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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배우는 사람 창비세계문학 30
토머스 핀천 지음, 박인찬 옮김 / 창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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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간을 추천할 때 창비세계문학이 눈에 띠었다. 두 권 모두 미국문학이었다. 윌리엄 포크너가 미국문학의 아버지라 평하는 마크 트웨인의 <얼간이 윌슨>과 해럴드 블룸에 의해 돈 드릴로, 코맥 매카시, 필립 로스와 함께 현대미국문학의 4대 거장으로 손꼽히는 토마스 핀천의 <느리게 배우는 사람>. 이전 시대 작가의 장편소설과 현 시대 작가의 단편집, 나는 경로우대 차원은 아니었지만 마크 트웨인을 선호했으나 다른 평가원들에 의해 최종적으로 선택된 건 핀천이었다(친구들 사이에서 운 좋은 놈으로 통하는 필자는 후에 창비 책 읽는 당원 2기에 뽑히면서 <얼간이 윌슨>을 결국 받고 읽게 되었다). 돈 드릴로는 다른 작가들에 비해 국내 수용이 미진한 것 같긴 하지만 필립 로스의 경우 이동진 평론가의 팟캐스트에서 <에브리맨>을 다루면서 알려지는데 어느 정도 기여했고(이언 매큐언의 <속죄>나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처럼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는지 확인해보진 못했지만 어느 정도 파급력이 있었을 거라 예상된다), <휴먼 스테인>,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포트노이의 불평>, 가장 최근에 <미국의 목가>까지 출간되면서 중요한 책들이 (늦었지만/그래도 이게 어디야) 소개되었다. 코맥 매카시의 경우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로드>가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었고, 특히 전자는 코엔 형제의 손을 거쳐 미국아카데미를 싹쓸이하면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민음사의 모던클래식 시리즈를 통해 국경 3부작이 모두 출간되었고, 민음사 패밀리세일을 이용해 책들을 책꽂이에 모셔놓는데 성공했다. 토마스 핀천의 경우 <49호 품목의 경매>을 장만해놓고 거실 인테리어로 열심히 써먹다 결국 <느리게 배우는 사람>으로 먼저 만나게 되었다.


 주워들은 얘기에 의하면 서양문학 판에서는 장편소설을 단편에 비해 더 우대한다고 한다. 문단 사회 내에서 그런 건지, 작가들이 장편에 더 자부심을 느끼는지 몰라도 작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앨리슨 먼로의 말을 들어보아도 장편 우세의 풍토가 없지 않은 것 같다. 그녀는 자신의 수상으로 단편작가들에게 더 많은 관심이 가길 바란다고 전했는데, 노벨문학상 수상 역사만 봐도 단편작가로는 최초의 수상이었기 때문에 이해가 되는 부분이었다. 서양사회에서 근대소설의 탄생배경, 과정, 그 역사에서 문학의 역할 및 위상 같은 거시적 관점의 문학사적 지식이 있다면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배움이 부족한 이에게 도움을 주시면 감사한 마음으로 받겠습니다(^^). 요즘은 시집이나 철학서들을 주로 읽어서 그런지 시집에 비해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철학서에 비해 표면적인 지적 만족도가 낮은 장편소설에 손이 잘 가지 않았는데 단편집이라 무리 없이 읽을 수 있었던 점이 만족스러웠다. 또 체홉이나 유명한 단편작가 이외에 서양의 단편을 읽어본 적 없어서 나름 색다른 독서체험이었고, 최근 그 동안 충분히 느끼지 못했던 김연수 작가의 매력에 눈을 떠, <꾿빠이 이상>을 필두로 작품을 읽던 중이여서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이란 공통분모로 비교해가면서 읽는 재미도 있었다. 또 작가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처럼 시상식장에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은둔형(이라고 쓰면 뭔가 중립적인 표현이 아닌 것 같아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작가라는 점과 서문에서 겸손함과 솔직함이 묻어나 읽기 전부터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다(하지만 ‘1953년 고등학교를 최우수로 졸업하고 장학생으로 코넬 대학 공학물리학과에 입학하였다. 2학년 때 문리학부로 전과해 영문학을 공부했으며 1959년 전과목 최우수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였다.’ 같은 이력에서 매력이 조금 감퇴되었다).


 (줄거리 요약은 출판사 서평보다 잘할 자신이 없어 부득이하게 빌리고자 한다) 소설집에 담긴 다섯편의 이야기는 소재나 배경 등이 각기 다르지만 죽음, 무기력, 권태, 획일화, 무질서, 파국, 단절감을 공통적으로 그리고 있다. 핀천의 첫 단편 이슬비는 군대라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죽음과 다를 바 없는 무기력한 삶을 반복하는 청춘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러바인은 도망치듯 군대에 들어온 인물인데, 그는 군대를 떠나려 하기보다 반복적이고 정체되어 있는 그곳에 안주하려 한다. 주인공은 허리케인으로 큰 피해를 입은 인근 뉴올리언스에 파견되어 시신 인양작업을 하면서 죽음의 문제와 맞닥뜨리고 우연히 만난 여자와 의미없는 섹스를 한다. 그런 뒤 그는 휴가를 가는 대신 군대생활로 되돌아간다. 작가는 주인공의 삶을 폐쇄회로와 같은 고립적이면서 단절적인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이슬비>를 한마디로 평한다면 내겐 분위기로 먹고 들어가는 소설이었다.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 듯 모를 듯해 논리적 해석과 감성적 추론(상상) 사이에서 둥둥 부유하게 만드는 작품,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모호해 몽환적인 느낌을 들게 만드는 작품, 약간의 외부충격만으로 깨질 얇은 꿈을 꾸는 기분을 들게 만드는 작품, 요즘은 이런 작품에 곧잘 마음이 유출되곤 한다.

