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1> 중에서...

눈은 그에게 희망 없는 빈곤을 말하고 있었다. - P23

눈 속에 버려진 듯 보이는 칼레알트 마을의 작은 빈민가에서 피어오르는 가느다란 연기가 얼마나 슬펐던지 눈에 눈물이 고였다. 개천의 반대편에서는 심부름을 나온 듯한 여자아이와 남자아이가 품에 따끈한 빵을 안고 서로 밀고 당기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얼마나 행복하게 웃는지 카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그의 가슴을 저며오는 것은 가난도 속수무책도 아니었다. 다만 앞으로 계속해서 보게 될 외로움이 문제였다. 도시의 사방에서, 사진관의 텅 빈 쇼윈도에서, 카드놀이로 시간을 죽이는 실업자들로 북적대는 찻집의 성에 낀 창문에서, 눈 덮인 텅 빈 광장에서 마주하게 될 이상하고도 강력한 외로움. 이곳은 모두에게 잊혀진 장소인 듯했고 소리 없는 눈은 세상의 끝에 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 P23

이 모든 이야기 속에는 카를 사로잡는, 평범한 삶의 흐름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전이 과정에 존재하는 속도와 절망이 있었다. - P29

끊어진 그네와 부서진 미끄럼틀이 있는 유스프파샤 마을의 공원 옆 공터에서, 석탄 창고를 비추는 높은 가둥주(街燈柱) 밑에서 축구를 하는 고등학생들을 바라보았다. 눈 속에서 미끄러지는 아이들의 고함 소리와 욕설을 들으며 전등의 희미한 노란 빛과 하얀 눈 빛 속에 있으려니, 이 지역이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너무나 적막한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이 어찌나 강렬하던지, 마음속에 신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 P35

인민당원인 전임 시장 무자페르 씨는 때로는 자랑스럽게 때로는 울분을 토하며 터키에 서구화가 진행되던 시기에 관해,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 비극 『오이디푸스 왕』을 공연하기 위해 앙카라에서 온 연극인들은, 그리스와의 전쟁이 끝난 지 20년도 채 지나지 않았건만, 카르스의 공화주의 중산층에게 환호의 갈채를 받았고, 모피 코트를 입은 나이 든 부자들은 장미와 반짝이로 장식된 건강한 헝가리 산 말들이 끄는 썰매를 타고 산책을 나가곤 했다. - P38

모두 함께 순간적으로 빈 역사에서 밖을, 네온 가로등 불빛 아래의 빈 철로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나는 이 세상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카는 생각했다. 멀리서 보이는 눈송이들은 정말로 가련해 보였다. 가련한 인생. 사람은 살고, 지치고 나이 들고, 사라진다. 그는 자신이 한편으로 사라지고 있다는것을,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을 사랑했다. 한 송이의 눈처럼, 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사랑과 슬픔으로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면도 후 로션을 사용했다. 문득 그것의 향이 되살아났다. 부엌에서 아침을 준비하는 어머니. 슬리퍼 속에 있는 그녀의 차가운 발, 빗, 밤에 기침을 할 때 마시곤 했던 분홍빛 달콤한 시럽, 입에 있던 수저, 그의 삶을 구성하고 있던 사소한 것들, 그 모든 것의 총체, 눈송이들・・・・・・ - P131

나중에 이 시를 어떻게 썼는지를 생각했을 때, 그의 머릿속에는 한 송이 눈이 떠올랐다. 그 눈송이는 자신의 인생을 보여주는 어떤 형태였다. 이 시는 그의 인생의 중심에 서 가까운 곳에, 인생의 논리를 설명하는 어떤 지점에 자리 잡아야 했다. 이 시의 탄생이 그러했듯이, 그가 이러한 마음가짐 중 어느 정도를 그 순간에 내린 것인지, 어느 정도가 이 책에서 밝히려고 하는 그의 인생의 은밀한 균형의 결과인지는 말하기 어렵다. - P134

"나의 불행은 나를 삶에 대항하게 만들지. 내 걱정은 하지 말게."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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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5-12-28 07: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곰돌이님, 2025년 서재의 달인, 축하드려요~~저도 달았어요~처음이라 넘 기쁘네요 ㅎㅎ

곰돌이 2025-12-28 09:21   좋아요 1 | URL
축하드려요 젤소민아님!ㅎㅎ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겠죠?ㅎㅎ 활기가 전달되는 감사한 댓글 정말 감사합니다!! (꾸벅꾸벅)
 
기나긴 하루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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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작가님의 책을 읽고 나면, 유독 말수가 적고 이렇다 저렇다 말씀하시는 법이 없는 우리 외할머니의 가슴에 담아둔 이야기가 더 궁금해진다. 윤이 반질반질하게 나는 이야기라도 하나 있으면 꺼내볼까 싶지만, 그렇고 그런 얘기밖에 없어 구지레하게 느끼기라도 할까 봐 그러실까, 아니면 백날 떠들어봤자 네가 뭘 알겠느냐는 생각인 걸까. 그저 온화한 미소를 띠시며 조용히 뉴스를 보시다가 “배라 처먹을 놈들!!”이라며 한 번씩 욕을 해서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게 전부다. 자주 뵈러 가지를 못해서 할 말도 없는 주제에, 우리 할머니도 속 시원하게 얘기 좀 해주시면 오죽이나 좋아라며 욕심을 내는 게 양심에 찔린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개코도 모르면서 떠든다고 된통 혼내실 것 같은 매콤함이 느껴지는 박완서 작가님! 때로는 억센 말투와 날카로운 묘사가 불편하게 다가오고 당혹스러울 때도 있지만, 괜히 마음이 힘들고 머릿속이 복잡함으로 꽉 차 있을 때, 아니꼽고 치사스러운 감정까지 막힌 코를 뚫어주듯 속이 다 시원하게 드러내서 머리털 하나 뽑아 숨 쉴 공간을 만들어주는 그 ‘따꼼함’이 세상 개운할 때가 있다.

