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일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평점 :
품절


 젊은 작가, 그러니까 아직도 젊은 작가, 혹은 언제까지나 젊은 작가일 것 같은 '소설 쓰는' 김연수가 쓴 에세이. 도서관에서 2명씩 예약이 꽉 차 있는 바람에 접근할 수조차(?) 없었던 <소설가의 일>을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한 번에 쭉 읽을 수 있었다.

 

 

1. 도너츠

 

 문학동네 카페에 연재된 글이란 사실은 알고 있었다. 연재 당시까지만 해도 김연수 작가에 대한 애정이 지금과는 영 딴판이어서 연재글을 챙겨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너츠 서사론'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이때 당시 아직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와 <청춘의 문장들>을 읽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김연수와 빵이 얼마나 각별한 사이인지[뉴욕제과점] 미처 생각지 못했다). 도너츠 서사론이 뭐냐 하면 소설의 문장은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직접 말해서는 안 되며, 말하고자 하는 것을 중심에 구멍으로 비워두고 그 주변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소설의 문장은 모두 보여주기를 위한 묘사의 문장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며, 직접 말하기의 방식을 취하고 있는 설명의 문장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요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혹은 다르게 말함으로써 일상의 어법과 다른 어법, 소통을 꿰하는 것이 문학의 언어라는 점이다. 지각에 소요되는 시간을 연장해 미적 효과를 노리는 쉬클로프스키의 '낯설게 하기' 기법과도 비슷한 맥락이 있다. 도너츠의 가운데 텅 빈 공간은 독자에 의해 채워져야 하는 창조적 독서의 장일 것이다. 낯익은 언어로는 독자의 의식에 어떤 변화나 균열을 만들어낼 수 없다. 낯선 언어는 우리가 평소에 잘 안 쓰는 고어古語나 전문용어, 은어의 사용이 아니라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사이의 낯선 매칭 속에서 만들어진다. 무엇을 말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말하느냐가 관건인 것이다.

 

2. 토고( 나라 이름 말고) 

 

 여기 소설가 지망생 K가 있다. 아마추어 소설가라 불러도 좋다. 그가 쓰고 싶은 글은 소설이다. 그가 그 동안 읽어온 소설 같은 글을 그는 쓰고 싶어 한다. 읽은 이의 가슴을 뛰게 하고, 상투적 인식의 패턴을 뒤흔들리고, 한마디로 '끝내 주는' 소설을 쓸 마음으로 흰 종이를 채우지만 그는 글을 확인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 글이 읽으면 토할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하는 '토고'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김연수는 말한다. 누구나 토고를 쓴다. 중요한 건 계속 실패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만이 토고를 넘어 좋은 소설로 넘어갈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한 가지 왜 토고는 토고인가 짚어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소설을 쓴다고 앉아 있지만 우리의 몸은 아직 소설을 쓸 몸이 되지 않아서다, 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의식은 깊은 철학적 통찰과 생생한 감각으로 무장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철학과 감각이 몸 밖으로, 그러니까 글로 흘러나오기까지 일상적 의식의 관성에 물들어 있는 의식을 탈색할 시간이 필요하다. 뜸 들이기. 이 작업은 쓰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빨간책방에서 김중혁 소설가가 잠깐 말해준 정영문 소설가는 침대에서 머리로 다 쓰고 나서 글로 옮긴다고 하지만 그건 그가 '프로' 소설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마추어 소설가는 황석영 소설가의 말처럼 엉덩이로 쓰는 시기를 거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엉덩이로 소설적 문장을 쓸 수 있는 몸에 이르는 시간이 단축됐을 때 프로 소설가가 되는 게 아닌가 싶다. 

