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른 나라 혹은 선진국에 가면 그 나라의 좋은 면이 부각되어 보이기 마련이다. 편파적 관점이랄까. 적어도 내게는 독일이 각계 각층 인사들이 롤모델로 꼽는 킹왕짱 나라로 지난 몇 년 동안 회자되었다. 독일에서 학위를 받은 교수님들은 독일 대학의 학비와 유학생에 대한 독일 정부의 대우를 높이 샀다. 아이를 낳았을 때 지원되는 생활비, 보모 는 처음 들었을 때 꽤 쇼킹하기까지 했다. 비정상회담의 다니엘을 통해 노잼 이미지가 굳어지긴 했지만 아무말대잔치와 어그로 키배로 얼룩진 온라인상에서도 나름대로 논리정연하게 합리적인 토론을 이어가는 성찰적 면모가 한국에 비해 두드러진다고 하니 역시 칸트의 나라-철학의 나라라 불릴 법하다고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그중에서도 베를린은 공무원 생활을 때려치우고, 소설가-번역가로서 삶을 개척한 배수아 의 도시로, 유럽에서 가장 자유분방하고 전 세계의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핫한 곳으로, 페이스북 포스팅에 따르면 성폭력 또한 제일 많이 일어나는 곳으로 내게 각인되어 있다. 지인이 베를린에서 1년 정도 생활을 하면서 만든 팟캐스트를 통해 베를린이란 도시와 베를리너로서의 생활을 엿볼 수 있었는데 이제는 집값이 비싸져 다른 도시를 알아보고 있다고 한다. 다른 지인은 베를린에서 프랑스인 룸메이트와 함께 지냈는데 낮과 밤이 완전히 뒤바뀐 삶을 살며 클럽으로 출퇴근했던 그녀의 마음이 이제 조금 이해될 것 같다고, 자기도 또 한 번 기회가 된다면 혹은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고 했다. 문화예술의 도시, 가장 리버럴한 도시,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글로벌한 공간, <생각은자유>에 그려진 베를린 또한 이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


2 연구년을 맞아 베를린에서 1년 동안 생활하게 된 극작가/교수와 배우 부부(아마 아내가 배우였던 걸로 기억). 전반적으로 연극은 이 여행-체류 동안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보여주는 데 주력한다. 외국에 나오자 한국의 정치적, 사회적 이슈가 좀 더 민감하고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고, 독일사회를 거울 삼아 한국사회를 바라보게 되는 구도는 내게 굉장히 익숙했다. 싱가포르에서 한 달 동안 지내면서 경험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외부로 나가야만 내부가 보이는 안과 밖, 주체와 타자의 변증법적 운동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싱가포르에 있는 한 달 동안만큼은 한국과 관련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매일매일 쏟아지는 정치, 사회 면의 기사들이 알게 모르게 행사하던 중력으로부터 풀려나 부분적 무중력 상태의 해방감을 만끽했다. 무관하다는 느낌 - 마치 이전에 신자유주의 사회가 각자도생하게 만듦으로써 개인으로부터 공동체적 감각을 박탈시킨다는 지적, 바로 상대방의 고통과 불행이 나와 '무관'하다는 감각을 만든다는 지적을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는 표현일지 모르겠으나 세 번째 출국만에 1달이란 생활 리듬이 교체되는 기간 동안의 타지 생활을 통해 모국어-모국과 이어져 있던 심리적, 정신적 탯줄이 끊어진, 실은 끊어진 건 아니지만 너무 익숙해져 느껴지지 않았던 텐션을 비판적 거리를 두고 의식한 순간이었다. 어쨌든 나처럼 고국에 대한 관심에서 풀려나는 경우와 외국으로 유학 간 예술가들이나 학자들이 종종 보인다는 '애국심 포텐'이 터져 정신적 고아 상태를 상징적 아버지와의 유대를 통해 극복하는 경우 두 가지 유형으로 크게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애국심 포텐'이라 희화화시킨 감이 있지만(사실 극중에서 한인협회 관련 이들을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감이 있다. 보수라기보다 국가주의적 성향이 짙은 국뽕으로 말이다.) 사실 공동체적 감각의 각성은 중요한 문제이다. 전통적인 국민국가의 경계가 해체되고, '한민족' 감각이 피부에 뿌리내린 세대들이 다 가고 나면 어떤 구호와 논리와 감각으로 우리가 공동체임을 자임할 수 있을까, 연대할 수 있을까. 물론 아직까지 민족주의의 문화적 유전자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기미가 보이지만 베를린에서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해 304켤레의 구두 퍼포먼스를 하고, 탄핵 정국에서 시위를 하는 등 이역만리의 타지에서 정치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목소리를 내는 모습은 시민권 여부를 떠나서 (다른 나라 국적을 취득했다손 치더라도) 공동체가 베네딕트 앤더슨이 말한 공동체와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 상상될 수 있는지, 다르게 상상된 공동체가 어떻게 도래할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3 ​혹자는 이 연극이 에피소드의 나열에 그쳤다고 평가했는데 나 또한 일기와 기사의 조각들을 이어붙인 에세이 혹은 다큐멘터리를 읽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연출가/작가의 분신인 주인공이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낀 걸 일차원적으로, 평면적으로 서술한 감이 있어 좀 더 작가적 관점이 투영되어 입체적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지 않았나 아쉬움이 남았다. '생각은 자유' 구호가 결과적으로 너무 나이브하게 들렸달까. 그건 한국사회의 모순과 갈등에 작가이자 시민으로서 개입하려는 연출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문매체에 기고를 하고, 퍼포먼스를 조직하고 등등) 한 발짝 뒤에 서서 관찰자의 포지션을 점하고 있다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아서였달까. 한마디로 일반적인 의미의 '연극적'이지 않은 연극이었다. 다큐멘터리 연극 장르를 표방했다고 하나 지식인의 고뇌를 바라보는 관객의 자리에 위치하게 되니 수평적, 민주적인 소통이 어려웠다고 할까. 가장 민주적인 장르라 할 수 있는 연극의 장점이 어떤 부분에서 발현되었는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시간이 넘는 시간이 처지고 지루하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이렇게 극적 사건 없이 일정한 톤으로 이어지는 연극치고) 소소한 재미와 유머가 흘렀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지만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세월호 사건을 비롯해 지난 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우리가 함께 지나온 자리들을 되짚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p.s 그러고 보니 베를린'자유'대학... 베를린이란 도시의 역사가 궁금해진다. 언젠가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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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나는 대로 일단 정리해보았다. 본격적으로 꿰 맞춰서 쓸 지는 미지수...

