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다 호기심이 생긴 번역작품들을 보관함에 담다가, 점차 번역작품 목록 자체로 관심의 초점이 이동했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옮긴이의 글 각각에도 틀림없이 저자의 개성과 취향이 묻어나서 김남주 개인을 느낄 수 있었는데, 나는 그보다는 전체 번역목록 자체가 훨씬 더 사적으로느껴졌다. 한 편 한 편의 글들은 그에 비하면 공적인글에 가까웠다. 그런 느낌을 받자, 나는 함부로 말해선 안 되는 느낌. 뭐랄까담벼락 너머로 옆집 거실과 안방을 슬며시 엿본 것 같은.. 일종의 죄책감 같은 것을 느꼈다. 조심스러워졌다.

 

그러다가..

 

 

 

셰익스피어 연구에 수년을 바친 선배가 교수 임용에 탈락한 후 귀농을 결심했고, 불문과를 졸업하고 프랑스로 건너가 박사학위를 받은 동창이 연구하고 가르치는 대신 가업을 이어받아 음식점을 운영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느꼈던 안타까움이 장 지오노를, 간디를 읽고 나서 새로운 기대와 긍정으로 이어졌다.

 

김을 매고 새참을 먹고 논두렁에 앉아 셰익스피어를 읽는 농부, 지극히 한국적인 요리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다뤄내는 경영자. 결국 한 사람의 경험의 총체가 그 사람이 하는 일에서 우러나오게 하는 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시간이 모는 이 일방향의 수레를 타고 이 세상을 지나 당도할 곳이 어딘지 알 수 없지만, 내 모든 경험과 생각이 합당한 질료가 되어 좋은 이동을 할 수 있기를!

 

 

 

이라는 글을 발견하자 뭔가 안심이 됐다. 묘한 죄책감은 사라졌다. 그것은 아마도 번역목록이 내가 생각한 만큼 순수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맞다. 저자의 저 말이. ‘한 사람의 경험의 총체가 그 사람이 하는 일에서 우러나오는 일의 신남’. 그게 그대로 느껴졌다. 그러고 나니 5장이 가장 마음에 든다.

  

 

 

 

 

공허감이 찾아 들었다. 주변의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허무감이 검은 안개처럼 다시 나를 감쌌다. 소설을 전부 읽은 후, 나는 얼른 카페에서 나와 집으로 향했다. 거의 집 근처에 다다랐을 무렵, 왼쪽 앞의 모퉁이에서 갑자기 꺅! 엄마야! ! 하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빠른 걸음으로 가보니 대여섯 명의 여자들이 놀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저기 아이스크림 냉장고에 쥐! !’ 그 중 한 명의 말이 어떤 상황인지 짐작케 했다. 모퉁이에는 슈퍼가 하나 있는데(나는 거의 가지 않는), 친구들끼리 거기서 아이스크림을 사려다가 움직이는 쥐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녀들의 표정. 물론 깜짝 놀라긴 했겠지만, 친구들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즐거워 보이기까지 한 밝은 표정들. 웃는 얼굴들. 서로를 보며 안도했다는 표정들.

 

그 사건의 현장(?)을 지나 몇 걸음 걸은 후에 깨달았다. 살인자의 기억법을 읽고 내게 달라붙었던 공허감이 거의 사라져버렸음을. 허무감이 엷어졌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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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개념정원 개념어 시리즈 (문학동네) 1
서영채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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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와 환유, 사디즘과 마조히즘에 대한 글은.. 전에 다른 책에서 어렵게 읽고 무슨 얘기인지 전부 파악하지 못한 것이었다. 덕분에 명쾌하게 정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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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드의 깨끗한 욕실. 먼저 들어가 씻은 이는 롤런드였다. 그곳에서 그는 그와 발(롤런드의 연인)이 살고 있는 집의 좁고 지저분한 욕실을 떠올린다. 다음에는 모드. 그녀는 거기에서 옛 애인인 퍼거스 월프와 여기저기 구겨져 있던 자신의 침대를 떠올리며 진저리 친다.

 

두 번째는 실 코트의 욕실. 크리스타벨 라모트가 살았던 곳의 2층 욕실. 세상을 덮을 만큼 눈이 쌓이던 그날. 먼저 들어가 씻은 이는 모드. 나중이 롤런드였다. 욕실은 물론 욕조가 있겠지만, 욕조에 누운 모습이 묘사되지는 않는다. 욕실에서 씻을 때 주인공들은 서 있는 모습이다. 서 있다. 그리고 순서가 있다. 먼저 한 사람이 씻고 나중에 다른 사람이 같은 욕실을 사용한다. 실 코트의 욕실에 나중에 들어간 롤런드는 모드의 자취를 읽는다.

 

정체성 문제는 이 소설에서 아주 중요하다. 존재의 문제. 다른 누군가에게 용해되어버려 자기 자신을 잃게 될까 두려워하는 사람들. 존재를 녹일 수 있는 사랑에 대한 방어기제의 작동. 거리를 두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소설의 한 축을 담당한다. 그리고 그 상징으로 욕실은 작동한다.