 

3. 어휘 사전

 

 세계를 바꿔야 한다. 소설에서 이것은 좋은 문장이 아닐 가능성이 좋은 문장이 가능성보다 훨씬 크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이 문장이 관념적이기 때문이고, 관념적인 문장이 소설의 문장으로서 나쁜 이유는 아까 말한 대로 상투적 인식에 균열을 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또한 철학(로쟈 이현우의 표현에 따르면 철학적 로고스에 치중된 철학)이나 사회과학의 논리적 문장과 다르게 소설의 문장만이 가질 수 있는 구체적 감각성, 감각의 물질성/직접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번 물어보자. 세계를 바꿔야 한다는 문장에서 세계는 도대체 무엇인가? 내가 속해 있는 국가? 지구? 내가 속해 있는 국가라고 했을 때 국가를 바꾼다는 건, 요즘 정부에서 자주 쓰는 표현에 따르면 국가를 '개조'한다는 건 도대체 무엇인가? 담뱃값과 자동체를 인상하는 것? 이 변화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았고, 흡연자들이 금연하도록 만들었기(강제했기) 때문에 세상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지만 담뱃값을 인상하자 라는 문장으로 충분한 것을 굳이 세계를 바뀌자는 식으로 포장할 이유는 없기 때문에 여전히 세계를 바꿔야 한다는 문장의 결점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디선가 이런 문장을 읽은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황현산 평론가의 문장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잘 표현된 불행>의 서문?). 어차피 정확하게 옮겨내지 못할 거 내 식대로 윤색을 감행하기로 한다(그러면 출처는 왜 밝힌 거지?).문학의 문장은 정치가의 연설문처럼 '뽀대'나지 않는다. 우리에게 희망찬 미래를 약속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읽으면 읽을수록 고통스럽게 만드는 불편한 구석이 있다. 이를 테면 아버지와의 갈등이 있었던 사람이 카프카의 <변신>, <선고(판결)>이나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의 시편을 읽는다는 것은 묻어두었던 아물지 않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거나 진배 없는 자학적 행위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고통스런 대면이 이뤄지고 나면 내면의 힘이 조금 붙은 느낌을 어렴풋이 받기도 한다. 치유라고 할 수 있을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이해할 수 없었던 상대방/타자를 조금이나마 '납득'하게 되면서 자신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던 유령 같은 어둠으로부터 조금 자유로워졌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자신이 쓸 수 있는 어휘 사전에 뒤쪽에 있는 단어와 문장을 구사할 것. 이 대목을 읽으면서 문학은 정확한 말하기/글쓰기의 욕망이라고 말한 신형철 평론가가 생각났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의 해설을 쓰기도 했고, 문학동네 팟캐스트 초반에 게스트로 '소설 쓰는' 김연수를 초대했으며, 아트앤스터디에서 진행한 서사윤리학 수업에서 김연수 작가를 다루는 등 공통분모가 심심찮게 보이는 한 쌍의 정확한 남자들. 

 또 하나 소설을 소설의 인물이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개고생하는 이야기라고 표현한 대목에서 신형철 평론가의 몰락의 에티카 서문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문학은 실패한/몰락한 자들의 이야기이며, 몰락 이후의 첫 번째 표정에 대한 이야기이다(이것도 읽은 지 꽤 돼서 정확성도 크게 떨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ㅜ). 전부인 하나를 위해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한 자의 이야기. 이 문장에서 영감을 받아 국카스텐은 <깃털>이란 곡을 만들었고(EBS스페이스 공감 곡 설명 참조), 최근에 발매된 2집에 깃털이 포함되어 있다. 

 대가끼리는 통하는 것일까? 아마 김연수 소설가, 신형철 평론가 모두 자신을 대가로 칭한다면 혀를 내두르며 당치도 않다는 반응을 보일 것으로 예상되지만, 그 정확함이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열쇠일 것이다. 

 

 소설가의 일. 소설 쓰는 김연수의 소설창작론 강의. 이 강의를 듣고 많은 아마추어 소설가들을 더 많은 토고를 쏟아내기를, 그렇게 한 문장에서 다른 한 문장으로, 거듭 쓰며 신인작가로 발돋움하기를 응원해본다.

 

출판사 서평

“매일 글을 쓴다. 그리고 한순간 작가가 된다.
이 두 문장 사이에 신인 즉 새로운 사람이 되는 비밀이 숨어 있다.”

이 문장에 가슴이 뛰다면 당신은 충분히 소설을 쓸 자질이 있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라 소설 쓰는 사람이 소설가라는 간단하면서도 간단하지 않은 사실을 알려준 '젊은 작가'가 더 많은 술을 마시며 더 많은 글을 남기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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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다뤄져 왔는지,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떻게 담론화가 진행되었는지 살펴 보았습니다.



