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나와 지하철 개찰구에 다다랐을 때 든 생각. 오늘 내가 양치질을 했나 머리는 감았나 세수는 했나. 당연히 했겠지. 그러지 않고 여기까지 왔겠어? 스스로에게 말을 건다. 세면대 앞에 있었던 시간들은 어디로 날아가 버린 걸까. 집에서 나와 지하철로, 지하철에서 회사로. 퇴근할 때는 그걸 다시 리버스. 근데 그 걸었던 거리에서 내 눈에 들어왔을 그 무엇, 피부로 느꼈을 그 무엇이 백색의 종이 위에 백색의 연필로 스윽 적어놓은 것처럼. 영(0)으로 남을 때.
한편으로 그것은, 일에 몰입해서 그런 것 아니겠어? 하지만, 그 일이 일한만큼 성과가 커지는 성격의 업무가 아니라 커트라인만 넘으면 되는 업무인 경우, 과연 그 일은 몰입할 만한 값어치가 있는 일인가? 아닌가? 하는. 일에 대한 의구심이 곧 삶에 대한 의구심이 되어가던 때에
만난 ‘이날을 위한 우산’은 사색적이어서가 아니라 관찰적(이런 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이어서 읽어나갈 수 있었다.
일에 대한 값어치를 생각한다.고 했을 때, 속으로는 그 일의 값어치를 누군가 알아봐주길 원하는 마음에 그 일에 조금이라도 무심한 모든 사람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날리고 있었던 게 아닌가. ‘다른 사람들에게 유죄판결’을 마구 찍어내고 있던 게 아니었나. 라는 반성을 했다. 그건 이 소설을 읽으며 생각한 것이지만, 이 소설의 이런 메시지가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사색의 흐름이 산책자의 걸음걸이와 동조화 될 때, 그리고 그 걸음걸이가 또한 호구지책과 연결되었을 때. 사색과 관찰과 경험과 생활과 욕망이 겹쳐서 함께 걸을 때, 유머까지 그 곁에 조용히 함께 하는 풍경을 생각한다면, ‘이날을 위한 우산’이 그와 같다고 말해도 좋겠다. 고 또 판단 내리고 만다. (이건 정말 지독한 습관인데, 작중 화자이자 주인공의 말을 인용하자면 하나의 ‘감미로운 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