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일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평점 :
품절


 젊은 작가, 그러니까 아직도 젊은 작가, 혹은 언제까지나 젊은 작가일 것 같은 '소설 쓰는' 김연수가 쓴 에세이. 도서관에서 2명씩 예약이 꽉 차 있는 바람에 접근할 수조차(?) 없었던 <소설가의 일>을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한 번에 쭉 읽을 수 있었다.

 

 

1. 도너츠

 

 문학동네 카페에 연재된 글이란 사실은 알고 있었다. 연재 당시까지만 해도 김연수 작가에 대한 애정이 지금과는 영 딴판이어서 연재글을 챙겨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너츠 서사론'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이때 당시 아직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와 <청춘의 문장들>을 읽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김연수와 빵이 얼마나 각별한 사이인지[뉴욕제과점] 미처 생각지 못했다). 도너츠 서사론이 뭐냐 하면 소설의 문장은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직접 말해서는 안 되며, 말하고자 하는 것을 중심에 구멍으로 비워두고 그 주변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소설의 문장은 모두 보여주기를 위한 묘사의 문장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며, 직접 말하기의 방식을 취하고 있는 설명의 문장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요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혹은 다르게 말함으로써 일상의 어법과 다른 어법, 소통을 꿰하는 것이 문학의 언어라는 점이다. 지각에 소요되는 시간을 연장해 미적 효과를 노리는 쉬클로프스키의 '낯설게 하기' 기법과도 비슷한 맥락이 있다. 도너츠의 가운데 텅 빈 공간은 독자에 의해 채워져야 하는 창조적 독서의 장일 것이다. 낯익은 언어로는 독자의 의식에 어떤 변화나 균열을 만들어낼 수 없다. 낯선 언어는 우리가 평소에 잘 안 쓰는 고어古語나 전문용어, 은어의 사용이 아니라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사이의 낯선 매칭 속에서 만들어진다. 무엇을 말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말하느냐가 관건인 것이다.

 

2. 토고( 나라 이름 말고) 

 

 여기 소설가 지망생 K가 있다. 아마추어 소설가라 불러도 좋다. 그가 쓰고 싶은 글은 소설이다. 그가 그 동안 읽어온 소설 같은 글을 그는 쓰고 싶어 한다. 읽은 이의 가슴을 뛰게 하고, 상투적 인식의 패턴을 뒤흔들리고, 한마디로 '끝내 주는' 소설을 쓸 마음으로 흰 종이를 채우지만 그는 글을 확인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 글이 읽으면 토할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하는 '토고'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김연수는 말한다. 누구나 토고를 쓴다. 중요한 건 계속 실패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만이 토고를 넘어 좋은 소설로 넘어갈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한 가지 왜 토고는 토고인가 짚어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소설을 쓴다고 앉아 있지만 우리의 몸은 아직 소설을 쓸 몸이 되지 않아서다, 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의식은 깊은 철학적 통찰과 생생한 감각으로 무장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철학과 감각이 몸 밖으로, 그러니까 글로 흘러나오기까지 일상적 의식의 관성에 물들어 있는 의식을 탈색할 시간이 필요하다. 뜸 들이기. 이 작업은 쓰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빨간책방에서 김중혁 소설가가 잠깐 말해준 정영문 소설가는 침대에서 머리로 다 쓰고 나서 글로 옮긴다고 하지만 그건 그가 '프로' 소설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마추어 소설가는 황석영 소설가의 말처럼 엉덩이로 쓰는 시기를 거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엉덩이로 소설적 문장을 쓸 수 있는 몸에 이르는 시간이 단축됐을 때 프로 소설가가 되는 게 아닌가 싶다. 

