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이 일제고사 반대하면 퇴학?”

 이성희기자 mong2@khan.co.kr

똑 부러졌다. 앳된 얼굴이었지만 일제고사에 대한 반대 의사는 분명했다. 일제고사 반대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퇴학 위기에 놓인 정재호군(18·백암고 2학년). “잘못한 게 없으니 당당하다”는 그는 22일 저녁에도 ‘부당징계 철회· 일제고사 중단’ 촛불을 들었다.





-“일제고사 반대운동 하지않겠다는 서약서 요구”-

정군의 일제고사 반대활동이 문제(?)된 것은 지난 10월 처음 실시되는 일제고사를 앞두고 서울 오류중학교 앞에서 유인물을 나눠주는 것을 체육교사가 봤던 것. 거기다 일제고사를 보는 학년은 아니었지만 학생을 일렬로 줄 세우는 교육정책에 반대하기 위해 등교거부를 한 것이 발단이 됐다. 학교 측은 진술서를 요구했고 ‘또 일제고사 반대운동을 할 때는 퇴학을 시키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그는 일제고사 반대운동은 멈추지 않았다. 지난 19일 일제고사에 반대하는 청소년 모임인 ‘Say No’를 도와 자신의 학교 앞에서 유인물을 나눠주다 담임교사에게 적발됐다. 정군에 따르면, 당시 다른 친구들이 있는 앞에서 ‘홍보활동을 그만두지 않으면 퇴학을 시키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또 학교 측은 ‘일제고사 반대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라’고 요구했다. 시위 선동이 징계 사유였다.

“일제고사를 반대하고 알리는 게 청소년이 해야 할 의무이자 권리라고 생각해요. 청소년은 마음껏 뛰어놀고 원하는 것을 해야 하는데, 일제고사와 영어몰입식 교육 때문에 더 심한 경쟁체제에 내몰리고 있잖아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못하고 부모님이나 학교, 학원 등에 속박돼 있는 상황인 거죠.”

이날 정군은 결국 서약서를 쓰지 않았다. 대신 ‘일제고사 반대활동에 대한 반성을 할 것이 없다’는 반성문 아닌 반성문을 작성했다. 이에 따라 학생부 교사들이 주축이 된 징계위원회가 구성돼 곧 징계 여부가 결정될 예정이다. 일제고사 대신 현장체험학습을 허락했다는 이유로 교사들이 파면·해임됐지만, 학생이 징계위기에 놓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선생님들을 징계했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도 참 답답했어요. 일제고사를 볼지, 체험학습을 갈지 선택권을 준 것 뿐인데 그걸로 징계한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교사·학생 1000여명이 지난 17일 저녁 촛불을 들고 서울 신문로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일제고사 대신 체험학습을 허용한 7명 교사의 파면·해임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서약서를 쓰지 않은 것도 ‘또 다른 시작’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부당하다고 생각한 것도 있지만, 제가 서약서를 쓰면 곧바로 다른 학교 친구들의 일제고사 반대활동도 문제 삼을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저와 학교의 문제가 아니에요. 이명박 대통령과 공정택 교육감, 그리고 이들의 교육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의 문제인 거죠.”

-해임교사 “교사 징계보다 가혹”-

아직 징계여부가 결정된 것은 아니지만 정군은 이미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다. 퇴학처분이 내려지더라도 일제고사 반대활동을 계속할 생각이다. 일제고사 때문에 징계를 받은 교사들이 ‘출근투쟁’을 하듯, 자신은 ‘등교투쟁’을 할 계획이다.

일제고사 사태로 파면통보를 받은 송용운 교사(선사초)는 정군의 소식을 듣고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분개했다. 함께 소식을 전해들은 촛불문화제 참가자들도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일제고사가 정착되면 전국의 학생들이 무한 경쟁시대에 돌입하게 됩니다. 당사자인 학생들이 일제고사를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거죠. 그런데 일제고사 반대의사를 표현했다고 퇴학을 운운한다는 것은 교사들을 파면·해임한 것보다 심각한 수준입니다. 지금 당장 중지해야 합니다.”

정군의 꿈은 청소년 인권활동가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고사 반대운동을 더욱 그만 둘 수 없다. 그는 일제고사를 “멍청한 짓”이라고 잘라 말했다. 일제고사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아이들과 징계를 받은 교사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안다면 이렇게 무리하게 추진할 수는 없을 것이라며 “누구를 위한 교육정책이냐”고 반문했다.

그는 중학교 1, 2학년을 대상으로 ‘전국 시도연합 학력평가’가 열리는 23일에도 일제고사 반대운동에 ‘올인’한다. 이날 오전부터 등교거부를 시작으로 촛불문화제가 열리는 저녁 때까지 ‘일제고사 반대’를 외칠 계획이다.