 

1 Bifan 최대의 화제작이라 불리는 영화를 이제 봤다. Bifan 당시 예매를 했음에도 날씨 영향인지 기분 탓인지 표를 취소했다. 6천원에 괜찮은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영화를 9천원에 맨 앞줄 구석에서 봤으니 아까운 마음도 들지만 꽤 '힘든' 영화였기에 bifan 때 무리해서 보러 가지 않은 게 좋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2 사실 영화를 보기 전 시놉시스만 보고 스토리를 예상해보았다. '채식주의자였으나 자신의 숨겨진 식인 욕망을 우연히 깨닫게 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의 영화' 라 하길래 일종의 정치적 올바름으로써 채식을 고수하는 이가 식인의 욕망에 눈을 떠 실재를 가로지르는 윤리적 전회를 경험하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을까 예상해봤다. 돼지가, 소가, 닭이, 오리가, 인간들의 인식론적 망에서 '고기'라 통칭되는 물고기가 맛있어서, 팍팍한 세상에 먹는 것에 있어서만큼은 '욕망을 양보하지 않겠다'는 충실성으로, 골고루 먹는 게 건강에 좋다는 이데올로기적 냄새를 풍기는 말을 어설픈 알리바이로 삼아, 스트레스가 만병의 원인이기에 먹는다는 육식의 논리에 동물이면서도 '인간'이라는 특수한 지위로 인해 외부로 설정되어 있던 식인을 이성의 법정에 회부하는 방향이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빗나갔다. 그렇다면 굳이 식인이 아닌 육식을 소재로 삼았어도 충분했을 테니까. 그래도 결과적으로 채식으로 인해 억압되어 있던 본능이 깨어나면서 폭주와 탈주가 이어질 거란 예상 정도는 들어맞은 듯하다

3 본격적으로 스포일러가 포함된 영화 내용을 다뤄보기 전 <로우>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을 축약해서 표현한다면 왓챠에 베스트 코멘트로 올라온 것처럼 ‘금지된 욕망을 가진 주체들이 공동체에서 공존할 수 있는가’를 빼놓을 수 없지만 <로우>는 무엇보다 자매의 이야기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채식주의자 집안의 주인공은 매쉬 포테이토에 들어간 고기에 구역질을 한다. 채식 내력이 꽤 된 것으로 보이는 주인공은 수재라 불린다는 점이나 아직까지 성경험이 없는 것으로 보아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고 일탈하지 않는 모범생으로 자랐을 거라 예상된다. 수의사를 키우는 대학교에 입학한 그녀를 혹독한 신고식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토끼 생간을 먹으라고 하자 자신이 채식주의자임을 밝히고, 이를 증명해줄 증인으로 언니를 찾는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언니는 자신이 채식주의자가 아니라 잡아떼며, 생간을 아무렇지 않게 먹고 동생에게 토끼 생간을 먹으라고 부추긴다. 먹지 않으면 왕따가 될 테니 눈 딱 감고 해치우라고. 억지로 먹은 생간이 부작용을 일으켜서인지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 고생한다. 내장이 혹독하게 신고식을 치룬 이후 주인공의 몸은 스위치가 켜지듯 동물적인 본능이 날뛰기 시작한다. 새벽에 허기를 느껴 새벽에 생고기를 뜯어먹고, 왁싱을 하다가 그동안 쌓였던 언니에 대한 불만으로 인한 짜증의 발길질이 낳은 불의의 사고로 인해 잘린 손가락을 쪽쪽 빨다가 이내 씹어 먹는다. 족발이나 닭발이랑 비슷해 보이는 ... 이때 Jim Williams의 사운드트랙이 하드캐리하는데(유튜브로 검색해서 다시 들었는데 온몸이 소름이 쫙...) 전자 파이프오르간 소리라 추정되는데 파이프오르간의 종교적인 느낌을 컬트적인 분위기를 입어 굉장히 오묘하고 역설적인 감정을 촉발시킨다. 반복되는 멜로디가 감정을 고조시키는데 장엄하고 숭고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슬펐다. 축복이자 저주인 여성괴물의 탄생.

손가락이 잘린 걸 보고 기절한 언니는 동생이 자기 손가락을 먹는 모습을 오히려 덤덤하게 바라본다. 가족 내에서 별종이었던 장녀 언니와 꽃길만 걸었을 수재 동생, 자기 욕망에 먼저 눈을 뜨고 동생의 개안을 도와주려 하지만 호의적인 뜻만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은 언니와 자신을 안전한 세계로부터 추방하는 데 앞장서는 것 같아 원망스럽지만 그럼에도 자기를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언니에게 기대는 동생.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동생이 좋아하는 게이 룸메이트를 먹어버린 언니를 차마 죽이지 못한 건 혼자 남겨질 세상이 너무 외로울 거란 자각에서였을까. 자매와 게이 룸메이트가 그리는 삼각형은 세즈윅이 얘기한 호모소셜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삼각관계가 말 그대로 삼각형의 역학적 구도를 띠고 있다면 남성 연대는 여성을 대상화하고 타자화함으로써 그 혐오와 구별짓기의 동일한 거리를 공유함으로써 친밀성을 구축하는 이등변삼각형 같은 꼴이 아닐까 싶다. 왜 하필이면 언니는 동생이 좋아하는 게이 룸메이트를 먹어버린 걸까? 배가 고파서, 는 아닐 테고 실은 자신도 게이 룸메이트에게 감정이 있어서 자신이 가질 수 없다면 동생에게도 줄 수 없다는 심리가 발현된 걸까, 동생이 자립하길 바라면서 한편으로 자신의 품을 떠나지 않았으면 애착으로 인해 사랑의 경쟁자를 해치운 것일까, 동생이 먹어버리기 전에 동생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먹어버린 것일까.