공부를 못하는데다가 산동네 아이 티가 더덕더덕 나는 촌스러운 옷차림을 한 아이는 자연히 외톨이 신세였다. 그러나 그걸 그닥 고통스러워한 것 같지는 않다. 동네 아이들과 다른 학교를 다니니까 으슥한 인왕산길을 혼자서 등하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걸 즐기면 즐겼지 무섬을 탄 것 같지도 않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마음껏 공상을 할 수 있었다. 그 길은 어린 날의 나의 꿈길이었다. 구질구질한 산동네와 나보다 잘난 아이만 있는 교실로부터의 해방구였다.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p. 28)

꿈 많은 소녀에게 단념이란 없었다. 가정주부로 지내다가 증언의 욕구가 이십 년 동안이나 뜸을 들였던 글쓰기에 결실을 보게 해 주었다고 한다. 그 증언의 욕구는 증오와 복수심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그 마음을 헤아려 본다. 어쩌면 자신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우리가 모두 평생 이해하지 못할 감정이기를 바라시진 않으셨을까? 색깔로 나누어진 삶 속에서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자유를 훼손당하며 하룻밤 사이에도 내 식구가 사라지고 땟거리를 위해 남의 집 담을 넘어야 했던, 그래서 가슴팍에 악다구니만 남긴 세상을 살아가는 게 어떤 심정인지 더는 아무도 알 수 없기를,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마음이기를 바라셨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저자의 또 다른 작품인 <나목>에서 자신이 우월감과 열등감 덩어리였다고 고백한 것이 기억난다. 사는 것을 재미나게 살고 싶은 그 마음을 꼿꼿한 자존심으로 눌렀던 이십 대 시절, 구질구질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그때로 잠시 가본다. 전쟁으로 오빠를 잃었던 것처럼, 한순간에 행복했던 순간을 무너뜨리게 만드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 시절 말이다. 그땐 이보다 더 큰 시련과 비극은 일어날 수 없을 거라고 가슴을 치며 하루하루를 버텼을 텐데, 세월이 흘러 비통하게도 남편을 잃은 같은 해에 어린 자식마저 가슴에 묻어야만 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볼까 중요했기에 외아들 하나 지니지 못했나 하는 수군거림이 슬픔보다 더 큰 수치심으로 다가왔다는 속마음 또한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차라리 하느님과 정면대결을 하려고 수녀원에 들어가 독방 차지를 하고 있어도 보았다.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런 벌을 주셨나 항의도 해보고, 나도 아들 곁으로 데려다달라고 처절하게 기도도 해보았다. 그러나 내 절규는 하느님의 견고한 침묵의 변죽도 울리지 못했다. 그래도 그때 하느님과의 일 대 일 대결에서 깨달은 게 있다면 피조물은 길든 짧든 창조주가 정해준 수명에서 일 초도 더하거나 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깨달음을 질책보다 더 엄혹했다.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p. 35)

이제부터 울고 싶을 때 울면서 살 거예요. 떠내려갈 거 있으면 다 떠내려가라죠, 뭐.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꾸미는 짓도 안 할 거구요. 생때같은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이 세상에서 소멸했어요. 그 바람에 전 졸지에 장한 어머니가 됐구요. 그게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될 수가 있답니까. 어찌 그리 독한 세상이 다 있었을까요, 네 형님? 그나저나 그 독한 세상을 우리가 다 살아내기나 한 걸까요? 아니 형님, 지금 울고 계신거 아뉴? 형님, 절더러는 어찌 살라고 세상에, 형님이 우신대요? 형님은 어디까지나 절벽 같아야 해요. 형님은 언제나 저에게 통곡의 벽이었으니까요. 울음을 참고 살 때도 통곡의 벽은 있어야만 했어요. 통곡의 벽이 우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대요.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p. 208)

나는 종교도 없을뿐더러, 인간 외의 존재를 떠올리며 살아본 적도 없었지만, 딱 한 번 신을 향해 간절히 요청해 본 적이 있다. 어느 곳을 향해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그저 딱 한 번만 부탁을 들어달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동안 없던 믿음이 지금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 염치도 없고, 이건 내가 생각해도 너무했다 싶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사람이 급하면 무언가라도 찾게 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한참 동안 답을 주기를 기다리다가 ‘바뀔 수 없다는 것에 매달려서 무너지지 말자. 그래, 나의 운명적인 소명이 어딘가에 있을 거다.’라는 순간적으로 든 생각이 무엇을 찾으려 했던 걸까 라는 물음에 현실에 맞는 답이 되고, 위로가 되어 반걸음 나아갔던 기억을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끌어내 주었고, 이것도 또 다른 인연의 형태라 여기며 감정을 주고받아 보았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알 수 없는, 알아서는 안 되는 가슴 속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사연과 함께 박완서 작가 본인의 진짜 이야기가 미사여구 하나 없이 진실한 언어로 쓰여져 있다. 아프지만 아름다운 글이었다. 펑펑 울고 싶었던 누군가가 그동안 혼자 얼마나 많은 눈물을 감추었을까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으면서, 잘만 살다가 괜히 삐끗거리며 ‘내가 지금 여기 왜 있는 걸까?’라며 불쑥 찾아온 냉기로 시려진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눈시울을 붉히게 한다. 그래, 위로가 필요했다면 이걸로 됐지 싶다. 추운 겨울날 마음의 난로가 ‘띡’ 하고 켜진 듯한 이 순간을 오롯이 즐기기만 해도 충분하지 싶다. 여운이 오래 남았던 이야기 위주로 적다 보니, 사뭇 마음을 무겁게 내리누르는 이야기들만 담겨있나 싶겠지만 그렇진 않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그동안 박완서 작가님의 에세이 한 편과 장편소설 몇 편만 읽어봤는데, 이번 <기나긴 하루>에 수록된 단편 또한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모두 좋았다. 좋았다고 말하는 게 내가 느낀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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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하루> 중에서...

