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랑콜리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다뤄져 왔는지,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떻게 담론화가 진행되었는지 살펴 보았습니다.



고대 - 중세 - 르네상스 - 바로크 - 계뮹주의 - 근대



고대엔 과학적, 물질적으로 멜랑콜리를 해명하고자 한 히포크라테스와 정신적으로 해명하고자 한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가 있었습니다.

멜랑콜리는 '은혜로운 광기'로 설명되었습니다. 위대한 학자/예술가는 멜랑콜리에 걸릴 수밖에 없고, 그 멜랑콜리에 의해 천재가 될 수 있다는 식의 설명이었습니다. 그래서 멜랑콜리는 상류층의 특권적 질병이었고, 노예-여자는 감히 멜랑콜리에 걸릴 수 없다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멜랑콜리는 굉장히 정치적이면서 계급적인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중세엔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계열의 주지주의적 성향이 더 짙어졌습니다. 별의 움직임을 통해 우주의 운행을 읽어내고자 했던 점성술과 주로 남성 수도자들이 걸리는 영혼의 문제로 설명하는 방식이 있었습니다. 점성술은 별의 움직임을 통해 우주의 운행을 읽어내고자 했고, 멜랑콜리는 토성Saturn과 연결지어 설명했습니다. 수전 손택은 토성의 네 가지 특성 (제일 멀다, 느리가, 차갑다, 무겁다)을 바탕으로 발터 베냐민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제일 멀다 : 메시아니즘/ 느리다 : 산책자/ 차갑다 : 놀라운 사유력/ 무겁다 : 하강 판타지(서 있는 것을 쓰러진 폐허로 봄).

남성 수도사들이 멜랑콜리에 걸리면 죄악시했는데, 신앙이 부족해서 사탄에 홀렸다는 식으로 멜랑콜리에 걸린 원인을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신에게 향해 있어야 할 정신이 다른 지상적인 것에 한눈 팔고 있으니 허영이 많아지고, 나태해지고, 무기력해진다는 식의 설명으로 고대에서 신화화된 멜랑콜리는 중세에 와 저주화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르네상스엔 다시 멜랑콜리에 대한 찬양론으로 상황이 급변합니다. 모든 천재는 멜랑콜리의 아들들이란 식으로 말이죠(여전히 딸들은 멜랑콜리에 걸릴 수 없다고 본 것 같습니다).



바로크 시대는 어떨까요? 바로크는 시기적으로 15~16세기에 해당하는데 이때 전쟁이 많이 발발하기도 했고,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시기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 궁정에서 상연된 비애극-애도극Trauerspiels은 비극tragedy란 장르와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비극은 대단원에 이르러 승화가 이뤄지지만, 비애극은 승화가 일어나지 않고 난장판으로 마무리됩니다. 바로크는 멜랑콜리의 컬트화가 이뤄진 시기였다고 합니다. 발터 베냐민은 독일 비애극의 원천이란 박사논문을 바탕으로 집필한 저서에서 문학적으로 저평가받았던 비애극에 주목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보니 좀 더 이해가 됐습니다. 또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인물들을 모두 멜랑콜리커로 설명하는 부분이 재밌어 햄릿을 다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작년 말에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 진행한 세월호 포럼에서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이동연 교수님도 햄릿을 읽자는 얘기를 해주셔서 이날 셰익스피어의 이름이 좀 더 깊게 울렸던 것 같습니다)



파스칼의 팡세에 대한 설명도 흥미진진했습니다. '저 우주의 진공이 나를 전율케 한다' 아무 것도 없는, 가공할 정도의 절망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희망/신을 찾고자 함. 끊임없이 신을 갈구하지만 대답 없는 신.





바로크 시대에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멜랑콜리가 유행했다고 합니다. 의사 리처드 버튼은 Anatomy of melancholy란 저서를 출간하며 히포크라테스 이후 끊긴 멜랑콜리에 대한 유물론적, 병리학적 탐구의 부활시킵니다.