주인공 러바인은 군에 복무 중이다. 대학을 나온 엘리트로 통하지만 의자에 커다란 엉덩이를 얹혀 놓고 소설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보통의 군인이다. 휴가에 대한 기대도 보통, 휴가취소에 대한 실망도 보통일 것 같은 그에게 존재감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사막의 배경과 폐쇄적인 군대조직이 중첩되면서 러바인의 고립감은 배가되고, 그의 일상은 건조한 공간과의 동화에 의한 마모의 시간으로 채워진다. 그는 조용히 표나지 않게 현지인처럼 되어갔으며, ‘원래 쓰던 날카로운 브롱크스 악센트는 느린 말투 속에서 무디어지고 부드러워졌다’. 그는 조금씩 지워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희박한 존재. 희박한 존재감은 미지근한 피에서, 둔한 심장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권태(倦怠). 게으름과 피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피로한 상태, 차라리 그 상태에 대한 예감. 이 피로는 때로 정신적으로 주체 내부를 소진시키는 불안에 의해 은폐된 채로 축적되곤 한다. 만성피로의 진원지를 찾지 못한 이는 무기력이란 진앙에 무기력하게 당하고, 이 무기력에 중독된 상태는 결국 삶 자체에 대한 게으름으로 현상된다. 불안의 원인을 알면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나올까? 불안이 사회구조처럼 정교하게 조직되어 있다면, 어쩌면 사회구조에 의해 정교하게 조직됐다면 문제가 되는 사회를 변혁하지 않는 이상 불안의 일상은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불안이 젖줄을 대고 있는 한 지류는 죽음일 것이다. 인간이 언제라도, 선하게 살았든 악하게 살았든 상관없이 이유 없이 한순간에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은 삶에 대한 열정에 불을 붙이기도 하고 꺼트리기도 한다. 러바인은 죽음의 공포를 목격하고 그 충격에 의한 반동으로 불장난을 해보지만 그 불은 오래가지 못한다. 부정에서 짜낸 의지는 순간적으로 강렬한 작용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지속적으로 유지되지 못한다. 폭력이 사람을 파괴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정복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사회구조에 의해 은폐된 폭력에 의해 사람들은 상처받으면서 아픈 줄도 모르고 살아간다. 한 시인이 말했던 대로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그날을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p.s 다른 단편에 대한 감상도 적어보았지만 <이슬비>와 크게 다르지 않아 여기까지만 올리고자 한다. 언젠가 <중력의 무지개>에 대한 리뷰를 올리고 싶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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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4-06-16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어렵더군요. 일단, 글자와 글자속 내용이 따로놀아서, 읽는 것 자체가 어려웠던 소설이었습니다. 읽기도 어려웠는데 쓰려니 어려웠다는 말 밖에는 할말이 없더군요 ㅠㅠ.

rendevous 2014-06-16 22:28   좋아요 0 | URL
제49호~ 는 그나마 대중성 있다고 하니 읽어보려고요 ㅎㅎ 저도 연역적으로 이게 이래서 이렇고~ 하는 논리적 이해는 힘들었는데 묘하게 어슴푸레하게 느낄 수 있었던 분위기가 매혹적이더라고요 ^^ 그나저나 자유로운 삶은 다 읽으셨나요? 전 아직 1권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ㅜㅜ

CREBBP 2014-06-17 11:22   좋아요 0 | URL
중국 작가라, 소설 쓰는 형식이 완전 새롭게 느껴지더군요. 속도가 이리 더디 나가는 책도 드물더군요. 다른 소설들도 처음 부분을 통과하기가 어려운데, 이 소설은 특히나, 1/3까지가 진도 엄청 안나갔어요. 1편 거의 다 읽었는데, 일단 1편 먼저 쓰고 2편 쓰려구요.

rendevous 2014-06-18 00:17   좋아요 0 | URL
저는 1권 절반 정도밖에 못 읽었습니다 ㅜ 다 못 읽고 써야할 것 같아요 ㅜ 최근 이창래 소설가에게 관심이 생겼는데 비슷한 처지의 중국작가 작품이라 흥미롭게 읽고 있습니다 ^^ 이름만 들어본 문화대혁명이나 텐안문 사건도 소설로 먼저 만나면 나중에 딱딱한 글들을 만났을 때 당혹감과 어색감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아요 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4-06-16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핀천, 어렵죠. ㅎㅎㅎㅎㅎ. 저는 주로 장르 소설을 읽어서리....... 중력 무지개 고가에 팔아서 화딱지나서 아직 안 사고 있는데..

rendevous 2014-06-16 22:25   좋아요 0 | URL
잔인한 가격대 ㅜㅜ 시립도서관에 신청했는데 받아줄지 미지수인 것 같습니다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