<이성희기자 mong2@kh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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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얼굴없는 천사’ 9년째 선행

 전주 | 박용근기자


ㆍ10차례에 걸쳐 총 8110만원 놓고 사라져

전북 전주에 해마다 나타났던 ‘얼굴 없는 천사’가 올해도 사랑을 전했다.



23일 오후 1시 전북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30대 후반으로 짐작되는 남자는 “지하 주차장 옆 화단에 가보면 박스 하나가 있으니 가져가라”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얼굴 없는 천사임을 짐작한 주민센터 직원이 화단에 가보니 복사용지 박스가 놓여 있었다. 박스 안에는 1만원짜리 100장 묶음 20뭉치와 동전 38만원 등 2038만1000원이 들어 있는 저금통이 있었다.

박스 안에는 ‘소년소녀가장 여러분 힘내세요’라는 메모지도 들어 있었다.

전주시 노송동에 얼굴 없는 천사의 선행이 시작된 것은 2000년 4월. 당시 중노2동사무소를 찾은 ‘천사’는 58만4000원이 든 돼지저금통을 놓고 조용히 사라졌다. 이렇게 올해까지 9년 동안 10차례에 걸쳐 전달된 성금은 모두 8109만7200원에 이른다.

해마다 선행이 되풀이되면서 얼굴 없는 천사가 누구인지 궁금증을 자아냈지만 전화 한 통으로 돈이 놓인 장소만 알려주고 사라지는 바람에 얼굴은 물론 이름, 나이도 모른다.

추측도 무성하다. 신원을 밝히기 곤란한 과거 ‘폭력배’나 인근 ‘집창촌 포주’일 것이라는 설이 나도는가 하면 신앙심이 깊은 성공한 사업가일 것이라는 말도 있다. 전주시민들은 이런 추측과 무관하게 ‘얼굴 없는 천사’로 부르며 흐뭇해 하고 있다.

<전주 | 박용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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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일제고사 전북 일부 학교 거부

 임지선·전주 | 박용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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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교과부, 체험학습 무단결석 처리… 갈등 커질듯, 교육학자 142명 “줄세우기식 평가 중단” 성명

중학교 1, 2학년을 대상으로 한 학력평가가 23일 전국에서 일제히 실시됐다. 전북지역 일부 학교는 학력평가를 치르지 않았으며 일부 학부모 단체와 학생들은 체험학습에 참여해 교육당국과 마찰을 빚었다.



중학교 1, 2학년을 대상으로 23일 치러진 일제고사 대신 체험학습을 선택한 서울지역 학생과 학부모들이 서울 덕수궁 앞으로 모이고 있다. |김창길기자

교육당국은 평가 거부를 목적으로 체험학습을 승인해준 교장·교사가 있을 경우 중징계하고 체험학습을 떠난 학생은 무단 결석처리한다는 방침이어서 갈등은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시험은 전국 중학교 1, 2학년생 135만여명을 대상으로 국어·영어·수학 등 5개 과목에 걸쳐 치러졌다. 교육과학기술부가 주관한 지난 10월 초등학교 3학년 대상 기초학력 진단평가와 초6·중3·고1 대상 학업성취도 평가와 달리 이번 시험은 전국 시·도교육감협의회 합의에 따라 서울시교육청이 출제를 담당했다.

전북지역에서는 장수중이 학교운영위·교직원회의 등을 거쳐 시험을 거부, 정상수업을 진행했다. 체육 특목중학교인 전북체육중과 대안학교인 지평선중은 시험을 치르지 않았다. 앞서 전북도교육청은 각 학교에 공문을 보내 일제고사 응시 여부를 물어 ‘시험 거부를 허용한 것 아니냐’는 논란이 빚어졌다.

시험을 거부한 전국의 중 1, 2학년생은 40명가량인 것으로 파악됐다. 서울·경기지역에서는 20여명의 중 1, 2학년생들이 평등교육실현전국학부모회 주도로 덕수궁 미술관으로 체험학습을 떠났다. 경북에서도 중 1, 2학년생 17명과 학부모들이 경주 안압지 등에서 체험학습을 진행했다. 교과부는 이날 체험학습을 가거나 평가를 거부한 학생은 모두 36명이라고 발표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소속 교사들은 이날 오전 검은옷을 입고 출근하는 ‘블랙 투쟁’을 벌여 일제고사에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경기지역 200여개 학교에서는 교사들이 일제고사에 반대하는 1인 시위를 벌였다.

