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작년의 오늘이 궁금해졌다.
그날의 나는 어떤 이야기를 따라가고 있었을까, 나조차 잊고 있던 1년 전의 나는 어떤 마음의 밑줄을 긋고 있었을까.
북플에 남아 있던 1년 전 기록을 슬쩍 들여다봤다. 그때의 나는 김연수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읽고 있었고, 스스로는 제자리에서 반 발자국쯤 나아갔다고 믿고 있었던 것 같다.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 몰랐으면 하는 마음, 지나쳐주길 바라는 마음. 이 모든 감정이 뒤섞여 복잡한 심경으로 지냈던 그때의 나날들이 머릿속에서 휘리릭 지나간다. 사실은 거의 멈춰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 혼자만이 알아챌 수 있는 아주 미세한 움직임, 그 정도만으로도 그때의 나에게는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지금의 나는 또 어떤가 싶어진다.
사소한 엉망 속에서도 나는 웃고, 잠깐 화를 내고, 또 아무렇지 않게 길을 걷는다. 여전히 미루고 또 미루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하다. 얼른 자동차 엔진오일도 갈아야 하는데, 이런 건 왜 이렇게 미루게 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책을 사는 일은 전혀 귀찮지 않다. 고르고, 주문하고, 박스를 뜯는 순간만큼은 이상하게 부지런해진다. 며칠 전엔 언니가 내 방에 들어와 한쪽 입꼬리를 예리하게 씨익 올리더니, 책장을 훑다가 한마디 던지고 나갔다.
“관상용.”
읽은 책보다 ‘읽으려고 했던 책’이 훨씬 많은 게 사실이기에 할 말이 없다. 어떤 책은 아직 읽지도 않았는데 괜히 아껴두고 싶어진다. 지금 읽기엔 아깝고, 나중의 내가 더 잘 읽어줄 것 같은 느낌. 그 ‘나중의 나’는 도대체 언제 오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쩔 땐 책을 펼치는 시간보다 책을 고르는 시간이 더 길어질 때가 있다. 이럴 때 나는 이야기를 읽고 싶은 게 아니라, 이야기를 고르는 기분이 좋은 건가 싶다. 근데 이렇게 주절주절 쓰고 있는 걸 보니, 확실히 ‘관상용’에 긁히긴 했나 보다.
그럼에도 책을 샀다. 내가 소화할 수 있는 책은 뻔히 한정되어 있는데, 기어코 또 사버렸다. 오르한 파묵을 제외하면 전부 처음 읽는 작가들이다. 먼저 읽고 리뷰를 남겨주신 분들 덕분에 도움을 많이 받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소박하게나마 ‘땡투’를 보내드렸다. 그렇게 또 아홉 권을 만나게 됐다. 읽을 예정인 책만 또 늘어난 셈이다. 궁금한 마음에 여기저기 앞부분만 조금씩 읽어보는 중이다. 나중에 다 읽어봐야 알겠지만, 일단 지금 막 나를 스친 이 책들의 첫인상은 이렇다.
아시아 제바르 《프랑스어의 실종》
최근에 읽은 《후리》를 쓴 카멜 다우드에 이어 두 번째로 만난 알제리 작가다. 소개를 읽다 보니 알제리 여성 최초의 고등사범학교 입학 같은 타이틀보다, 알제리 이슬람 학생 총연합 운동에 참여했다가 퇴학당했다는 이력이 더 눈에 띈다. 그때부터 본명 대신 ‘아시아 제바르’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데, 자기 이름까지 지워가며 지키고 싶었던 세계는 대체 뭐였을까 궁금해졌다.
그런 작가의 이력을 알고 나서인지 “그러니까 바로 오늘, 나는 고향으로 돌아왔다”라는 첫 문장을 읽는 순간, 저자의 실제 삶이 문장 뒤로 어렴풋이 겹쳐 보였다. 다른 아랍 여성들과 달리 프랑스에서 교육받았던 그의 이력이 이 소설 속에 어떤 그림자로 스며 있을지 상상해 보면서.