 

4 자매만의 케미와 더불어 타자를 먹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자매, 형제, 남매, 누나-남동생, 오빠-여동생, 연년생, 쌍둥이, 두 살 터울, 10살 터울, 이복형제, 장남/녀인지, 막내인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족이란 관계는 참으로 미스터리한 것 같다. 혹자는 가족을 가장 가까운 타자라 칭한 바 있는데 이는 앎과 무지의 극적 대비에서 비롯된다. 가족과 공유하는 것과 공유하지 않는 것/공유할 수 없는 것의 경계가 명확할수록 친숙하고 익숙한 타자성, uncanny가 극대화된다. 감정표현에 인색하고 무뚝뚝한 가정에서 감정은 공유되지 않는다. 정치성향이 완전히 갈리는 가정에서 정치적 사유는 공유되지 않는다. 성정체성-섹슈얼리티는 공유되지 않는다. 주체가 individual,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부분으로 구성되기에 공유할 수 없는 부분의 존재는 필수적이라 볼 수 있다. 모든 것이 공유된다면 앎은 권력의 문제인데 고백에 있어 부담해야 하는 리스크가 불균형할 때 고백은 이뤄지기 힘들다. 여행지에서 만난, 다시 볼 일이 없는 이에게 딱히 리스크가 없기에 손쉽게 비밀을 고백할 수 있는 것처럼 반대로 일상의 관성이 강력하게 지배하는 가족에게 속마음을 꺼냄으로써 생기는 심리적 낙차를 견디기가 꺼려져 고백이 불가능해질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아내에게 살점이 뜯겨나간 상처로 뒤덮인 남편-아버지의 몸을 딸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끝나서 좋았다. 아마 아버지는 식인을 하지 않고, 어머니만 하는 것으로 설정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버지를 보며 사랑을 통해 공동체에서 살아갈 여지가 남아 있음을 확인하지 않았을까 싶다. 평소에 자신의 본능을 꼭꼭 누르며 정상성의 가면을 쓰고 살아야 할지라도 계속 쫓아다니고 매달리는 구애를 펼칠 정도의 사랑이라면 자신의 살점이 뜯기는 것까지 참아낼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없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희망의 그림자를 엿본 셈이다.

 

5 <로우>를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떠오른 영화는 <렛 미 인>이었다.(혹자는 <박쥐>를 떠올린다고 했는데) 사회에서 공존이 용인되기 힘든 정체성을 가진 소수자가 등장한다는 점이나 고기는 아니지만 피를 마신다는 점에서 살인-식인의 모티프 등 유사점이 있었고, 식인이 생존의 조건이 아닌 <로우>에 비해 <렛 미 인>은 인간의 피를 마셔야만 살아갈 수 있는 뱀파이어가 등장한다는 점, <로우>는 공동체적 연대의 모색이 가족 내부에서 이뤄지는 경향이 짙은 반면 <렛 미 인>은 소수자적 위치에 있지 않은 일반적인 사람과의 우정과 사랑, 환대(let me in)가 다뤄진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보였다. 아예 태생적으로 종이 다른 <렛 미 인>과 달리 후천적으로 사회에서 용인되기 힘든 소수자적 정체성을 갖게 되고, 이로 인해 고뇌한다는 점에서 <박쥐>와의 친연성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피를 마시는 것과 살을 먹는 것, 몸에 있어 회복 및 재생산의 문제, 먹고 싸고 자고 씹하는 존재의 기본값에 대하여, 단식과 불면, 변비와 설사, SM과 수간獸姦, 시간屍姦 등 각종 간음행위에 대하여, 내부와 외부, 자아와 타자, 정상과 비정상에 대하여, 에로스와 타나토스...

<나 자신이고자 하는 충동>에서 아마 마루야마 겐지를 다루는 파트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타자에게 자신의 살을 내주는 일은 선물을 주는 것과 같다고 데리다의 선물론을 인용했던 부분이 나온다. <옥자>를 비롯해 홍승은 작가, 웹툰 <혼자를 기르는 법>과 여러 매체에서 공장제 축산에 대한 비판을 넘어 육식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비판이 이뤄지고, 채식이 다뤄지는데 ... 이성복이 지적했듯 타자를 먹음으로써 자기보존을 하는 생사성식의 세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식문화에 대한 인문적인 접근과 더불어 가장 원초적이고 동물적이고 헤겔 식으로 이성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미각을 시각적 포르노그래피로 상품화하는 푸드 포르노가 범람하는 시대에 ‘먹는 인간’으로서 무엇을, 어떻게 먹어야 할지, 의식적인 각성과 감각적인 갱신 양 측면에서 생각하게 된다. <나 자신이고자 하는 충동> 세미나 장이었던 선생님은 냄새 때문에 소고기를 먹지 못한다고 밝힌 바 있다. 어렸을 때 소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있어 소냄새를 맡으면 그 소가 생각나서 차마 먹을 수 없다고. 독서모임을 통해 만났던 다른 분의 경우 ‘고기’가 상품의 형태로 가공되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다루는 영상을 본 충격으로 인해 채식을 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나는 이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채식으로의 전회를 ‘회심’으로 서술한 바 있는데 이성적 결단이라기보다 감각적 차원에서 변화를 ‘회심’으로 명명하는 게 적절한지 비판을 받았다. 별다른 계기가 없다면 육식을 계속 하게 될 것 같은데 좀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아도르노나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들이 지적한 지점, 근대화-도시화-우리가 이룩한 기계문명/물질문명이 경험세계를 파괴하여 망각에 빠지게 만들었다는, 원초적인 감각의 마비됨을 인지하지 못하는 마비 상태에 빠져 있다는 점을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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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형이상학 민음사 철학 에세이
알랭 바디우 지음, 박성훈 옮김 / 민음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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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자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가장 유명한 소설의 도입부로 꼽히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다. 소설의 주제를 압축적으로 암시하고 있고, 대구를 통해 수사학적 효과를 내고 있기에 소설적으로 좋은 문장이기에 틀림없지만 고개가 살짝 갸우뚱해지는 건 문장의 역도 성립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나름나름이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다. 비트겐슈타인이었다면 이 명제가 유의미한지 무의미한지 구분했을 테지만 문학에서 좋은 문장은 비문非文이거나 특정한 의미로 고정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이 문장은 인생과 행복에 대한 톨스토이의 관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좋다. 이를 테면 톨스토이와 같이 러시아 문학계의 대문호로 뽑히는 도스토예프스키나 고골이라면 톨스토이와 반대로 썼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행복과 불행의 주체가 개인이 아니라 가정이라는 점이다. 행복한 가정의 구성원들은 모두 행복한가, 불행한 가정의 구성원들은 모두 불행한가 같은 질문들이 촉발되고, 본능적인 정열에 이끌린 안나-브론스키 커플과 의무와 책임을 따르는 레빈-키티 커플 모두 완전한 행복에 이르지 못했음을 확인하고 나면 진정한 행복은 무엇인지, 어떻게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서평가 이현우는 행복해야 한다는 물음을 던지지 않는 삶이 행복하다는 식으로 말한 바 있다. 행복에 대한 물음은 불행이나 결핍의 자각에 따른 반작용인 경우가 많기에 행복이라는 인위에 얽매이지 않은 무위적 상태가 행복하다는 의미에서였다. 하지만 이렇게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방식으로 행복을 정의내리기엔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다면 행복의 형이상학을 주창하는 어느 철학자의 말을 들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진리와 사건의 철학자 바디우는 언어학적 전회 이후 언어의 의미 해석(해석학), 언어 게임의 규칙(분석철학), 새로운 삶의 형식들-복수성의 발명(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반철학자들의 세이렌의 노래에 맞서 진리로의 여정을 떠나는 오디세우스를 자처한다. ‘존재는 언어에 선행한다는 명제로 주체는 술어의 수행적 효과에 불과하다는 주체의 죽음을 부정하고 제1철학으로서 존재론과 형이상학을 복권시킨다. 진리철학은 다시 이론으로부터 괴리되어 있던 삶을 철학의 무대로 불러내고, 행복은 당당히 주인공으로 사유의 향연에 중심에 선다.

