자권을 빼앗은 야곱을 방관하고 가까이 하셨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고 교만 하는 요셉을 선택하여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세웠다. 하느님은 오직 당신의 뜻대로 하신다. 교만, 약탈, 성실, 지혜 이 모든 것은 인간이 만든 언어의 허상이다. 모든 것, 위에 존재하는 하느님은 모르는 것들이다.

따라서 세상에 이루어진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정의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승리의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지지 않는, 믿는 곳에 승리를 안겨주는, 그 승리가 행복이나 안락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은 이름을 드높이기를 원한다. 하느님은 사랑하는 모세가 다른 이들의 아픔으로 괴로워 해도 이집트 왕을 이기기 위해 연거푸 재앙을 내린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현세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인간의 고통이나 목숨은 중요하지 않다. 실제로 모세에게 하느님은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자들을 모두 없애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노아에게 보인 대홍수를 아무 거리낌 없이 재현하려한 것이다. 

하느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 인간의 잣대에 휘둘릴 필요가 있겠는가, 말이다. 인간을 사랑한다하여 현세의 안락을 보장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의심스러운 것은 왜 하느님은 굳이 인간 앞에 나타나려 하시는가, 그리고 왜 갑자기  예수를 보내 인간을 구원하려 했을까,

1,2권에서 하느님이 굳이 정의로울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3권에서 예수의 맞이했다. 예수의 등장은 앞의 정의를 다시 혼란스럽게 했다. 예수는 선을 말했고 정의를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의로움의 본질에 다가서는 해안을 갖고 있었다. 예수는 이때까지 하느님과는 달리 성자에 가깝다. 하느님은 왜 예수를 성자로 만들어 십자가를 짊어지고 죽게 했을까?

하느님은 고정불변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라면 가능한 일이다. 하느님은 절대 권력을 갖고 있지만 사마엘, 루시퍼, 하와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또 지상의 인간과 교류하고 대화하기를 원한다. 그 결과로 하느님은 성자인 예수를 보낸 것이다. 인간의 변화에 하느님이 반응을 보인 사건이다. 하느님은 이제 인간에게 정의와 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어머니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나의 어머니는 즐겨 <성서>를 읽으셨는데, 특히 루터 판 <성서>를 애독하셨다. 물론 어머니는 ’신약성서‘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갖고 계셨다. ’구약성서‘는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은 언짢게 했기 때문이다. 나는 장난삼아 하느님의 잔혹함, 그분의 불공정함, 알다가도 모를 그분의 행동, 그분의 소심함, 그분의 성급함을 입증하는 구절들만 일부로 골라내서 어머니께 보여주기도 했다.
“‘구약성서’이야기를 읽다보면 사람들만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도 그렇게 성장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단다.”

작가의 어머니의 말이 정답은 아닐지라도 하느님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일 수는 있을 것 같다.
 
세상에서 제일 많이 읽히는 책이 성경책이라지만, 비 기독교이 성경을 읽기란 쉽지 않다. 성경책을 완독하지 못한 나는 그들의 맹목적인 믿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성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고 여긴 탓이다. 잠시, 소설로 나마 절대자의 힘을 느꼈고 그 힘 앞에 이성이란 얼마나 나약한가, 인간의 선악의 판단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힘은 기록을 통해 생기고 이어진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 같다. 하느님은 선택한자에게 승리를 안겨주고 기록을 남겼다. 우리가 하느님을 알 수 있는 것은 기록에 의해서이고 기록은 결국 하느님이 선택한 인간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구약성서>뿐만 아니라 역사는 언제나 승자에 의해 기록되었다. 하느님의 역사가 승자의 역사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따라서 하느님을 믿으면 승리자가 된다는 것은 정당한 귀납적 논증의 자료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객관적인 판단을 떠나 한 인간이 자신의지에 따라 뜻을 세워 승리를 이루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믿음이 필요하다. 성취하려는 것이 절대 신인 하느님의 뜻이라는 믿음은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이런 믿음은 선악을 분별하지 않아, 더욱 힘이 있고 그래서 위험하다. 구약성서에서 보여주는 하느님이 힘이 이러한 것이기에 경이로움과 두려움이 느껴진다.