시골 우리 마을의 집은 서로 멀찍멀찍 떨어져 있었고 한눈에 누구네 집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는 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영희네 집은 영희네 집같이 생겼고 수돌이네 집은 수돌이네 집같이 생겼다. 우리 집에 오는 편지는 할아버지의 성함만으로도 우리 집을 잘만 찾아왔다. 아무리 가르쳐도 주소를 제대로 못 외는 딸은 엄마를 실망시켰고 아둔하다는 탄식을 자아냈다. 소명하다는 칭찬을 듣던 아이가 환경이 바뀌자 하루아침에 아둔한 아이로 변했다. - P21

내가 꿈속에서 찾는 건 친구네 집도 아니고 우리 집도 아니고 다만 사람 사는 동네다. 저 등성이만 넘으면 동네가 보이겠지, 혹은 인가로 통하는 찻길이나 교통편이라도. 그러나 길은 점점 더 험해지고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협곡이나 직각으로 선 단애를 만나게 된다. 차라리 단애에서 추락을 하자. 그래야 꿈을 깰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 고비만 넘으면 사람 사는 세상으로 통하는 길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미련을 못 버리고 계속 허우적대다가 깬다. - P22

내가 누려온 안일이 한없이 누추하게 여겨졌다. 사람이란 고통받을 때만 의지할 힘이나 위안이 필요한 게 아니라 안일에도 위안이 필요했던 것이다. 증언의 욕구가 이십 년 동안이나 뜸을 들였다가 결실을 맺게 된 것은 아마도 최초의 욕구가 증오와 복수심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증오와 복수심만으로는 글이 써지지 않는다. 우리 가족만 당한 것 같은 인명피해, 나만 만난 것 같은 인간 같지 않은 인간, 나만 겪은 것 같은 극빈의 고통이 실은 동족상잔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던 것이다. - P32

내 붙이의 죽음을 몇백만 명의 희생자 중의 하나, 곧 몇백만 분의 일로 만들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의 생명은 아무하고도 바꿔치기할 수 없는 그만의 고유한 우주였다는 게 보이고, 하나의 우주의 무의미한 소멸이 억울하고 통절했다. 그게 보인 게 사랑이 아니었을까. 내 집 창밖을 지나는 무수한 발소리 중에서도 내 식구가 귀가하는 발소리는 알아들을 수있는 것처럼. 몇백, 몇천 명이 똑같은 제복을 입고 운동장에 모여 있어도 그 안에서 내 자식을 가려낼 수 있는 것처럼. 내자식이 딴 애들보다 덜 똘방똘방하고 어리숙해 보일수록 사무치게 사랑스러운 것처럼. - P33

나는 오슬오슬 춥다가 오싹오싹 떨린다고 말하고 싶다. 내 몸은 지금 불화로를 얼음조각으로 포장해놓은 것 같다고 말하고 싶다. 삭신이 쑤신다고 말하고 싶다. 입맛이 소태 같다고 말하고 싶다. 죽어도 이 나라에선 죽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아무도 통역할 수 없을 것 같은말만 생각났다. 그걸 참고 따라다니자니 하루가 여삼추였다. - P39

나의 시골집 마당은 아직도 흙바닥이지만 양회 바닥처럼 단단하다. 내 친구의 어머니 시신까지 하룻밤 사이에 동해바다로 토해낸 폭우도 우리 마당의 견고함을 범하진 못했다. 나의 입과 우리 마당은 동일하다. 다 폭력을 삼켰다. 폭력을 삼킨 몸은 목석같이 단단한 것 같지만 자주 아프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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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차일드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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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읽은 책 중 첫 문장이 가장 강렬했던 책을 꼽자면,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이 아닐까 싶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여행에서 팔을 하나 잃었다.”

흑인 여성 ‘다나’가 흑인 노예제도가 있던 과거로 타임슬립 하면서 낯선 곳,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하루하루가 지옥 같기만 한 끔찍한 일을 맞닥뜨리는 일상을 너무나도 빨리 원래 살던 곳에서의 삶처럼 받아들이는 순종적인 모습에 나는 무력한 관찰자가 되어 비통함을 느껴야만 했다.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전개로 꿀떡꿀떡 읽히도록 해준 이 작품을 경험한 뒤, 평소 SF 소설을 즐기는 편은 아닌데도 그녀의 글을 또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창적인 시각 안에 담긴 가볍지 않은 메시지가 좋은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킨>이 손에 땀을 쥐게 할 만큼 마음을 바잡게 만들고, 극강의 공포로 불안에 떠는 주인공과 같은 심정으로 19세기 초 미국 남부 사회를 경험하게 했다면, <블러드 차일드>는 지구를 떠나 또 다른 공간에서 인간이 아닌 존재와 접촉하며 살아가거나, 외계 생명체의 번식을 위해 선택된 인간의 몸에 알을 키우는 등 SF적 요소가 훨씬 진하게 느껴졌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존재의 본질적 요소를 드러내어 오히려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삶을 계속해서 떠올리게 했다.

