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튀르키예 작가 쥴퓌 리바넬리의 <세레나데>였다. 독일계 미국인 노교수 막시밀리안 바그너가 59년 만에 이스탄불에 도착해 그를 수행하게 된 마야에게 긴 시간 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다. 그 이야기 한가운데에 스트루마호가 있다. 유대인에 대한 박해를 피해 루마니아를 떠나 팔레스타인으로 가려던 수백 명이 이 배에 올랐고, 바그너의 아내 나디아도 그 안에 있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을 통치하던 영국은 아랍인들의 반발 등을 우려해 유대인의 이주를 제한했고, 튀르키예 정부 역시 이들의 상륙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렇게 배는 이스탄불 앞바다에서 오랫동안 발이 묶이고 만다.

배 안에서는 먹을 것이 떨어지고, 아기들의 울음소리와 사람들의 구조 요청이 끊이지 않았다. 그 외침은 육지에까지 닿았지만, 누구나 자유롭게 배에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허가를 받은 이스탄불의 유대인 단체가 스트루마호에 식료품과 약품을 날랐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누군가는 자신의 삶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용기를 내지 않았을까. 배에서 내릴 수 있기를 얼마나 소망했을까. 또 다른 누군가는 눈앞에 육지를 두고도 내릴 수 없는 현실이 오히려 절망스럽지는 않았을까. 나는 그 마음들을 다 알 수가 없다. 바그너가 하루빨리 나디아를 만나 예쁜 집으로 데려가고만 싶었다고 했던 그 말에 콧잔등이 시큰해져 짐작만 해 볼 뿐이다.

“이 일이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렵군요. 몇백 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나디아를 만나는 게 세계 정치문제가 돼버리다니.” (<세레나데>, p. 396)

스트루마호는 한때 다뉴브강에서 가축을 실어 나르던 낡은 배였다. 그 배가 사람들을 태우고 팔레스타인으로 향하려 했던 것이다. 중부유럽에서 흑해까지 이어지는 다뉴브강. 사람과 물자가 오가는 길이었고, 때로는 제국의 경계가 되기도 했다. 이 강을 따라서는 또 어떤 사람들이 지나갔고,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그렇게 이탈리아 작가 클라우디오 마그리스의 <다뉴브>를 만나게 된다.

다뉴브강은 한 줄기의 강이지만, 어디에서 시작하는지를 두고 오랜 논쟁이 이어져 왔다. 여러 나라를 가로지르며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를 품은 강이라서일까. 그 시작을 두고 여러 가설이 나왔는데, 퇴적학자 아메데오는 다뉴브강이 아무도 잠그지 않은 한 수도꼭지에서 생겨난다는 가설까지 내놓았다. 아메데오는 직접 그곳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그에게 이 탐사는 단순히 강의 시작점을 확인하는 일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자기 안에 갇힌 생각에서 벗어나 바깥을 바라볼 구실도 필요했던 모양이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 언제나 답을 찾아가는 길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면 제자리에서 맴돌 때도 있으니까. 사실 꼭 답을 찾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잠시 다른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거나 바깥 풍경을 보고 있다 보면, 내 안에서만 맴돌던 생각도 슬쩍 딴 데로 새곤 한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오지 마라, 라고 설교하던 때의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느 정도는 틀렸다. 그랬다가는 자기 안에 갇혀 별점을 치다가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고, 결국 그의 두려움에서 나온 찌꺼기와도 같은 연기에 휩싸인 우상, 저녁기도에서 어서 썩 꺼지라고 명하는 이 악몽에서처럼 어둠 속에 도사린 허망한 이 우상에게 향을 피우게 된다. (p. 29)

이 책은 베네치아의 시의원 마우리치오 체코니가 제안한 <여행 건축: 호텔의 역사와 유토피아>라는 주제의 전시회에 함께하자는 초대장에서 시작한다. 여행의 건축학이라니. 어디 여행이라는 게 계획대로만 흘러가던가?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뜻밖의 무언가를 발견하기도 하는 게 여행인데 말이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여행이고 삶이라는 이야기를, 마그리스는 초대장 한 장에서부터 슬쩍 꺼내 놓는 게 아닐까 싶다.