어느 바다든, 어느 바다의 파도든 자신에게 매혹적인 행복의 시간을 되돌려 주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주 가까이에서 찰싹거리는 그 물결 소리가 더 멀리서, 깊이 파묻혀 있던 과거에서 되살아나 들려오는 듯했다. (p. 20)
파리에서 20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내고 마침내 고향 알제리로 돌아온 화자 베르칸. 그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훨씬 담담해서 오히려 더 마음이 쓰리다. 분명 고향 땅을 밟았는데 어딘지 모르게 서먹해 보이는 공기. 오랫동안 써온 프랑스어라는 언어가 마치 남의 옷처럼 느껴지는 그 이물감이 문장 사이사이에서 툭툭 걸린다. 고향에 왔지만 정작 내 언어는 어디에 있는지 되묻는 것 같은 그 막막함. 그러나 고향에 돌아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방식조차 스스로 결정하려는 그의 모습에서, 프랑스어와 고향의 언어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단호한 기색이 느껴진다.
가장 흥미로운 건 시점의 변화다. 베르칸의 직접적인 목소리와 그의 삶을 읊어주는 제3자의 시선이 묘하게 교차된다. 처음엔 살짝 당혹스러웠지만, 이내 이 불친절한 전환이 내게는 매력으로 다가왔다. 어색함보다는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뒤에 숨어있을 것 같은 기분 좋은 긴장감처럼. 이 묘한 시점의 차이가 이야기를 어떻게 끌고 갈지, 그리고 낯선 틈새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은 호기심 덕분에 책장을 넘기는 손길이 무겁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왜, 퇴직까지 앞당겨가며 이 낯선 고향으로 기어이 돌아와야만 했을까.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할 겁니다! 그러자면 온전히 제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p. 22)
하인리히 뵐 《천사는 침묵했다》
도입부의 몇 줄만으로도 전쟁이 훑고 지나간 폐허의 냄새와 지독한 허기, 그리고 적막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주인공 한스 슈니츨러는 전쟁 끝에 탈영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살아남았지만, 그가 마주한 세상은 뼈대만 남은 건물들과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린 잿빛 도시다.
그는 이제 오로지 생존과 허기로 세상을 본다. 당장 배를 채울 빵 한 조각과 몸을 뉠 안전한 장소가 그에겐 그 어떤 이념보다 절실하다. 버려진 옷 주머니에서 우연히 발견한 담배를 입에 물고서 성냥불을 가진 누군가가 지나가길 기다린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그는 사람들로 북적이던 시절의 집을 멍하니 떠올려본다.
돌로 만든 천사의 얼굴은 부드럽고도 고통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p. 8)
손에 백합 한 송이를 든 채 침묵하는 천사상. 한스는 그 천사의 얼굴을 바라보며 기묘한 희열에 잠긴다. 전쟁이 삼켜버린 도시에서 그가 처음으로 마주한 ‘얼굴’다운 얼굴이기 때문이었을까?
안톤 체호프 《상자 속의 사나이》
단편의 매력을 처음 알게 해준 건 권여선 작가의 작품들이었다. 서서히 단편 쪽으로 관심이 옮겨가면서 세계문학 단편선을 한 권씩 모으다 보니 결국 안톤 체호프까지 만나게 되었다.
이 책은 여러 편의 단편이 모여 있는 구성이다. 이제 막 앞부분에 실린 <굴>과 <아뉴타>그리고 <반카> 까지만 읽어봤는데, 누구는 죽을 것 같은데 누구는 웃고 있고, 누구는 진심인데 누구는 이용만 한다. 인간이 서 있는 위치가 다르다는 이유로 발생하는 그 지독한 온도 차. 체호프는 그걸 요란하게 꾸미지 않고 그냥 툭 내놓는다. 그 무심함이 오히려 아프게 찌른다.
굳이 비교하자면, 권여선이 뜨겁게 도려낸 자리를 체호프가 그 뜨거운 순간을 식지 않은 채로 냉정하게 응시하는 기분이다. 한낱 먼지인 나의 감상일 뿐이다.
체호프의 글에 담긴 ‘삶의 민낯’에서 내가 느낀 냉기 외에 남은 이야기들이 또 어떤 다양한 감정을 얻게 해줄지 궁금해진다. 아직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다. 각기 다른 온도로 놓인 이야기들이 담겨있을까? 읽어봐야 알겠지. 왜인지 서늘한 가을 끝자락에 읽어 보고 싶단 생각이 든다. 그래야겠다.