계몽주의 시대부터 멜랑콜리에 대한 병리화 작업이 시작됐다고 합니다. 애도와 우울증 모두 대상의 상실에서 촉발되는데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애도는 사랑을 대상을 찾기 위한 건강한 앓음이라면 우울은 자기 자신 속에 매몰돼 있는 부정적 질병으로 대조적으로 설명됩니다. 여기에 대해 이현우 교수의 저서 <애도와 우울증>에 내용을 덧붙입니다.



애도와 우울중은 모두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자리에 들어선 어떤 추상적인 것, 즉 조국, 자유, 어떤 이상 등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애도의 경우에는 일단, 현실성 검사를 통해서 드러난 사실, 즉 사랑하는 대상이 이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대상에 부과되었던 모든 리비도를 철회시켜야 한다는 요구를 점차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상실의 충격으로부터 벗어난다. 하지만 우울증은 상실한 대상과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함으로써 대상 상실이 자아상실로 전환된다. 그리고 대상과 자아 사이의 갈등은 동일시에 의해 변형된 자아와 자아-이상으로서의 초자아 사이의 갈등으로 변모되고, 이것은 대상화된 자아에 대한 애증의 감정을 낳으면서 급격한 자기애의 상실, 곧 자기 비하로 이어진다. 이러한 애도와 우울증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을 세 가지로 정리하면, 첫째, 애도는 의식적인 대상과 관련되지만 우울증은 무의식적인 대상과 관련된다. 둘째, 애도는 대상과 관련되지만 우울증은 나르시시즘, 즉 자아 형성과 관련된다. 섯째, 애도와 달리 우울증에서는 애증의 양가감정이 자아 내부로 투사되면서 사랑의 대상을 자아로 바꾸고, 자신의 자아는 초자아의 역할을 하면서 사디즘을 발현시킨다.



(p28~29)



루터와 칼뱅주의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루터는 청교도적 자세로 신과의 소통을 중시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도덕-윤리가 판치는 사회에서 신에 대한 은총을 추구하기 위해 경건주의적 태도를 취했습니다. 이에 따라 현실에 대한 도외시가 이뤄졌고,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인간의 존재 의미의 신에 대한 믿음 속에서'만' 찾으려고 하니 먹고 사는 문제마저도 제쳐두고 신앙생활에 몰두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칼뱅주의는 예정론이란 프레임을 통해 이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신이 인간을 구원할지 안 할지는 이미 예정되어 있다. 또한 직업-노동도 신앙생활의 일부이기 때문에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