9부로 나뉜 책에서 1부만 들여다봤는데도 카프카, 괴테, 첼란, 셀린, 헤겔, 횔덜린, 하이데거, 키르케고르 등 여러 인물이 언급된다. 지금까지 읽으면서 든 생각은, 마그리스가 인물이나 역사를 하나의 이름으로 정리할 수 없다는 걸 보여주려는 게 아닐까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어떤 면을 높이 평가한다고 해서 다른 면까지 긍정할 수 있는 건 아니고, 반대로 한 가지 면만으로 그 사람을 다 설명할 수도 없을 테니까. 살아온 시대와 내린 선택, 그로 인해 벌어진 일들이 얽혀 있으니 말이다. 이런 모순과 간극을 여러 인물을 통해 들여다보는 것이 흥미로웠다. 역사와 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시처럼 읽히는 아름다운 문장을 만나 잠시 쉼을 얻기도 했다.

사실 우리는 고아나 다름없이 살아간다고, 횔덜린은 「다뉴브 강의 수원에서」라는 시에서 말했다. 강은 삶의 흐름처럼 햇살에 반짝이며 흘러가지만, 빛나는 그 인상은 눈이 부신 시선이 만들어낸 시각적 환상이다. (...) 강은 늙은 도인道人과 같다. 강변을 따라가며 큰 바퀴 위에서도, 바퀴살 틈새에서도 가르친다. 여행마다 여유로운 시간, 나태, 흘러가는 물결 등, 적어도 남쪽의 한 조각이 있다. 자신의 강변에 있는 고아들에게 무관심한 채, 다뉴브 강은 바다를 향해, 위대한 확신을 향해 흘러간다. (p. 23)

마그리스가 어떤 생각을 하는 작가인지 엿볼 수 있는 이야기를 만나기도 한다. 뜻밖에도 오래전 한 시인과 여인의 사랑 이야기다.

4세기 로마의 시인이자 수사학자였던 아우소니우스는 368년 게르만 원정에 나선 로마군을 따라갔다. 원정에서 승리한 뒤 그는 여성 노예 한 명을 얻었고, 그녀에게 비술라라는 이름을 붙였다. 쉰여덟의 아우소니우스는 비술라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녀를 자유롭게 해주었지만 비술라는 그를 따라 로마까지 왔다. 게르만인의 금발과 눈을 지녔으면서도 로마식 옷을 입고 그곳의 생활에 익숙해진 그녀. 아우소니우스는 비술라를 사랑하면서도 그녀의 출생이나 독일의 강과 숲을 부정하라고 하지 않았다. 새로운 정체성을 얻는다고 해서 이전의 자신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었을까. 이 이야기를 읽다 보면 마그리스가 서로 다른 문화의 만남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아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물론, 늘 조화로운 만남만 있는 것도 아니고, 서로 다른 것들이 부딪히는 순간마다 선택해야 할 일도 생긴다. 다뉴브를 따라가는 동안 마그리스는 또 어떤 이야기들을 이어갈까. 아직 갈 길이 (매우) 멀다.

모든 민족에게는 자신의 때가 있는 법이고, 절대적으로 더 우월하다거나 열등한 문화는 없으며, 다만 민족들이 각기 다른 시기에 번영하고 쇠퇴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몸으로 체험하여 확실하게 배우지 않는 한, 우리는 진정으로 안전하다 말할 수 없을 뿐이다. 삶을 살아가고 읽는다는 것은, 모든 시기와 모든 국가에서 일어난 ‘인간의 정신사’를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강을 따라 삼각주까지 가다 보면 여러 다양한 사람과 민족 속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장을 보게 될까. 아니면 언어와 문화의 다양성 속에서 이 모두에도 불구하고 하나 된 인류의 합창을 듣게 될까. (p. 43)

관심이 가는 것마다 따라가다 보면 끝이 없다. 갖가지 사유를 좇으며 그 안에 담긴 본질까지 알아내 빈약한 영혼을 살찌우겠다는 욕심도 그닥 없다. 내 발등에 떨어진 일 처리하기도 천근만근이다. 그래도 자꾸 따라가게 되는 건, 그 안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다뉴브강을 따라 중부유럽에서 발칸으로 관심이 이어졌고, 마침 발칸을 배경으로 한 영화 <킹 페타르: 세계대전의 서막>을 보게 됐다. 1915년 겨울, 세르비아군과 피란민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 불가리아의 협공을 피해 알바니아 산맥을 넘어 후퇴해야 했다. 눈앞에 화면을 채우는 건 눈과 추위 속에서 산길을 걷다 쓰러지는 사람들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행렬을 보고 있자니, 그 겨울을 어떻게 버텼을까 싶었다.