유진 오닐 《밤으로의 긴 여로》
내 기억이 맞다면 희곡은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말하니 희곡을 좀 읽어본 사람인 것처럼 말하지만 실은 유일한 한 권이다. ㅋㅋ
여기에 한 권을 더 얹어보려 한다. 일단 제목부터가 좀 압도적인 느낌인데 책장을 펼치자, 아침 햇살이 거실을 꽉 채우고 있다. 모여 있는 네 가족의 대화가 참 묘하다. 분명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있는데, 그 말들 속에 가시가 돋쳐 있다.
가장 가까운 이의 살결을 가장 아프게 할퀴는 그들의 대화 과정을 보고 있자니 내가 다 눈치가 보일 정도다. 불씨를 덮듯이 아슬아슬하게 애써보지만 이미 뒤편엔 짙은 그림자가 깔린 기분. 닥쳐올 불행이 두려워 날을 세우는 사람들처럼 보여서 어딘가 애처로운 마음이 든다. 이들이 통과해야 할 길고 긴 밤을 채우게 되는 것은 무엇일지. 4막 중 1막을 읽었을 뿐인데, 가슴팍이 이렇게도 갑갑할 수가 없다.
막스 프리슈 《호모 파버》
유네스코 소속으로 저개발 지역 지원 업무를 담당하는, 주인공 발터 파버는 모든 걸 확률과 통계로만 따지는 뼛속까지 엔지니어다. 소설 시작부터 비행기가 사막에 비상착륙을 하게 되는 난리가 나는데, 이 와중에도 엔진 결함을 숫자로 계산하고 있는 이 남자를 보고 있자니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온다. 세상 모든 일을 계산기로 두드려보고 나서야 안심하는 그는 엄숙한 분위기도 싫고, 괜히 질척거리며 대화를 이어 나가는 스타일도 아닌 듯싶다.
보이는 것만 보는 인간미가 영 부족한 남자다. 그런데 읽을수록, 난 이 사람이 은근히 맘에 든다! 실생활에서 때론 이런 지독한 투명함이 더 낫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뚝뚝하고 불친절해 보일지언정, 적어도 계산기 밖의 딴마음은 품지 않을 것 같다. 사실은 우리가 모두 가끔 속에서 끓어대는 ‘단절의 욕구’를 대변해 주는 것 같아 묘하게 정이 간다. 나만 그런가? (또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군.)
난 내가 지구상 최초의 인간도, 최후의 인간도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게다가 내가 최후의 인간이라고 단순하게 상상해도 별다른 감흥이 없다. 그건 사실이 아니니까. 히스테리를 부릴 이유가 뭐란 말인가? (p. 33)
하지만 인생은 늘 계산기 밖에서 터지는 법. 그의 견고한 논리를 비웃으며 자꾸만 끼어드는 ‘우연’들이 이 소설에 기묘한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감정 따위는 하나도 안 섞인 차가운 기계 부속품 같은 문장들 끝에 어떤 비극이 그려질 것 같아 자꾸만 어디 한번 보자? 싶은 심보를 자극한다. ㅋㅋ 읽다보니 《슈틸러》도 급 관심이 간다.
로베르토 볼라뇨 《야만스러운 탐정들 1·2》
최근에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염소의 축제》를 찍먹했다가,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을 좀 더 읽어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샀고, 그 흐름이 자연스럽게 로베르토 볼라뇨에게까지 이어졌다. 원래는 《2666》이 궁금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내가 쉽게 덤빌 두께가 아니라서 《야만스러운 탐정들》로 방향을 틀었다.
대학교 안 시 창작 교실을 중심으로 시인이 되려는 젊은 사람들이 모여 떠들고, 시를 쓰고, 문학을 이야기하는 장면들이 먼저 펼쳐진다. 이곳은 시에 대한 평가와 각자의 작품 이야기가 오가고, 때로는 서로의 문장을 두고 농담처럼 가볍게 날을 세우기도 하는 공간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학 정체성을 이야기하며 ‘내장 사실주의’라는 이름을 붙인다. 어째 이름이 영 껄쩍지근하다.
