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순례를
떠난 해. 나는 아마도 2013년의 절반이 흐른 그날. 순례를 떠난 해. 라는 말이 어쩌면 나를 위해 예비된 말이었지 않았나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곧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다자키
쓰쿠루는 여자친구인 ‘사라’의 조언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자발적’으로 순례에 나선 것이었다. 나는 타의에 의해 움직여진 것이니 같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또 억지로라도 나의 이동을 ‘순례’와 엮어내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든 것이다.
주변은
온통 거친 바위뿐인 땅이었다. 한 방울 물도 없고 한 가닥 풀도 없다.
색깔도 없고 빛다운 빛도 없다. 해도 없고 달도 없다. 아마
방향도 없다. (중략) 그러나 동시에 그곳은 풍요의 장소이기도
했다. 어슴푸레한 저물녘이면 칼날처럼 날카로운 부리가 돋은 새들이 날아와 그의 살을 사정없이 발라냈다. (53 page)
‘다자키
쓰쿠루’라는 이름을 풍경으로 펼쳐 보여주는 이 문장들. 말장난
같이 느껴지는 주인공의 이름을 풀어보면 이렇게 나눠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자키(多崎) – 험함이 많은, 험하기
그지없는… (존재 기반)
쓰쿠루(作) – 만들다… (존재의식)
참
묘하게도 ‘시지프’ 라는 이름을 한자로 의역한 듯 보이는 이 유치한 이름이 가슴에 짙게 와 닿은 것이다. 이
풍경을 그저 하염없이 바라 보았다. 반복해서 상상해 보았다. 그러자
리스트의 ‘르 말 뒤 페이’가 배경음으로 선택된 까닭이 분명해졌다.
2.
시로의
죽음을 미스터리인 채로 남겨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상하게도 나는 왠지 하이다와 아버지 하이다의 이야기가, 미도리카와의 작은 주머니와 여섯 번째 손가락 이야기가 내내 걸렸다. 시로가
겪은 끔찍한 사건들과 다자키 쓰쿠루가 그렇게나 아무 연관이 없었던 것일까. 나는 그게 내내 걸렸다. 지금도 모르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다자키 쓰쿠루에게도 하이다처럼
아버지가 있었고, 손가락 이야기는 유전(遺傳)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뭔가 걸렸고, 시로의 방에 남겨져 있었던 담배꽁초. 담배를 하루에 50개피나 피던 누군가. 다자키 쓰쿠루가 서른 살 때 죽은 사람은
시로만이 아니었다. 다자키 쓰쿠루의 아버지의 죽음도 그때였다. 아마
이건 나의 망상일 수 있겠다. 잘못 읽은 것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성명(姓名)은 내내 걸렸다. 이름(名)은 개별적 존재를, 성(姓)은 개별적 존재를 넘어선 핏줄의 문제를 떠올리게 한다. ‘쓰쿠루’는 태어난 이후의 문제고
‘다자키(多崎)’는 태어나기 전부터 계속 되어온 문제다. 핏줄. 인간의 운명은 나 개인의 운명만의 문제는 아니다. ‘나’라는 존재를 연유하게 했던 끊을 수 없는 존재 또는 맥락들은 ‘나’라고 불리는 것만큼 중요할지 모른다. 아니 최소한 간과해서는 안될 그 무엇임에는 틀림 없다.
3.
색채가
있는 사람 – 도약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도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최소한으로 말한다 해도 나는 그것이 맥락에서 떨어져 나온 ‘나’
혼자만의 도약이라고는 생각 들지 않았다. ‘나’라고 불리는 것은, 크게는
인류의 역사가, 핏줄(姓)이, 내가 살고 있는
현재 사회가, 친구들과의 우정과 연인과의 사랑이, 모두 뭉쳐져
있는 존재다. 이 모든 맥락을 짊어지고서 해야 하는 도약. 아마
그런 의미에서의 도약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오가
렉서스를 판매하고 아카가 샐러리맨들의 정신개조 교육 프로그램 아웃소싱 업체 사장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그렇게 세세하게 얘기하는 까닭도 마찬가지라고
여겨졌다. 우리가 사는 동시대의 문제들에서 멀어지는 것이 ‘도약’이 아니고, 그것을 껴안고 할 수 있어야 ‘도약’이라고.
하루키는
여전히. 그렇다. 아이러니스트다. 어떤 짐을 이고 있더라도 길은 내 스스로가 만들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 ‘나’라고 불리는 존재는 가느다란 한 줄의 실이 아니라, 핏줄과
동시대의 문명-문화와 인연이 된 사람들과… 이 모두가 꼬이고 엮어진 하나의 실타래임을. 느끼게 해준다. 이제 너무 징징대지 말고, 사랑하자.고
4.
순례를
떠난 마음으로 현재를 즐기자. 고 스스로에게 속삭인다. 낯선
곳을 즐기고, 취미를 즐기고, 무엇보다 애지중지하는 사람들과
사랑과 우정을 나누며…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