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1> 중에서...

눈은 그에게 희망 없는 빈곤을 말하고 있었다. - P23

눈 속에 버려진 듯 보이는 칼레알트 마을의 작은 빈민가에서 피어오르는 가느다란 연기가 얼마나 슬펐던지 눈에 눈물이 고였다. 개천의 반대편에서는 심부름을 나온 듯한 여자아이와 남자아이가 품에 따끈한 빵을 안고 서로 밀고 당기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얼마나 행복하게 웃는지 카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그의 가슴을 저며오는 것은 가난도 속수무책도 아니었다. 다만 앞으로 계속해서 보게 될 외로움이 문제였다. 도시의 사방에서, 사진관의 텅 빈 쇼윈도에서, 카드놀이로 시간을 죽이는 실업자들로 북적대는 찻집의 성에 낀 창문에서, 눈 덮인 텅 빈 광장에서 마주하게 될 이상하고도 강력한 외로움. 이곳은 모두에게 잊혀진 장소인 듯했고 소리 없는 눈은 세상의 끝에 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 P23

이 모든 이야기 속에는 카를 사로잡는, 평범한 삶의 흐름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전이 과정에 존재하는 속도와 절망이 있었다. - P29

끊어진 그네와 부서진 미끄럼틀이 있는 유스프파샤 마을의 공원 옆 공터에서, 석탄 창고를 비추는 높은 가둥주(街燈柱) 밑에서 축구를 하는 고등학생들을 바라보았다. 눈 속에서 미끄러지는 아이들의 고함 소리와 욕설을 들으며 전등의 희미한 노란 빛과 하얀 눈 빛 속에 있으려니, 이 지역이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너무나 적막한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이 어찌나 강렬하던지, 마음속에 신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 P35

인민당원인 전임 시장 무자페르 씨는 때로는 자랑스럽게 때로는 울분을 토하며 터키에 서구화가 진행되던 시기에 관해,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 비극 『오이디푸스 왕』을 공연하기 위해 앙카라에서 온 연극인들은, 그리스와의 전쟁이 끝난 지 20년도 채 지나지 않았건만, 카르스의 공화주의 중산층에게 환호의 갈채를 받았고, 모피 코트를 입은 나이 든 부자들은 장미와 반짝이로 장식된 건강한 헝가리 산 말들이 끄는 썰매를 타고 산책을 나가곤 했다. - P38

모두 함께 순간적으로 빈 역사에서 밖을, 네온 가로등 불빛 아래의 빈 철로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나는 이 세상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카는 생각했다. 멀리서 보이는 눈송이들은 정말로 가련해 보였다. 가련한 인생. 사람은 살고, 지치고 나이 들고, 사라진다. 그는 자신이 한편으로 사라지고 있다는것을,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을 사랑했다. 한 송이의 눈처럼, 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사랑과 슬픔으로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면도 후 로션을 사용했다. 문득 그것의 향이 되살아났다. 부엌에서 아침을 준비하는 어머니. 슬리퍼 속에 있는 그녀의 차가운 발, 빗, 밤에 기침을 할 때 마시곤 했던 분홍빛 달콤한 시럽, 입에 있던 수저, 그의 삶을 구성하고 있던 사소한 것들, 그 모든 것의 총체, 눈송이들・・・・・・ - P131

나중에 이 시를 어떻게 썼는지를 생각했을 때, 그의 머릿속에는 한 송이 눈이 떠올랐다. 그 눈송이는 자신의 인생을 보여주는 어떤 형태였다. 이 시는 그의 인생의 중심에 서 가까운 곳에, 인생의 논리를 설명하는 어떤 지점에 자리 잡아야 했다. 이 시의 탄생이 그러했듯이, 그가 이러한 마음가짐 중 어느 정도를 그 순간에 내린 것인지, 어느 정도가 이 책에서 밝히려고 하는 그의 인생의 은밀한 균형의 결과인지는 말하기 어렵다. - P134

"나의 불행은 나를 삶에 대항하게 만들지. 내 걱정은 하지 말게."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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