그에 비해 예수는 성자와 같은 세련된 인격체로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다. 기록은 또 하나의 하느님을 모습을 현세화 시킨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어머니의 말을 빌어 성장하는 하느님을 만들었다. 작가의 말처럼 하느님도 인간과 더불어 성장한다면 지금쯤 다시 한번 예수의 탄생 같은 종교혁명을 꿈꿀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모든 종교가 하느님 앞에 화합하고 각자의 관습에 따라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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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읽는 성서 1 - 천지창조 편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서양 고전
미하엘 쾰마이어 지음, 송용구 옮김 / 현암사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IMG1@ ‘<성서>의 출발점은 천지창조이다. 성서는 천지창조 이야기로 시작한다. 고대인이 신화를 믿는 것만큼, 현대인은 물리학을 철썩 같이 믿는다. 현대인이 아무리 물리학을 믿어도 시공을 초월하는 첫 창조 행위를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은 매력적인 일임이 틀림없다.’

과학자들은 성경에 위배된 자연현상과 진화론을 증명해 냈다. 그들의 노력으로 인해 신은 정말 죽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아직도 종교적 기반으로 뭉친 세력들 간의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인간이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영원히 자신들이 믿는 신을 위해 싸울지도 모른다.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성서의 하느님은 굳이 평화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나의 어설픈 종교관은 어떠한가, 어린시절 친구 손에 이끌려, 교회와 성당에서 들었던 하느님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고 기억하고 있는가, 지금 생각해보니 설교자의 의도와는 달리 너무나도 자위적으로 해석하고 기억하고 있었다. ‘하느님은 절대자로 완벽한 자이다. 하느님은 세상만물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이 모든 걸 뜻대로 하실 수 있으며 모든 걸 정하신다.’ 여기까지는 별문제 없이 하느님을 이해 한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아 다음과 같은 오류가 생겨난다. ‘하느님은 선하고 정의롭고 모든 인간을 사랑한다. 그래서 세상을 옳게 이끄신다.’라는 가당치도 않은 정의를 만든 것이다.

절대자 하느님에 대해서 새롭게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소설로 읽는 성서’ 덕분이다. 이 책은 정통신학도 아니고 성서의 일부를 그리스, 이집트, 이스라엘 신화와 함께 근거로 삼았다. 다분히 작가의 주관적인 견해가 들어간 소설일 뿐이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 하느님에 대해서 비로소 알 수 있었다고 말한다면 또 다른 어설픔만 보이는 꼴이 된다. 그러니 내가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은 ‘절대자의 의미’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소설로 읽는 성서’는 모두 세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1권에는 천지창조에서 이집트에 정착한 요셉까지이고 2권은 모세의 탄생배경과 인간적인 고뇌와 죽음까지 보여주고 있다. 3권은 기록자 도마유다의 시선을 따라 예수와 이스카리오트 유다를 바라보는 1,2권과는 좀 다른 각도로 예수죽음을 그리고 있다.

절대자 하느님에 대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1,2권에서였다. 작가는 하느님을 그리스 신들처럼 인격화 하고 있다. 그래서 하느님은 자신의 창조물이 오직 당신만 사랑하길 바라는 질투의 신으로 끊임없이 인간을 시험한다. 아브라함에겐 사랑하는 아들을 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하고 노아와 모세에게 인내를 요구한다.

왜 하느님은 인간에게 시험에 들게 하고 구원하는가?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지에 대해선 몇 가지로 해명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느님은 완벽한 절대자이다. 선악의 구분은 인간의 것이다. 고통 또한 인간의 것이지, 하느님의 것이 아니다. 만약, 하느님이 인간이 고통 받는 것을 아파한다면 그것은 예방접종과 같은 것이다.
 
@IMG2@긴 역사 속에 인간을 지켜보는 하느님에게 고통은 단지, 다음을 살아내기 위한 따끔한 주사바늘과 같은 것. 순간의 고통 따위에 하느님의 의지를 방해 받을 필요가 없다. 고통은 인간 개개에게 이르렀을 때 크게 느껴지는 것뿐이다. 마치 인간이 무심코 걷는 발 아래서 개미집단이 고통 받듯이 말이다.

