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버스토리
리처드 파워스 지음, 김지원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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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속을 걸을 때마다 사람은 자신이 찾던 것 이상을 얻는다. 우주로 들어가는 가장 명확한 방법은 야생의 숲을 통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곳에서 살아가는 아무 연관 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차례로 등장한다. 나무와 함께 자라고, 나무를 연구하고, 삶의 한가운데서 나무를 만나고, 각각의 삶에 나무는 늘 가까이 있다. 줄기처럼 따로 뻗어가던 그들의 삶은 어느 순간 서로 맞닿기도 한다. 태어나고, 자라고, 가장 넓게 뻗어나가기도 하고, 베이기도 하고, 어딘가에서 또 싹을 틔우기도 하는 나무의 시간을 따라가면 인간의 짧은 생을 생각하게 된다. 사람은 자꾸 서두르지만, 나무는 기다린다. 계절이 돌아오기를, 비가 내리기를, 시간이 자기 몫만큼 흐르기를.

병충해가 나무 깊숙이 파고들 듯, 고난도 예고 없이 들이닥친다. 예상도 못 한 극단적인 상황을 맞닥뜨린 가족 이야기에 이건 해도 해도 너무 했다 싶다가도, 현실과 또 뭐가 다른지 똑 부러지게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인생에 열 계단이 있다면 고작 한두 계단 올랐거나 말았을 내가, 어떠한 선택 하나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 삶을 통째로 뒤흔들 수 있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은 너무나 많다.

몇 해 전 그날이 잠깐 떠오르는 이야기도 있었다. 1948년 상하이의 한 부자의 이야기인데, 무역회사를 하는 후이족 무슬림 사업가 마 쇼잉은 공산세력이 곧 들어올 것을 염려해 아들에게 미국으로 떠나라고 한다. 비밀 금고에 간직해 둔 세 개의 옥반지도 아들에게 건넨다. 각각 과거와 현재, 미래를 뜻하는 나무가 세공된 반지였다. 그리고 아버지는 자신과 마 가문이 격변 속에서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때 아들은 그 반지와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의 의미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었을까. 우리 아빠도 첫 출근을 앞둔 내게 옥반지 같은 건 없었지만, 짧고 굵은 이야기 몇 마디를 건넨 적이 있다. “그놈이 가면 더 한 놈이 온다.” 지금 생각하니 좀 웃기다. 마 쇼잉이 아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상황과 내 첫 출근은 전혀 다른 일이었는데, 현실적인(?) 그때의 말 한마디가 왜 갑자기 생각나던지. 사람에게 남는 게 꼭 대단한 것만은 아닌가 보다.

저문다는 것. 한 사람이 평생 살아온 시간이 점점 뒤로 물러나고 앞으로 남은 시간이 조금씩 줄어드는 인간의 생애를 나무의 시간과 나란히 놓으니, 시간 자체가 왠지 더 쓸쓸하게 느껴졌다. 지금 흘러가는 시간 하나하나가 전과는 조금 다르게 보이는 건 무언가를 잃고 난 뒤에서야 생기는 것 같다. 슬픔에 잠식되지 말라며 놓고 간 선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시간은 지나간 것을 잊게 만들고, 곁에 있던 것을 잃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 나날의 연속에도 무언가는 천천히 쌓이고 있다는 것을 위안 삼아본다. 봄이면 어떨까, 여름은 또 어떻고, 가을엔 좀 다를까, 금방 또 겨울이군. 계절마다 속속들이 들어차 있던 대단치도 않은 생각들이 머릿속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구나 싶지만, 그건 또 그런대로 나름의 역할을 해줄 때가 있다.

이어간다는 것. 한 사람의 생이 저물어도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까지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기억으로 남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삶에 닿기도 하고,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또 다른 모습으로 이어지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무는? 나무는 더 긴 시간 속에서 이어짐을 보여주고 있다. 한 그루가 사라져도 숲의 시간은 멈추지 않고,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는 또 무언가가 자라고 있을 테니까. 그런 나무를 베어내려는 사람들과 그것을 막으려는 사람들이 한 숲에서 맞선다. 나무를 베는 데는 법도 있고 이유도 있다. 그래서 베는 사람은 할 일을 하는 것이고, 막는 사람은 법 밖에 서게 된다. 이상하다. 법이 허락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한 걸까.

