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길지 않지만 읽기 까다로운 작품이다. 비단 마키아벨리뿐 아니라 고전에 속하는 다른 작품들(성경, 호메로스의 서사시, 셰익스피어의 희곡,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플라톤의 대화편, 그리스 비극 등)도 현대 독자에게는 넘기 힘든 벽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그 원인은 고전이 쓰인 시대와 우리 시대 사이의 간격이 크다. 이때 번역자는 독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문장을 정결하게 다듬거나 독자에게 친숙한 용어를 쓸 수 있다. 그러나 하비 맨스필드는 그러한 노력은 번역가의 의무가 아니라고 본다. 그에 따르면 '저자의 사상을 저자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만이 번여가가 해야 할 일이다. 이에 따르면, 원문의 문장이 복잡하게 되어 있으면, 쉬운 문장으로 고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옮겨야 한다. 설령 현대에는 거의 쓰이지 않는 단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원전의 의미를 가장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면 그 단어를 써야 한다. 그는 이 원칙이야말로 원전의 의미를 가장 충실하면서 역자의 해석이 개입되지 않는 고전 번역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다른 번역과 달리 자신의 번역은 이 원칙을 지켰으므로, 결국 자신의 번역이 가장 우월하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하비 맨스필드가 말하는 번역 원칙은 비단 단어와 문장의 차원에서 그치지 않는다. 최근에 읽은 한 기사(하단 링크 참조)에 따르면, 최근 출판계 동향 중에는 '젠더 개정'과 '성인지 감수성의 향상'이 있다고 한다. 과거 출간된 문학 작품 중에서 성차별적, 여성비하적, 가부장적 표현과 문장들을 대폭 개정하여 책을 다시 내는 것이다. <유진과 유진> 등을 저술한 이금이가 이 기사에서 소개된 사례이다. 가령 이금이는 "소라는 세번은 거절해야 한다고 말한다. 남자들은 너무 쉬운 여자는 좋아하지 않는다나."라는 <유진과 유진>의 한 구절을 "소라는 전적으로 내 마음에 달린 거라고 했다. 내가 잡고 싶으면 잡고 싫으면 말고."로 문장을 수정하였다.
이러한 젠더 개정의 흐름은 번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세계문학전집'으로 국내 독자들에게 유명한 열린책들이 이 흐름을 주도하는 출판사이다. 이들은 여성에 대한 비칭을 수정하는 한편, 남자는 반말을 쓰고 여자는 경어를 쓰는 가부장적 번역 등 성인지 감수성에 맞지 않는 번역을 수정하여 지속적으로 개정판을 내고 있다. '열린책들'의 이사 김영준은 "책의 생명력을 연장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작업은 필요하다"고 '젠더 개정'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얼마 전 개정판이 나온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유)도 젠더 개정이 시도된 다른 사례이다. 역자 이정순은 보부아르의 유명한 경구 ""에서 '만들어지다'는 "여성의 수동성이 부각된 표현"이라며 "여성에게 자율성이 없으면 여성 해방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 표현을 '되는 것이다'로 바로잡았다"고 말했다.
이금이처럼 저자 자신이 자신의 작품을 개정하는 것은 일개 독자로서 왈가왈부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번역의 경우는 다르다. 앞에서 언급한 열린책들이나 이정순의 경우, 번역의 기준은 사용된 번역어나 표현이 얼마나 가까운지가 아니라 성인지 감수성에 부합하느냐 아니냐이다. 특히나 <제2의 성>처럼 역사적으로 중요한 문헌을 번역하는 데 있어서 역자 이정순은 그리 신중치 못한 듯하다.
젠더 개정 같은 현재주의적 번역은 몇 가지 문제점이 곧바로 드러난다. 우선 젠더 개정은 성인지 감수성 같은 주먹구구식 개념을 기준으로 원전을 인위적으로 재단함으로써 원문의 의미를 제한시키고 훼손할 가능성이 있다. 고전을 좋아하는 한 명의 독자로서 이런 번역은 대단히 우려스럽다. 앞에서 말했듯 고전 독서에서는 불편함까지 독서의 한 과정이 된다. 이 불편함에는 익숙치 않은 단어나 문체에서 기인하기도 하지만, 현대와 다른 가치 체계에서 오기도 한다. 그러므로 과거 텍스트에서 현대적 페미니즘이나 성인지 감수성을 기대할 수는 없다. 성차별적 단어이든 "유교 패치"이든, 아무리 불편하더라도 원전의 의미와 뉘앙스를 살려 온전히 전달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 단어를 써야 한다(이 말을 내가 성차별에 찬성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란다.) 구태여 다른 단어나 표현을 찾을 필요가 없다. 번역가는 고전 속 불편함도 전달할 의무가 있다. 다른 것은 고려사항이 아니다. 독자로서도 이 불편함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고 어떻게 넘느냐가 고전을 읽을 때의 중요한 화두일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자의적 번역의 행태가 낣은 인식을 버리고 책을 새롭게 하여 책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는 명분에 의해 합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가치관에 맞게 새롭게 번역을 한다는 것은, 고전의 불편함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고전 텍스트를 우리 시대 속에서만 살게 하려는 모습이 엿보인다. 김영준은 젠더 번역이 책을 현재의 가치와 부합하여 책의 생명을 늘리고 독자가 느낄 위화감을 줄인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인지 감수성을 높이려는 번역 시도는 실제로는 원문의 풍부함과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죽이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위화감이 적은 번역이 좋은 번역일까? 과연 젠더 감수성이라는 한 가지 기준에 맞춰 현대적으로 재단된 텍스트가 다음 세대에도 그대로 통할 수 있을까? 김영준의 천박한 발언은 세계문학전집을 내는 출판사의 이사나 되는 인물이 할 말로는 적절치 않은 것이다. 반대로 출판사의 신뢰성까지 떨어트린다.
김영준에게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진정으로 책의 생명력을 연장하여 영구적으로 남는 번역물을 만들고 싶다면, 하비 맨스필드의 다음 말을 가슴에 새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