또, 정의라는 단어는 하느님께 사용한다는 것은 온당치 않다. 하느님은 정의로울 이유가 없다. 그래서 정의를 행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우직하고 성실한 카인을 버리시고 지혜로운 아벨을 사랑했다. 형의 장자권을 빼앗은 야곱을 방관하고 가까이 하셨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고 교만 하는 요셉을 선택하여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세웠다. 하느님은 오직 당신의 뜻대로 하신다. 교만, 약탈, 성실, 지혜 이 모든 것은 인간이 만든 언어의 허상이다. 모든 것, 위에 존재하는 하느님은 모르는 것들이다.

따라서 세상에 이루어진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정의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승리의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지지 않는, 믿는 곳에 승리를 안겨주는, 그 승리가 행복이나 안락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은 이름을 드높이기를 원한다. 하느님은 사랑하는 모세가 다른 이들의 아픔으로 괴로워 해도 이집트 왕을 이기기 위해 연거푸 재앙을 내린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현세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인간의 고통이나 목숨은 중요하지 않다. 실제로 모세에게 하느님은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자들을 모두 없애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노아에게 보인 대홍수를 아무 거리낌 없이 재현하려한 것이다. 

하느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 인간의 잣대에 휘둘릴 필요가 있겠는가, 말이다. 인간을 사랑한다하여 현세의 안락을 보장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의심스러운 것은 왜 하느님은 굳이 인간 앞에 나타나려 하시는가, 그리고 왜 갑자기  예수를 보내 인간을 구원하려 했을까,

1,2권에서 하느님이 굳이 정의로울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3권에서 예수의 맞이했다. 예수의 등장은 앞의 정의를 다시 혼란스럽게 했다. 예수는 선을 말했고 정의를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의로움의 본질에 다가서는 해안을 갖고 있었다. 예수는 이때까지 하느님과는 달리 성자에 가깝다. 하느님은 왜 예수를 성자로 만들어 십자가를 짊어지고 죽게 했을까?

하느님은 고정불변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라면 가능한 일이다. 하느님은 절대 권력을 갖고 있지만 사마엘, 루시퍼, 하와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또 지상의 인간과 교류하고 대화하기를 원한다. 그 결과로 하느님은 성자인 예수를 보낸 것이다. 인간의 변화에 하느님이 반응을 보인 사건이다. 하느님은 이제 인간에게 정의와 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어머니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나의 어머니는 즐겨 <성서>를 읽으셨는데, 특히 루터 판 <성서>를 애독하셨다. 물론 어머니는 ’신약성서‘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갖고 계셨다. ’구약성서‘는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은 언짢게 했기 때문이다. 나는 장난삼아 하느님의 잔혹함, 그분의 불공정함, 알다가도 모를 그분의 행동, 그분의 소심함, 그분의 성급함을 입증하는 구절들만 일부로 골라내서 어머니께 보여주기도 했다.
“‘구약성서’이야기를 읽다보면 사람들만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도 그렇게 성장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단다.”

작가의 어머니의 말이 정답은 아닐지라도 하느님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일 수는 있을 것 같다.
 
세상에서 제일 많이 읽히는 책이 성경책이라지만, 비 기독교이 성경을 읽기란 쉽지 않다. 성경책을 완독하지 못한 나는 그들의 맹목적인 믿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성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고 여긴 탓이다. 잠시, 소설로 나마 절대자의 힘을 느꼈고 그 힘 앞에 이성이란 얼마나 나약한가, 인간의 선악의 판단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힘은 기록을 통해 생기고 이어진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 같다. 하느님은 선택한자에게 승리를 안겨주고 기록을 남겼다. 우리가 하느님을 알 수 있는 것은 기록에 의해서이고 기록은 결국 하느님이 선택한 인간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구약성서>뿐만 아니라 역사는 언제나 승자에 의해 기록되었다. 하느님의 역사가 승자의 역사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따라서 하느님을 믿으면 승리자가 된다는 것은 정당한 귀납적 논증의 자료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객관적인 판단을 떠나 한 인간이 자신의지에 따라 뜻을 세워 승리를 이루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믿음이 필요하다. 성취하려는 것이 절대 신인 하느님의 뜻이라는 믿음은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이런 믿음은 선악을 분별하지 않아, 더욱 힘이 있고 그래서 위험하다. 구약성서에서 보여주는 하느님이 힘이 이러한 것이기에 경이로움과 두려움이 느껴진다.

