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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낙원 ㅣ 동서문화사 세계문학전집 51
존 밀턴 지음, 이창배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6년 9월
평점 :
존 밀턴의 <실낙원>은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에덴동산, 첫 인간의 타락 이야기를 담은 창세기 1~3장을 시인의 풍부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서사시로 엮어낸 작품이다.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단테와 같은 선배 서사시인들에게서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것이 보이는 이 서사시는 서사시의 전통을 따른다. 예를 들면, 서사시는 늘 작품을 시작하면서 시적 영감을 불어넣어주는 그리스의 여신 뮤즈를 초대한다. 또한, 보통 도입부에서는 이 서사시의 대략적인 주제도 같이 밝힌다. 서사시의 전범으로 간주되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우스>의 첫 부분을 봐보자.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일리아스, 천병희 역)
“들려주소서, 무사 여신이여! 트로이아의 신성한 도시를 파괴한 뒤
많이도 떠돌아다녔던 임기응변에 능한 그 사람의 이야기를” (오뒷세우스, 천병희 역)
<일리아스>의 줄거리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하여 그의 분노가 해소되면서 마무리된다. 첫 행에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명시하여 이 서사시의 방향과 주제가 무엇인지를 암시한다. <오뒷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 주인공 오뒷세우스가 저승까지 갔다 올 정도로 산전수전 다 겪었던 모험담과 귀향 과정이 중심 줄거리이다. 밀턴의 <실낙원>도 호메로스의 시와 비슷하게 시작하며, 고전적인 형식을 답습한다.
“인간이 처음으로 하느님을 거역하고
금단의 열매 맛봄으로써 세상에
죽음과 온갖 재앙 불러일으키고
에덴까지 잃고 말았으나, 이윽고 한 위대한 분 나타나
우리의 죗값 치르시고 복된 자리 다시 얻게 하셨으니
노래하라, 하늘의 뮤즈여 (...)
더욱이 그대, 성령이여, 어떤 성전보다도 바르고 깨끗한 마음으로
사랑하시는 성령이시여, 그대는 모든 것을
알고 있나니, 나를 가르치고 이끌어주시라 (...)
이 높고 위대한 주제에 걸맞게
영원한 섭리를 증명하여, 하느님의 뜻이 옳음을 인류에게 밝히도록 하시라” (1편, 1~26행)
밀턴이 부르는 뮤즈 여신은,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여신 뮤즈가 아니라 성령을 가리킨다. 그는 성령님을 힘입어 “하느님의 뜻이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이 서사시를 썼다. 실낙원의 주제는 “악에서 선이 태어난다”는 것이다. 사탄의 유혹으로 태초에 인간이 타락하고 모든 인류가 죄인이 되었다. 이 비극을 선으로, 희극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 이것이 밀턴이 <실낙원>에서 일차적으로 다루는 주제이다.
고전 서사시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영웅과 전쟁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서사시는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나라를 세우거나 무공이 탁월한 아주 비범한 인물들이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다. 길가메시, ‘신과 같은’ 아킬레우스, 오뒷세우스 등을 떠올려보자. 당연히 <실낙원>에서도 영웅적 캐릭터가 등장한다. 밀턴의 제9편에서 자신은 “진정 영웅서사시라 부를 만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단언한다. 그런데 밀턴의 작품을 읽다 보면 이 부분에서 걸리게 된다. 과연 이 시에서 밀턴이 생각하는 진정한 영웅은 누구인가? 언뜻 봤을 때, <실낙원>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영웅상에 가장 걸맞은 존재는 바로 사탄이다. 1편에서 가장 유명한 사탄의 대사를 봐보자.
“그러니 패한들 어떠랴?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으니, 우리에게는 아직 불굴의
투지와 불타는 복수심과 불멸의 증오심과
항복도 복종도 모르는 용기가 있도다! 지지 않기 위해
또 무엇이 필요하랴? 그의 분노와 힘이 아무리 큰들
결코 내게서 이 영광을 빼앗지 못하리라. 무릎 꿇고
허리 굽혀 자비를 빌며, 조금 전까지
그의 권세를 위태롭게 했던 이 팔로
그의 힘을 숭배하란 말인가? 그러한 비굴은
이 타락보다 못한 불명예요 치욕이다.” (1편)
비관적 상황에서도 보이는 낙관적 인식(혹은 정신승리), 강대한 적(=하나님)에게도 결코 굴복하지 않으려는 의지, 좌절한 부하들에게 용기를 북돋우는 카리스마와 지도력. 그는 분명 절대악의 위치에 있지만, 이 부분에서는 고전적 영웅의 면모가 보인다. 지옥을 벗어나 천사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인간을 유혹하겠다는 위험한 계획을 사탄은 자진하여 맡는다. 또한 그는 전투에 능하여 매우 호전적이며, 전략에도 능하여 인간 타락의 계획도 그가 생각한 것이다.