영화 속에서 만난 세르비아의 페타르 1세 국왕은 실제로 젊은 시절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세르비아어로 옮겼을 만큼 자유주의적 신념을 품었던 인물이다. 개인의 존엄과 자유를 이야기하던 사람이 포화가 빗발치는 전선에서 병사에게 듣는 자유는 ‘고통받을 자유’뿐이었다. 그 앞에서 페타르 왕은 끝내 말을 잇지 못한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자니 발칸의 역사를 조금 더 들여다보고 싶어졌고, 책장에 꽂혀 있던 이보 안드리치의 <드리나 강의 다리>를 펼쳤다. 영화에서 본 전쟁은 그 땅이 겪어온 긴 세월 가운데 한 시기였다. 소설은 그보다 훨씬 앞선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그곳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망각은 모든 것을 치유시켜주었으며 노래는 망각의 가장 아름다운 방법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노래 속에서 오직 사랑하는 것만을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늘과 강과 산 사이 카사바에서 대를 이어간 세대는 혼탁한 물결이 휩쓸고 간 것에 그다지 슬퍼하지 않는 태도를 터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삶은 끊임없이 닳고 소모되지만 그러면서도 역시 지속되고 ‘마치 드리나 위의 다리처럼’ 단단하게 서 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이라는 카사바의 무의식적인 철학이 그들에게 스며든 것이었다. (p. 117)

새 신발에 뒤꿈치가 콱 깨물려도 괜찮겠거니 하며 계속 걷다가, 도저히 아니다 싶어 양말을 젖혀보면 이미 많이 까져 있다. 삶에도 그런 일이 있다.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거나, 뒤늦게 알아채거나, 알면서도 별일 아니겠거니 여긴 것들이 어느새 덩치를 키우고 있다. 미리 뒤꿈치에 밴드라도 하나 붙여두었으면 될 일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제 뜻대로만 살 수 없다며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여긴 방향들을 조금씩 지우기도 하고, 실리를 좇는 기회주의자이자 몇 가지 요령만을 갖춘 겁쟁이가 되어가는 것 같기도 하다. 조금은 유연해진 것이라고 위안이라도 삼아 본다. 이렇게 스스로를 달래보는, 별거 아닌 하루다. 그런데 그 뒤늦음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사람들의 삶에 닿고 나면, 내가 뭘 안다고 그랬을까 싶어진다. 훨씬 큰 힘에 떠밀려 살아야 했던 사람들은 그 시간을 도대체 어떻게 지나왔을까. 사실, ‘어떻게’랄 게 있을까 싶다.

역사라는 이름 아래 몇 줄 줄거리로 요약되기 전에, 그곳에는 각자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하루하루가 있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책이나 영화로 만난다.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 이야기도 많다. 익숙하고 비슷한 이야기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그 안에 있던 사람에게는 처음이자 단 한 번의 일이었을 것이다. 내가 책을 통해 만난 사람들, 영화 속 그 겨울에 쓰러진 사람들에게도 한 사람 몫의 하루가 분명 있었을 텐데, 그 하루들은 대부분 이름도 없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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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6-10-29 15: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제나처럼 글과 사진 모두 아름답네요.

저는 저기 중간에, 그 겨울을 어떻게 버텼을까, 하는 문장에서 빅토르 위고의 [웃는 남자]가 생각났어요. 추운 겨울, 눈 위를 걷던 소년이 갓난 아이를 발견하고, 저 살기도 바쁜데 그 아기를 기어코 품에 안고 다시 그 추위를 걷던 장면이요. 그 책은 그래서 처음부터 하, 진짜 인간 뭐냐, 나도 힘들어 죽겠는데 가만 두면 죽겠다고 다른 사람 살리려는 그거, 그거 진짜 뭐냐, 싶었거든요. 저는 그 겨울을 어떻게 버텼을까, 멈춰 생각해보는 곰돌이 님에게서도 아 진짜 인간은 뭐냐, 하는 그 생각을 합니다. 그 따뜻한 지점에서 말이지요.

따뜻한 마음을 가지신 분이라서 사진도 이토록이나 따뜻한가 봅니다. 저런 정갈한 사진, 저는 꿈도 못꿔요.

