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독일어 작품이고, 사유소설 이라고 하길래 나는 저 제목 ‘특성 없는 남자’를 ‘그것’ 없는 남자의 이야기로 생각해 왔다. 즉 배 아래 얘기는 하나도 없고 뇌와 입으로만 진행되는, 특정한 스토리라인이 없는, 휑한 회색 빛 콘크리트 같은 소설일 것이라고. 이건 오해였고, 이 오해는 또한 오해였다.
첫 번째 오해. 이 0.1밀리미터의 하찮은 오해는 생각보다 꽤 큰 즐거움이 된다. 기대 없이 본 영화가 생각보다 괜찮았던 경우와 비슷한 느낌. 이 소설에는 남자도 여자도 많이 나온다. 사유 소설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이유는 충분히 알겠지만, 그것만큼 이 소설은 캐릭터 중심 소설이기도 하다. 다만 이 캐릭터들은 사유가 곧 몸이다. 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한 인물들이라는 것이 두드러진다.
여성 등장인물들이 특히 관심이 갔다. 레오나는 술집에서 노래 부르는 가수이자 가끔 매춘도 하는 여성. 보나데아는 착하고, 유부녀고, 여러 남자들과 바람 피우는 여성으로. 울리히의 친구인 클라리세는 천재를 탐하는, 발터(울리히의 남자친구)의 아내이자 발터와 섹스리스 생활을 한지 꽤 되는, 남편이 천재라고 생각하고 결혼했지만 예상과는 다르다고 예감하는 여성으로. 울리히의 먼 사촌인 디오티마는 특유의 능력으로 나름의 권력을 쥐게 된, 아우라를 지니게 된, 그렇지만 알게 모르게 속물인 듯한, 아른하임(울리히와 여러모로 반대되는 인물)을 사모하게 된 여인으로. 게르다는 반유대주의 사상에 빠진 남자를 만나 유대인인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게 된 여성으로. 라헬은 디오티마의 어린 하녀고, 한 아이의 엄마인 인물로. 등장한다. 재미있는 점은 그녀들과 주인공 울리히와의 관계다. 1~2권에서 육체적 관계를 맺는 것으로 나오는 여성은 두 명(레오나와 보나데아)이지만, 다른 여인들과도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다. 한 마디로, 특성 없는 남자는 발기불능의 남자는 아니었던 것.
따라서 휑한 회색 빛 콘크리트 같은 소설이라는 내 오해는 불식되어야 했지만, 실은 이 소설은 더한 소설. 회색 빛인데다가 거칠기까지 한 콘크리트 같은 소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섹스와 육욕은 있지만, 사랑이라고 불릴만한 것들은 점차 쓰레기화되어 가는 느낌. 근대적인 사유들이 각각의 인물들에게 새로운 욕망을 부여하고 그 욕망들이 예전에 인간적이라고 불렸던 가치들을 거침없이 찢어발기고 있는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작중 언어로 말하면 모두다 ‘현실 감각’만 키워가고 ‘가능성 감각’은 상실해 가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2.
개념을 기다리고 있는 체험. 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다. 특성 없는 남자를 읽으며 메모한 짧은 문장들을 지금 하나하나 보니, 대부분이 우리가 사는 현대를 날카롭게 사유한 결과들이었다. 개념화하지 않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것들(물론 대부분 다른 책들에서도 많이 봐서 이젠 새롭게 느껴지지만은 않는 표현들).
적대적 행위를 통해 존재. 채워지지 못한 방들로서의 환상. 실용적 관심사. 사람 없는 특성들의 세계. 불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생각. 미확(미확정)이라는 주문. 세가지 논문(침묵하기, 필요한 일만 하기, 무덤덤하기). 명령할 군대가 없는 폭군들. 사방 1밀리미터(만큼 전문화된). 자기들의 이상이 실현될 수 없을 때라야 큰 기쁨을 느끼는. 스펙터클에 매달리는 히스테릭한 애착. 실증주의자, 모두 비슷비슷하게 나쁜 생을 영위. 결혼 밖에서 생생한 여성의 이상을 발전. 모든 인간이 우주의 중심.
이 중에서 예를 들어, ‘아주 불운한 사람이나 행운아를 제외하고는 사람들은 모두 비슷비슷하게 나쁜 생을 영위하지만’이라는 표현은 톨스토이를 표적으로 삼은 말일 테다. 울리히의 사유는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시대에 흘러 넘쳤던 여러 사상들에 대한 반박과 지지를 통해서 움직인다. 언뜻 보이는 것만해도 20세기 초. 당대를 주름잡았던 웬만한 사유들은 다 등장하는 듯.
그리고 그 시대. 1913년 전후. 사유들이 마치 휘발성 있는 물질인 것처럼 위태위태한 모습을 보이던 시절. 전쟁과 파시즘이 본격적으로 대두하기 전 유럽의 불안한 분위기가 소설 전반을 채우고 있다. 캐릭터 중심 소설이라는 말을 했지만 이 소설은 또한 시대소설이기도 하다. 다만 그 시대가 짧은 유행의 한 시기가 아니라 1913년에서 백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진행되고 있는 큰 틀의 시대라는 점에서 여느 시대소설과 다를 뿐.
아직 그 유명한, 책을 읽지 않는 사서(가장 기대하고 있는 대목)도, 여동생도 등장하지 않았다. 전부 번역된다면 다시 읽고, 작가 스스로 에세이즘.이라고 명명한 그 형식의 독특함을 해석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