이 소설은 처음 문을 열어주는 화자가 있는데, 어딘가 너무 진지해서 좀 웃기다. 건조한 웃음이랄까? 본인은 꽤 심각하게 시와 문학을 바라보는 것 같은데, 옆에서 보면 살짝 과몰입한 사람처럼 느껴지고, 그 와중에 폼은 또 꽤 잡는다. 누구나 ‘어린 패기’가 대기권을 뚫고 올라가는 시절이 있으니까.
딱히 누가 주인공이라는 느낌보다는 몇몇 핵심 인물들 사이로 시선이 계속 이동하는 구조처럼 느껴진다. 초반만 읽어서는 아직 무슨 이야기라고 말하기 어렵다. 여러 인물의 목소리가 번갈아 등장하기 때문에 하나의 이야기로 딱 떨어지기보다는 계속 겹치는 말들의 흐름처럼 흘러간다. 그래서 이야기를 정리해서 이해하기보다는, 그 안의 분위기를 따라가게 된다.
초면인지라 처음엔 쭈뼛거리며 접근했건만, 읽다 보니 요거 은근히 빠져든다. 막 써 내려간 듯한 생생함 때문인지 시답잖은(?) 대화가 이어지다 말고 애매한 지점에서 재미가 터지기도 한다. 앉은자리에서 백 쪽 정도를 쭉 읽었다. 실제로 1973년 칠레에서 발생한 ‘피노체트 쿠데타’가 이들의 대화 속에서 스치듯 지나가는데, 단순한 배경이라기보다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의 결도 어딘가 이 사건 이후의 공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는 혼자만의 추측을 해 본다.
화자가 고백하길, 자신은 자세히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미 나는 ‘충분히’ 자세한 이야기 한가운데에 있다. ㅋㅋㅋ
오르한 파묵 《하얀 성》, 《새로운 인생》
이제 앞으로 겨울이면 더 생각날 오르한 파묵. 작년에 《눈》을 읽고 홀딱 빠졌다는 재탕 삼탕의 말을 또 해야겠다. 너무나 좋았던 첫 만남 덕분에 최근 《내 이름은 빨강》까지 만날 수 있었고, 몇 권 더 품에 들였다.
한동안 나는, 명확하게 들려주는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였다. 분명 듣고 싶은 목소리가 있었을 테지.
내게도 차츰차츰 조금씩 변화는 찾아오더라. 지금의 나는 이전처럼 또렷한 문장을 찾기보다, 오래 머무는 문장을 더 오래 바라보게 되었다. 의미를 단번에 건네받기보다는, 그 의미 주변을 맴도는 시간을 견딜 수 있게 되었다고 하면 너무 뜬구름 잡는 사람처럼 보이려나? 후훗. 어쨌든 요즘은 선명한 목소리보다, 눈 내리는 날 창밖처럼 흐릿한 이야기들에 더 오래 시선을 두게 된다.
오르한 파묵의 소설 속 인물들은 어딘가에 완전히 발붙이지 못한 채 떠다니고 있는 사람들처럼 보일 때가 많다. 그게 그렇게 내 마음을 붙든다. 이유를 다 말하지 못한 채로, 그저 오래 남는 것들처럼.
작년 오늘, 김연수의 문장을 따라 ‘반 발짝’ 나아갔다고 믿었던 내가 그랬듯, 지금의 나도 이 아홉 권의 책들 사이를 헤매며 나만의 보폭으로 기분 좋게 걷는 중이다. 새 책을 만지작거리며 아직은 확실히 이해하지 못한 채 조금씩 다가가는 기분, 난 이 기분이 참 좋다. 날 선 시선, 서정적인 여운, 예리한 통찰... 이토록 다양한 감정들을 조금씩 느껴볼 수 있었던 기분 좋은 시간 역시 참 좋다.
앗! 글을 닫기 전 작년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보내온 메시지 같은 밑줄을 다시 한번 꺼내 본다. 이 문장 하나 슬쩍 남겨두고 이제 정말 마무리 지어야겠다. 김연수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 나온 한 구절이다.
“시간의 끝에,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이르렀을 때 이번에는 가장 좋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