곰돌이 2026-10-29 15:47   좋아요 0 | URL
책을 읽는 재미가 이런 데도 있구나 싶어요. 저는 혼자 읽고 혼자 끄적거리고, 거기에서 그치는 사람이라서요. 제가 읽거나 본 어떤 장면을 두고 다락방님은 다른 책을 떠올리시고, 그 이야기가 또 저한테 오고, 이렇게 책 이야기가 연결되는 게 저한테는 흔한 일이 아니라서 더 좋네요.

저는 <웃는 남자>를 아직 안 읽어서 그 소년은 모르지만, 추위 속에서 아기를 품에 안고 걸었다는 이야기는 기억해 둬야겠어요. 나중에 읽다가 그 장면을 만나면 다락방님 생각이 나겠네요. 큭큭

2026-10-30 1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10-30 16: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52
알프레트 되블린 지음, 권혁준 옮김 / 을유문화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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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나는 어디로 가야 하지? 그때 대답이 들려왔다. 이게 바로 형벌이야”

지금 막 4년의 형기를 마친 사내가 교도소 담장 밖으로 나왔지만, 여름 외투 하나 걸친 그는 이내 풀썩 주저앉고야 만다. 자유를 얻은 사람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주저앉는 것이라니. 왜? 무엇 때문에? 그는 지금 담장 안으로 되돌아가고만 싶다. 그러나 형을 다 마쳤으니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상 속으로, 저 많은 사람들 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을까? 막막함과 두려움이 엄습해온다. 이 사내의 불안함을 눈치챈 어느 붉은 수염의 유대인이 다가와 던지는 한마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눈과 발이오. 세상을 제대로 볼 줄 알아야 하고, 세상에 뛰어들 수 있어야 하니까요.”

사흘이 지났다. 출소한 사내, 프란츠 비버코프는 이제 겨울 외투에 모자까지 쓰고 활력을 찾은 모습이다. 이번만큼은 진실하게 살아보겠다 맹세한다. 그러나 그가 다시 마주한 세상은 결심만으로 건너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새사람이 되어보겠다는 건 프란츠의 마음이고, 세상이 그를 대하는 방식은 별개의 문제다. 그가 어떤 죄목으로 교도소에 들어갔는지, 그리고 나온 이후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내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새사람? 개코나, 인간이 어디 그리 쉽게 변한다니?’ 욕도 아까웠다. 그래서인지 앞서 붉은 수염의 유대인을 향한 프란츠의 대꾸 안에서 느껴진 삶의 의지와 자신감이 새삼 다시 떠오르면서 괜히 같은 말도 더 괘씸하게 다가왔다.

“당신은 발과 눈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죠. 내게도 아직 눈과 발이 있어요. 아무도 그것을 뺏어 가진 않았죠.”

이 책은 베를린에서 시멘트 공장 노동자이자 가구 운반 인부였던 프란츠 비버코프에 관한 보고서다. 왜 하필 범죄자 프란츠일까? 그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아니아니, 알렉산더 광장 앞을 오가는 벌떼같이 많은 사람들 중 사소한 인물일 뿐이다. 심지어 그의 친구들 사이에서는 ‘선량한’ 프란츠라는 거.

갑자기 뜬금없는 작가의 TMI인데, 정신과 의사이기도 한 알프레트 되블린은 영화광이라고 한다.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영화를 보듯 조각조각 난 장면을 머릿속으로 이어 붙이게 된다. 지금 읽고 있는 이야기만 쭉 이어지는 게 아니라 도시 전체의 풍경을 비롯한 여러 요소가 다소 이질적으로 끼어들 때가 있고, 화자의 말이 이어지다 말고 인물의 혼잣말이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처럼 구분도 없이 섞이기도 한다. 현기증 날 정도는 아니다. 맨날 먹는 밥은 지겨워서 새로운 거 먹을 때 입이 즐겁듯, 그저 즐기면 될 뿐. 따라가다 보면 금세 리듬에 적응이 되고, 이 소설 특유의 공허함과 머리가 무거워지는 엄숙함에 서서히 감기게 된다.

마치 한 방향으로 바람이 부는 게 아니라 이쪽에서 불었다가 저쪽에서 불고, 거리의 먼지와 종잇조각이 정신없이 휘날리는 날의 느낌이다. 도시는 부산스럽고 활기찼지만, 프란츠처럼 전과를 안고 다시 살아보려는 사람에게 이 분주함은 기회인 동시에 언제든 자신을 휩쓸어갈 바람이기도 하다. 주머니에 얼마 안 되는 지폐를 만지작거려보기도 하고 외투 깃을 바짝 세워보지만 춥다, 더럽게 춥다. 마음이 추우니 더 춥다. 그렇게 1920년대 말 베를린이 한꺼번에 품고 있었을 활기와 불안을 느껴볼 수 있었다.