그에 비해 예수는 성자와 같은 세련된 인격체로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다. 기록은 또 하나의 하느님을 모습을 현세화 시킨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어머니의 말을 빌어 성장하는 하느님을 만들었다. 작가의 말처럼 하느님도 인간과 더불어 성장한다면 지금쯤 다시 한번 예수의 탄생 같은 종교혁명을 꿈꿀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모든 종교가 하느님 앞에 화합하고 각자의 관습에 따라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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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에너지, 태양
우베 반트라이 지음, 이창주 옮김, 이필렬 감수 / 푸른나무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 태양 에너지에 관심을 갖는가? 당연히, 화석 연료의 고갈과 환경오염으로 인한 문제 때문이다. 화석연료를 이대로 사용한다면, 앞으로 30~40년이면 바닥이 난다고 한다. 또, 화석 연료의 사용으로 인해 두꺼운 온실 가스층이 대기권을 덮어 지구를 가열시키고 있다. 이런 부작용은 자연 재해를 발생시켜 우리를 위협한다. 화석 연료의 고갈과 환경오염으로 인한 자연재해는 한정된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지구라는 공동체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따라서 대체에너지 개발에 거는 기대가 그 무엇보다 크다.

대체에너지로는 어떤 것이 있으며 왜 태양열 에너지 인가?

지구에는 다행히도 화석에너지를 대체할 수 있는 태양광, 바람, 물, 바이오매스 같은 태양 에너지가 있다.  특히, 이중 태양열 에너지는 무공해이면서, 태양이 뜨는 한 무한정으로 공급된다. 더욱이 원료 자체는 누구에게나 무상으로 공급한다는 매력을 지닌다.

구체적으로 태양에너지를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이 책에서는 태양 에너지의 범위를 생각보다 상당히 넓게 잡고 있다. 이를테면, 식물이 태양열을 받아 성장하고 에너지를 저장하기 때문에 태양열 에너지를 다른 물질로 저장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동물 또한 태양열을 지닌 식물을 먹고 성장하는 것으로 태양열 에너지의 변이로 본다.

이런 동식물이 땅속에 묻혀 화석연료로 쓰이게 된 것이니, 이 또한 태양열 에너지이다. 풍력 발전기 역시 태양에 의한 온도 차로 생긴 것이니 태양 에너지의 의한 것이다. 따라서, 바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파력도 결국, 태양 에너지에서 온 것으로 보고 있. 바이오매스 역시 동식물이나 그 배설물을 원료로 하고 있으니, 당연히 태양 에너지의 영향권 안에 있다.

이렇게 지구에서는 태양 에너지를 근거로 많은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한편, 태양열 에너지의 변이 형태가 아닌, 태양빛으로 직접 에너지를 얻어 낼 수도 있다. 이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태양열 에너지로, 태양빛을 집열기를 통해 모으거나 전지에 저장하는 형태이다.

태양열 집열기의 원리는 ?

이 책에선 집열기의 원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몇 가지 과학원리부터 출발한다. 예를 들면 지표면에서 성층권 경계 면까지의 구성을 설명하고 있으며, 태양이 지구에 보내는 빛의 종류와 빛의 파장에는 단파와 장파로 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빛의 파장은 집열기를 만들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태양 빛 중에서 단파만이 집열기 안에 들어 갈 수 있다. 집열기 안에 들어간 단파는 장파로 바뀌게 된다. 장파가 된 빛에너지는 밖으로 빠져 나 올 수 없다. 이때 빛은 흡수가 잘되는 검정관에 흡수된다. 관안에는 찬물이 흐르게 장치하여 태양열이 물을 데우게 하는 원리이다. 이런 방법으로 더운물을 공급하고 보일러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집열기의 원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평소 우리가 잘 구분해 쓰지 않는 몇 가지 과학용어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열전도와 열전달의 차이, 열과 온도 차이이가 그것이다. 그러니까, 집열기를 이용한 열의 이동은 열전달에 해당된다. 태양열은 기체사태의 것이 고체에 닿아서 액체 상태의 열로 전달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온도는 물체가 지닌 열의 상태를 말하고 열은 물체에 공급된 열의 양, 다시 말해서 물체가 지니고 있는 열 에너지의 전체 양을 의미하고 ‘J’이라는 단위를 갖는다. 이런 열의 단위는 태양열이 해내는 일의 양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용어의 차이가 과학원리를 이해는 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새삼 깨달았다.