중도·진보성향의 교육학자 142명은 성명을 통해 “입시경쟁을 부추기는 학생 줄세우기식 평가를 중단하고 일제고사 거부를 유도했다는 이유로 교사들에게 내린 중징계 결정을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성명에 동참한 경희대 교육과정학과 성열관 교수는 “교육 소외지역에 대한 어떠한 정책적 배려와 지원책도 마련해 주지 않고 시행되고 있는 학력평가는 과열입시경쟁 체제와 사교육 광풍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말했다.


<임지선·전주 | 박용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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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맘이 행복한 취리히 [2008.12.19 제740호]
 
[체험! 살기 좋은 대도시 ①]
기자가 홈스테이로 들여다 본 도시의 삶… 다니엘 가족이 여유로운 까닭은?
 
 
 
박수진


 
 

한국은 경제대국으로도 손꼽히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나라들 가운데 최고의 노동시간과 자살률로도 악명 높다. 수도인 서울은 특히 높은 인구밀도와 개발의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기도 하다. 경제 불황의 여파로 도시에서의 삶은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다. 도시의 삶의 질이 더욱 아쉬워지는 때다.

<한겨레21>은 이번호부터 ‘삶의 질’ 평가에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대도시 네 곳을 찾는다. 우리보다 나은 대도시 삶의 양식은 어떠한지, 그런 삶은 어떻게 가능한지를 탐구하기 위해 기자가 직접 현지 가정에 ‘홈스테이’를 하면서 해당 도시민의 삶의 결을 들여다봤다.

첫 번째 방문지인 스위스 취리히는 매년 세계 대도시의 삶의 질을 비교 평가하는 ‘머서휴먼리소스컨설팅’사가 2007년 최고로 꼽은 도시다. 13위를 차지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과 38위의 영국 런던, 아시아에서 수위를 차지한 싱가포르(34위)·도쿄(35위)도 찾아간다. 서울은 86위에 그쳤다. 지구촌 시대 다른 대도시의 높은 삶의 질, ‘어떻게’부터 ‘왜’까지의 세계로 독자를 안내한다. 편집자


 
 


» 다니엘이 12월4일 저녁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만들기 놀이를 하며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부모의 짧은 노동시간은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을 늘리는 결과로 나타난다.
 
 
 


“와, 그리티반츠는 잘돼가고 있어?”

12월5일 금요일 저녁 8시30분. 스위스 취리히의 제바흐 지역에 사는 다니엘 게이트링어(43)가 큰딸 야나(13)와 함께 현관문을 열면서 외쳤다. 집에서 차로 20분쯤 걸리는 아폴턴에서 승마를 하고 온 뒤다. 둘째 티모(11)와 막내 릴리아(7)는 아빠 베아트(46)와 함께 그리티반츠를 구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티반츠는 사람 모양의 빵이다. 다음날인 6일은 스위스 전통 명절 산타클로스 데이다. 스위스에서는 산타클로스가 이날 방문한다. 전날엔 산타에게 줄 선물로 온 가족이 모여 그리티반츠를 굽는다. 우리나라에서 추석 전에 송편을 빚는 것과 비슷하다. 다니엘은 평소와 다름없이 금요일마다 승마를 하느라 조금 늦었다.






다니엘은 세 아이의 엄마이자 직업여성이다. 취리히를 포함해 12개 도시가 속해 있는 취리히주(Canton Zurich) 정부에 소속된 사회복지사다. 다니엘의 표정에는 여유가 넘친다. 세 아이를 키우고 일을 하고 집안일까지 하느라 헉헉대는 느낌이 없다. 월요일과 금요일 이틀은 2시간씩 승마를 한다. “말을 타고 달리면 일주일 동안 쌓인 피로가 확 풀려요. 정신이 맑아지죠. 다음 한 주를 사는 동력이 되고요.” 다니엘이 말했다.


데이케어센터와 근무시간 조정


세 아이를 둔 일하는 엄마. 한국에서는 듣기만 해도 버거운 이 단어가 취리히의 다니엘에게는 어떻게 가벼운 걸까. 우선 학교 안에 있는 데이케어센터가 큰 도움이 된다. 데이케어센터는 두 종류가 있다. 아이들이 점심 시간을 보내는 ‘미탁쇼트’와 아침 7시부터 오후 5시30분까지 아이들이 머물 수 있는 ‘타게쇼트’다. 스위스 아이들은 오전 수업이 끝나면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온다. 이때 부모가 모두 일해 집에 없거나 집에 가도 먹을 것이 없는 아이들은 미탁쇼트에서 점심 식사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타게쇼트는 수업이 끝난 뒤 오후 5시30분까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사회복지사 선생님과 함께 숙제를 하고 책을 읽거나 게임 등을 한다. 스위스의 모든 초등학교에 설치된 데이케어센터는 시에서 운영한다. 사회복지사들도 취리히 시청에 속해 있는 직원들이다.