프란츠는 이것저것 팔기 시작한다. 넥타이핀을 팔다가 알렉산더 광장을 떠돌며 민족주의 성향의 신문까지 판다. 그러다 옛 전우, 지금은 연마공으로 일하다 직장에서 쫓겨난 게오르크를 만나면서 이야기는 전쟁과 혁명, 공화국을 둘러싼 정치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런데 프란츠가 꺼내놓는 건 전쟁의 승패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먹을 게 없어 농부의 감자를 훔쳐 먹었던 일, 고기와 버터조차 구하기 어려운 현실 같은 것들. 전쟁을 겪고 혁명까지 일어났는데, 정작 달라진 게 뭐냐는 거다. 건물은 높이 올라가고 도시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세상이 변한다는 건 대체 누구의 삶이 변한다는 뜻일까? 거리에서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고, 헌법에 자유가 적혀 있어도 경찰의 곤봉 앞에서는 소용이 없다고 외치고 있다. 자유가 있다고 쓰여 있는 것과 실제로 자유롭게 사는 건 다른 문제라는 듯이. 겉으로는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야.”라고 되뇌는 프란츠. 세상이 무슨 색을 내걸든, 먹고사는 일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어떤 친구가 갖고 있는 시가의 띠가 빨간색이든 금색이든, 아니면 흑백적이든 그것 때문에 시가 맛이 더 좋아지는 것은 아니잖아. 중요한 것은 연초 그 자체야.” (p. 118)

빵 한 조각도 벌어야 내 입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그 벌이조차 힘겨운 세상이니 목구멍에 술이 안 들어갈 수가 없고, 남는 거라고는 그다음 날의 숙취와 그사이 흘러간 세월뿐. 멀미 나는 배 위에서 아무 기둥이라도 얼른 껴안고 싶은 사람처럼, 불안한 세상 속에서 프란츠는 대단한 신념이 아니라 그저 움직이지 않는 무언가가 필요해서 움직이는 사람으로 보였다.

프란츠는 평온함을 원한다. 깨끗해지길 원한다. 말끔히 치워지길 바란다. 무엇이? 자기 안팎의 나쁜 기운이나 불쾌한 감각이. 자기가 옳다고 믿는 상태를 억지로라도 만들어내려는 사람처럼, 일부러 창문을 열고 차디찬 바깥바람을 쐬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자신과 안 좋게 엮인 인물이 자기가 사는 집에 왔을 땐, 그 사람을 향해 계속해서 찬물을 뿌리는 모습도 같은 맥락으로 보였다. 지금 당장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당장 감당할 수 있는 크기로 줄여 놓는 것. 나는 이게 프란츠가 살아가는 방식 중 하나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차근차근 받아들일 여유조차 없는 사람처럼. 그런 그가 막상 자기한테 엄청난 일이 닥쳤을 때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세상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사람이 자기 삶에 대해서만큼은 어떻게든 포기하지 않으려 하는 모습. 대단한 생존 본능일까,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일까.

줄거리를 최대한 드러내지 않고 적으려니 영 가슴팍이 갑갑하다. 이 책과 어울리는 표현은 아닌 것 같지만 요 며칠 정말 신나게 읽었다. 프란츠의 이야기 사이로 다른 사람들의 일상이나 가축들이 도축되는 과정, 성경 속 이야기와 시의 한 구절이 불쑥 끼어든다. 그런데 이 구성이 참 묘하다. 어떤 장면에서는 프란츠가 겪는 엄청난 일들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수많은 일 중 하나처럼 보였다. 특별히 이상할 것도, 놀라울 것도 없는 일상처럼. 그런데 도살장의 풍경이나 성경 속 이야기가 끼어들면 방금까지 따라가던 프란츠의 삶이 갑자기 다른 무게를 갖게 된다. 도축대 위에 올라와 있으면서도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 채 평온한 가축들의 모습에 인간의 죽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어서였을까. 감옥에서 나온 뒤 새롭게 살아보려 하지만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는 프란츠의 인생도 떠올랐다. 인간이 언젠가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살아보려고 애쓴다고 해서, 어떻게든 다시 시작해보겠다고 마음먹는다고 해서, 자기 앞에 놓인 일을 다 피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것. 어떤 일을 맞닥뜨리게 될지 모른 채 살아가다가, 자기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에 휘말릴 수도 있다는 것. 더는 희망도, 절망도, 분노도 없이 유약한 나 자신을 인정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이 참담함.

