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4
알랭 로브그리예 지음, 박이문·박희원 옮김 / 민음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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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고 해당 공간-아프리카 어느 지역 바나나 농장의 집과 마당 및 주변-평면도를 그려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내 사랑을 바치겠다. (사랑 외엔 드릴 게 없다) 극사실주의인 척, 건물 그림자의 각도, 테라스의 구조, 의자의 위치, 타일의 모양 등을 치밀하게 묘사하지만 머릿속에 그려보려 애쓰면 애쓸수록 전체적인 구조가 아련하게 멀어진다. 숱하게 등장하는 오른쪽 왼쪽, 동서남북, 두 번째 창문, 복도와 면한 벽, 사무실, 부엌 모두 볼 때마다 온통 낯설다. 이건 평소 방향감각과도 어쩌면 상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나 같은  ‘방향치’가 아니라 날 때부터 머릿속에 나침반을 장착하여 살고 있는 독자에게는 이 공간이 어떻게 다가갈지 무척 궁금하다. 그리고 또 그런 사람들은 현기증 같은 거 잘 느끼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의문도 문득 든다.

 

jalousie [ʒaluzi] : 1. 질투, 시기  2. 강한 애착, 집착  3. 미늘덧문, 블라인드

         

     

                   

                                                                                (오드리 햅번 말고 블라인드를 보셔야 한다)


 

지금 기둥-지붕의 남서쪽 모서리를 받치고 있는 기둥-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져, 집의 정면 테라스의 중심부를 지나 바닥의 포석까지 닿아 있다. 테라스에는 저녁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도록 팔걸이의자들이 놓여 있다. 벌써 그림자의 끄트머리는 집의 정면 중앙에 있는 현관에 거의 다다랐다. 집의 서쪽 박공 위로 태양이 대략 1미터 50센티미터 높이에서 박공의 나무를 비추고 있다. 따라서 이쪽으로 나 있는 세 번째 창문에 블라인드jalousies가 내려져 있지 않았다면 햇빛이 방 안 가득 비쳐들었을 것이다. (12쪽)


jalousie가 처음 등장하는 부분이다. 각주에 ‘(…)블라인드의 틈새를 통해 아내의 부정을 감시하는 남편(화자)을 암시하는 이 작품에서, ‘블라인드’는 ‘질투’라는 감정이 물화된 표상이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화자의 집요한 시선이 전부인 답답한 소설. 그러나 제목이 ‘질투’인 탓에(덕에) 그 시선이 끔찍하게 팽팽하면서 동시에 절망적으로 처량하다. 아내(A…)가 방에서 몰입하여 쓰는 편지, 연한 파란색 편지지는 이웃 남자 프랑크의 주머니에서 끄트머리가 삐죽 관찰되며 좀체 틈입하지 않는 화자의 아주 희박한 의견(트럭 운전수에 관한)은 그 둘의 의견과는 대립한다. 프랑크와 아내가 같은 책을 읽고 나누는 대화와 둘의 시내 외출 계획을 듣는다(듣기만 한다).

 

세 사람의 식사 장면과 식후 테라스에 모여 앉는 장면, A…가 방에서 편지를 읽거나 쓰는 장면, 머리를 빗는 장면과 벽에 출현한 지네를 눌러 죽이는 장면들은 무한 반복되며 조금씩 변주되고 살짝 틀어지기도 한다. 가장 훌륭한 변주로 꼽아 볼 수 있는 장면이 ‘지네 컷’인데, 거리를 두고 반복되는 세 장면을 연이어 옮겨본다. 모아놓고 보니 변주가 어찌나 정교하고 질투로 촘촘한지 눈물이 날 지경이다.


