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52
알프레트 되블린 지음, 권혁준 옮김 / 을유문화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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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나는 어디로 가야 하지? 그때 대답이 들려왔다. 이게 바로 형벌이야”

지금 막 4년의 형기를 마친 사내가 교도소 담장 밖으로 나왔지만, 여름 외투 하나 걸친 그는 이내 풀썩 주저앉고야 만다. 자유를 얻은 사람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주저앉는 것이라니. 왜? 무엇 때문에? 그는 지금 담장 안으로 되돌아가고만 싶다. 그러나 형을 다 마쳤으니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상 속으로, 저 많은 사람들 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을까? 막막함과 두려움이 엄습해온다. 이 사내의 불안함을 눈치챈 어느 붉은 수염의 유대인이 다가와 던지는 한마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눈과 발이오. 세상을 제대로 볼 줄 알아야 하고, 세상에 뛰어들 수 있어야 하니까요.”

사흘이 지났다. 출소한 사내, 프란츠 비버코프는 이제 겨울 외투에 모자까지 쓰고 활력을 찾은 모습이다. 이번만큼은 진실하게 살아보겠다 맹세한다. 그러나 그가 다시 마주한 세상은 결심만으로 건너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새사람이 되어보겠다는 건 프란츠의 마음이고, 세상이 그를 대하는 방식은 별개의 문제다. 그가 어떤 죄목으로 교도소에 들어갔는지, 그리고 나온 이후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내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새사람? 개코나, 인간이 어디 그리 쉽게 변한다니?’ 욕도 아까웠다. 그래서인지 앞서 붉은 수염의 유대인을 향한 프란츠의 대꾸 안에서 느껴진 삶의 의지와 자신감이 새삼 다시 떠오르면서 괜히 같은 말도 더 괘씸하게 다가왔다.

“당신은 발과 눈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죠. 내게도 아직 눈과 발이 있어요. 아무도 그것을 뺏어 가진 않았죠.”

이 책은 베를린에서 시멘트 공장 노동자이자 가구 운반 인부였던 프란츠 비버코프에 관한 보고서다. 왜 하필 범죄자 프란츠일까? 그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아니아니, 알렉산더 광장 앞을 오가는 벌떼같이 많은 사람들 중 사소한 인물일 뿐이다. 심지어 그의 친구들 사이에서는 ‘선량한’ 프란츠라는 거.

갑자기 뜬금없는 작가의 TMI인데, 정신과 의사이기도 한 알프레트 되블린은 영화광이라고 한다.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영화를 보듯 조각조각 난 장면을 머릿속으로 이어 붙이게 된다. 지금 읽고 있는 이야기만 쭉 이어지는 게 아니라 도시 전체의 풍경을 비롯한 여러 요소가 다소 이질적으로 끼어들 때가 있고, 화자의 말이 이어지다 말고 인물의 혼잣말이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처럼 구분도 없이 섞이기도 한다. 현기증 날 정도는 아니다. 맨날 먹는 밥은 지겨워서 새로운 거 먹을 때 입이 즐겁듯, 그저 즐기면 될 뿐. 따라가다 보면 금세 리듬에 적응이 되고, 이 소설 특유의 공허함과 머리가 무거워지는 엄숙함에 서서히 감기게 된다.

마치 한 방향으로 바람이 부는 게 아니라 이쪽에서 불었다가 저쪽에서 불고, 거리의 먼지와 종잇조각이 정신없이 휘날리는 날의 느낌이다. 도시는 부산스럽고 활기찼지만, 프란츠처럼 전과를 안고 다시 살아보려는 사람에게 이 분주함은 기회인 동시에 언제든 자신을 휩쓸어갈 바람이기도 하다. 주머니에 얼마 안 되는 지폐를 만지작거려보기도 하고 외투 깃을 바짝 세워보지만 춥다, 더럽게 춥다. 마음이 추우니 더 춥다. 그렇게 1920년대 말 베를린이 한꺼번에 품고 있었을 활기와 불안을 느껴볼 수 있었다.