 

1 행복은 진리들에 이르는 모든 통로를 가리키는 틀림없는 표지이다.(10) 행복은 미덕의 보상이 아니라 미덕 그 자체이다(스피노자, 11) 9 행복은 오직 개별자로서 주체 됨을 받아들이는 자를 위한 것이다(53). 그의 통찰을 빌리면 웰빙부터 행복에 대한 담론이 양적으로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질적 행복에 있어 변화가 미비한 한국사회의 불행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짐작하게 된다. 그동안 우리가 추구한 행복은 사실 실제적 행복아니라 만족이었을 지도 모른다. 부연하자면 행복의 성취보다 불행의 회피에 중점을 두고, 불행하지 않음에서 만족을 축적하는 방식으로 행복이라는 정상summit에 도달하려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외부의 물질에서 행복을 찾는 소유하는 삶이 아닌 성찰적 태도로 내면을 보살피고 다스리는 존재하는 삶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분명 행복의 기준을 사회에서 제시한 척도가 아니라 자율적 주체에 두는 것은 핵심적인 사항이지만 이 또한 만족 추구의 변형된 형태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일례로 달관 족이라 불리는 사토리 세대는 더 많이 소유하려는 욕망을 버리고, 미니멀한 일상 자체를 긍정하는 모습으로 내면적 행복으로 충만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보통 사람들보다 높은 불안에 시달린다고 한다. 이를 테면 탈정치적 지평에서 행복은 행복감이라는 형태의 심리적 차원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해 정신승리가 아닌 존재의 승리, 유한성에 맞서 유한성의 무한한 향유일 때 행복은 오롯이 삶에 깃든다.

 

그렇다면 다시 묻자.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가. 철학은 구체적인 처세의 기술을 가르쳐주지 않지만 나침반처럼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느 방향으로 가야하는지 방향을 제시한다. 철학은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자 진리와 친구가 되는 삶의 태도이자 방법이고, 온전히 진리를 따랐을 때 행복이라는 참된 정동이 젖과 꿀처럼 흐를 것이다. 행복은 일정 정도의 절망을 요구하기에 우리는 안전한 삶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리게 되겠지만 바디우는 이 위험성과 고단함을 받아들이고 충실성을 견지하라고 한다. 그렇게 어떻게 세계를 변화시킬 것인가라는 질문은 행복하자라는 혁명적 욕망을 설파하는 보편적 구호로 답변될 수 있을 것이다.

 

행복의 형이상학, 알랭 바디우 지음, 박성훈 옮김, 민음사.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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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알아요

 

 

엘르 코리아에서 배우 한예리의 인터뷰를 읽었다. 그중 일부를 옮긴다.

 

행복지수도 높아졌나요 : 빨리 서른이 되고 싶었어요. <청춘시대>만 봐도 20대는 많이 흔들리잖아요. 저도 그랬고, 서른이란 나이의 안정감을 기대했어요. 그 나이가 되면 안개가 낀 것처럼 불투명한 시간이 한결 선명해지고 생각도 성숙해지지 않을까 하고.

기대한 대로 됐나요 : 확실히 30대가 좋아요. 저란 사람에 대해 더 알게 된 만큼 재미있고 행복해요.

 

 자신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행복할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는데 이 특수한 지식은 전적으로 행복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윤리학적 재료들이다. 자신에 대한 앎은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 활용할 수 없는 것은 아니나 무엇보다도 자신이 행복해지는 데 필요한 결정적인 근거이다. 자신은 동적인 사람인데 이를 평생 인식하지 못하고 데스크 업무만 보고, 집에서만 여가시간을 보낸다면 억겁의 시간이 흐른다 해도 행복의 방정식은 풀리지 않은 상태로 남겨질 것이다.