고대 - 중세 - 르네상스 - 바로크 - 계뮹주의 - 근대



고대엔 과학적, 물질적으로 멜랑콜리를 해명하고자 한 히포크라테스와 정신적으로 해명하고자 한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가 있었습니다.

멜랑콜리는 '은혜로운 광기'로 설명되었습니다. 위대한 학자/예술가는 멜랑콜리에 걸릴 수밖에 없고, 그 멜랑콜리에 의해 천재가 될 수 있다는 식의 설명이었습니다. 그래서 멜랑콜리는 상류층의 특권적 질병이었고, 노예-여자는 감히 멜랑콜리에 걸릴 수 없다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멜랑콜리는 굉장히 정치적이면서 계급적인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중세엔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계열의 주지주의적 성향이 더 짙어졌습니다. 별의 움직임을 통해 우주의 운행을 읽어내고자 했던 점성술과 주로 남성 수도자들이 걸리는 영혼의 문제로 설명하는 방식이 있었습니다. 점성술은 별의 움직임을 통해 우주의 운행을 읽어내고자 했고, 멜랑콜리는 토성Saturn과 연결지어 설명했습니다. 수전 손택은 토성의 네 가지 특성 (제일 멀다, 느리가, 차갑다, 무겁다)을 바탕으로 발터 베냐민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제일 멀다 : 메시아니즘/ 느리다 : 산책자/ 차갑다 : 놀라운 사유력/ 무겁다 : 하강 판타지(서 있는 것을 쓰러진 폐허로 봄).

남성 수도사들이 멜랑콜리에 걸리면 죄악시했는데, 신앙이 부족해서 사탄에 홀렸다는 식으로 멜랑콜리에 걸린 원인을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신에게 향해 있어야 할 정신이 다른 지상적인 것에 한눈 팔고 있으니 허영이 많아지고, 나태해지고, 무기력해진다는 식의 설명으로 고대에서 신화화된 멜랑콜리는 중세에 와 저주화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르네상스엔 다시 멜랑콜리에 대한 찬양론으로 상황이 급변합니다. 모든 천재는 멜랑콜리의 아들들이란 식으로 말이죠(여전히 딸들은 멜랑콜리에 걸릴 수 없다고 본 것 같습니다).



바로크 시대는 어떨까요? 바로크는 시기적으로 15~16세기에 해당하는데 이때 전쟁이 많이 발발하기도 했고,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시기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 궁정에서 상연된 비애극-애도극Trauerspiels은 비극tragedy란 장르와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비극은 대단원에 이르러 승화가 이뤄지지만, 비애극은 승화가 일어나지 않고 난장판으로 마무리됩니다. 바로크는 멜랑콜리의 컬트화가 이뤄진 시기였다고 합니다. 발터 베냐민은 독일 비애극의 원천이란 박사논문을 바탕으로 집필한 저서에서 문학적으로 저평가받았던 비애극에 주목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보니 좀 더 이해가 됐습니다. 또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인물들을 모두 멜랑콜리커로 설명하는 부분이 재밌어 햄릿을 다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작년 말에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 진행한 세월호 포럼에서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이동연 교수님도 햄릿을 읽자는 얘기를 해주셔서 이날 셰익스피어의 이름이 좀 더 깊게 울렸던 것 같습니다)



파스칼의 팡세에 대한 설명도 흥미진진했습니다. '저 우주의 진공이 나를 전율케 한다' 아무 것도 없는, 가공할 정도의 절망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희망/신을 찾고자 함. 끊임없이 신을 갈구하지만 대답 없는 신.





바로크 시대에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멜랑콜리가 유행했다고 합니다. 의사 리처드 버튼은 Anatomy of melancholy란 저서를 출간하며 히포크라테스 이후 끊긴 멜랑콜리에 대한 유물론적, 병리학적 탐구의 부활시킵니다.



계몽주의 시대부터 멜랑콜리에 대한 병리화 작업이 시작됐다고 합니다. 애도와 우울증 모두 대상의 상실에서 촉발되는데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애도는 사랑을 대상을 찾기 위한 건강한 앓음이라면 우울은 자기 자신 속에 매몰돼 있는 부정적 질병으로 대조적으로 설명됩니다. 여기에 대해 이현우 교수의 저서 <애도와 우울증>에 내용을 덧붙입니다.