7편의 단편과 2편의 에세이로 구성된 이 소설의 전반적인 주제는 ‘공생’이며, 핵심은 ‘사랑’과 ‘희생’으로 읽힌다. 질병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 파괴된 세상이 등장하는 「말과 소리」는 말하는 능력을 잃은 사람과 읽는 능력을 잃은 사람이 서로의 능력을 시기하며 소통 능력의 한계를 보이고 균형이 무너진 비정상적인 사회에서 미래가 보이지 않는 절망감과 고독감으로 내몰린다. 계속해서 읽다 보면 어느 순간 현실과 경계를 두고 바라보는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인식 차이, 소통의 구조적 장애 등의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끼리도 소통이 어렵고 폭력이 난무하며, 권력을 사용해 지배하고 장악하는 비인간적인 존재를 너무 많이 보았다.

어느 토요일, 사람 많고 냄새나는 버스에 앉아서 사람들이 살 속으로 파고든 내 발톱을 밟지 못하게 하려고 애쓰면서, 끔찍한 일들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나는 바로 맞은편에서 소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어떤 남자가 다른 남자가 자기를 쳐다보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만원 버스에 끼어 있을 때는 어디로 보아야 할지 알기가 힘든 법인데 말이다. (...) 인류가 어떤 형태로든 주먹을 쓰지 않고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익힐 만큼 성장하는 날이 오기는 할까 생각하면서 앉아 있었다. (「말과 소리」, p. 157)

저자는 이 단편을 쓸 당시 인류에 희망도 애정도 없다는 기분으로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애써 나아질 가능성이 있기를 바라보려 노력하는 것이 때론 억지스럽게 느껴지거나 오히려 거부감이 들 때가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증오의 감정에서 더 나아가 성장하는 날이 오기를 바랐던 그녀의 진심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질병, 죽음, 전쟁, 억압, 파괴 등에 대한 관성으로 서서히 두려움마저 잃어가는 동안, 희망 또한 바라지 않으면서도 따뜻한 손길이 간절한 사람들을 향해 우울과 슬픔 대신 “괜찮아.”라고 온기와 희망을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무너진 사회 속에서 주체적으로 살아가며 행복을 찾으려는 생명력마저 잃고, 파괴하려는 자들로부터 도망치는 일과 순응하는 일이 본능처럼 익숙해져야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세상을 위해 사랑과 구원의 힘을 스스로 끌어낸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암흑 속에서 겨우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또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야 하는 현실에 갇힌 그 순간, 딱히 방법이 없다는 끔찍함에 허덕이다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맞닥뜨려 외면하고 싶은 마음 안에 역겨움과 비통함이 한데 섞여 고뇌에 빠져, 두려움과 혐오스러움이 오가는 사이, 훅하고 들어온 또 다른 감정이 가슴을 뜨겁게 달구면서 이제는 포기하고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은 나약함과 좌절감을 이겨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외계 생명체와 이들로부터 보호를 제공받는 대신 특정한 의무를 지닌 인간과의 공생관계를 다룬 표제작 「블러드 차일드」는 초반에 호두 한 알을 집어삼키고 소박하게 남아 있는 나의 상상력을 발휘하며 독특함을 따라가야 했다. 이 단편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여러 사람과 공생하며 살아가는 동안 ‘연대의 힘’이 삶을 살아가고 위기를 극복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강력한 힘을 발휘할 때가 있다는 것과 그 힘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자발적 복종이라기보다 사랑을 위한 희생이었으며,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었다는 점이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집단이 연대하여 약자를 억압하고 소외시키는 이면마저 담아 현실에 없는 새로운 환경이나 다른 지적 생명체가 존재하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이해의 벽을 충분히 허물 수 있도록 해주었으며, 다른 세계를 다루고 있기에 탐구하듯 들여다보면서도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인간의 모습 등 우리의 삶과 크게 벗어나지 않은 모습을 발견하게 하여 때로는 씁쓸하게, 또 때로는 새로운 희망을 느끼도록 했다.

저자는 이 책에 자신의 이야기도 담았다.
때는 1957년, 그녀의 나이 열 살 때 처음으로 혼자서 서점에 가게 되었다고 한다. 모아둔 5달러를 쥐고 현금 인출기 앞에 있는 여자에게 물었다.

“아이들도 들어가도 되나요?”

실은, 흑인 아이들도 들어갈 수 있는지 궁금했던 거다. 그런데 출납원이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물론 들어와도 되지.”

마음속 두려움이 가득한 채 처음으로 가 본 서점에서 미소를 지어 준 출납원 덕분에 열 살짜리 소녀는 마음의 긴장을 풀었을 것이다. 그 기억은 오래도록 잊을 수 없었을 테고 말이다. 이처럼 저자의 글은 기괴한 설정과 잔인함으로 가슴을 찢는 고통을 주면서도 출납원의 미소와 같은 따뜻함이 공존한다. 쓸모없는 고통스러운 물건을 내다 버리듯, 투덜거림과 불평에서 스스로 벗어났던 자신감과 다부짐이 멋있는 사람이었던 그녀가 이야기의 힘을 빌려 인류가 무엇을 잃어가고 있으며, 무엇을 놓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아챌 수 있길 바라는 듯, 정형화된 좁은 틀에서 미지의 바깥으로 우리를 끌어낸다. 이 미지의 공간에서 인간과 또 다른 존재인 ‘커뮤니티’가 충돌하는 대신 서로 이해하고 소통을 도와주려는 이야기를 담은 「특사」의 통역사 ‘노아’의 목소리를 통해, 저자가 독자에게 집요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엿볼 수 있었다.