목에 무거운 무게추를 매단 채 알렉산더 광장의 한복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고개를 들고 앞으로 나아가려 해도 벗어날 수 없고, 내려놓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 무게에 익숙해질 수도 없는 상태로. 각자 옳다고 믿는 게 다르고 살아가는 방식도 다른, 누구 하나 딱 집어 마음을 주기도 어려운 사람들의 모습이 안쓰럽다고 편들 수도 없고, 밉다고 외면하기도 어려웠다. 사정이 있다고 해서 다 이해되는 것도 아니고,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삶까지 들여다볼 필요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까.

모든 것은 의미를 드러낼 것이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섬뜩한 의미를. 그 숨바꼭질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이 친구야. (p. 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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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bass 2026-10-28 16: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광장 한복판에서 여러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정신없는(?) 느낌을 주는 책인가봐용😮

곰돌이 2026-10-28 16:46   좋아요 1 | URL
광고판에 적힌 글, 신문 기사, 시와 성경 구절이 갑툭튀 하는데요, 그런 장면들이 한데 모여 당시 베를린과 사람들(특히, 노동계급)이 먹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소설이에요. 주인공이 범죄자 인데, 그 외 등장인물들도 대체로 선량하고 착실한 쪽은 아닙니다! 입이 간질간질 하지만 더 이상 입을 털지 않으렵니다. ㅋㅋ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52
알프레트 되블린 지음, 권혁준 옮김 / 을유문화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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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이 제법 되는 책은 읽다가 글자가 눈에서 그냥 지나가버리기도 하고, 또 그게 딱히 아쉽지 않을 때도 있다. 이 책은 거의 지루할 새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재밌는 책에 리뷰가 왜 이리 적을까. 아! 그냥 내가 뒷북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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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25 1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10-25 2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oolcat329 2026-10-30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곰돌이님 추천으로 구입했어요. 다른 글들도 잘 읽고 있습니다. 😊
 
오블로모프 2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11
I.A. 곤차로프 지음, 최윤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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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나! 내가 누굽니까? 도대체 나란 사람이 누구란 말입니까? 자하르에게 가서 물어보세요. 이렇게 말할 겁니다. ‘주인님!’이라고. 맞아요. 나는 주인 나으리,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지주올시다!”

그래도 사랑의 힘이 강력하긴 한가 보다. 침대 붙박이 오블로모프를 다시 밖으로 나오게 만드는 걸 보면. 이 남자의 사랑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짚고 넘어갈 사람이 있다. 오블로모프와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친구 슈톨츠다. 오블로모프가 생각과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기까지가 어려운 쪽이라면, 슈톨츠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줄 아는 쪽이다. 그렇다고 어느 한쪽이 더 나은 인간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한 사람에게는 삶을 꾸려갈 능력이 있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그 능력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어쨌든 슈톨츠를 통해 오블로모프는 올가를 알게 되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오블로모프가 아무 일도 안 해봤을 법한 만년 백수처럼 보이지만, 짧게나마 관청에서 일하기도 했다. 하루 종일 일하고 또 일하고, 일하면서도 또 다른 일을 찾아 움직이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도무지 버텨나갈 수가 없었는지, 서류를 잘못 보내는 실수를 한 끝에 병가를 내고 결국 사직해 버렸다. 목구멍이 포도청인 상황은 아니니 이를 악물고 버틸 까닭이 없었을지도? 이런 오블로모프를 답답해하면서도 슈톨츠는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고 자꾸 세상 밖으로 끌어내려고 한다. 이렇게나 다른 두 사람이 오랜 친구라는 것이 꽤 의외다. 오블로모프 때문에 천불이 끓어오르려다가도 슈톨츠가 등장하면 속이 좀 뚫리는 것 같았다. 인간 개비스콘!

올가와 오블로모프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마음이 영 편치가 않다. 올가와의 만남에서는 매번 뭔가를 해야 하고, 오블로모프는 그때마다 등 떠밀려 단추를 끼워 나가면서도 빠져나갈 구실을 찾는다. 그러다 마땅한 변명거리가 떠오르면 그 자체가 적잖이 기쁜 오블로모프다. 물론 이렇게 해서라도 관계를 이어 나가려 하는 것은 올가를 사랑하고, 그녀가 보여주는 삶의 방향은 자신에게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다만 그 방향을 향해 마음을 먹는 것과 실제로 그 삶을 살아가는 것은 오블로모프에게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거다.