 

 행복에 대한 정의가 제각각 다르겠으나 행복이 슬픔이 아닌 기쁨과 관련되어 있다는 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줄로 안다. 감정, 정동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 스피노자에 따르면 기쁨은 자신의 역량을 온전히 발휘할 때 생성되는 감정이다. 들뢰즈는 어느 강연에서 길에서 사람을 마주쳤을 때 기쁨을 느낀다면 이는 자신이 강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혼자를 기르는 법>의 김정연 작가의 인터뷰가 떠오른다. 자기 방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채워져 있어서 좋다는 것, 그야말로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에서 살고 있는 이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30대가 되면 조금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알게 된다는 말에 심심한 위로를 받으면서 한편으로 이십대의 격렬한 방황과 좌충우돌이 있었기에 가능한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런 점에서 20대는 실험의 연속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다운 나를 찾기 위한, 또 만들어나가기 위한 연습과 연마의 시간. 연애를 통해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시행하고, 소비와 문화적인 편력을 통해 자기만의 감수성과 취향을 실험하고, 독립을 통해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시공간의 디자인을 실험하고, 취업 및 도전을 통해 이상과 현실 사이 적절한 타협점을 실험한다. 사랑의 경험을 통해 자기 몸과 처음으로 내밀한 소통을 시작하게 되고, 진부한 비유이긴 하지만 상대방의 연주에 따라 자신이 어떤 음을 낼 때 가장 빛나는 악기인지 차차 알아가고,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독립함에 따라 자기만의 시공간을 확보하게 되고, 그 시공간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디자인하면서 멋을 찾아가기 시작하고, 욕망과 능력이 조화를 이루는 지점을 찾고 자신의 포지션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에 대해 조금 알 것 같다고 노래 부를 수 있는게 아닐까.

 

 이렇게 자신에 대한 앎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타인의 호명 및 심문은 중대한 역할을 차지한다. ‘누구냐,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에게 자신을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자기소개를 하고, 자소설이란 오명이 씌워지긴 했지만 자소서를 쓰는 등 사실은 나는 누구인가반복적으로 규정하게끔 유도·강제하는 규율을 통해 자아에 대한 특정한 이미지가 구축된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는 누구인가. 알튀쎄의 호명 메커니즘을 적용시킨다면 나는 누구인가묻는 는 대타자-이데올로기에 호명된 주체이기 때문에 실상 누구냐, 이란 질문의 뒤집힌 형태에 불과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나는 양동혁이다, 남자다, 한국인이다, 시스젠더 헤테로섹슈얼이다, 대학원생이다, 이런 식의 답변은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정보일지 모르지만 스스로에게 무의미한 기호일 뿐이다. 명사가 아닌 동사로 주술 구조를 갖춰 서술했을 때 내 본질을 조금이나마 담아낼 수 있다. ‘누구인가도 문제적이지만 라는 개념 자체도 그 못지 않다. 니체가 말했듯 가 문법적 환상에 불과하고, 행위가 주체를 구성한다는 수행적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내가 한 행동들의 총체 정도라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정희진처럼 읽기>에서 정희진이 데카르트 식 코기토에 대항하며 피력한 의견과도 동일한데 이와 더불어 나는 내가 맺고 있는 관계들의 총체라는 관계론적 관점이 탈근대 철학적 지평에서 바라보는 주체의 이미지인 것 같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한 행동들과 내가 맺고 있는 관계들을 설명하면 나에 대해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걸까?

 

 가끔 그런 상상을 한 적이 있다. 브레인라이팅-생각하는 즉시 그대로 문자로 옮겨지는 기술-과 카메라로 전 생애 전체를 기록하고, 텍스트로 남긴다면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인생을 복기하는 과정에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만 볼 수 있게 해놓더라도 내 삶이 전부 기록되고 있다는 의식이 살아가는데 영향을 미칠 수 있겠으나 망각으로 인해 고초를 겪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 인생을 기록하는 블랙박스의 존재를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 , 자기 자신에 대한 평전을 쓸 수 없듯 객관적인 거리가 확보되지 않아 비평적 관점을 취하기 힘든 반성적인 내면 성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할 수 있겠다 싶었다. 예술가의 경우 작품을 통해 창작자의 심리와 세계를 해석하는 게 가능하지만 작품 및 기록물archive 자체가 양적으로 빈약한 경우가 일반적이다 보니 기술의 도움을 통해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는 지평이 확장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보니 이 기록들이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할 공산이 농후해보였다.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면 남의 인생을 사후적으로 구성하고, 해석하는 데는 유용한 자료가 되겠지만 스스로를 이해하는 데는 큰 도움이 안 될 거라 예상되었다. 영상이든 문자든 이미지든 기호들은 해석을 통해 주체로 편입되는데 해석할 자료가 양적으로 많다고 해서 해석의 질적 깊이나 정확도가 높아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최신식의 심리테스트나 과학기술이 개발되었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에 대한 가장 깊은 지식은 명상을 통해 얻어지는 걸 보면 자신에 대한 앎은 그 지식을 매개 삼아 지적 주체 자신이 변화할 수 있는가지식의 윤리성(윤여일은 <지식의 윤리성에 관한 다섯 편의 에세이>에서 지식을 정합성, 기능성, 윤리성의 측면으로 구분하여 논하면서 지식의 윤리성을 화두로 독자들에게 건넨다)이 가장 절실하게 요청되는 영역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여기의 자신이 어떤 마음인지 알아차리고행동하면서 자아라는 허상, 집착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있다면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을뿐더러 스스로에게 진실한 사람이다. 스스로를 속이지 않아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사람,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2지금의 함춘수(정재영), 내면이 배배 꼬여 있지 않아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아는 사람, 진실한 사람이 되려면 행동을 바꾸고 욕망을 바꿔야 했다. 다른 것을 욕망하는 게 아니라 다르게 욕망하는 도주선을 그리기 위해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삶. ‘그것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라캉)

p.s 난 알아요. 무엇을? 난 날 알아요. 어떻게? 난 날 잘 알아요. ? 왜 난 날 잘 알아요? 왜 난 알아요(김승일). 왜 무가 아니라 존재인지 물었던 것처럼 왜 무지가 아니라 앎인지 물어보자. 이렇게 많이 알고 있는데 그만큼 잘 알고 있는지, 나아가 윤리적인지 따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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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토대 - 구조기능주의 입문 파라디그마 Paradigma 2
로만 야콥슨.모리스 할레 지음, 박여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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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언어의 두 측면과 실어증의 두 유형

 

 