난 사람들이 생각을 하게 만들고 싶어요. 인간 정부가 말해주지 않는 것들을 말해주고 싶어요. 진실을 말함으로써 당신들과 우리 사이의 평화에 한 표를 던지고 싶어요. 내 노력이 길게 봤을 때 조금이라도 쓸모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야 해요. (「특사」, p. 179)

이번에 <블러드 차일드>를 읽으면서 이 지구상에 평화만이 존재하고 모든 인간이 불행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런 소설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가장 많이 했다. 옥타비아 버틀러가 바라본 세상은 얼마나 암울했기에 마치 인류에게 남은 것이 종말뿐이라고 여긴 사람처럼 인간과 외계 생명체 간의 공존하는 삶을 소설로 담아야만 했을까…. 사실, 이제는 인간이 아닌 또 다른 존재와 미지의 세계에서 공존하는 삶보다 다툼과 불행이 없는 삶을 상상하는 것이 더 어렵게 느껴지지만, 이런 마음마저 주고받으며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는 게 문학의 힘이 아닐까 싶다. 상상이 만들어낸 상황 안에 담긴 철학적인 메시지에서 옥타비아 버틀러만의 강렬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던 이 소설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번역이 내용의 이해를 도와주기보다는 오히려 가끔 방해가 되는 경우가 있었다. 완전히 몰입해서 이야기에 빠져 있다가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 일이 없었다면 훨씬 더 즐기며 읽을 수 있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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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bass 2025-12-20 0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는 매우 섬뜩한데...곰돌이님이 저렇게 쓰시니 재미있을것 같기도 하고....(sf 그닥 안 좋아하는 일인이라서...)

곰돌이 2025-12-20 08:06   좋아요 1 | URL
저도 SF 소설을 즐기진 않지만,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을 재미있게 읽었어요. 이 책은 SF적 요소가 더 진하기 때문에 혹시 생각이 있으시면 <킨> 먼저 읽으시길 추천해요! 근데, rainbass님이 안 읽으실 것 같습니다!! 풉 ㅋㅋㅋ

rainbass 2025-12-20 09: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또 그렇게 말하시면 청개구리 심보 발동해서 읽을것 같아요. 😂 😆
 

단편소설의 매력에 점점 더 빠지고 있다. 누군가의 스치는 감정이기보다 스포이드로 쏙 뽑아 올려놓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그 순간에 내가 놓여 있는 듯한 문장과 마주할 때의 쾌감도 좋고, 핀 조명으로 주목한 것 뒤로 드러내지 않아 가려진 것, 그 보이지 않는 것을 헤아려보는 시간이 나에게 소소한 즐거움이 되어주기도 한다. 짧지만 잊지 못할, 그 찰나의 감정을 바로 흘려보내지 않고 조금 천천히 놓아주고 싶어진 내면의 변화 때문일지도 모른다. 잘 흘려보내고 싶다. 좋은 것은 오래도록 기억하게 어떤 식으로든 남겨두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옹글게 맺혀 있는 감정은 모난 모서리 부분을 잘 다듬어서 잘 흘려보내고 싶다.

뚱카롱을 좋아하고 뚱낭시에도 좋아하는 내가 뚱책마저 좋아하기에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시리즈로 눈길이 가 몇 권을 구매했다. 여섯 권 중 세 권은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작가지만, 먼저 읽은 분들의 평과 작품의 분위기를 가지고 결정했고, 맨 처음에 실린 글과 표제작 위주로 조금씩 읽어보았다.



<왕이 되려 한 남자 외 24편>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정글북>으로 유명한 영국의 소설가이자 시인인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은 1865년 인도 봄베이에서 태어나 그동안 자신이 경험한 인도의 문화와 생활상 등을 관찰하여 글을 써오다가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아들을 잃고 난 뒤로 내면 세계로 눈을 돌렸다고 한다. 25편의 단편 중 맨 앞에 실린 「백 가지 슬픔의 문」을 펼치자, 백인과 인도인 혼혈인 한 남성과 인도의 뒷골목 비좁은 통행로와 담배 파이프 자루 상인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편굴에 가득한 검은 연기와 아편 향에 취한 한 남성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헛소린지 아닌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독한 기운을 내뿜는 통에 나마저 대나무 파이프에 연기를 빨아올린 느낌이 들면서도, 밀폐된 공간에서 홀로 맨정신으로 참담함을 목격하는 기분이 들게 했다. 아편 거래로 수익을 올리며 배를 불리고 있는 영국의 모습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충분히 그려지다 보니, 검은 연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 눈알만 돌리다가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는 이들의 모습이 이토록 허탈할 수가 없다. 아편에 중독되어 죽어 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똑같이 그 길을 걸어가는 남성은 내 시선에는 비극적인 상황에 놓여 있는 것 같기만 한데, 지난 기억들이 연기와 함께 전부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평온함을 느끼고 위로를 얻고 만족해하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괴상하다고 부를 만한 것들을 보아왔다. 그러나 당신이 검은 연기를 들이마시고 있으면 그 연기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괴상하지 않다. (「백 가지 슬픔의 문」, p. 16)



