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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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의 작가 오르한 파묵의 작품이다. 그의 유명한 작품인 <내 이름은 빨강>을 먼저 읽어볼 생각이었다가 겨울이라서인지 이 책에 먼저 손길이 가길래 몇 장만 읽어보자 싶어 책장을 넘겼다가 완전히 빠져서 읽었다. 하얗고 순수한 눈에서 느껴지는 왜인지 모를 낭만과 함께 가련하면서도 쓸쓸한 분위기에 정말 마음이 확 사로잡혔다.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비추는 가로등 아래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는 한 남성이 내뿜는 연기와 소리 없이 내쉰 한숨이 왠지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들었다. 고국을 떠난 세월도 오래되었고, 사실 대단한 기대를 하고 돌아온 것도 아니었지만, 예전 모습만큼은 간직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십이 년 만에 고향 터키를 방문한 이 남성의 이름은 카(Ka)이다.

이스탄불의 중상류층 사람들이 사는 지역인 니샨타쉬의 안락하고 세속적인 공화주의 가정에서 자란 카에게 집 너머의 삶은 다른 세상이었다. 그랬던 그가 정치적 망명자가 되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지내다가 어머니의 부음 소식을 듣고 이스탄불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우연히 좌익 성향의 신문사에서 정치면 기사를 쓰는 ‘타네르’라는 청년 시절의 친구를 통해 곧 카르스에서 지방선거가 있을 것이라는 소식과 히잡을 착용하는 소녀들이 이상한 자살 증후군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아무도 취재를 원치 않는 곳에 임시 기자증을 발급받아 카르스로 발걸음을 향하게 한 이유에는 대학 동기이자 첫사랑인 아름다운 ‘이펙’이 그곳에 있다는 귀띔이 크게 작용했다. 이렇게 예정에 없던 여행이 시작되어 터키에서 가장 가난하고 잊힌 지역인 카르스에 도착한 카는, 과거의 순수를 찾고 싶은 충동이 생겨 천진난만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 친구들과 걸었던 거리를 가본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예전의 고향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 버려진 듯 보이는 마을의 작은 빈민가를 지나 텅 빈 도시의 사방을 채우는 것은 일이 없어 카드놀이로 시간을 죽이는 우울한 실업자들뿐이었다.

이슬람주의 쿠르드족들과 마르크스주의 쿠르드 민족주의자들 간의 논쟁, 욕설, 구타, 길거리에서의 싸움으로 시작된 불화는 많은 도시에서 칼부림으로 변했고, 최근 몇 달 동안 양쪽 진영 모두가 서로에게 총질을 하거나 납치하여 고문을 동반한 취조를 했으며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다. (p. 109)

카는 5년 전 프랑크푸르트 백화점에서 산 부드러운 회색 털코트를 입고 있다. 나는 방금 내린 뜨거운 커피를 호로록 마시며 카르스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이 두툼한 코트를 입은 채 숙소 침대에 누워 상상에 빠진 그의 내면을 이해하는 동반자가 되어 본다. 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느껴보며 공화국 시기 터키인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고, 잠시 뒤 대학 시절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카를 당황스럽게 만들게 될 이펙과의 만남에 앞서 들뜬 감정 또한 함께 나눠본다. 가난한 마을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 두 명의 이스탄불 출신 서구화된 부르주아들의 만남은 과연 어떤 전개로 이어질까. 일단 카의 멋진 털코트가 빛을 발해야 할 텐데 말이다.

“넌 아주 멋져. 나도 너와 사랑을 나누고 싶어. 하지만 3년 동안 그 누구와도 사랑을 나누지 않았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나도 4년 동안 그 누구와도 육체관계를 갖지 않았어.’ 카는 속으로 말했다.

영화 <도둑들>에서 “저 10년 동안 안 했어요.”라는 씹던껌(김해숙)의 대사가 떠올려지는 이 장면에서 난 뜬금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럼 10년 치 합시다.”라는 첸(임달화)의 박력을 카에게 바랄 수도 없는 것이, 그는 워낙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부끄럼이 많은 타입이다. 카와 이펙, 두 사람의 애정선은 가끔 이렇게 잔잔한 실소를 뿜게 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일 뿐이다. 흠, 분위기가 나 때문에 좀 이상하게 빠져버렸다. 이 진지한 소설에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싶다. 아니, 그런데 이펙의 아름다움에 완전히 홀딱 빠진 카는 깜빡이도 안 켜고 냅다 “너와 결혼하기 위해 이곳에 왔어.”라고 고백까지 하는 게 아닌가? 카의 급하고 거침없는 모습에 나는 살짝 당황스러웠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난 뒤에 만남이라 사랑이라는 단어를 거론하기에 아직 성급하다고 느껴서가 아니라, 서로 변화할 마음가짐이 없는 상태에서 오가는 대화가 영 겉도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평온함을 찾고 싶었던 카에게 이펙을 향한 감정이 사랑인 건지도 아직 잘 모르겠다. 2권을 읽어봐야 알 것 같다!