4차 산업혁명을 몰고 올 거라 예견되는 인공지능 기술의 등장으로 사라질 위기에 놓인 직업 중 하나가 번역가이다. 그런데 사실 번역은 인공지능의 역사 초창기부터 연구된 분야였으나 딥러닝 기반의 패러다임 시프트paradigm shift’가 일어나지 전까지 진척이 거의 이뤄지지 않은 분야이기도 했다. 이 이유를 야콥슨 식으로 설명하면 기존의 인공지능은 은유환유’, 인접성과 유사성의 메커니즘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안녕은 문맥에 따라 만나서 반갑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고, 다음에 또 보자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How do you do?’라는 문장을 영한사전만 펼쳐놓고 번역하면 어떻게 지냈어? 잘 지냈어?’가 아니라 너는 어떻게 하고 있어같은 엉뚱한 오역을 피할 수 없다. 이처럼 언어는 축자적 의미가 아닌 문맥에 따라 코드화된 의미를 지니고, 이 코드화는 미리 제조된 조립식 표상들을 담아놓은 파일 캐비닛에 의해 이뤄진다. 인공지능은 딥 러닝을 통해 이 캐비닛에 해당되는 빅 데이터를 구축할 수 있었고, 은유와 환유, 유사성과 인접성의 메커니즘을 적용시켜 불가능해보였던 번역기술을 정복하기 직전에 이르렀다. 여태껏 인공지능의 발전에 있어 발목을 잡던 부분이 명명할 수 있는 능력’, 추상적 범주를 사고할 수 있는 메타인지 능력의 부재였는데 이를 빅데이터를 통한 딥러닝으로 돌파해낸 것이다.

 

 abstract, 사물로부터 공통되는 특성을 추출해 범주화하는 능력을 구사하는 일이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었겠으나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추상적인 체계, 에피스테메를 학습하는 게 그 못지않게 어려웠을 거라 예상된다. 사실 나는 인간의 추상적인 사고에 정밀하고 정확한 수학적 엄밀성이 결여되어 있음을 느낄 때가 있다. 한편으로 고도의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사유가 실증주의적 사고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는 초월적 가능성(창의성, 창조성)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포퍼나 비트겐슈타인의 작업이 보여주듯 사변과 추상의 자의성, -픽션적인 성격이 내재하고 있는 부정확성, 오류가 걸리는 순간이 있다. 데이터 및 인공지능이 인간의 사유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다는 데 부정적이지만 더 이상 인간중심적 관점에서 인공지능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고 상대한다면 이는 인간에게도 결코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인공지능을 거울삼아 인간의 정신활동을 탈마법화, 탈신화화해서 정신에 대해 좀 더 정확한 지식을 얻게 된다면 인류에게 득이 되면 득이 됐지,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인간은 다른 지적 존재에게 자신의 언어를 가르치는 데 성공했다. 정확히 말하면 가르치는 데 성공한 게 아니라 스스로 배울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가진 기계를 발명하는 데 성공한 것이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앞으로 인공지능이 지금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인간이 언어를 학습하게끔 가르쳐주는 역할을 할 수 없을까? 마치 영화 <컨택트arrival>에서 외계인들이 지구인을 찾아와 그들의 언어를 가르쳐줌으로써 루이스가 과거-현재-미래를 선형적으로 인식하던 기존의 인식체계와 결별하고 (이종필의 표현을 빌리자면)일괴암적 인식을 배운 것처럼 인간이 지닌 생물학적, 역사적, 문화적 조건의 강한 구속 아래 형성된 지금의 언어(학습체계)와 완전히 인식론적으로 단절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발명하고 학습해서 구사하는 건 불가능한 일일까? 루이스는 미래를 기억하는 비선형적 사고를 하면서도 여전히 기존의 방식 그대로 산문적이고 선형적인 언어를 구사했는데 비선형적 언어, 이를 테면 이미지나 음악, 시어를 통한 대화와 소통은 불가능한 일일까? 인간이 만든 언어가 기표가 기의에 미끄러질 수밖에 없고, 필연적으로 오해를 낳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언어를 바꿔야 할까? 매체를 바꿔야 할까? 텍스트에 기입되는 문자언어나 공기 매질을 통해 진동하는 음성언어가 아닌 텔레파시와 같이 매개(필연적으로 굴절을 일으키는) 없이 직접적으로 상대방의 의식에 언어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오늘날 반지성주의가 판을 치는 반동의 시대에 과연 계몽주의적 비전이 여전히 유효한지, 시민사회의 의식수준의 지표라 일컬어지는 독서대중reading public의 규모를 일정 수준 이상 높일 수 있는 정책적 변화와 노력들을 하다 보면 사회가 정말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는지 회의적이다. 테크놀로지가 유토피아를 가져올 거란 낙관적인 생각에 기대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미래를 설계하는 데 있어 인공지능을 하나의 지적 행위자agent이자 동료로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대화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인간의 힘만으로 인류의 행복과 지구생태계의 존속의 과제를 실현하기 어렵다면 타자에게 SOS를 보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나는 인공지능의 번역 정복기를 관찰하면서 자연스레 인간의 외국어 학습과 비교해보게 되었다. 나이를 먹고 외국어를 습득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사고가 모국어로 이뤄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머릿속에서 모국어로 사유된 문장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식으로 말하고, 듣고, 읽고, 쓴다. 외국에서 영어로 의사소통을 진행할 때 머릿속에 한국어로 완성된 문장에서 단어 하나하나를 일대일 대응 식으로 해석하다 보니 문맥에 맞는 단어를 선택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곤 한다. 문장을 해석하고, 모르는 단어의 뜻을 찾아볼 때 한영사전에 기대 문장 단위가 아닌 단어 단위로 학습하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한국어 단어에 맞는 영어단어를 선택·대체alternation하는 데는 능통하지만 대체와 조합이 동시에 이뤄지지 않고, 대체된 단어들을 짜 맞추면 제대로 된 문장이 나오기 힘들다(예전에 이런 식의 문장을 보고 번역기돌렸다는 비아냥을 들었는데 인공지능 번역기술이 더 발전하면 이런 표현은 사어가 될 것이다). 그래서 단어를 외울 때는 영영사전을 이용하고, 문장을 통째로 외우거나 영어로 된 책을 많이 읽으라고 조언하는 이들이 있다. 독일어처럼 명사의 성과 격에 따라 변화를 여러 군데 줘야 하는 언어의 경우 사태가 심각해진다. 때문에 일반적으로 언어감각을 키운다고 했을 때 이 언어감각은 미리 제조된 조립식 표상들을 담아놓은 파일 캐비닛이 일정 크기 이상이 되면서 미리 제조된 조립식 표상들을 즉각적으로 불러올 수 있고, 문장들에 내재된 문법적 요소들을 직관적으로 터득함으로써 얻어진 능력을 의미할 것이다. 언어감각을 체득하게 되면 더 이상 모국어 문장을 파편적으로 쪼개 일일이 계산하고, 선택하고, 대체하는 게 아니라 문장 단위로의 즉각적 변환, 선택과 조합이 동시적으로 이뤄지는 게 가능해진다.