집열기는  지붕에 설치하는 평판형 집열기 말고도 진공관식 집열기, 홈통형 집열기, 포물면경(접시형)집열기가 있다. 이런 집열기의 가장 큰 단점은 에너지를 저장하는데 너무 넓은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직까지는 가정용으로 조금씩 쓰는 데는 무리가 없지만, 큰 에너지를 상시 안정적인 공급받기는 어렵다.


태양열 전지?

태양열 집열기와 태양열 발전소의 경우는 태양광선이 열 에너지나 운동 에너지가 변환된 것이다. 태양전지는 태양 에너지에서 바로 전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특별한 장치 없이 간편히 휴대할 수 있고 현재 우리생활에서도 시계, 계산기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태양 에너지를 많이 받을 수 있는 곳에서는 우주선을 움직이게 할 수도 있다. 실재, 우주 왕복선 ‘엔데버’호를 움직이고 있기도 하다.

 
태양열 전지는 한번 설치해 놓으면 유지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다. 그리고 태양전지 숫자만큼 전기를 생산하므로 태양전지를 많이 설치할수록 많은 량의 전기를 얻을 수 있다. 별도의 기계 가동 부분이 없으므로 소음과 진동 등이 없어 환경오염을 일으키지 않는다. 수명은 20년 이상으로 비교적 오랫동안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에너지 밀도가 낮아, 많은 수의 태양 전지를 사용해야 하므로 많은 공간을 필요로 한다. 또, 태양전지의 재료는 아직까지 값이 비싼 반도체 재료인 실리콘을 사용하고 있다. 때문에 태양광 발전 시스템을 처음에 설치하는 데는 많은 비용이 든다.

이외에 바이오매스에 관해서도 간단한 실험과 시설작동 원리를 그림과 함께 설명하고 있다.


태양에너지가 아직까지는 화석연료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지고 비효율적이라 일반화되어 있지 않지만, 자원의 무한성, 무상공급, 공평성, 친환경성 등을 따진다면 그 어떤 연구보다도 사활을 걸고 추진해야 할 산업이다. 태양열 에너지시대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 실현되고 있는 것을 연구개발하면 화석연료보다 싸고 간편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은 그 동안 궁금했던 태양에너지를 어떤 원리로 모아 사용하는가? 효용가능성은 어느 정도 인가? 왜 실용화되지 않는가? 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 설명들이 아주 쉽게 느껴졌던 것은 저자의 친절한 배려 덕분이었다. 태양열 에너지의 생성원리에 접근하기 위해 충분한 사전지식부터 알려주고 있어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이것은 마치 소설이 절정에 이루기 위해, 충분히 암시적 요소를 풍겨 독자의 감동을 끌는 작업에 비유할 수 있다.

일반인들의 과학현상에 대해 알고자 하는 욕구가 점점 커지고 있다. 그래서 대중을 위한 과학서적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고 있다. 그런 책들 중에 중력, 양자역학, 중력, 힘과 에너지, 따위를 이처럼 단순 명쾌하게 설명한 책을 보지 못했다. 저자의 친절한 배려로 과학현상을 이해하는 즐거움을 맛 볼 수 있었다.

* 태양광선은 어떻게 지구에 도달할까?

태양광선은 진공인 우주 속을 초당 300,000km의 속도로 이동한다. 따라서 태양광선이 1역 4천 9백만km의 여행을 마치고 우리에게 도달하기까지는 8분이 걸린다. 그런데 태양광선은 태양으로부터 일직선으로 쭉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길다란 파장 형태로 뻗어간다. 단파의 경우 200nm(나노미터, 1nm=1/1,000mm), 장파의 경우 3,000nm의 파장을 지닌다. 파장은 파동의 마루와 마루사이의 거리를 말한다. 파동이 진행하는 길에는 아주 작은 입자들이 빠르게 운동하는데 이 입자들을 가리켜 양자(量子)라고 부른다. 모든 파장이 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다. 눈에 보이는 파장, 즉 가시광선(可視光線)은 4000~800nm 사이의 파장뿐이다. 눈에 보이는 파장 속의 입자를 '광자'라 부르는데 이것을 통해 많은 태양 에너지가 전달된다. 우리 눈에 흰색으로 보이는 태양광선의 여러 파장들은 무지개에서 볼 수 있듯 여러 색으로 갈라진다. 이것을 빛의 스펙트럼이라 부른다.