한편, 아담과 이브는 “하느님처럼 곧게, 만물의 왕으로서 가치 있는 모습”을 보이고, “거룩한 얼굴엔 영광스런 창조주의 모습”이 빛나고 있었다. 이들은 “만물의 왕”이요 “순결한 신성”을 지닌 반신(半神)적인 존재로서 “참된 자유의지”에서 “참된 권위”를 가진다. 역자 이창배에 따르면, 이는 “고전적·르네상스적 영웅상”이 반영된 것이라 한다. 사탄이 반그리스도적 영웅이라면,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간직하고 있는 영웅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사탄과 인간은 이 작품에서 절대로 영웅이 될 수 없다. 사탄은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천상 반란과 인류 유혹을 정당화하지만, 그 행위 동기는 “신에 대한, 신의 사랑을 받는 인간에 대한 질투”에서 비롯된 것이며 교만과 지배욕에 불타오르는 것이 사탄의 중요한 성격적 특징이다. 이러한 그의 가치관을 잘 보여주는 것이 “질투를 부르는 자, 하늘의 새로운 총아, 흙덩이에서 생긴 인간, 우리의 화를 돋우기 위해 그가 먼지에서 만든 이 한스러운 인간을 겨냥하여 내리치면 족하리라. 원한은 원한으로 갚는 것이 상책이로다.”이다.
사탄은 하와를 유혹하는 것으로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하와가 혼자 있는 틈을 노린 그는 “고귀한 여왕” “세상에 둘도 없는 경” “지식의 어머니”라고 치켜세우고는 “인간에서 신이” 될 것이라고 하여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게 한다. 결국 하와는 넘어갔고, 하와는 다시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게 한다. 자신이 죽은 뒤 아담만 행복을 누리는 것에 대한 질투 때문이었다. 아담은 금단의 열매를 먹으면 안 된다는 명령을 이성적으로 알고 있었음에도 “그대 없는 이 세상 나 혼자 어찌 살리요”라며 하나님보다 하와에 대한 사랑을 더 우선시하여 선악과를 먹는다. 하와는 자신이 속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사탄의 거짓말에 의해 선악과를 먹었고, 아담은 이것이 어떤 적의 소행임은 알았지만 하와를 더 사랑하여 자발적으로 선악과를 먹었다. 밀턴의 관점에서 하와의 타락은 ‘이성의 부족’이라면 아담의 타락은 ‘자유의지의 남용’의 결과이다. 타락의 결과로 인간은 신적인 영광이 사라지고, 낙원에서도 추방된다.
전통적인 영웅상을 반영한 사탄과 아담과 하와의 반영웅성을 보면서, 우리는 밀턴이 전통적인, 그리고 당대의 영웅상을 거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밀턴은 9편 도입부에서 “지금까지 영웅시의 유일한 주제였던 전쟁”이 아니라 “한층 차원 높은 주제, 진정 영웅서사시라 부를 주제”를 노래한다. 그것은 “훌륭한 인내와 불굴의 정신과 영웅적 순교”이다.
9편 도입부를 한 단락 더 봐보자. 9권의 내용은 사탄의 하와 유혹과 인류의 타락이다. 이 때문에 이제 시인은 “이 노래를 슬픈 곡조로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이 주제는 과거 어떤 영웅의 영웅적 행위보다도 “더 영웅적이다.” 이창배의 주석은 이 모순적 구절을 이해할 단서를 제공한다. “신의 심판과 분노는 아킬레우스 등의 분노와 달리 은총의 계기를 포함하므로 ‘영웅적’”이다. 우리는 여기서 ‘악에서 선이 태어난다’는 것이 밀턴이 <실낙원>을 통해 말하려던 주제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악을 선으로 바꾸는 하나님의 섭리는 바로 ‘은총’이다.
11편과 12편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을 떠나기 전, 천사 미가엘이 앞으로 벌어질 구원사를 예언하는 내용으로 채워져있다. 이는 구약의 내용을 시인이 요약한 것이다. 어떤 구약은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라는 창세기의 예언이 어떻게 실현되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와의 후손에게서 원수를 무너뜨릴 인물이 나온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사의 완성이자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의 절정이다. 그리스도가 있기에 죽음과 죄가 지배하게 된 인류의 역사에 희망이 생길 수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강력한 무력으로 사탄과 죽음을 정복한 것이 아니다. 바로 “하느님의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그대(아담)의 죄와 그 죄에서 나오는 그대 자손들이 받아야 할 형벌인 죽음의 고통을 받음으로써” 그가 이 땅에 온 이유가 완성된다. 그는 순종해야 하며, 인류를 위해 자신을 대속, 즉 순교해야 한다. 죽음의 고통을 인내해야 한다. ‘순종’, ‘인내’, ‘순교’. 이것은 사탄과 아담과 이브에게 없었던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이로써 악을 선으로 바꾼다.
밀턴에게서 영웅은 전투 행위로 완성되지 않는다. 인내와 같은 내면적 덕을 통해 영웅이 된다. 당대 ‘인내’란 “역경에 처했을 때에 신의 섭리에 따르는 것”이었다. 밀턴이 가족과 시력을 잃고, 공화정의 꿈도 무너져 인생의 위기를 맞이했을 때, 인내는 더욱 그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그래서 그는 ‘인내의 덕’을 체현한 영웅을 구상했다. 이 덕은 처음에는 죄를 지었다가 회개한 아담과 하와에게서 나타난다. 그리고 이 덕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된다. 이런 면에서 봤을 때, 밀턴이 생각하는 진정한 영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며, <실낙원>의 속편격인 <복낙원>은 바로 그러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노래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