프란츠는 이것저것 팔기 시작한다. 넥타이핀을 팔다가 알렉산더 광장을 떠돌며 민족주의 성향의 신문까지 판다. 그러다 옛 전우, 지금은 연마공으로 일하다 직장에서 쫓겨난 게오르크를 만나면서 이야기는 전쟁과 혁명, 공화국을 둘러싼 정치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런데 프란츠가 꺼내놓는 건 전쟁의 승패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먹을 게 없어 농부의 감자를 훔쳐 먹었던 일, 고기와 버터조차 구하기 어려운 현실 같은 것들. 전쟁을 겪고 혁명까지 일어났는데, 정작 달라진 게 뭐냐는 거다. 건물은 높이 올라가고 도시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세상이 변한다는 건 대체 누구의 삶이 변한다는 뜻일까? 거리에서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고, 헌법에 자유가 적혀 있어도 경찰의 곤봉 앞에서는 소용이 없다고 외치고 있다. 자유가 있다고 쓰여 있는 것과 실제로 자유롭게 사는 건 다른 문제라는 듯이. 겉으로는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야.”라고 되뇌는 프란츠. 세상이 무슨 색을 내걸든, 먹고사는 일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어떤 친구가 갖고 있는 시가의 띠가 빨간색이든 금색이든, 아니면 흑백적이든 그것 때문에 시가 맛이 더 좋아지는 것은 아니잖아. 중요한 것은 연초 그 자체야.” (p. 118)

빵 한 조각도 벌어야 내 입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그 벌이조차 힘겨운 세상이니 목구멍에 술이 안 들어갈 수가 없고, 남는 거라고는 그다음 날의 숙취와 그사이 흘러간 세월뿐. 멀미 나는 배 위에서 아무 기둥이라도 얼른 껴안고 싶은 사람처럼, 불안한 세상 속에서 프란츠는 대단한 신념이 아니라 그저 움직이지 않는 무언가가 필요해서 움직이는 사람으로 보였다.

프란츠는 평온함을 원한다. 깨끗해지길 원한다. 말끔히 치워지길 바란다. 무엇이? 자기 안팎의 나쁜 기운이나 불쾌한 감각이. 자기가 옳다고 믿는 상태를 억지로라도 만들어내려는 사람처럼, 일부러 창문을 열고 차디찬 바깥바람을 쐬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자신과 안 좋게 엮인 인물이 자기가 사는 집에 왔을 땐, 그 사람을 향해 계속해서 찬물을 뿌리는 모습도 같은 맥락으로 보였다. 지금 당장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당장 감당할 수 있는 크기로 줄여 놓는 것. 나는 이게 프란츠가 살아가는 방식 중 하나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차근차근 받아들일 여유조차 없는 사람처럼. 그런 그가 막상 자기한테 엄청난 일이 닥쳤을 때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세상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사람이 자기 삶에 대해서만큼은 어떻게든 포기하지 않으려 하는 모습. 대단한 생존 본능일까,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일까.

줄거리를 최대한 드러내지 않고 적으려니 영 가슴팍이 갑갑하다. 이 책과 어울리는 표현은 아닌 것 같지만 요 며칠 정말 신나게 읽었다. 프란츠의 이야기 사이로 다른 사람들의 일상이나 가축들이 도축되는 과정, 성경 속 이야기와 시의 한 구절이 불쑥 끼어든다. 그런데 이 구성이 참 묘하다. 어떤 장면에서는 프란츠가 겪는 엄청난 일들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수많은 일 중 하나처럼 보였다. 특별히 이상할 것도, 놀라울 것도 없는 일상처럼. 그런데 도살장의 풍경이나 성경 속 이야기가 끼어들면 방금까지 따라가던 프란츠의 삶이 갑자기 다른 무게를 갖게 된다. 도축대 위에 올라와 있으면서도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 채 평온한 가축들의 모습에 인간의 죽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어서였을까. 감옥에서 나온 뒤 새롭게 살아보려 하지만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는 프란츠의 인생도 떠올랐다. 인간이 언젠가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살아보려고 애쓴다고 해서, 어떻게든 다시 시작해보겠다고 마음먹는다고 해서, 자기 앞에 놓인 일을 다 피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것. 어떤 일을 맞닥뜨리게 될지 모른 채 살아가다가, 자기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에 휘말릴 수도 있다는 것. 더는 희망도, 절망도, 분노도 없이 유약한 나 자신을 인정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이 참담함.

목에 무거운 무게추를 매단 채 알렉산더 광장의 한복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고개를 들고 앞으로 나아가려 해도 벗어날 수 없고, 내려놓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 무게에 익숙해질 수도 없는 상태로. 각자 옳다고 믿는 게 다르고 살아가는 방식도 다른, 누구 하나 딱 집어 마음을 주기도 어려운 사람들의 모습이 안쓰럽다고 편들 수도 없고, 밉다고 외면하기도 어려웠다. 사정이 있다고 해서 다 이해되는 것도 아니고,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삶까지 들여다볼 필요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까.

모든 것은 의미를 드러낼 것이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섬뜩한 의미를. 그 숨바꼭질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이 친구야. (p. 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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