프랑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A…를 쳐다본다. 그러고는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한 손엔 냅킨을 들고 있다. 그는 냅킨을 돌돌 말아 쥐고는 벽 쪽으로 간다. A…의 숨소리가 가빠지는 것 같다. 아니, 착각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왼손은 나이프를 점점 더 꽉 움켜쥔다. 가느다란 더듬이들이 교대로 빠르게 움직인다. 갑자기 지네는 몸을 활처럼 구부리더니 긴 다리를 전속력으로 움직이며 바닥 쪽으로 비스듬히 내려오기 시작한다. 이때 둥글게 만 냅킨이 잽싸게 덮친다. 벌레보다 빠르게. 가느다란 손가락을 가진 손이 나이프 손잡이를 움켜쥐고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나 표정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프랑크는 벽에서 냅킨을 떼고는 발로 타일 위에 있는 무엇인가를 주춧돌에 대고 짓이긴다. (44-45쪽)


벌레는 벽 한가운데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 약한 불빛인데도 밝게 페인트칠한 벽 위에 그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프랑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A…를 쳐다본다. 그러고는 소리 없이 일어선다. A…도 지네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 프랑크는 둥글게 만 냅킨을 손에 쥐고 벽 쪽으로 다가간다. 손가락이 가느다란 손이 새하얀 식탁보를 움켜쥐고 경련을 일으켰다. 프랑크는 벽에서 냅킨을 떼고는 발로 타일 위에 있는 무언가를 주춧돌에 대고 짓이긴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자기 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뒤쪽 찬장 위에서 불을 밝히고 있는 램프의 오른쪽 자리다. (66-67쪽)


프랑크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나서 수건을 든다. 그것을 둥글게 말아서 살금살금 다가가더니 지네를 벽에다 짓이긴다. 그다음 침실 바닥에 대고 다시 한번 발끝으로 짓이긴다. 이어서 그는 침대로 돌아가면서 수건을 세면대 옆 수건걸이에 다시 걸어둔다. 손가락 관절이 가느다란 손이 새하얀 침대보 위에서 경련을 일으켰다. 벌리고 있던 다섯 개의 손가락을 너무 세게 그러쥐어 그 사이로 천이 말려 들어갔다. 천은 다섯 가닥으로 주름이 잡혀 있다……. 그러나 침대의 모기장이 내려지면서 수많은 그물코로 이루어진 반투명의 천이 침대를 뒤덮어버린다. 사각형의 헝겊이 모기장의 찢어진 부분에 덧대어 있다. (110쪽)


차이가 보이도록 볼드체를 입혔다. 부엌의 사건으로부터 세 번째 반복지점에서는 어느새 침실의 사건으로 변모되고 있다. 냅킨에서 수건으로, 부엌 바닥에서 침실 바닥으로, 식탁보가 침대보로 은밀하게 슬쩍 바꿔치기 되는 단어들.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화자의 치밀한 시선이 그대로 독자에게도 요구된다. 미간이 다 아픈 독서가 아닐 수 없다.

지네와 관련해서 화자가 하는 일 역시 처량하여, 부엌 벽에 남은 지네 자국을 지우는 일이다. 여기서 무척 반가웠는데, 다름 아니라 저자가 4년 앞서 쓴 『고무지우개』에 대한 오마주 비슷한 의도가 보였기 때문이다.

 

 

   

 

 

『고무지우개』는 화자가 골목을 한없이 배회하며 여러 문방구에 들러 마음에 드는 고무지우개를 찾는 장면들이 기억에 남아 있는 소설이다. 『질투』가 현기증 이는 집의 공간을 그리고 있다면 『고무지우개』는 미로 같은 골목들과 수수께끼 인물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국어로 읽으면 그 느낌이 얼마나 다를지, 만약 번역출간된다면 1등으로 사서 볼 생각이다. 로브그리예 전공자들이 꽤 있는 걸로 아는데 (아닌가?) 번역물들은 왜 이렇게 뜸한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벽을 닦아낸다는 것은 전혀 실용적인 방법이 아니다. 차분하게 칠해진 페인트는 분명히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이 페인트는 먼저 칠했던 아마(亞麻)기름 페인트보다도 훨씬 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선의 방법은 고무지우개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것도 타이프라이터용 고무지우개같이 더러워진 표면을 조금씩 벗겨내는, 입자가 미세하고 단단한 지우개라야 한다. 그 지우개는 사무용 책상의 왼쪽 제일 위 서랍에 있다. (87쪽)

