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는 언제나 마음대로야 - 세계 아동극 선집 1 쑥쑥문고 65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김라합 옮김, 김무연 그림 / 우리교육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70년대에 어린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든 말괄량이 삐삐를 기억할 것이다. 양옆으로 딴 머리는 위로 뻗혀있고, 주근깨 가득한 얼굴은 입 꼬리가 광대뼈까지 닿아 있는 삐삐. 외모부터가 충격이었다. 그런 삐삐는 생김만큼이나 자유분방한 언행으로 정제된 사고에 갇혀있던 우리를 열광하게 만들었다. 충효를 최고의 덕목으로 알았던 시절, 삐삐는 제도권의 틀을 거부하고 고정된 사고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런 삐삐의 언행에 우리는 경악했지만, 사실은 우리 안에 꿈틀대는 욕구를 펼쳐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삐삐가 TV에 방영되던 시절을 생각해 보자. 당시 학교생활로 기억에 남는 것 중하나가 웅변대회였다. 웅변대회의 주된 주제는 ‘반공’에 관한 것으로 이승복 어린이가 간첩에게 저항하다 죽었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웅변하는 아이는 마지막 휘나래로 ‘이 연사 강력히 주장 합니다.’하며 불끈 쥔 두 손을 쳐든다. 이 쯤 되면 웅변하는 아이나 청중으로 앉아있던 아이들은 모두 공산당에 대한 분노로 치를 떨며 눈물바다를 이룬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우스운 광경인가,

선생님들의 권위적인 태도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  5학년 때 우리 반 여자 아이들 중 손끝 야무진 아이들은 한 학기 내내 집단 노동에 동원되었다. 담임선생님이 집에 걸어 놓을 초대형 스킬장식을 만드는 일을 시켰던 것이다. 그것도 교실에서 책상을 이어 붙여 커다란 스킬 판을 올려놓고 거리낌 없이 행해졌다. 지금에야 아동학대고 노동력 착취지, 당시에 나는 그 아이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우리는 그렇게 체제에 순응하고 권위를 선망하는 어리고 순진한 아이들이었다.    

착하고 순진하기만 했던 우리들에게 삐삐의 말과 행동은 충격적이었다.

'아니카 : 우리 선생은 참 좋은 분이셔, 너도 틀림없이 우리 선생님을 좋아하게 될 거야.
토마스 : 학교에 그렇게 오래 있는 것도 아니야 열두 시 반까지만 있으면 돼.
아니카 : 그리고 크리스마스 휴가랑 부활절 휴가랑 여름 방학도 있어.
삐삐   : (조금 생각하고 나서) 그건 불공평하다.
토마스 : 뭐가?
삐삐   : 아주 아주 불공평해 !
아니카 : 뭐가?
삐삐   : 너희만 크리스마스 휴가랑 부활절 휴가랑 여름 방학 있는 거. 난 아무것도 없단 말이야.
토마스 : 넌 학교에 안 다니니까 그렇지.
삐삐   : 겨우 그까짓 크리스마스 휴가 하나 얻으려고 학교를 다녀야 돼?
아니카 : 응, 안 그러면 안 돼.
삐삐   : 그럼 나도 학교에 다닐래. 나도 크리스마스 휴가를 얻고 싶으니까. 그래야 공평하잖아.
아니카 : (환호성을 지른다.) 야호, 신난다! 어서 가자 !
삐삐   : 에이, 그렇게 서두를 거 없어. 갈 때가 되면 알아서 갈게. 크리스마스 휴가를 주기 전에만 가면 되잖아. 안녕!'
 
삐삐는 다른 아이들처럼 크리스마스 휴가를 얻기 위해서 학교에 가기로 했다. 그래야 공평해지니까 말이다. 이 말을 잘 풀어 보면, 아이들은 결국 공평해지기 위해서 자유를 희생한다는 의미로 들린다. 학교에 간 삐삐는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를 어떻게 만드는지 보자.

‘삐삐   : 안녕하세요. 저 왔어요! 제가 코 파기에 딱 맞춰서 온 거죠?
선생님 : 그래, 하지만 조금 더 조용하게 왔으면 좋을 것 그랬구나. 아무튼 학교에 온 걸 환영한다. 삐삐야.
삐삐   : 고맙습니다.
선생님 : 우리 학교가 네 마음에 들면 좋겠다.
삐삐   : (줄곧 아주 상냥한 표정을 짓고 있다.) 선생님이랑 아이들이 행동을 늘 바르게 하면 마음에 들 거예요.‘

삐삐의 태도는 얼마나 당당한가, 학교라고는 처음 와본 고아 아이가 선생님께 행동을 바르게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삐삐가 등장하기 이전엔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던 당당한 어린이 모습이다. 우리는 경악과 동시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뿐인가,

‘오늘 셈 하기는 그만 끝내는 게 좋겠다!’ 는 말에 선생님 뺨을 쓰다듬으며

‘선생님이 여태까지 하신 말씀 가운데 가장 똑 소리 나는 말씀이었어요. 선생님은 참 친절하고 상냥하세요. 그래서 저는 선생님이 정말 좋아요. 하지만 선생님이 사람을 조금 피곤하게 만들기는 해요. 그건 선생님도 인정하시죠?’ 

삐삐의 이런 행동은 우리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삐삐는 어른들이 어린들에게 행한 억압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었으며, 그것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을 갖게 했다. 이것은 말괄량이 삐삐가 1945년 처음 발표되면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세계의 많은 어린이들에게 사랑을 받은 이유이기도 하다. 작가 린드그렌은 삐삐를 통해 규율과 제도권 교육의 문제점, 어른과 아이들의 관계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특유의 유머를 담아 풀어 놓고 있다.
 
아이들이 비판적 의식을 갖지 못한 것을 탓할 수 없다. 어리고 순진한 아이들에게 반공교육을 쇠뇌 시킨 권력자나 권위적인 선생님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이지, 아이들에게 무슨 힘이 있었겠는가. 만약 그때 우리에게 삐삐와 같은 괴력의 힘이 있었다면, 금화가 잔득 든 가방이 있었다면, 그 누구도 나를 구속하는 사람이 없다면, 우리는 삐삐처럼 학교에 가지 않았을 거다. 어른들에게 아이들을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해 달라고 요구 했을 것이다.

삐삐가 지금까지도 어린이들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는 아직도 어린이들이 억압된  규율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때와는 다르지만, 요즘 어린이들도 경쟁체제로 인해 어린이가 누려야할 자유와 인권을 희생당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어른들에 비해 신체적으로 약하고 경제적으로 무능한 존재이다. 그러니 삐삐는 여전히 대리 만족을 주고 부러운 대상일 수밖에 없다.

<삐삐는 언제나 마음대로야>는 린드그렌이 말괄량이 삐삐이야기를 동극으로 꾸민 것이다. 그래서 전체내용이 동극 극본이고 뒤편에 이 작품을 어떻게 동극으로 올릴 것인가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릴 적에 보았던 삐삐를 추억하였다. 나는 이제 삐삐를 처음 보았을 때 내 나이의 아이를 둔 부모다. 지금 내가 보는 삐삐의 모습은 단순히 통쾌하고 우스운 재미만 주지 않는다. 나도 모르는 사이 구조적으로 분석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린이들은 어릴 적 나처럼 단순히 보고 즐겼으면 한다. 왜냐하면 재미있게 읽어야 할 동화책을 구조적으로 분석하라고 요구한다면, 어린들에게 동화책 읽는 즐거움을 빼앗는 것일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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