애도와 우울중은 모두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자리에 들어선 어떤 추상적인 것, 즉 조국, 자유, 어떤 이상 등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애도의 경우에는 일단, 현실성 검사를 통해서 드러난 사실, 즉 사랑하는 대상이 이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대상에 부과되었던 모든 리비도를 철회시켜야 한다는 요구를 점차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상실의 충격으로부터 벗어난다. 하지만 우울증은 상실한 대상과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함으로써 대상 상실이 자아상실로 전환된다. 그리고 대상과 자아 사이의 갈등은 동일시에 의해 변형된 자아와 자아-이상으로서의 초자아 사이의 갈등으로 변모되고, 이것은 대상화된 자아에 대한 애증의 감정을 낳으면서 급격한 자기애의 상실, 곧 자기 비하로 이어진다. 이러한 애도와 우울증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을 세 가지로 정리하면, 첫째, 애도는 의식적인 대상과 관련되지만 우울증은 무의식적인 대상과 관련된다. 둘째, 애도는 대상과 관련되지만 우울증은 나르시시즘, 즉 자아 형성과 관련된다. 섯째, 애도와 달리 우울증에서는 애증의 양가감정이 자아 내부로 투사되면서 사랑의 대상을 자아로 바꾸고, 자신의 자아는 초자아의 역할을 하면서 사디즘을 발현시킨다.



(p28~29)



루터와 칼뱅주의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루터는 청교도적 자세로 신과의 소통을 중시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도덕-윤리가 판치는 사회에서 신에 대한 은총을 추구하기 위해 경건주의적 태도를 취했습니다. 이에 따라 현실에 대한 도외시가 이뤄졌고,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인간의 존재 의미의 신에 대한 믿음 속에서'만' 찾으려고 하니 먹고 사는 문제마저도 제쳐두고 신앙생활에 몰두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칼뱅주의는 예정론이란 프레임을 통해 이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신이 인간을 구원할지 안 할지는 이미 예정되어 있다. 또한 직업-노동도 신앙생활의 일부이기 때문에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