계몽주의 시대에 멜랑콜리에 대한 병리화 작업은 왜 일어난 것일까? 그것은 계몽주의가 이성의 추구를 통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사유할 수 있다는 믿음. 하지만 사유의 끝/종착지는 불가능(성)이기 때문에 이성이 주도한 멜랑콜리의 담론화 작업에서 배제되고 억압되고 담론화되지 못하고 추방된 어둠의 자식들, 입이 없는 것들이 프로이트가 말하는 억압된 것의 회귀the return of the repressed를 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최근에 읽은 이성복 시인의 대담집 <끝나지 않는 대화>에서 이성복 시인의 필생의 문제로 '불가능'을 상정해 천착하는 걸 읽고 멜랑콜리와 불가능의 관계를 좀 더 파고들어가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어서 설명해주신 부르주아 부분은 개인적으로 정말 무릎을 치고 싶은 심정이 들 정도로 이론을 통한 현실문제에 대한 분석이 탁월하게 느껴졌습니다. 초창기에는 부르주아 시민들이 건강했다고 합니다. 경제적, 정치적 의미로 건강했던 부르주아들은 건강한 노동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사유재산-부에 대한 사회적 책임감이 있었다고 합니다(사회로 환원하는 식의). 하지만 자본주의가 진행됨에 따라 개인의 도덕은 지속불가능한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쁘띠 부르주아는 오직 부를 축적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이고, 정치에 대해 무관심해지면서 탈정치화됩니다. 부의 축적을 통해 행복이란 이념-이상향에 도달하려 하지만 나보다 더 잘 사는 사람이 있으면 만족될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소시민들은 권태에 빠지고 불행의식에 빠지게 됩니다. 재벌은 왜 골목상권까지 침투-침략하는가에 대해 그것이 시장 자본주의의 메커니즘, 생리 자체라는 설명, 그렇게 끊임없이 더 많이 추구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것이 소위 말하는 '무한경쟁'이라는 걸 깨닫고 성장의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호출하고 있는 현 정부에 대해, 아니 자본주의의 대기권 안에 있는 우리 세대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공동체에 대한 무관심, 바깥-사회, 정치적 영역에서 단절된 채 내면에 스스로 만들어낸 행복 이념을 골몰하는 사람들. 이 실현될 수 없는 욕망이 곪아 끝내 악성종기로 터져버리는 양태 중 하나라 히스테리라고 했습니다(조현아 부사장은 왜 이렇게 히스테리컬한가 라는 저번 시간의 말씀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네요). 프루스트의 소설 살롱 여인들과 프로이트가 진찰한 여성 환자들이 대표적인 경우라고 하는데요. 사회진출이 금지된 여성들에게 좀 더 첨예하게 나타난 겁니다. 이렇게 내면으로의 도피 말고 자연으로의 회귀도 있었는데 이 역시도 현실에 대한 외면이라는 점에서 결함이 있다는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개인적으로 청년 세대에 짙게 깔린 무기력도 이런 맥락에서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취업(생존)을 위해 학력과 스펙에 매몰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한 극단에는 잉여들이 양산되고, 한 극단에는 경쟁을 통한 차별은 정당하다고 말하는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에 나오는 경쟁시스템에 과잉으로 적응한 괴물들도 만들어지는 극단적 양상. 강의 마지막에 세월호 얘기를 많이 해주셨는데 개인적으로 속칭 일베, 일간베스트에 대한 이야기도 멜랑콜리의 차원에서 다뤄주시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이 발명한 자유, 평등, 박애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하는 근대가 세워졌는데 이 자유의 불가능성과 존재의 무의미성이 엘리트 계급에 국한돼 있던 멜랑콜리의 일반화를 야기했다고 합니다. 쁘띠 부르주아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냉소적 우월성'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냉소적 우월성은 보통 일반인보다 더 많이 자유를 추구하는 지식인, 교양인, 예술가들에게 나타나는데, 그들은 멜랑콜리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난 멜랑콜리해' 자기승인을 하고, 발버둥치고 저항하는 이들을 밑에서 내려다봄으로써 심리적으로 우월적 지위를 점한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정치에 대해 환멸하고, 의미 운운하고 진보 운운하는 이들을 냉소합니다. '어차피' 바뀌지 않을 거야, 생은 무의미하고 자유는 불가능해. 현실에서 한 발짝 떨어져 고고하게 자신을 지키는 냉소적 우월주의자로 김영하 소설가를 지목하기도 했습니다. 함돈균 평론가의 평론집 <예외들>에서 김영하의 <빛의 제국>에 투영된 작가의 정치의식, 냉소적 포즈를 비판하는 대목이 기억나기도 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청년 운동, 문화 운동을 일으킨 대표적 사례로 수전 손택을 거론했는데 그녀 역시 현실도피적 행위라는 비판을 피하진 못했습니다.



애도불가능의 사회. 선생님은 세월호에서 침몰한 아이들이 마지막에 본 것은 무엇일지에 대해 물었습니다. 구해줄 거라 굳게 믿었고, 탈출하기 위해 창문을 절박하게 두드리고 있는 아이들을 버려두고 빈손으로 돌아간 해경을 보면서 그들이 무엇을 알게 되었을지에 대해.

http://na-dle.hani.co.kr/arti/issue/71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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