 

 

2.

침실에서 연인들은 동시에 같은 곳에 있다. 숨소리, 긴장된 피부, 고정된 눈동자, 직접적이고 간접적인 온갖 사랑의 행위들. 그것은 일종의 스펙터클. 그리고 물론 오르가슴이겠고, 그때 각각의 개별 존재는 순간 사라지고 더 높은 존재로 승화되거나 더 낮은 존재로서 전투를 치른다.

 

빈 방의 하얀색 침대. 롤런드와 모드가 꿈꾸는 공간. 그 침대는 욕실과 거의 매칭되지만, 그럼에도 침대는 빈 방의 하얀색 침대로만 남을 수는 없다. 필연적으로 그것은 구겨지게 되어 있는 것. 빈 방의 하얀색 침대는 일종의 투사일 것인데, 그것은 또한 그들이 서로를 사랑하기 시작했음을 무의식적으로 억압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침대는 사랑의 장소, 서로가 서로에게 용해되는 장소, 자신을 잃어버릴 수 있는 곳이다. ‘사랑을 떠올릴 때 딱 붙어 다니는 이미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사랑, 결혼의 이미지.

 

침실의 사랑학이 있고 욕실의 사랑학이 있다. 누군가를 온전히 소유하고 싶기도, 누군가에게 온전히 소유되고 싶기도. 자기 자신으로 자립하여 존재하고 싶고도,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슬쩍 기대고도 싶기도 한 욕망.

 

 

3.

각 챕터의 맨 처음을 장식하는 것은 거의 시(). 크리스타벨 라모트 또는 랜돌프 헨리 애쉬의 작품들. 이 시들이 내내 장애물이 되었다. 상징성을 듬뿍 담은 이 시들은 배경지식이 얕은 독자인 나로서는 이해도, 공감도 하기 어려웠다. 그러다 레오노라(크리스타벨 라모트의 또 다른 연구자)가 라모트의 묘지에 찾아간 것을 회상하는 대목에서, ‘묘비를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아차! 했다.

 

그 시들은 모두 결국엔 묘비명(epitaph)이라는 것을.

묘비는 서 있다. 주검은 누워 있다. 서 있음과 누워 있음이 공존하는 곳. 몸에 맞는 관 하나가 땅속에 누워있고 작은 묘비 하나가 그 위에 서 있다. 욕실과 침실의 공존. , 결국 사랑과 존재에의 욕망이 겹쳐진 우리의 삶을 시()로써 반복해 읊었던 것을. 그것이 결국 죽음에 이르렀을 때 우리 삶에 대해 쓸 수 있는 단 몇 줄의 가장 중요한 문장들이라는 것을.

 

 

수직의 욕망(욕실, 존재)과 수평의 욕망(침실, 소유)에 대한 어마어마하게 풍부한 상징을 담은 지적인 이야기면서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처럼 유쾌하기까지 한 이야기. 읽고 있는 중에 이미 아주 많은 것들을 내 속에 침묵으로 남겨둘 수 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예감한작품. ‘풍부하다는 평을 이런 소설에 쓰지 않으면 대체 어디다 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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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7-24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읽으셨군요! :)

dreamout 2013-07-24 22:04   좋아요 0 | URL
읽은지는 한 보름 된 것 같아요. 막상 글을 쓸 때는 시간을 많이 투입해서 집중해서 쓰지도 않으면서, 시간이 없다 뭐가 없다.. 자꾸 미루기만 하는 것 같아요.

이 소설도 좋았어요. ^^
 

 

 

 

 

 

 

1.

순례를 떠난 해. 나는 아마도 2013년의 절반이 흐른 그날. 순례를 떠난 해. 라는 말이 어쩌면 나를 위해 예비된 말이었지 않았나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곧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다자키 쓰쿠루는 여자친구인 ‘사라’의 조언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자발적’으로 순례에 나선 것이었다. 나는 타의에 의해 움직여진 것이니 같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또 억지로라도 나의 이동을 ‘순례’와 엮어내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든 것이다.

 

 

주변은 온통 거친 바위뿐인 땅이었다. 한 방울 물도 없고 한 가닥 풀도 없다. 색깔도 없고 빛다운 빛도 없다. 해도 없고 달도 없다. 아마 방향도 없다. (중략) 그러나 동시에 그곳은 풍요의 장소이기도 했다. 어슴푸레한 저물녘이면 칼날처럼 날카로운 부리가 돋은 새들이 날아와 그의 살을 사정없이 발라냈다. (53 page)

 

 

‘다자키 쓰쿠루라는 이름을 풍경으로 펼쳐 보여주는 이 문장들. 말장난 같이 느껴지는 주인공의 이름을 풀어보면 이렇게 나눠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자키(多崎) – 험함이 많은, 험하기 그지없는… (존재 기반)

쓰쿠루() – 만들다… (존재의식)

 

참 묘하게도 ‘시지프’ 라는 이름을 한자로 의역한 듯 보이는 이 유치한 이름이 가슴에 짙게 와 닿은 것이다. 이 풍경을 그저 하염없이 바라 보았다. 반복해서 상상해 보았다. 그러자 리스트의 ‘르 말 뒤 페이’가 배경음으로 선택된 까닭이 분명해졌다.