 

소설 속 화자의 존재방식이 이토록 소극적인 경우도 없을 것인데, 그나마 지네 사체와 아내 편지지의 흔적을 지우는 행동!은 그 와중 엄청난 적극성으로 보일 정도다. 보통은 식탁의 세 번째 접시로, 테라스의 세 번째 의자, 세 번째 잔으로, 그리고 집요한 시선으로만 존재하는 화자. 차곡차곡 쌓인 시선을 기억으로 반복하여 풀어내고 있는 작업. 도대체 어느 서술, 기억, 장면이 진실일까, 축적된 기억 또는 시선에 진실이 있기나 한 걸까, 단어 하나 삐긋-하니 순식간에 색깔을 달리하는 장면. 자, 한번 당해봐, 하듯 작품을 툭 던져주고 싱긋 웃는 하얀 털의 저자에게 경의를 표한다.

 

화자의 묘사에서 내게 가장 강렬한 아픔을 남긴 부분은 여기, 두 사람 사이의 10센티미터!를 관찰하는 부분이다. ‘감정이 없는 누보로망’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감정은 각자에게 나름으로 온다. ‘나’로부터는 아득한 속수무책의 거리, 아내와 프랑크 사이의 10센티미터라는 사무치는 슬픔과 절망. 이 소설을 즐기기에 머릿속 나침반이 꼭 필요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 선물 같은 어리둥절함, 환각을 닮은 장면들을 즐기기에 나침반은 어쩌면 거추장스럽다. 작품에서 자기장은 오직 하나, ‘질투’이기에. 그리고 그런 건 내 안에 얼마든지 있으므로.

 

A…의 양팔은 엷은 옷 색깔 때문에 옆 사람의 것보다는 덜 선명하게 보인다. 그녀의 팔 역시 의자의 팔걸이 위에 놓여 있다. 네 개의 손이 움직이지 않은 채 나란히 있다. A…의 왼손과 프랑크의 오른손 사이의 공간은 대략 10센티미터 정도다. 야행성 육식 동물의 가냘픈 울음소리가 거리를 알 수 없는 골짜기 깊은 곳에서 다시 한번 짧고 날카롭게 울려 퍼진다. (22쪽)

 

한편, jalousie는 프랑스에서, 블라인드의 모양을 하고 있는 이런 페이스트리를 일컫기도 한다. 번역제목이『덧창』 또는『덧창 모양 빵과자』였다 해도 멋있을 작품이다.

 

 

 

 

Bon appét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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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june23 2023-06-24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는 해석~책보다 더 재밌게읽었어요

에르고숨 2023-06-24 20:33   좋아요 0 | URL
그래요? 고맙습니다. 덕분에 10년 전 글 저도 다시 읽어보았네요.ㅎㅎ
 
질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4
알랭 로브그리예 지음, 박이문·박희원 옮김 / 민음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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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칫 끊어질 것만 같은 신경. 사무치게 절망적인 질투의 감정. 읽어내기가 무척 힘들고 피가 마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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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로이 대산세계문학총서 75
사무엘 베케트 지음, 김경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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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껴두었던, 은 거짓말이다. 다른 만만한 술들을 먼저 꺼내 마시다보니 마지막, 다시 말해 오늘까지 손대지 않은 병으로 남아 있던 포도주를 땄다. 크리스마스라기에, 그리고 마침 아주 조금은, 나 외로운가? 아니, 외로워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자책 아닌 자책이 들어, 부제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든 책을 들었다가 조금 전에 집어던진 참이다. 제목에 속으면 안 된다. 형식에도, 인터넷 사전을 띄워놓고 단어를 확인해가며 읽게 하는 현란함에도, 단정함에도, 책 만듦새에도, 필자의 이름에도.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약간의 위무를 찾고 있었지 싶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틀 전에 읽은 놀라운 책이 그 역할을 톡톡히 해 주었기에, 좀처럼 하지 않는, 그것은 내가 반추동물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고 게으른 습성에 따른 것이기도 한데, 되새김질을 해서라도 자위해보고자 한다. 이것은 적잖은 걱정거리를 던져주는 일임을 모르지 않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볼 어떤 한 시선이 벌써부터 따갑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랴, 위무가 필요한 나는 그 책 바깥에서는 어떠한 어루만짐도 만날 수 없고 지금 나는 그런 손길이 무척 필요하므로 차라리 뚫어보고자 하는 그 시선을 견디어내고 말리라.