집 뒤에 있는 초등학교인 콜베나케에 다니는 릴리아와 티모도 타게쇼트를 이용한다. 릴리아의 학교에는 모두 9개 데이케어센터(미탁쇼트와 타게쇼트 포함)가 운영되고 있다. 전교생 380여 명 가운데 200여 명이 데이케어센터를 이용한다. 한곳에 많은 아이들이 모여 있는 게 아니라 20명 정도씩 나눠서 돌봐진다. 데이케어센터의 가격은 가계 소득 수준에 따라 결정된다. 하루에 10프랑에서 100프랑 사이다. 다니엘 가족은 하루에 60프랑을 낸다.

학교가 가깝다는 점도 엄마·아빠에겐 큰 이득이다. 취리히시는 학교의 접근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거주지와 인구 등을 파악해 어린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는 10분 이내에 갈 수 있는 곳에 짓고 있다. 그래서 면적 4.72㎢의 제바흐에는 초등학교가 5개 있다. 릴리아와 티모가 다니는 콜베나케도 집 바로 뒷골목에 있어서 후다닥 뛰어가면 1분, 걸어가도 2분이면 충분하다. 다니엘은 “학교가 가깝고, 학교 안에 데이케어센터가 있어서 일하는 중에 아이들을 많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좋다”고 말했다.

여기에 일하는 시간도 조정했다. 다니엘은 월요일에는 6시간, 화요일과 목요일엔 8시간씩 일한다. 스위스의 대부분 회사들은 하루 8시간씩 주 5일 근무를 100% 일하는 것으로 본다. 다니엘은 이 중 55%만 일하는 셈이다. 스위스에서는 근로계약을 할 때 근로 시간을 50~100% 사이에서 조정할 수 있다. 사정에 따라 유연하게 일하는 시간을 정하기 때문에 일자리는 많고, 삶의 질도 높아진다. 다니엘은 티모와 릴리아가 모두 낮 12시에 수업을 마치는 수요일을 일하지 않는 날로 정해 이날 집안일도 하고 아이들 숙제도 봐준다. 대신 6시간만 일하는 월요일과 일하지 않는 금요일에는 취미인 승마를 중요한 스케줄로 잡아뒀다. 다니엘의 이웃 마르쿠스 베만(43·남)도 6살, 8살 난 두 아이와 놀아주기 위해 일주일에 80%만 일한다. 금요일에는 아이들과 갤러리나 박물관 등 전시회에 가거나 지역문화센터에 간다. 이번주 금요일에는 지역문화센터에 가서 크리스마스 때 쓸 촛불을 직접 만드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다니엘을 비롯해 취리히의 학부모들은 이렇게 일하는 시간을 조정하고 시에서 제공하는 데이케어센터의 도움을 받아 일과 여가, 일과 가정생활을 조화롭게 운영한다. 워킹맘인 다니엘의 여유는 이런 다양한 사회적 조건 덕에 만들어진 것이다.


대학 진학률 10~20%, 시험 없는 학교

 
 


» 다니엘 가족이 12월5일 저녁 다음날 먹을 그리티반츠를 만드느라 여념이 없다(맨 위). 초등학교마다 설치된 데이케어센터는 낮 시간 아이들의 보육을 책임진다(가운데). 다니엘의 남편 베아트가 아들 티모와 함께 집 근처 강가를 거닐고 있다. 풍부한 자연환경은 쾌적한 삶을 즐기는 데 필수적이다.
 
 
 


아이들도 학교가 끝나면 다양한 취미를 즐긴다. 티모와 릴리아는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수영을 하러 동네 수영장에 간다. 악기도 배운다. 티모는 매주 수요일 기타를 배우고, 김나지움(중·고등학교가 합쳐진 교육과정)에 다니는 야나는 월요일에 피아노를, 금요일에는 승마를 한다. 세 아이는 수업이 없는 토요일에는 다 같이 가라테를 배우러 도장에 간다. 토요일에는 취리히 시청 사회복지과 공무원인 아빠 베아트가 아이들을 도장에 데려다준다. 그러고 나서 베아트는 도장에서 2km 떨어진 곳에 있는 이르헬 공원에서 조깅을 한다. “이르헬대학 캠퍼스에서 뻗어나온 공원이에요. 둘레가 4~5km 정도 되는데 잘 조성돼 있어 달리기에 좋아요.” 베아트의 취미는 여행과 조깅이다.