사실, 올가도 오블로모프가 다시 침대 붙박이 시절로 돌아가지 않도록 애쓰며 만남을 이어가는 중이다. 매사 쉽게 쉽게 넘어가는 게 좋아 읽지도 않고 서류에 서명하는 바보 천치 같은 인간에게 어떻게든 생의 활력을 불어넣으려니 속이 타들어 갈 만도 하다. 그런데도 보고 싶고, 만나면 좋고, 함께 있는 순간만큼은 행복한 모양이다. 그런데 왜인지 두 사람의 사랑은 불꽃이 언제 연기만 남기고 사라질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들여다보게 된다는 것.

오블로모프에게 사랑이란 뭘까. 사랑하는 마음이야 있을 테지만, 그 마음만으로 되는 일은 별로 없어 보인다. 결혼을 생각하면 그에 딸린 온갖 일들이 따라오고, 올가의 마음에 발맞춰 자기 감정을 키워가는 일도 오블로모프에게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녀가 기쁨에 푹 빠져 있는 모습을 보며 오블로모프가 도리어 시샘을 느꼈다는 대목이 그랬다.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면서도 자신은 그 감정 한가운데로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 어쩌면 오블로모프는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던 마음마저 오래전에 잃어버린 건 아닐까.

“행복이란 얼마나 허약하고 미덥지 못한 것이란 말인가!” (p. 74)

그런데 올가와는 결이 다른 여성이 등장한다. 새로 지낼 집 문제로 찾아간 곳에서 만난 여주인, 미망인 아가피야 마트베이브나. 호사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낡고 소박한 옷차림, 순박한 두 눈에 억센 두 팔로 쉬지 않고 일하는 사람. 어랏? 올가와 함께 있을 때의 오블로모프를 생각하면 묘한 차이가 느껴진다. 뭔가 자연스럽고, 편안하단 말이지! 마치 기름칠이 잘 된 톱니바퀴가 매끄럽게 돌아가는 느낌이랄까. 온종일 일만 하느라 앉을 새도, 딴생각할 새도 없이 살아온 아가피야. 그런 그녀의 삶에 오블로모프가 등장하면서 해도 해도 끝이 나지 않던 집안일에도 활기가 돈다. 이건 또 무슨 일이야! 재채기와 사랑은 뭐라더라?

160여 년 전의 러시아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모습은 뭐, 다 거기서 거기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삶이 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다들 보이지 않는 밤을 뚫고 저마다의 방향으로 가듯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거겠지, 짐작만 칠 뿐이다. 곤차로프가 그려낸 여러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며 이런 사람이 있으면 저런 사람도 있는 거 아닌가 생각하다가, 마음 한편이 무거워지는 순간에 다다르기도 했다. 지주랍시고 영지 문제를 자기 손으로 처리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오블로모프는, 어떤 사람인지 깊이 알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도움을 청하며 이렇게 말한다.

“어린애에게 이야기한다 생각하시고 말씀을 해주시고 또 충고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갑갑한 마음도 더는 들지 않더라. 그 순간엔 이 사람의 인생이 그저 짠하게 느껴졌다. 누구에게도 드러내고 싶지 않았을 연약한 ‘구석의 것’을 내보이면서까지 뭔가 해보려는 모습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그가 살아가는 세상은 가만히 기다려주지 않는다. 가진 게 없어 억하심정만 늘어나는 이들에게는 “다른 사람 귀에다 속삭이거나 글 한 줄 받아 적게 하거나, 아니면 그냥 제 이름을 서류에 적기만 해도 베개처럼 호주머니가 빵빵해지는 작자들”을 보며 욕지기가 나고, 뼈 빠지게 일해봤자 뭐 하냐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판국이다. 순한 마음을 지녔지만, 가진 것도 스스로 간수하지 못하는 오블로모프는 날강도들에게 먹잇감이 되는 게 현실이다. 그러니 누군가는 오블로모프를 보며 혀를 끌끌 찰지도 모르겠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도 시원찮을 판에 무력하기만 하니 말이다.