계몽주의 시대에 멜랑콜리에 대한 병리화 작업은 왜 일어난 것일까? 그것은 계몽주의가 이성의 추구를 통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사유할 수 있다는 믿음. 하지만 사유의 끝/종착지는 불가능(성)이기 때문에 이성이 주도한 멜랑콜리의 담론화 작업에서 배제되고 억압되고 담론화되지 못하고 추방된 어둠의 자식들, 입이 없는 것들이 프로이트가 말하는 억압된 것의 회귀the return of the repressed를 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최근에 읽은 이성복 시인의 대담집 <끝나지 않는 대화>에서 이성복 시인의 필생의 문제로 '불가능'을 상정해 천착하는 걸 읽고 멜랑콜리와 불가능의 관계를 좀 더 파고들어가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어서 설명해주신 부르주아 부분은 개인적으로 정말 무릎을 치고 싶은 심정이 들 정도로 이론을 통한 현실문제에 대한 분석이 탁월하게 느껴졌습니다. 초창기에는 부르주아 시민들이 건강했다고 합니다. 경제적, 정치적 의미로 건강했던 부르주아들은 건강한 노동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사유재산-부에 대한 사회적 책임감이 있었다고 합니다(사회로 환원하는 식의). 하지만 자본주의가 진행됨에 따라 개인의 도덕은 지속불가능한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쁘띠 부르주아는 오직 부를 축적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이고, 정치에 대해 무관심해지면서 탈정치화됩니다. 부의 축적을 통해 행복이란 이념-이상향에 도달하려 하지만 나보다 더 잘 사는 사람이 있으면 만족될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소시민들은 권태에 빠지고 불행의식에 빠지게 됩니다. 재벌은 왜 골목상권까지 침투-침략하는가에 대해 그것이 시장 자본주의의 메커니즘, 생리 자체라는 설명, 그렇게 끊임없이 더 많이 추구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것이 소위 말하는 '무한경쟁'이라는 걸 깨닫고 성장의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호출하고 있는 현 정부에 대해, 아니 자본주의의 대기권 안에 있는 우리 세대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공동체에 대한 무관심, 바깥-사회, 정치적 영역에서 단절된 채 내면에 스스로 만들어낸 행복 이념을 골몰하는 사람들. 이 실현될 수 없는 욕망이 곪아 끝내 악성종기로 터져버리는 양태 중 하나라 히스테리라고 했습니다(조현아 부사장은 왜 이렇게 히스테리컬한가 라는 저번 시간의 말씀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네요). 프루스트의 소설 살롱 여인들과 프로이트가 진찰한 여성 환자들이 대표적인 경우라고 하는데요. 사회진출이 금지된 여성들에게 좀 더 첨예하게 나타난 겁니다. 이렇게 내면으로의 도피 말고 자연으로의 회귀도 있었는데 이 역시도 현실에 대한 외면이라는 점에서 결함이 있다는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개인적으로 청년 세대에 짙게 깔린 무기력도 이런 맥락에서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취업(생존)을 위해 학력과 스펙에 매몰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한 극단에는 잉여들이 양산되고, 한 극단에는 경쟁을 통한 차별은 정당하다고 말하는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에 나오는 경쟁시스템에 과잉으로 적응한 괴물들도 만들어지는 극단적 양상. 강의 마지막에 세월호 얘기를 많이 해주셨는데 개인적으로 속칭 일베, 일간베스트에 대한 이야기도 멜랑콜리의 차원에서 다뤄주시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이 발명한 자유, 평등, 박애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하는 근대가 세워졌는데 이 자유의 불가능성과 존재의 무의미성이 엘리트 계급에 국한돼 있던 멜랑콜리의 일반화를 야기했다고 합니다. 쁘띠 부르주아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냉소적 우월성'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냉소적 우월성은 보통 일반인보다 더 많이 자유를 추구하는 지식인, 교양인, 예술가들에게 나타나는데, 그들은 멜랑콜리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난 멜랑콜리해' 자기승인을 하고, 발버둥치고 저항하는 이들을 밑에서 내려다봄으로써 심리적으로 우월적 지위를 점한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정치에 대해 환멸하고, 의미 운운하고 진보 운운하는 이들을 냉소합니다. '어차피' 바뀌지 않을 거야, 생은 무의미하고 자유는 불가능해. 현실에서 한 발짝 떨어져 고고하게 자신을 지키는 냉소적 우월주의자로 김영하 소설가를 지목하기도 했습니다. 함돈균 평론가의 평론집 <예외들>에서 김영하의 <빛의 제국>에 투영된 작가의 정치의식, 냉소적 포즈를 비판하는 대목이 기억나기도 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청년 운동, 문화 운동을 일으킨 대표적 사례로 수전 손택을 거론했는데 그녀 역시 현실도피적 행위라는 비판을 피하진 못했습니다.



애도불가능의 사회. 선생님은 세월호에서 침몰한 아이들이 마지막에 본 것은 무엇일지에 대해 물었습니다. 구해줄 거라 굳게 믿었고, 탈출하기 위해 창문을 절박하게 두드리고 있는 아이들을 버려두고 빈손으로 돌아간 해경을 보면서 그들이 무엇을 알게 되었을지에 대해.

http://na-dle.hani.co.kr/arti/issue/71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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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와 철학. 이 조합에서 처음 연상되는 건 발터 벤야민/베냐민(베르그손처럼 베냐민으로 표기가 정착될까요?)이었습니다. 김진영 선생님이 이 수업을 듣게 된 동기를 물으셨을 때 저는 발터 베냐민에 관심 있다고 대답했지만 아트앤스터디 팟캐스트를 통해 조금이나마 들어본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 강의를 굉장히 좋았고, '풀버전'으로 맛본 이번 강의 역시 기대를 뛰어넘어 굉장히 만족스러웠습니다. 어떤 분이 김진영 선생님과 이번 강의 주제가 딱 들어맞는다는 논평을 해주셨는데 수업을 듣고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어떤 강의였는지 천천히 살펴보겠습니다.