가벼운 이야기로 착잡함과 무거움을 피해 볼까 했지만, 그럴 수가 없겠다. 곧 있을 지방선거에서 복지당의 지구 위원장이 시장이 될 것이 유력하여 이슬람 원리주의 정권이 자리 잡는 것을 막기 위해 예술을 도구로 삼은 세속주의 세력의 계몽 연극이 펼쳐지고, 이때 군부 쿠데타가 벌어진다.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 사실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 되어 혼란스러운 사람들과 똑같이 당황스러움과 혼란에 빠지게 하는 묘사가 압권이었다. 오늘은 좀 특별한 일이 없을까 하는 마음으로 나온 군중들이 머리 위로 무언가 떨어지는 것 같아 올려다본 순간, 그들을 향해 군인들이 총구의 방향을 틀었을 때 무너져 내리는 지금의 심정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까. 착잡하다. 숨죽인 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겁먹은 움직임과 웅성거림이 비명으로 바뀐 이날의 광경과 발포 명령에 따른 총소리와 처참함을 폭설이 가리고, 도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TV로 시선을 돌린 시민들은 창문을 닫고 커튼을 내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하루가 흘러가 버린다. 이 소설은 자살, 히잡, 테러리스트, 탄압 등의 단어로 꼼짝할 수 없게 만드는 공포와 맞닥뜨리게 될 것임을 예상하게 하지만 자극적인 사건에 비해 이야기는 차분하게 흐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조용히 내리는지도 모르게 내리는 눈이 어느 순간 수북하게 쌓여 있는 것처럼, 극단적인 사건이 긴장감을 놓지 않게 해주면서도 소리를 죽인 몰아침과 함께 서서히 쌓이는 서사에 완전히 압도당하게 된다.


카는 시인이다. 그는 시를 써야만 했다.
눈의 정적이 이어지면 쓸 수 있으리라.

카르스에 드리워져 있는 과거의 죄가 아니라 아름다운 시를 써야 했다. 따스한 호텔에서 손에 담배를 들고 좋아하지 않은 문제를 그냥 넘어가는 아이처럼 머릿속으로는 사랑하는 이펙과 얼른 이곳을 떠나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침대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면 너무나 행복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그의 모습은 분명 카르스의 현실과 조금 빗겨나간 듯 보인다. 무신론자이면서도 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카는, 이슬람 세력이 서구화를 종교적으로 비판하고, 세속주의 세력은 군대가 저지른 쿠데타를 통해 세속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양쪽의 대립 또한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그는 이방인이었다. 비겁하게 보이는가? 세상은 고통스럽고 아픈데 평온함을 찾는 그의 내면이 나는 오히려 측은하게 여겨졌다. 이미 어린 시절 군사 혁명을 경험했던 그가 무너진 마음의 조각을 뚝 떼어놓고 잠시라도 혼란에서 벗어나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시에서 중요한 주제들 중 하나는, 세상에 재앙이 일어나고 있을 때에도 시인은 마음의 일부를 그것으로부터 격리시킬 수 있다는 내용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시인이라면 현재를 환상처럼 살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이 해내기 힘든 일이 바로 이것이다! 카는 시를 다 쓴 후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p. 248)


잠시, 눈 오는 소리에만 귀를 기울여 본다.
카르스를 가득 채우는 눈 오는 날, 또 하나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다정하고 따뜻한 아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시간과 공간을 넘어 다가오는 감정에 오롯이 빠져들어 본다. 언어는 들리지 않지만, 아이들의 동작만큼은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털복숭아처럼 오동통한 뺨은 갈수록 붉어지고,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식식거리며 뛰어노는 모습, 때묻지 않은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내뿜는 밝음과 희망찬 모습은 모든 것에서 벗어나게 해 줄 것만 같은 희망을 품게 만든다. 그러나 지금의 해맑음이 나중에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닐지 마음을 무겁게 한다.

작은 공터에서, 눈 덮인 광장에서, 공공건물과 학교의 정원에서, 비탈길에서, 카르스 강 위에 있는 다리에서, 아이들은 썰매를 타고 눈싸움을 하고 고함을 지르고 뛰어다니고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코트를 입은 아이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 교복 윗도리를 걸친 채 목도리와 두건을 쓰고 있었다. 아이들은 쿠데타를 기쁘게 맞이했다.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됐으니까. (p. 311)

행복에 빠지면 평범한 사람이자 평범한 시를 쓸 수밖에 없게 된다고 생각하는 시인 카. 그런 카에게 이곳 카르스가 시를 쓰게 만들었다. 정치에는 관심이 없지만 모든 것이 정치적 문제와 연결될 수밖에 없는 카르스를, 새하얀 길을 달리는 차 안에서 유리를 통해 바깥 풍경을 바라보듯,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의 가슴 깊숙이 쌓여가는 연민과 두려움 그리고 죄책감과 수치심이 그를 쓰게 만들었다. 이 책은 쓸쓸함이 상당하다. 상실과 체념의 순간을 견뎌야 하는 고통을 준다. 아직 2권이 남아있어서 앞으로의 전개를 알 수 없고, 지금의 여운 또한 계속 이어질지 알 수는 없지만 오르한 파묵의 <눈>은 앞으로도 매년 눈이 오든 오지 않든 겨울이 되면 떠오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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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12-29 07: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하는 파묵입니다! 애독자가 많지 않은 책 같아서 참 유감이었는데 곰돌이님이 읽으시니 즐겁기까지 하네요. ㅎㅎㅎ

곰돌이 2025-12-29 08:44   좋아요 1 | URL
올해 읽은 책 중에서 손가락 안에 듭니다! Falstaff님 서재에서 제 망태기에 담아온 책들이 많아서 덕분에 좋은 작가와 작품을 접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소박하게나마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헤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