<오랜 죽음의 운명 외 19편> 캐서린 앤 포터

보수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미국 남부 태생인 캐서린 앤 포터는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고, 안타깝게도 그 불행이 남편과의 결혼 생활까지 이어졌다. 정신적·육체적 폭력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그녀는 이혼 후 과거로부터 자신을 떼어놓기 위해 ‘칼리 러셀’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길러 준 조모의 이름을 따라 ‘캐서린 앤 포터’로 개명한다. 소개 글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니, 파란만장한 삶의 궤적이 느껴졌다. 작가를 꿈꿔왔다고 한다. 이 꿈을 위한 노력이 그녀에게 버티는 힘을 주고, 살아 움직이게 하며 가슴 뛰게 했을 것 같다. 책장을 넘기자마자 멕시코의 어느 마을에 사는 한 여성의 발걸음에서 느껴지는 고단함과 마주하게 된다. 응달진 길에 잠시 쉬었다 가면 좋으련만, 그쪽은 선인장이 무성하기에 괜히 가시 돋친 길을 걷다가 발에 박힌 선인장 가시를 뽑으며 지체할 시간이 없다며 계속해서 조심조심 걸어 나간다. 그런 그녀의 눈앞에 남편과 한 여성의 다정한 모습이 마음을 괴롭힌다. 그럼에도 정작 그녀는 삶에 불만이 전혀 없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오히려 그런 태도가 나를 더 어쩌지 못하게 만들었고, 언제쯤에야 이 어쩌지 못하는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싶어 발걸음을 계속 따라가 본다. 계속해서 걸어야 하고, 살아 나가야 하는 그녀를 불안하게 흔들거리는 촛불을 보듯 바라만 봐야 했다.

“기도는 혼자 조용히 하세요, 할머니. 아니면 기도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해 주든가요. 나는 내가 이 세상에서 원하는 걸 하느님께 직접 구할 테니까.” (「마리아 콘셉시온」, p. 23)



<내가 우체국에서 사는 이유 외 31편> 유도라 웰티

이 책의 서문을 위에 소개한 캐서린 앤 포터가 썼다. 그녀의 정성스러운 글 덕분에 유도라 웰티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 올리비아 콜맨의 얼굴을 떠올리게 하는 외모의 웰티는,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하는 캐서린 앤 포터와 달리 미시시피 잭슨 출신의 풍족한 가정에서 별다른 걱정 없이 글쓰기에만 몰두하며 지냈다고 한다. 대학에서 따로 글쓰기를 공부한 적이 전혀 없고 자신이 방향과 목표를 잡고 도전하며 그 길을 닦아 나가다가 스물여섯 살에 첫 단편을 발표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을 떠나지 않았다고 하니 그런 그녀의 시선에 자주 들어온 것은 아마도 주변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맨 처음에 실린 「릴리 도와 세 부인」은 지적 장애가 있는 ‘릴리’라는 한 여성을 향해 보이는 사람들의 손길이 과연 진실한 친절이자 배려이자 보호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겉으로 보기엔 점잖아 보이는 여성들이 모두 한목소리를 내며 릴리를 향해 다가가는 모습은 오히려 그녀가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 없게 만드는 것만 같아 이 강압적인 분위기가 조금 숨 막히고 불편한 감정을 만들어냈다. 어쩌면 이 불편한 감정이 틀에 박힌 생각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의 삶에 미묘한 틈을 만들어 주는 게 아닐까 싶다. 사진작가이기도 했던 웰티가 카메라 셔터를 내리는 순간 포착한 것처럼 그녀의 눈에 들어온 수많은 것 중 글로 담고 싶은 순간은 무엇일지 나머지 31편의 이야기가 더 궁금해진다.

릴리가 웃었다. 카슨 부인의 가슴 앞에서 손을 뻗어 창문 밖의 한 남자를 가리켰다. 그는 기차에서 내려 그저 거기에 혼자 서 있었다. 모자를 쓴 그는 외지인이었다. “저거 봐요.” 릴리가 대충 입을 가린 채 낮게 웃었다. “보지마라.” 지금까지 한 얘기를 다 통틀어 엄숙한 이 단어가 모자란 릴리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게 하려는 듯이 카슨 부인이 아주 또렷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덧붙였다. “엘리스빌에 도착할 때까지는 아무것도 보지 말거라.” (「릴리 도와 세 부인」, p. 33)

조심성이 있지만 어떤 단단함이 느껴지는 웰티의 글을 따라가 보니 역시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왠지 얌전하고 차분할 것 같은 그녀가 생각보다 꽤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 표제작 「내가 우체국에서 사는 이유」는 특별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창문을 열어도 눈에 들어오는 것이 늘 별반 다를 게 없는 곳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이야기다. 가족과 한 공간에서 공존하며 살아가는 것이 현재 몹시 피곤하게 만드는 상황까지 벌어져 미쳐버리기 일보 직전인데, “되바라진 년!”이라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던 여성과 가족 사이의 일상이 펼쳐진다.

“전 제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는 거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예요.” (「내가 우체국에서 사는 이유」, p.119)

그녀의 말 한마디는 공감을 자극했고, 무엇이 필요한지 충분히 알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의 평온을 위해 개인의 삶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던 보수적인 미국 남부 지역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던 이 소설에서 내가 흥미롭게 바라본 부분은 주인공 여성이 자신의 짐을 실은 수레를 이동시키기 위해 도움을 요청한 검둥이 소녀(소설 속 표현 그대로)에게 삼촌이 5센트 동전을 ‘던져 준’ 장면이었다. 아홉 번을 왔다 갔다 해야 할 만큼 짐이 적지 않았다고 했다. 웰티는 이 장면을 흑인 차별이 극심했던 그 당시의 보편적인 분위기 그대로 찰나의 순간처럼 담았다.