 

이번 학기에 진행되는 멜랑콜리와 철학, 다음 학기에 진행될 예정인 멜랑콜리와 예술에 대한 전반적인 스케치를 하셨습니다. 전자는 멜랑콜리란 주제를 철학에서 어떻게 다뤄왔는지 해석사를 살펴 보고, 후자는 뒤러의 그림, 김광석의 목소리, 이은주의 얼굴, 현대클래식 음악 등 예술작품에서 멜랑콜리가 어떻게 표현됐는지 살펴 보는 시간이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강의에서 다루고자 하는 멜랑콜리가 도대체 무엇인지 먼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데 멜랑콜리가 담론화되어 있기 때문에 논하기 어렵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멜랑콜리와 멜랑콜리적인 것의 구분을 강조하셨습니다. 멜랑콜리가 담론화되고 교양화된 (죽어 있는) 개념에 가깝다면, 멜랑콜리적인 것은 실제로 감각할 수 있는 (살아 있는) 느낌, 상태에 가까운 것입니다.

 

독일어로 우울을 뜻하는 schwermut의 풀이로 멜랑콜리를 이해하는 데 한 걸음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우울schwermut는 무거운 마음이다(schwer(무거운)와 mut(마음)). 아무리 기뻐도 남아 있는 무거운 마음, 이것이 우울이다. 이 무거운 마음을 벗어날 때 우리는 주이상스(향유)나 황홀경을 경험했다고 하지만 그런 초월적 경험은 일상에서 잘 발생하지 않는다.

 

 1. 왜 멜랑콜리인가

 

오늘날의 사회를 양극화 사회라고 하는데 선생님은 양극화라도 있으면 다행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좋은/나쁜, 부/빈, 이렇게 명확하게 대치하고 있는 안티테제가 있으면 전복의 가능성이 있을 텐데 오늘날은 멜랑콜리 안에서 통합된 것에 가까운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있는 자들은 행복한가라는 질문을 던지셨고, 이 질문에 동의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보면서 멜랑콜리의 대기권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매일매일' 멜랑콜리는 마시고 있다는 진단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열심히 노력하는데 왜 노력할수록 나아지는 게 아니라 나빠지는가. 이 자기배반의 상황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멜랑콜리의 대기권에 갇혀 있는가. 그러면서 한국문학이나 영화가 상류사회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는 지적을 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렇다면 상류사회의 멜랑콜리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작품으로 어떤 작품을 꼽을 수 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최근에 나온 영화로 보면 우디 앨런의 블루 재스민, 마틴 스콜세지의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정도? 김진영 선생님이 다른 강의에서 다룬 적 있으신 필립 로스의 텍스트도 이런 관점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피로사회, 투명사회, 단속사회 등등 ~~사회란 제목으로 사회를 진단하는 책들이 일종의 트렌드를 형성했고, 그 중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가 독일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큰 주목을 받았는데 과연 피로사회가 한국사회를 설명할 수 있는 적절한 개념인가 하는 반문을 하시면서 들뢰즈가 말했던 소진사회와 피로사회를 비교하셨습니다. 피로는 힘을 많이 써버린 상태이고, 힘을 회복해 다른 상황을 희구해볼 수 있는 변화의 잠재적 가능성이 존재하는 상태이지만, 소진은 힘이 '고갈된' 상태라서 잠재적 가능성이 부재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소진된 사회의 인간상을 보여주고 있는 작가로 사무엘 베케트를 꼽았습니다. 베케트의 대표작인 <고도를 기다리며>에 대한 얘기를 잠깐 해주시면서 무대장치를 최소화한 무대, 잎이 다 떨어진 나무 한 그루만 있는 배경,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고도를 기다린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고도를 기다린다고(고도가 올 거라는 믿음이 있다고) 볼 수 없고, 그들에게 남은 것은 육체뿐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그래서 피로사회/인간과 소진사회/인간의 구원 양상이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것이 이 강의를 통해 묻게 될 질문이 될 거란 걸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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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앤스터디 2015-02-02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윤스리 님! 안녕하세요, 아트앤스터디입니다. :) 소중한 강의 노트 감사합니다. 윤스리님의 글들은 하나하나 정성이 가득하네요. ㅎㅎ 다음 수업때도 좋은 모습으로 뵈어요~
 
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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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 <소년이 온다>1980년 광주, 계엄군에 맞서 싸운 소년 동호와 그곳에 남아있던 사람들,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올해 읽었던 한국소설,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 읽었던 모든 소설 중에 강렬한 이미지를 남긴 작품.