파동
- 마루 : 물결이나 파동 따위의 가장 높은 부분
- 골 : 물결이나 파동 따위의 가장 낮은 부분 

* 책에는 그림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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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약 고구려 장군이었다면
김용만 지음, 양은희 그림 / 청솔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리 세대는 역사를 중학교 들어가서 처음 접하였다. 처음부터 교과서로 만났기 때문에 역사에 대한 호기심이라든가 흥미를 붙이기 보다 학습이고 암기 과목으로 한 쪽 귀퉁이를 차지했다. 부담스러운 암기 과목인 '역사에도 뭔가 대단한 게 있지 않을까?' 라는 의혹 같은 호기심을 품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시절 국사선생님을 만나면서 였다.

손수 자른 짧은 단발머리만이 여자임을 상징하셨던 노처녀 국사선생님. 항상 굵은 몽둥이를 들고 다니셨지만 막상 휘두른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날카롭고 매서운 외모 때문인지  국사 시간만큼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이 시간을 다음 시간을 위한 휴식시간으로 정한 듯 꾸벅꾸벅 조는 일이 많았다. 가끔 이런 정적을 깨는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흥분 된 선생님의 목소리였다.

신문 쪼가리를 들고 와서는 이번에 새로운 유적이 발견되었으며, 이 것이 우리 역사적으로 어떤 의의를 갖는지를 상기된 목소리로 설명하시곤 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잘은 모르지만 무척 중요한 일로 여겨 조는 것도 잊고 귀를 쫑긋 세워들었다. 이런 개인적인 경험은 자란 후에도 유적지 발굴 기사를 꼼꼼히 읽게 되었고 역사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요즘 아이들은 우리 때와 달리 다양한 경로로 역사에 대한 체험을 하고 있다. 학교에서도 자기 자신의 역사에서 시작하여 가족의 역사, 우리고장, 조금 넓게는 광역시, 도, 나라로 확장해 가며 사회와 역사를 배워 나가고 있으며, 학습내용을 따라 현장학습도 병행하고 있다. 또 부모와 함께 역사현장을 답사하거나 박물관 견학, 도서 등을 통해 풍성한 역사체험을 하고 있다.

이런 역사체험들은 기존의 틀만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새로운 시도로 아이들에게 다양한 역사적 경험을 할 수 있게 돕고 있다. 그 중에 도서를 보면 기존의 역사라는 개념의 폭을 넓혀  비행기의 역사, 나침반의 역사, 식물의 역사, 과학의 역사, 인류의 역사 등, 한 가지 주제를 통시적으로 다루기도 하고 역사탐정, 역사퀴즈로 재미와 지식을 전해주기도 한다.

‘내가 만약 고구려 장군이었다면’은 이런 새로운 시도중 하나로 이제까지는 볼 수 없었던 기획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만약 고구려 장군이었다면’ 이란 가정은 의외로 매우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막연히 장군이라면 나라에 공을 세워 큰 인물이  되겠다는 생각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준다.

고구려장군이 되려면 어려서부터 일정한 관직을 거쳐야 한다. 또,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부하들을 잘 보살피고 무기와 식량을 철저히 점검해야 한다. 당시 고구려 장군들은 무거운 철판 갑옷을 입었으며, 군사훈련에도 힘썼다. 사냥은 부족한 식량을 채우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훌륭한 군사훈련이기도 했다. 이 외에도 수박(택견), 씨름으로 놀이를 통해 훈련을 시켰다.

뿐만 아니라 전쟁에서 이기려면 장군들은 전술전략에도 뛰어나야 하는데, 고구려의 대표 전술은 청야전술이다. 적을 끌어들인 후, 적의 보급로를 끊어 굶주리게 한 후 반격하는 전술이다. 전투에서는 중장기병을 활용하여 적의 대열을 흐트러트린 후, 경기병과 궁병의 공경으로 승리를 거둔다.

이 쯤 되면,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이나 거룡장군이 수만의 거란군과 수나라대군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전략전술과 철저한 준비와 관리 덕분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 책은  아이들에게 역사적 인물에 대한 전설과 신화를 이야기 하기보다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로써 미래를 향해 오늘의 나를 준비하게 하는 바람직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어린이들이 고구려 장군이 되어 보는 경험을 통해 새로운 자극을 받게 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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