 

결코 이야기가 되지 않으려 하는 쓰기, 그래서 어쩌면 성공적으로 이야기 아님, 또는 아무것도 아님이 되어버린 어떤 글로부터 어떻게 감동을 받으며 아름답다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올 수 있었는가가 의문인, 그래, 언젠가는 밝혀야 할 제목, 사뮈엘 베케트의 『몰로이』다. 아니, 질문이 틀렸다. ‘이야기 아님’에 어째서 감동받을 수 없을 거라고, 아름답다는 감탄도 불가할 것이라고 지레 짐작한 거지? 감동이 일관된 ‘이야기’에서 오는 거란 말인가? 알아 볼 일, 그러므로 리뷰에 소설의 줄거리가 들어갈 필요가 하등 없음주의자!인 나의 게으른 성격에 참으로 맞춤한 작품이건만, 간혹 일탈하고 싶어 하는 기질이 하필 지금 발현하여, 굳이 줄거리를 여기에 한 줄로 말하겠으니, 소설에서 이야기를 원하는 영혼들에게 이건 엄청난 스포일러가 될 터이다, 아무렴. 몰로이는 모친의 집을 찾아가는 중이고 모랑은 그런 몰로이를 찾으러 다니는 이야기다. 끝.


하지만 나도 인간이라, 그렇게 생각한다, 나의 전진은 이러한 일의 정황으로 영향을 받아, 내가 지금까지 그것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었든지 간에, 그때까지 항상 그랬었듯이, 느리고 고통스러운 데서 이제는,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정지의 끝도 없고, 십자가형의 희망도 없고, 내 진정으로 말하건대, 시몬도 없는, 진짜 갈보리의 고난으로 변했고, 난 빈번하게 멈춰야만 했다. 그렇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나는 점점 더 자주 멈춰야 했고, 멈추는 것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114쪽)


낯선 숲길을 한참이나 헤매는, 꿈인지 왜곡된 기억인지 심각한 농담인지 저자의 입꼬리가 슬며시 은밀하게 올라가는 장난인지, 내뱉는 말은 통하지 않고 귀도 어두우며 다리까지 굳어 몹시도 고통스럽고 수고스러운 발걸음, 급기야는 배를 땅에 대고 기어, 기어서 나아가는 악몽 같은 여정에 오로지, 아무 것도 말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줄기차게 혼자 말하는 문장들만이 명료하다. 꿈같은 공간, 종잡을 수 없는 시간, 끊임없이 이어지는 중얼거림. 배경 없는 인물 사진에서 인화된 인물만이 부담스럽게 두드러지며 관람자를 쳐다보듯, 사유들이 수정 같은 문장들로 성큼 와서 뜻밖의, 맙소사, 위로를 선사한다.


나는 주머니에서 야채 칼을 꺼내 손목을 자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통증이 순식간에 나를 사로잡았다. 난 먼저 소리를 질렀고, 그러고 나서 멈추고 칼을 닫아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나는 크게 실망하지 않았는데, 내심 다른 결말을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거다. 본래로 돌아간다는 것은 나를 항상 슬프게 했지만, 삶이란 본래로 돌아감의 연속인 것 같고, 죽음 또한 일종의 본래로 돌아가는 것임이 분명한 듯하다, 그렇다고 한들 내겐 놀랍지 않다. 바람이 그쳤다고 내가 말했던가? 가랑비가 내린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바람에 관한 모든 생각을 제외시킨다. (90-91쪽)