리뷰 : 소설은 어떻게 시작될까?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이 질문을 한번쯤 던져봤을 것 같다. 이 질문을 작가에게 옮긴다면 나는 왜 쓰는가로 변주될 것이다. 책과 소설가들의 강연을 기웃거린 결과 몇몇 답변들을 얻을 수 있었다. 천명관 소설가는 핑크라는 단편이 대리운전을 하는 당신의 친구가 해준 이야기의 첫 문장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여자 아이가 태어났다에서 시작됐다고 말해주셨다. 이렇게 한 문장에서 출발하는 소설도 있고, 특정 이미지에서 출발하는 소설도 있다. 작가의 자전적인 경험에서 출발하는 소설도 있고, 작가가 가장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실존적 질문에서 출발하는 소설도 있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바로 그 질문에서 시작된 소설이라고 한다(문학동네 문학이야기 팟캐스트를 참조했다). 한강이 쓸 수 있는 가장 밝은 이야기라고 설명한 <희랍어시간>을 쓰고 나서 더 밝은 세계로 나아가고 싶은데 그럴 수 없었다고 한다. 그 원인을 밝히기 위해 내면을 찬찬히 살핀 결과 80년 광주의 기억과 만났다고 설명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한 번은 아무것도 아니다는 독일속담이 인용되는데 사실 어떤 한 번모든 것이 되기도 한다. 인간의 잔인한 폭력성을 가감 없이 보여준 80년 광주라는 트라우마적 사건을 겪은 한강은 아마도 이 한 번이 언제든지 반복될 수 있음을,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인간이란 존재를 완전히 끌어안고, 긍정하는 건 자기기만임을 직감했던 것 같다. 소년은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오기 시작했다.


4쇠와 피에서는 차마 입에 담기 버거운 잔인한 고문의 기억을 담담한 언어로 서술하고, 6꽃핀 쪽으로에서는 동호 어머니의 구수한 사투리가 아들을 잃은 어미의 슬픔과 마찰하면서 더 짙은 비의를 전달한다. 작가는 쓴다. ‘삼십 센티 나무 자가 자궁 끝까지 수십번 후벼들어왔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p167)’로 시작하는 처참하고 처절한 증언불가능성에 대한 증언을,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p192)’ 동호의 맑은 영혼의 목소리를 불러내는 기억을, 소년들의 무덤 앞에서 슬픔에 자신을 내어주지 않고 반투명한 날개처럼 파닥이는 불꽃의 가장자리를 나는 묵묵히 들여다보고 있었다.(p192)’ 자신이 써야() 할 것을 (p211)’ 쓰기 위해 묵묵히 죽음의 자리를 응시하는 곧은 자세를. 그러면서 그녀는 싸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심의 광휘에 대해 쓰고(p116), 부서짐으로써 존재를 증명한 영혼에 대해 쓰며(p130), 존엄의 순간(p213)에 대해 쓴다. 한강은 폭력으로 짓밟힌 폐허 속에서 인간을 정당한’, ‘정확한이유로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불가능해 보이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촛불 같은 한 줄기 미세한 빛줄기를 길어올리기 위해 그녀는 <소년이 온다> 집필 당시 잠자다가도 악몽에 시달려 벌떡 일어났다고 했다. 그 불면(不眠)이 있었기에 광주의 노래가 살 속으로, 뼈 속으로 전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노래는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함께 읽으면 좋을 책 (5) :

이것이 인간인가(프리모 레비), 봄날(임철우),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조르조 아감벤), 죽음의 푸가(파울 첼란), 1980 대중 봉기의 민주주의(김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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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51

홍대 칼국수집 두리반은 작은 용산이었다

용산에서 5명이 망루에 올라가 불타 죽었지만두리반에서는 뮤지션-예술가들이 공연을 하면서 1년여가 넘는 장기간 동안의 투쟁을 통해 시민의 정당한 권리를 지켜내는데 성공했다.