 

3. 어휘 사전

 

 세계를 바꿔야 한다. 소설에서 이것은 좋은 문장이 아닐 가능성이 좋은 문장이 가능성보다 훨씬 크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이 문장이 관념적이기 때문이고, 관념적인 문장이 소설의 문장으로서 나쁜 이유는 아까 말한 대로 상투적 인식에 균열을 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또한 철학(로쟈 이현우의 표현에 따르면 철학적 로고스에 치중된 철학)이나 사회과학의 논리적 문장과 다르게 소설의 문장만이 가질 수 있는 구체적 감각성, 감각의 물질성/직접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번 물어보자. 세계를 바꿔야 한다는 문장에서 세계는 도대체 무엇인가? 내가 속해 있는 국가? 지구? 내가 속해 있는 국가라고 했을 때 국가를 바꾼다는 건, 요즘 정부에서 자주 쓰는 표현에 따르면 국가를 '개조'한다는 건 도대체 무엇인가? 담뱃값과 자동체를 인상하는 것? 이 변화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았고, 흡연자들이 금연하도록 만들었기(강제했기) 때문에 세상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지만 담뱃값을 인상하자 라는 문장으로 충분한 것을 굳이 세계를 바뀌자는 식으로 포장할 이유는 없기 때문에 여전히 세계를 바꿔야 한다는 문장의 결점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디선가 이런 문장을 읽은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황현산 평론가의 문장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잘 표현된 불행>의 서문?). 어차피 정확하게 옮겨내지 못할 거 내 식대로 윤색을 감행하기로 한다(그러면 출처는 왜 밝힌 거지?).문학의 문장은 정치가의 연설문처럼 '뽀대'나지 않는다. 우리에게 희망찬 미래를 약속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읽으면 읽을수록 고통스럽게 만드는 불편한 구석이 있다. 이를 테면 아버지와의 갈등이 있었던 사람이 카프카의 <변신>, <선고(판결)>이나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의 시편을 읽는다는 것은 묻어두었던 아물지 않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거나 진배 없는 자학적 행위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고통스런 대면이 이뤄지고 나면 내면의 힘이 조금 붙은 느낌을 어렴풋이 받기도 한다. 치유라고 할 수 있을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이해할 수 없었던 상대방/타자를 조금이나마 '납득'하게 되면서 자신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던 유령 같은 어둠으로부터 조금 자유로워졌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자신이 쓸 수 있는 어휘 사전에 뒤쪽에 있는 단어와 문장을 구사할 것. 이 대목을 읽으면서 문학은 정확한 말하기/글쓰기의 욕망이라고 말한 신형철 평론가가 생각났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의 해설을 쓰기도 했고, 문학동네 팟캐스트 초반에 게스트로 '소설 쓰는' 김연수를 초대했으며, 아트앤스터디에서 진행한 서사윤리학 수업에서 김연수 작가를 다루는 등 공통분모가 심심찮게 보이는 한 쌍의 정확한 남자들. 

 또 하나 소설을 소설의 인물이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개고생하는 이야기라고 표현한 대목에서 신형철 평론가의 몰락의 에티카 서문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문학은 실패한/몰락한 자들의 이야기이며, 몰락 이후의 첫 번째 표정에 대한 이야기이다(이것도 읽은 지 꽤 돼서 정확성도 크게 떨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ㅜ). 전부인 하나를 위해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한 자의 이야기. 이 문장에서 영감을 받아 국카스텐은 <깃털>이란 곡을 만들었고(EBS스페이스 공감 곡 설명 참조), 최근에 발매된 2집에 깃털이 포함되어 있다. 

 대가끼리는 통하는 것일까? 아마 김연수 소설가, 신형철 평론가 모두 자신을 대가로 칭한다면 혀를 내두르며 당치도 않다는 반응을 보일 것으로 예상되지만, 그 정확함이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열쇠일 것이다. 

 

 소설가의 일. 소설 쓰는 김연수의 소설창작론 강의. 이 강의를 듣고 많은 아마추어 소설가들을 더 많은 토고를 쏟아내기를, 그렇게 한 문장에서 다른 한 문장으로, 거듭 쓰며 신인작가로 발돋움하기를 응원해본다.

 

출판사 서평

“매일 글을 쓴다. 그리고 한순간 작가가 된다.
이 두 문장 사이에 신인 즉 새로운 사람이 되는 비밀이 숨어 있다.”

이 문장에 가슴이 뛰다면 당신은 충분히 소설을 쓸 자질이 있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라 소설 쓰는 사람이 소설가라는 간단하면서도 간단하지 않은 사실을 알려준 '젊은 작가'가 더 많은 술을 마시며 더 많은 글을 남기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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