<선원, 빌리 버드 외 6편> 허먼 멜빌

읽어보고 싶은 책 중 하나가 <모비딕>인데, 이렇게 맛도리 단편들을 먼저 만나게 되었다. 가문의 사업이 파산하고 부친이 세상을 떠나면서 학업도 중도에 포기해야 했던 허먼 멜빌은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열세 살 때부터 여러 일자리를 전전했다고 한다. 힘겨운 시절 속에서 고통스러운 시련을 겪으며 보고 느낀 것들이 그의 작품에 깊이 반영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읽기 전에는 알 수가 없으니, 일단 분량도 적고 제목부터가 왠지 재미있을 것 같은 「꼬끼오! 혹은 고귀한 수탉 베네벤타노의 노래」를 펼쳤다. 빚에 쪼들리는 한 남성(입담이 상당히 좋음)이 등장한다. 입에 모터를 달았는지 험난하고 가혹한 세상을 향해 알아듣는 사람들이나 알아듣겠지 하는 심정처럼 쉴 틈 없이 말을 쏟아낸다. 가진 게 없어 문제지, 마음만큼은 고상한 이 남성에게 세상이 도와주질 않아 비참할 따름인데… 아, 일단 재밌다. ㅋㅋㅋ (모비딕은 급행으로 장바구니로!) 이따금 부담을 낮춰주는 듯한 안녕! 흥!처럼 가벼운 표현으로 거리감을 좁혀주기까지 하고 말이다. 그러나 쓴웃음을 주는 입담 뒤로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가며 세월을 보내다가 삶의 불행에 초연해지는 인간의 마음에 가득 찬 음울함이 무겁게 내리누른다. 자본주의의 비극과 불행 속에서 그가 본 것,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나는 드넓게 굽이치는 평원, 산들, 마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농가들, 큰 숲과 작은 숲, 시내, 바위, 초원을 둘러보면서 생각했다. 결국 이 거대한 대지에 인간이 만들어 내는 자취들이란 얼마나 하찮은가. 그러나 대지는 인간에게 자취를 남긴다. (p. 71)

저 아래 평원에서 배고픈 주인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목숨을 빼앗길 운명에 처해 있는 하잘것없는 수탉 한 마리가 아무 뜻 없이 뉴올리언스에서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기리는 계관시인처럼 소리를 지르고 있을 때, 나는 언덕 위에서 부루퉁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p. 75)

썩은 가로장 울타리를 녹슨 못들로 오래 지탱시키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60년의 겨울과 여름에 걸쳐서 얼었다가 달궈지는 과정을 거듭해 온 막대기들에 무슨 수로 사라져 버린 나뭇진을 다시 주입시킬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썩어 빠진 가로장 울타리를 썩어 빠진 가로장들로 수리하려는 한심한 시도이며, 많은 농부들이 그런 작업을 하다가 결국은 요양원에 들어가고 만다. (p. 85)



<내가 연주하는 블루스 외 40편> 랭스턴 휴스

‘할렘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가 랭스턴 휴스의 소개 글을 통해 그는 흑인 고유의 정체성을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동안 내가 접했던 흑인문학과는 또 다른 면을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과 이들의 표현 수단이었던 연주가 내 감성을 자극했고, 그런 의미로 제목부터 끌리는 표제작 「내가 연주하는 블루스」를 가장 먼저 펼쳤다. 예술가들을 후원해 주는 백인 ‘웰즈워스’ 여사와 그녀가 후원하는 흑인 소녀 ‘오시올라’에 관한 이야기다. 가난했지만 학교에서 독일 선생님께 피아노 레슨을 배웠기에 기초를 다질 수 있었던 오시올라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교회에서 성가대 반주를 하며 돈을 모아 대학에 다닐 수 있었다. 웰즈워스 여사는 오시올라의 뛰어난 실력을 소문으로 듣고 오로지 예술성에 대한 확신으로 후견인이 되어주기로 한다. 그런데 예술에는 품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녀의 가치관에 이 소녀를 끼워 맞추려고만 한다. 이 작품은 흑인의 고통과 저항을 드러내기보다는 오시올라가 자기만의 삶의 리듬을 따르는 모습에 마음을 무척 개운하게 해주었고, 그녀가 연주하는 흑인 블루스와 경쾌한 재즈는 당당함과 얽매임이 없으며 통제받지 않는 앞으로의 삶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오르게 했다.

그녀가 블루스를 연주할 때 저음은 작은북들의 소리처럼, 고음은 작은 플루트들처럼 소리를 냈다. 땅속 깊은 곳과 까마득하게 높은 하늘의 두 음들의 경계 안에서 그녀의 음악은 모든 것을 이해하는 듯했다. 클럽의 손님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블루스 음악에 맞춰 춤을 출 때면 브릭톱은 “헤이! 헤이!” 하고 추임새를 넣곤 했다. 오시올라는 크릴용 살롱에서 그녀의 음악에 감탄을 금치 못하는, 연미복을 빼입은 청중들 앞에서 쇼팽의 에튀드를 연주할 때만큼이나 행복했다. (「내가 연주하는 블루스」, p. 102)



<그 시절의 연인들 외 22편> 윌리엄 트레버

단편소설의 거장이라고 하는 윌리엄 트레버의 「욜의 추억」이 나를 방구석에서도 지중해의 고요함과 산들바람을 느끼게 해주더니, 갑자기 지저분한 남자가 나타나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하며 만끽하고 있는 여유를 침범하려 한다. 묻지도 않았거늘 자신의 이름은 ‘퀼런’이며 추방당한 아일랜드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아일랜드 출신이지만 영국으로 이주한 윌리엄 트레버가 이 남성의 심정을 잘 알 수밖에 없겠구나 싶다. 소외감과 죄책감을 느끼는 이방인의 심정을 말이다. 고맙게도 ‘아그네스’라는 여성이 그의 눈에 담긴 불안함에 동정을 느끼며 인내심 있게 이야기를 들어준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다. 기억 속에 담고 있는 어린 시절의 아픔을 말하는 입과 고통을 담은 눈빛에서 슬픔을 알아봐 주며 상처받은 손등에 손가락 끝을 조심히 갖다 대는 것으로 위로의 마음을 전하는 아그네스의 모습은 나 역시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품게 한다. 그저 설익은 마음으로 그치더라도 말이다. 퀼런이 불운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 욜은 나에게도 멋진 해변 휴양지였지만, 지금은 마냥 그럴 수가 없다.