몰로이가 길을 나선 게 맞나? 어디로 가던 중이었지? 모친의 침대에서 글을 쓰고 있노라고 시작한 이 불구의 노인네, 사기꾼, 거짓말쟁이, 간절하게 원하나 허망하게 도달하지 않는 오르가슴의 좌절 같은 여정을 써 놓고 툭, 무책임하게 사라져버리는 배신자. 그렇다면 모랑은? 아, 투덜이 모랑, 몰로이를 찾는 임무를 맡은 모랑은 몰로이를 찾아내어서(찾아낸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또 다른 배신자이며 시간이, 그런 게 있다면, 흐를수록 몰로이와 똑같아지는, ‘맹렬히 붕괴해가는’ 섬뜩한 거울 이미지다. 언어를 믿지 않음,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 이야기, ‘부재로의 귀환.’ 말을 하면 할수록 저만치 달아나는 핵심, 혹은 에두를 수밖에 없는, 결코 1:1 대응으로 나서주지 않는 글, 속절없는 무능력 또는 불가능성이 몰로이 혹은 모랑의 절뚝거리며 에두르는 헛걸음이 상징하는 것인가. 상징이라니, 베게트가 들으면 펄쩍 뛰실 일. 무의미, 부재를 추구하는 작품에서 숨겨진 의미 따위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부조리’ 정도에서 머물러야지. 부조리극의 대명사, 땅 밑에서 곧 올라와 사방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될, 작가에 의해 몇 년 뒤 ‘심심풀이’ 삼아 쓰일, 고도Godot의 움. 몰로이와 모랑, 행인 A와 B, 혹은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라고 불러도 될 베케트 적 연속성.


왜냐하면 내 안엔 항상 여러 어릿광대 중 두 놈이 있는데, 한 놈은 자신이 있는 곳에 그대로 남기만을 주장하고, 다른 한 놈은 좀 더 멀리 가면 덜 나쁠 거라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나는 무엇을 하든 간에, 이 분야에서는 항상 만족했다. 그리고 난 불쌍한 그 친구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이해시키려고 번갈아 양보했다. (71-72쪽)


자, 네모반듯하게, ‘까맣게 종이를 채웠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 위해, 늘 배신하는 글과 말을 보란 듯이 꺼내, 오늘은 날이 좋구나, 볕에 척 널어 말리듯이,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발을 질질 끌며 하염없이 흔적만 남기는 에두름, 어디로 가기를 원했더라? 나에게? 그 사람에게? 맞다, 그랬었지, 내 마음 어루만지러. 저 잘생긴 아일랜드 작가가 언어의 장식성을 배제하기 위해 프랑스어로 쓴 글, 한국어 번역으로 읽는 내게까지 전해지는 아득한 감동, ‘반(反)전통’, ‘반(反)내러티브’라는 전위성과 시대성을 뛰어넘어, 아니 그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어슴푸레한 저녁에 위로하는 빛처럼, 마음을 열고 무장해제한 채 보지 않으면 다가오지 않는, 그래, 문학의 힘, 2013년 12월 25일에 내가 포도주를 따기까지, 『몰로이』에 다가가기 위해 혹은 멀어지기 위해, 아니 차라리 『몰로이』를 구실로, 흔적을 남기기까지 조용히 기다려온 듬직한 예술. 아껴두었던, 은 거짓말이 아니다. 오늘을 위해 기꺼이 남겨 두었던 포도주를 땄었다. 내 다정한 친구, 내 갑옷.


Merci, Samuel Barclay Beckett. (1906~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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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루만지다 -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고종석 지음 / 마음산책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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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도로 아름다운 글발이 품고 있는 보수성. 그 어긋남이 힘겨워서 못다 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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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로이 대산세계문학총서 75
사무엘 베케트 지음, 김경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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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러티브적 소설의 ‘해체’라는 전복성만을 강조하기에는 너무 아름답다. 눈부시게 찬란하고 쓸모없이! 아름답다. 에움길을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에 서는 헛걸음에도 신세계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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