온종일 드러누워 남이 가져다주는 커피나 마시고 빵이나 뜯어 먹으며, 남이 출근하는 모습이나 바라보고 사는 지주라니. 호되게 욕하면서 읽을 것 같지만, 막상 읽어보면 또 마냥 흘겨보지 않게 되니 환장하겠다. 오블로모프의 선함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한계까지 이해하고, 그렇다고 모든 것을 정당화하지는 않으려 했다. 한계에 갇혀 살아가는 그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할 때가 있어서인지, 어느 순간부터는 계속 부딪히고 실수하고 아프더라도 마음에 불을 확 지피고 멈추지만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좀 더 컸던 것 같다. 물론 그 순간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갈지는 그의 몫이겠지만.

1권을 읽을 때만 해도, 도대체 침대에서 떨어지지 않는 인간의 이야기로 무슨 할 말이 쏟아지려나, 게다가 2권씩이나? 하는 생각에 갸우뚱했다. 시대와 상황은 달라도, 지금 사람들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그들의 삶을 다각도에서 들여다보게 됐다. 그중에서도 발밑이 어디에 닿을지 모른 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불안과, 매일 벌어지는 낯선 상황에 좀처럼 뿌리내리지 못해 온갖 생각으로 머릿속을 꽉 채워야만 했던 이의 심정이 꽤 가깝게 다가왔던 것 같다.

인생이란 게 참 무거운 것이구나 하는 걸 또 한 번 차갑게 들이마셔본다. 예전의 난 어쩜 그리도 안일했던지, 큰 고민도 없이 얼마나 성큼성큼 내디뎠던지. 그렇게 내 인생을 한 번 훑어보다가 2권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정작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한 인간이 되레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다는 걸 느꼈다. 에잇, 보드카 한 잔이 급 땡기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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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yonder 2026-10-15 10: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는 리뷰 감사합니다~! ^^ 사랑이란 무엇이고 인생이란 무엇일까요... ˝에잇, 보드카 한 잔이 급 땡기는군.˝ ㅎㅎㅎ

곰돌이 2026-10-15 14:06   좋아요 1 | URL
오블로모프처럼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만 있는 사람과 달리, 바쁘게 살아가는 것만이 정답이라면 바쁜 사람들은 모두 행복하고 잘 살고 있어야 하잖아요. 이런 등식의 허술함을 보여주는 걸 보면, 작가가 오랜 관직 생활과 세계일주를 통해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지켜봤을지 슬쩍 짐작하게 되기도 해요. 어떤 삶이야말로 충분한 걸까, 답도 없는 생각을 하다가 그런 생각 자체가 무슨 의미일까 싶어지더라구요. 그렇게 머릿속만 데굴데굴 굴려봤습니다.

보드카 땡기십니까ㅋㅋㅋㅋ

blueyonder 2026-10-15 16:17   좋아요 1 | URL
정성스런 댓글 감사합니다~ 삶에 정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합니다. 낭비하지 말고요... 하지만 생각과 실천은 늘 다른 문제라서... ㅋ

전에 예쁜 병에 든 보드카를 마셔봤는데, 괜찮더라고요. 하지만 한 잔만 마실 수 있습니다. ^^;

다락방 2026-10-15 1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드카 드실 때 저를 불러주시죠. 흠흠.

곰돌이 2026-10-15 14:07   좋아요 0 | URL
그런 일이 생긴다면 오죽이나 좋을까 싶어요. 일단 보드카 대신 땡투가 먼저 갈 겁니다, 다락방님. ㅋㅋ

잠자냥 2026-10-15 1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뭐... 그렇게 게으른 와중에도 애도 만들고 그러지 않습니까....

곰돌이 2026-10-15 14:08   좋아요 0 | URL
인생의 대부분은 미뤄도 본능까지 미룰 순 없었나 봅니다. 앙큼하다. 오블로모프! 할 건 다 했다! ㅋㅋㅋ 팔꿈치 플러팅이 들어오니 뭐...
 
오블로모프 2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11
I.A. 곤차로프 지음, 최윤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3월
평점 :
품절


잘 살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문제는 그 마음이 어디까지 데려다주느냐다. 바라는 것과 해내는 것 사이의 아득한 거리는 누구도 대신 좁혀 줄 수 없다는 걸 새삼 차갑게 들이마셔본다. 답답해서 속이 터지다가도 끝내 미워할 수 없는 침대 붙박이 오블로모프가 되레 나를 흔들어 깨울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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