홍대의 땅값이 비싸지는 바람에 공연할 공간을 잃어버린 뮤지션들과 재개발을 이유로 적당한 보상금을 '먹고 떨어지라'는 식으로 주며 자본의 폭력을 행사하려는 대기업에 저항한 두리반 사장님들의 연대가 만들어낸 작은 기적이었다. 이렇게 표현해보면 어떨까. '집'을 잃어버린 이들의 '우리 집 지키기 프로젝트',의 성공

야마가타 트윅스터의 한받과 객원댄서 이랑, 하헌진, 강정 jam docu에서도 본 적 있는 밤섬해적단, 회기동단편선 등의 뮤지션이 파티51에 동참했고, 씨네토크에 출연해주신 심보선 시인을 비롯해 1월 11일 동인이 낭독회를 적극적으로 열었다고 했다. 이 얘기를 듣고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문예중앙에 연재 중인 '가사 울림통'에 나온 4명이 모두 두리반-파티51에 연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야마가타 트윅스터, 회기동 단편선, 이랑, 1월 11일 동인인 밴드 MOT의 이이언까지.

아마 용산 이후로 '예술/문학과 정치'가 다시 화두로 떠오른 것으로 알고 있다.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전통적인 리얼리즘의 허구성을 비판하며, 예술의 정치성, 미적인 것의 정치성, 예술과 정치의 접점을 찾으려는 다각적 시도가 이뤄져 왔다. 대산문학상 수상 당시 이광호 평론가가 예술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만남을 자신의 비평적 화두로 삼는다는 식의 소회를 밝혔고, 이는 문학과 정치를 탐구하는 다른 평론가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현장'의 중심에 있었던 진은영 시인의 <문학의 아토포스>는 그런 의미에서 문학과 정치에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읽지 않을 수 없는 책일 것이다. 문득 진은영 시인은 두리반 투쟁에 참여하셨을지 궁금해졌다. '베프' 심보선 시인과 함께 참여했을 거란 예상 ^^

용산 사건은 한국 문단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문학인들은 <작가선언 6.9>을 발표하고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 문집을 냈다. 뿐만 아니라 이시영 시인의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를 비롯해 많은 작가들이 용산을 문학화하고, 증언하고자 했다. 세월호 사건 이후의 반응도 비슷한 것 같다. 문학인들의 시국선언과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 문집 발간.

 

파티51 관람 후 내게 남은 이미지는 이랬다. 자본보다 무서운 법. 법보다 더 무서운 자본과 유착한 법. <법의 힘>. 현재 법이 자본으로부터 얼마나 독립적이고 자유로운지 잘 모르겠고, 법이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이고 자유로울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르겠다. 정의 - 옳은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힘이 약하고, 힘이 강한 사람들은 정의롭지 않기 때문에 권력/폭력과 정의 사이의 괴리가 있다는 문장을 읽은 기억이 나는데 '힘이 곧 정의'가 되는 약육강식의 논리를 멈추고 정의실현이라고 하는 법의 텔로스를 실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정치. 정치의 올바른 작동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정치의 올바른 작동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아니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이 정치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로선 역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지만 벤야민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앞으로는 정치가 역사에 대해 우위를 차지하도록 해야 한다.'(k[1,2])고 말했을 때 정치는 자본주의 시대니까 ~~ 해야 한다 같은 식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내면화된 주체들의 자기복제적 중얼거림이 아니라 이 이데올로기의 꿈으로부터 각성해 이전부터 존재했으나 현실화되지 못한 '오래된 미래'를 지금-여기에 도래시키는 언어, '문자의 사슬을 끊고 나오는 해방된 산문', 임재하는 진리의 언어로 말해지는 그 무엇이 아닐까 어렴풋이 추측할 뿐이다.

 

파티51은 유쾌한 영화였다. 무엇보다 두리반 현장에서 미친 듯이 소리지르고 춤추고 열광하며 즐긴 청중들이 부러웠다. 고2나 고3였을 텐데 그때 두리반-파티51을 경험했다면 지금의 나와는 조금, 혹은 많이 다른 모습이 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마지막으로 회기동 단편선의 라이브 무대 정말 좋았고, 언젠가 꼭 한 번 한받 님과 '돈만아는저질' 댄스를 같이 추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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