무엇을 소유할 수 있고 누가 소유를 할 수 있을까? 무엇이 권리를 부여하고 왜 전 지구상에서 인간만이 그걸 가져야 할까? (p. 351)

나무를 연구하는 박사 패트리샤 웨스터퍼드는 “나무가 서로에게 말을 한다.”고 알려준다. 나무들이 뿌리와 균류를 통해 연결되어 서로 신호를 주고받고, 필요한 물질을 나누기도 한다며 숲을 하나의 연결된 사회처럼 바라본다. 언제나 숲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그녀를 보고, 사람들은 나무가 지성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여자라며 조롱하듯 수군거렸다. 내가 자연으로부터 얻은 치유, 모든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나’와 ‘나무’ 사이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느낀 숲의 보살핌에, 어느 것 하나 시작되지 않았는데도 이미 이룬 것 같고, 또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머릿속까지 시원해지는 그 개운함을 나는 과연 무엇으로부터 얻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숲이 우거진 공간에서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과 시원하게 부는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뭇잎들에게서 얻는 생의 약동감을. 지나가다 보이는 들꽃 이름 하나도 알지 못하는 내가, 그 알지 못하는 이름을 하나하나 알려주는 엄마의 음성을 들으면서도 ‘아, 그렇구나’라는 힘도 안 드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던, 그런 나에게도 무언가를 쥐여주는 자연의 관대함을.

나무가 그래봤자 나무일 뿐인데, 나무에서 나올 만한 이야기가 뭐가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지나쳐 버렸었다. 사실 예전 같으면 관심조차 두지 않았을 거다. 이 또한 상실 이후에 생긴 변화 중 하나일 듯싶다. 마음에 잔물결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도 해본 적 없는 이야기에 매료될 줄도, 나무에 아무 의미도 두지 않던 내가 자연에 빚을 졌다고 말하게 될 줄도, 이 책을 읽게 될 줄도 몰랐다. 베트남전에서 반얀나무 한 그루 덕에 목숨을 건진 한 남자는 그 이후, 벌거벗은 땅에 나무를 심고 숲을 지키는 사람이 된다. 뇌 손상을 입은 남편을 병간호하던 한 여성은, 삶이 강제로 느려지고 나서야 뒤뜰에 심어 둔 나무들을 남편과 함께 하나씩 알아가기 시작한다. 알면 알수록 그녀의 가슴에 놀라움 덩어리가 자리하고, 그 무렵 책에서 이런 문장을 만난다. “개간된 땅에 숲을 되돌아오게 만드는 가장 훌륭하고 쉬운 방법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누군가는 나무를 심으며 손을 보탰고, 누군가는 손을 거두며 자연에게 자리를 내주는 법을 배웠다.

덩굴이 벽을 한 뼘씩 타고 오르는 것처럼 책장이 더디게 넘어갈 때마다, “숲을 산책하고 나서 기분이 좋아진다면, 그것은 특정 종이 당신을 매수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나무들은 오랫동안 우리에게 닿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들이 듣기에는 너무 낮은 주파수로 말을 한다”는 단순한 말 안에 담긴 확신이 생각을 건드렸다. 앞으로 자연과 나무가 또 내게 어떤 의미가 될지는 모르겠다. “개개의 나무들의 생화학적 행동은 이들을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볼 때에만 이해가 가능할 것”이라는 패트리샤의 말을 떠올리며, 또다시 숲의 신호에 귀를 기울이러, 나무에게 매수당하러 가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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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6-09-29 1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물고 이어가는 것.
곰돌이 님의 리뷰는 정말 아름답군요.

곰돌이 2026-09-29 13:21   좋아요 0 | URL
누군가 내게 남기고 간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알아채는 순간이 있곤 하잖아요. 그럴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드는 생각들, 고마우면서도 또 한편으론 그 자체가 참 가혹한 것 같다 싶은 복합적인 감정의 결을 느끼게 만든 것이 나무라서, 생각도 더 깊었던 것 같아요.

다락방 2026-09-29 11: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믿고 읽는 곰돌이 님의 리뷰입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저는 이 책을 가지고 있으며, 또 다행스럽게도 저는 나무와 숲을 사랑합니다. 게다가, 저는 인간은 어쩔 수없이, 필연적으로 비인간과 함께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저도 이 책을 읽어보겠습니다.

곰돌이 2026-09-29 13:23   좋아요 1 | URL
다락방님은 이미 자연과 나무에 대한 심리적 거리가 가까운 분이니, 리처드 파워스가 이 책을 사람들이 읽고 나무를 위해 뭐라도 하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각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쓰고 있구나 하는 걸 더 많이 발견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책에서 좋아했던 부분이 하나 떠올랐어요.

“뮤어의 근사한 말이 있죠. ‘난 그저 산책을 나갔을 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