생전 처음보는 이 남자가 감상적인 이야기를 계속하기를 바랐다. (「욜의 추억」, p. 13)


자로 잰 듯이 살 수 없는 내가 흘린 먼지를 주워 담을 순 없기에 나와 같은 사람의 모습에 공감해 보고 한여름 밤의 꿈 같은 일을 상상하며 또다시 대충 구겨서 안 보이는 구석으로 치우기도 해봤다. 이들의 삶은 누구나의 인생처럼 아름답기만 하지 않았고 사랑도 다양했다. 빛바랜 할머니의 물건들, 주인은 떠나고 세월만 쌓여가는 장신구를 보며 이유도 모른 채 울적해진 소녀의 마음처럼 불가사의한 사랑을 느껴보기도 하고, 권태로운 결혼 생활을 이어가던 중 세월만 흐를 뿐 사랑을 갈망하는 것은 젊을 때의 그것과 다를 바 없이 마침표가 없기에 새로운 외면의 세계를 향해 미친 듯이 달리는 남자를 통해 체념할 수 없는 마음의 위험과 포기할 수 없는 그의 마음에 부질없음을 내내 읊조려 보기도 했다. 특히, 고되거나 포기하고 싶거나 누구를 원망하고 싶은 심정이 들 수밖에 없는 삶을 더 주목했는데, 대체로 동정심과 연민이 담긴 손길을 바라지 않았고, 우려의 시선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없을 만큼 이 모든 것이 지나갈 일처럼 받아들이고 사는 듯했다. 이런 모습에 나는 권여선 작가님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돌이켜보면 엄청난 위로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사랑이 보잘것없다면 위로도 보잘것없어야 마땅하다. 그 보잘것없음이 우리를 바꾼다. 그 시린 진리를 찬물처럼 받아들이면 됐다. (<내 정원의 붉은 열매>, p. 80)

그리고 윌리엄 트레버는 등장인물 아그네스의 목소리를 빌려 “세상은 우리한테 가장 좋은 것을 허락하지 않아”라고 말한다. 두 사람의 말이 냉혹한 현실을 알려준다. 그럼에도 나는 왜 단 한 줄의 글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머무는 것일까? 분명 무언가 내 마음을 건든 것이 분명하다. 누군가 말로 옮기지 못해 닿지 못한 말들을 대신 적어 알려준다는 마음이 들어, 굳게 닫힌 문을 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고민하는 삶으로 방향을 틀도록 만든 것일까? 말하려 했던 수많은 시도에 귀를 기울여 그 감정을 하얀 종이 위에 짧은 호흡으로 써 내려가기까지 겪었을 글쓴이의 노력이 감동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대부분 공감이 가는 대상이나 와닿는 이야기를 만나면, 그다음 장의 이야기를 기대하고, 책을 덮고 나면 또 다음에 들려줄 이야기를 기대한다. 기대한다는 것! 순수한 이 감정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에너지가 아닐 수 없다. 모두가 잠든 늦은 밤 혹은 이른 새벽, 나 홀로 떠진 눈을 끔벅거리며 더디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떠올려지는 생각들을 따라가다가 나는 오늘 하루 몇 번의 기대를 하며 지냈는지 물어본다. 아무런 기대 없이 하루를 움직였던 긴 터널을 지나고 나니, 이제서야 단 한 권의 책만으로도 기대감으로 들뜨게 하는 이 순간의 값어치가 절대 작지 않음을 실감한다.

흐트러져 있던 마음을 움켜잡아 한 곳으로 모아보는 시간 그 자체를 즐겼다. 어쩌다 보니 습관적으로 늘 올곧은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나 자신을 잊고 말이다. 몇 주에 걸쳐 시간 날 때마다 조금씩 읽다 보니 6권의 책에 대한 애정이 그새 많이 쌓였다. 인도의 후덥지근한 공기와 무거운 흙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 그리고 지중해의 산들바람을 타고 날리는 담배 연기와 잔에 담긴 독한 술의 향기까지, 아편 향에 취해, 술에 취해, 이야기에 취해 아주 어질어질하지만, 아직도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그저 좋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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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12-09 1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두 이거 전집 있으요~~~ 아직 읽은 책은 없지만 언젠가는 읽으려고 항상 대기중인 전집..^^;;

곰돌이 2025-12-09 10:10   좋아요 0 | URL
저도 이따금 하나씩 쏙쏙 뽑아먹으려고 합니다. yamoo님의 리뷰를 읽어볼 날을 기다릴게요!! 언젠가는 볼 수 있겠죠 ㅋㅋㅋ

새파랑 2025-12-09 18: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현대문학세계문학단편집 모으는데...
사긴 사는데 너무 방대해서 몇권 못읽었습니다 ㅋㅋ

곰돌이 2025-12-09 18:18   좋아요 1 | URL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뚱실함…ㅋㅋ 천천히 여유를 두고 읽어보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