 

 

2.

시로의 죽음을 미스터리인 채로 남겨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상하게도 나는 왠지 하이다와 아버지 하이다의 이야기가, 미도리카와의 작은 주머니와 여섯 번째 손가락 이야기가 내내 걸렸다. 시로가 겪은 끔찍한 사건들과 다자키 쓰쿠루가 그렇게나 아무 연관이 없었던 것일까. 나는 그게 내내 걸렸다. 지금도 모르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다자키 쓰쿠루에게도 하이다처럼 아버지가 있었고, 손가락 이야기는 유전(遺傳)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뭔가 걸렸고, 시로의 방에 남겨져 있었던 담배꽁초. 담배를 하루에 50개피나 피던 누군가. 다자키 쓰쿠루가 서른 살 때 죽은 사람은 시로만이 아니었다. 다자키 쓰쿠루의 아버지의 죽음도 그때였다. 아마 이건 나의 망상일 수 있겠다. 잘못 읽은 것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성명(姓名)은 내내 걸렸다. 이름()은 개별적 존재를, ()은 개별적 존재를 넘어선 핏줄의 문제를 떠올리게 한다. ‘쓰쿠루는 태어난 이후의 문제고다자키(多崎)’는 태어나기 전부터 계속 되어온 문제다. 핏줄. 인간의 운명은 나 개인의 운명만의 문제는 아니다. ‘나’라는 존재를 연유하게 했던 끊을 수 없는 존재 또는 맥락들은 ‘나’라고 불리는 것만큼 중요할지 모른다. 아니 최소한 간과해서는 안될 그 무엇임에는 틀림 없다.

 

 

3.

색채가 있는 사람 – 도약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도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최소한으로 말한다 해도 나는 그것이 맥락에서 떨어져 나온 ‘나’ 혼자만의 도약이라고는 생각 들지 않았다. ‘나’라고 불리는 것은, 크게는 인류의 역사가, 핏줄(), 내가 살고 있는 현재 사회가, 친구들과의 우정과 연인과의 사랑이, 모두 뭉쳐져 있는 존재다. 이 모든 맥락을 짊어지고서 해야 하는 도약. 아마 그런 의미에서의 도약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오가 렉서스를 판매하고 아카가 샐러리맨들의 정신개조 교육 프로그램 아웃소싱 업체 사장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그렇게 세세하게 얘기하는 까닭도 마찬가지라고 여겨졌다. 우리가 사는 동시대의 문제들에서 멀어지는 것이 ‘도약’이 아니고, 그것을 껴안고 할 수 있어야 ‘도약’이라고.

 

하루키는 여전히. 그렇다. 아이러니스트다. 어떤 짐을 이고 있더라도 길은 내 스스로가 만들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 ‘나’라고 불리는 존재는 가느다란 한 줄의 실이 아니라, 핏줄과 동시대의 문명-문화와 인연이 된 사람들과… 이 모두가 꼬이고 엮어진 하나의 실타래임을. 느끼게 해준다. 이제 너무 징징대지 말고, 사랑하자.

 

 

4.

순례를 떠난 마음으로 현재를 즐기자. 고 스스로에게 속삭인다. 낯선 곳을 즐기고, 취미를 즐기고, 무엇보다 애지중지하는 사람들과 사랑과 우정을 나누며…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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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7-16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집에 가면 이 책이 도착해있을거에요. 그러면 저는 이 책을 읽을 겁니다. 다른 많은 책들은 그 다음으로 미뤄두고요.

샐러리맨의 정신개조 교육 프로그램 아웃소싱 업체, 렉서스 판매, 등의 문장들에서 [1Q84]가 떠오르네요. 덴고의 아버지였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티븨 수신료를 받으러 다니던 사람이요. 그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어요.

순례를 떠난 마음으로 현재를 즐기시고자 하는 속삭임이, 부디 그렇게 되기를요.

dreamout 2013-07-16 13:44   좋아요 0 | URL
저는 오늘 다른 약속이 정해지지 않는다면..., 소유.에 대해 글을 써 볼까 해요.

1Q84는 아직 읽지 않았어요.. 언젠가 읽겠죠?

네. 순례를 떠난 마음.... 정말, 제겐 그게 필요해요...

2013-07-19 09: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20 0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철학자, 철학을 말하다 토트 아포리즘 Thoth Aphorism
강신주 엮음 / 토트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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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리즘이 필요했다. 7월 들어 읽은 몇 권의 책들에게서 내가 원한 것은 결국 아포리즘. 그러나 역시 아포리즘만으로 채워진 책은 강렬하지 않았다. 노이즈와 함께 하지 않은 아포리즘은 간이 안맞는 김치같아. 아삭하긴 하는데 맛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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