 

 여기까지 읽으면서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랑시에르가 주목한 자코토의 지적 실험은 학생들에게 프랑스어의 문법이나 어휘를 가르쳐준 게 아니라 프랑스어자체를 가르치고자 한 것처럼 보인다. 그랬기에 필연적으로 본인이 이미 알고 있는 부분적, 파편적 지식을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로 하여금 스스로 전체로서 프랑스어를 파악할 수 있도록 무지한 스승역할을 자처한 것이다. 지적 평등과 해방의 논의를 전개하는 데 있어 네덜란드에서 네덜란드 학생들에게 네덜란드어를 모르는 프랑스 선생 자코토의 프랑스어 수업 사례를 선택한 건 굉장히 상징적이라 느껴진다. 아무리 뛰어난 석학이라 해도 배워본 적 없는 외국에 대해서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똑같이 무지할 수밖에 없다. 외국어 초급반에 들어가면 초등학생부터 5, 60대 장년층까지 똑같이 알파벳과 같은 문자기호들과 읽는 법을 배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학습속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문법을 익히고, 단어를 외우고, 읽고 쓰고 말하고 듣는 법을 공부해야 한다는 입장의 차이는 없다. 하워드 가드너의 다중지능 이론이나 일반적인 통념상 언어능력을 담당하는 뇌의 특정 부위의 발달 정도에 따라 언어 습득력의 차이는 있겠으나 읽고 쓰고 말하고 듣는 것을 반복하면서 익히는 것 이외의 다른 방도가 없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애를 갖고 있지 않으면서 정규 교육과정을 이수한 사람은 언어구사능력을 갖추고 있다. 설사 정규 교육과정을 이수하지 못했더라도 글쓰기에 불편함을 느낄지언정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사례는 거의 없을 것이다. ‘실어증aphasia적 퇴행은 아동의 음성언어 습득 과정을 거꾸로 반영mirror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다시 말하면 실어증은 아동의 언어 습득과 역순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는 문장을 접하면서 인간이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에 있어 단계가 있다면 그 단계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보편문법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예상되었다. 인간의 언어학습 과정에 있어 첫 번째 도약하는 단계가 있다면 그건 문장을 만들어내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개별 단어만을 지시하거나 발음할 수 있었던 아이가 엄마, 나 배고파요같은 문장을 구사한다는 건 거울단계를 지나 자타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본인을 주체로서 인식하며, 자신이 배고픔을 느낄 때 배고픔을 해소시켜줄 수 있는 존재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는 뜻이다. 아이는 주어·동사·목적어·서술어 같은 문법용어들을 모르는 상태에서 문법에 맞게 적절한 문장을 구성해낸다. 그건 문장을 통째로 인지함으로써 문장에 내재된 문법규칙을 메타적으로 인지했기 때문이리라. 이 메타인지의 중요성은 카르납이 주장하듯이 우리가 어떤 대상언어에 대해 말할 수 있으려면, 메타언어가 필요하다.”’의 말에서도 발견된다. 이 메타언어/메타인지는 결국 언어가 인접성과 유사성, 은유와 환유의 두 가지 원리에 의해 작동되는 테크놀로지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조합(결합)combination, 구성, 정렬alignment

선택selection, 대체, 교체alternation

환유

은유

인접성contiguity

유사성similarity

리얼리즘

모더니즘

통합체

계열체

그것들을 더 높은 차원의 복잡성을 가지는 언어적 단위들로 조합

일정한 언어적 속성들을 선택

현존하는 결합in presentia. 현재의 연쇄체 안에서 연결되어 구현된 둘 또는 그 이상의 항들

부재하는in absentia 항들을 가상적인

 기억 연쇄체의 구성 성분으로서 연결

연결된 속성들이 메시지와 코드 양자 안에서 또는 실제의 메시지 안에서 연결

코드로 연결된 속성들을 다룸

문맥context

코드code

 

 

표로 은유와 환유의 특징들을 정리해보았다. 문장이 대내적으로 은유와 환유의 원리에 의해 직조된다고 한다면, 문장을 짓는 이는 대외적으로 미리 제조된 조립식 표상들을 담아놓은 파일 캐비닛이라고 하는 사회문화적 문법에 따라 말이 말이 되게끔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변증술이 보여줬듯 말이 안 되는 말, 즉 아이러니는 말이 말이 되게끔만드는 사회문화적 문법이 얼마나 자의적인지, 어떤 논리를 따져보면 얼마나 비논리적인지를 폭로한다. ‘제조된 조립식 표상들을 담아놓은 파일 캐비닛은 기표와 기의의 특정한 결합의 약속을 사회구성원들에게 학습시켜 언어가 커뮤니케이션에 경제적으로, 효율적으로 봉사하게끔 하고, 이 약속은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탐구>에서 밝혔듯 언어-게임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규칙이다. ‘바벨탑의 우화는 기표의 기의의 분열 및 수많은 외국어로의 분화로 인해 소통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타락하고 분화하기 전 보편언어의 존재를 상정하고 있다. 이런 보편언어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인공언어나 에스페란토어 같은 실험들이 시도되었으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기표와 기의 사이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의 정신구조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바벨탑의 우화는 어떤 완벽했던 기원을 상정하고 다분화되고 다양화된 오늘날의 언어 생태계를 부정적으로 규정하지만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 보여주듯 언어의 통일은 곧 사고의 통일일 수밖에 없고, 이는 인간의 근원적 자유를 억압하는 전체주의적 발상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이렇듯 기호의 상징체계, 언어의 의미체계를 규정하는 규칙은 역사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기에 다분히 정치적인 문제다. 모든 말들이 의미가 고정되어 있는 실체가 아니라 해석하는 힘들이 투쟁하는 장이라 했을 때 결국 언어의 사회성은 지극히 정치적인 문제이다. 예를 들면 정치적이란 말이 중립을 지키지 않으면서 특정한 진영에 편향적인 태도를 드러낸다는 의미로 부정적으로 전유되는 경우 정치적이란 말은 공동체 내에서 축자적, 사전적 의미보다 일련의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된, 매개된 의미로 사람들에게 전유되고 소비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정부, 지식인, 출판권력, 신문권력 등 의미체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헤게모니 집단은 규칙, 프레임을 자기 식대로 짠다. 그렇다면 두 가지 질문이 생긴다. 첫째, 언어를 특정한 방식으로 코드화하는 지배적 헤게모니에 저항할 수 있는 대항 헤게모니를 어떻게 생산할 수 있을 것인가. 둘째, 언어의 의미체계(기표와 기의의 특정한 결합방식에 대한 약속)에 의존하더라도 상대방의 메시지를 완벽하게 독해하는 건 불가능한데 소통은 어떻게 가능한가.

 

 첫 번째 질문에 대해 다양한 답변이 있을 수 있지만 랑시에르가 말한 문학의 정치에 주목해보고 싶다. 하지만 문학의 정치는 추후에 다른 글에서 본격적으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질문 또한 야콥슨보다 언어와 정치, 언어와 사회를 다루는 파트에서 다루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커리큘럼상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이 빠져 있는데 하버마스가 아니더라도 이런 문제의식과 연결되는 문학작품-사상을 만나게 되면 추후에 다뤄보고 싶다.

 

 만약 인접성 장애를 가진 사람끼리, 유사성 장애를 가진 사람끼리 대화를 한다면 진행이 될까? 아마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대화상황에서 상대방의 말을 완벽하게 해독할 수 없지만 그래도 대화가 그럭저럭 진행될 수 있는 이유는 논리체계를 공유하고 있기에 해석의 공통적 지평이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인접성 장애자끼리 유사성의 체계만으로 언어를 구사한다고 해도 해석의 차이는 생길 수밖에 없으며 인접성의 체계가 부재하는 만큼 정보의 부족의 해석력의 결여가 소통을 불가능상태로 몰아넣을 것이다. 이처럼 메시지의 인코딩과 디코딩의 관점에서 대화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 대화를 발신자의 텍스트와 수신자의 해석이 만나 공동의 의미지평을 형성하고 그 속에서 상호주체적으로 이해와 공감, 상상 등의 활동을 통해 끊임없이 텍스트에 대한 더 좋은 해석을 만들어나가는 변증법적 과정이라고 본다면, 즉 대화는 기능적이고 기술적인 작업이면서 동시에 예술적인 작업으로 인식한다면(무한한 대화, 끝나지 않는 대화) 소통(불가능성)을 다르게 볼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포스트구조주의를 비롯한 인문명저들을 살펴보면 정신의학이나 병리학이 다룰 법한 주제를 탐구한 책들이 적지 않게 보인다(대표적으로 프로이트, 푸코와 깡길렘 등을 꼽을 수 이을 것이다). 이는 단순히 우연으로 보이지 않는데 20세기 서구철학이 헤겔로 대변되는 이성과 근대성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었다는 측면에서 병리현상과 장애가 추상적인 이성과 정신에 구체적인 균열을 일으켜 이들이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도록 분절articulation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프로이트는 히스테리나 정신병에 걸린 환자들의 꿈과 말을 분석해 무의식을 발견했고, 푸코는 광인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담론화되었는지 계보학적으로 탐구해 이성과 광기가 시대에 따라 관계적으로 구성됨을 밝혀냈다(베르그손의 <물질과 기억>도 기억의 메커니즘을 밝혀내는 데 있어 기억장애를 가지고 있는 이들을 다룬 것으로 알고 있다). 야콥슨의 텍스트를 읽으면서 기억이나 상상 같은 정신활동의 구조를 탐구하는 데 있어 장애를 가지고 있는 대상들을 관찰하거나 사고실험의 형태로 장애를 가정하는 전제, 가설들을 세워보고 논증해봄으로써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다른 경우이긴 하지만 모음 중 ‘e’가 들어간 단어만 쓴다거나 ‘e’가 들어간 단어는 배제하고 소설을 썼던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울리포의 멤버였던 조르주 페렉의 실험이 보여주듯 규칙의 제정을 통한 자유의 제약, 한계의 부여는 새로운 글쓰기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언어의 결과 겹을 가장 섬세하고 다루는 시인들의 전위적인 시들은 대부분 조재룡 평론가가 지적한 바 있듯(‘알레고리, 지금-여기를 궁리하는 현대시의 조건’) 환유적으로 조직되었다. 기존의 서정과 은유의 문법에 익숙해져 있던 이들이 보기에 이런 시들은 죄다 난해시로 치부되었으나 신진 비평가들은 이들의 낯선 발화와 이미지가 자폐적인 개인방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기 위해 치열하게 몸부림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현대시는 주체의 감정을 재현하는 대신 타자를 감각하고, 이를 비재현적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이처럼 은유가 지배적인 조직원리였던 시에 환유를 도입함으로써 새로운 현대시의 지평이 열렸듯 다른 분야에 있어서도 그것을 이루고 있는 내재적 원리로서 은유와 환유, 인접성과 유사성의 분배, 분할관계를 재구성함으로써 새롭게 갱신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지 않을까 한다. 장애학은 비장애인을 완전성의 기준으로 두고, 장애를 결핍된 상태로 보는 기존의 관점을 뒤집어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온전함을 갖고 있는 개체로 인식하여 거기서 새로운 가능성들을 발굴하는 분야라고 한다. 베케트, 이인성, 배수아, 정영문, 한유주 같이 건강한’ ‘정상언어의 관점에서 장애인에 가까운 이들의 언어에서 불온한 정치성, 새로운 인식론적 가능성들을 읽어낼 수 있다면 <문학과 언어> 수업을 제대로 수강했다고 말하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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