아이들과 부모가 자유롭게 여가를 보낼 수 있는 것은 교육환경의 덕도 크다. 스위스는 한국처럼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모두가 시험을 통해 경쟁하지는 않는다. 대학 진학률도 10~20% 정도다. 정말 대학 공부가 필요한 아이들만 대학에 간다.

교육제도나 일하는 방식 등은 지역별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유럽 안에서는 대체로 비슷하다. 그런데 유독 취리히의 삶의 질이 높은 건 왜일까. 베아트는 “편리한 교통, 지역 어디에서나 도심으로의 접근성이 높은 점 등이 취리히의 삶의 질을 높인다”고 말했다. 베아트 가족이 살고 있는 제바흐는 취리히시 북쪽 끝에 해당한다. 오각형 모양에 가까운 취리히시의 오른쪽 끝 모서리다. 시 외곽 공항까지 1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제바흐에서 각종 문화와 쇼핑 공간 등이 집중된 취리히 도심까지는 트램(전차) 한 번이면 족하다. 14번 트램을 타면 21분 만에 중앙역에 도착한다. 이것은 취리히시 어느 권역에서나 마찬가지다. 중앙역을 중심에 두고 방사형으로 13개 트램과 각종 버스, 전철인 에스반이 모세혈관처럼 촘촘하게, 그러나 체계적으로 퍼져 있기 때문이다. 공장 등이 많아 ‘노동자들의 방’이라는 콘셉트를 가진 취리히 서부 지역에서도, 부자들이 주로 산다는 취리히 남쪽 취리히버그 지역에서도 도심까지 가는 데 3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베아트는 직장 근처인 도심 베르트 지역에 살다 좀더 싼값에 더 좋은 집을 구하기 위해 외곽 지역인 제바흐로 이사했다. 그는 “취리히도 도심으로 갈수록, 또 강변을 둘러싸고는 집값이 굉장히 비싸요. 부촌과 그렇지 않은 동네의 구분이 분명히 있어요. 그런데 베르트에 사는 것과 이곳 제바흐에 사는 게 크게 다르지 않아요. 그것이 취리히의 장점이죠. 각 지역의 특색은 그대로 있으면서 편리한 대중교통을 줄기로 모든 지역이 원활히 소통된다는 점이 장점”이라고 말했다.


집 앞 공원, 길 건너 공공 수영장


이런 장점을 취리히시에 사는 거주자들은 충분히 활용한다. 여가 시간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도시를 200% 활용한다. 베아트 가족은 한 달에 두 번쯤은 트램을 타고 중앙역에 간다. 중앙역 근처 극장에서 아이들과 영화를 보기 위해서다. 박물관에서 하는 전시 목록을 살펴본 뒤 국립박물관에 가기도 한다. 여름이면 전세계 각지에서 관광객이 몰려드는 강가에서 아이들과 함께 햇볕을 쬐며 수영을 즐긴다.

이 모든 것들은 집 근처에서도 가능하다. 집 근처에는 자연환경이 풍부하다. 베아트의 집에서는 길을 건너 3분 정도 걸어가면 공공 수영장이 나온다. 수영장 옆으로는 6천 평 정도의 잔디밭이 펼쳐져 있다. “여름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수영장으로 나와요. 자연스럽게 이웃들이 누가 있는지 알게 되죠. 그렇지 않으면 사실 이웃과의 교류는 없는 편이고요.” 이 수영장이 지겨울 때면 자전거를 타고 10분쯤 거리에 있는 고양이 호수(Katzensee)에 가기도 한다. 이곳엔 나무가 잘 조성된 숲이 있다. 샌드위치 등을 싸 가서 돗자리를 펴고 수영을 즐긴다. 문화시설도 많다. 제바흐역에서 두 정거장을 가면 있는 외어링콘에서는 각종 전시회와 스포츠 경기 등이 열린다. 외어링콘에는 할렌스타디움이 있어 스위스 테니스 오픈이 매년 4월 이곳에서 열리고 하키 경기도 자주 열린다. 겨울에는 아이스쇼가 펼쳐진다.

12월6일에도 아이들의 가라테가 끝난 뒤 베아트는 중앙역 근처로 가서 티모와 함께 크리스마스 선물을 골랐다. 다니엘과 릴리아와 야나는 팝아티스트 자클레티의 전시를 보러 갔다.

12월14일에는 취리히 도심 1.5km를 달리는 ‘도시 달리기 대회’에 참가할 예정이다. 취리히 시청은 매년 12월 둘쨋주 일요일마다 도시 달리기 대회를 열어왔다. 가족 단위로 참가할 수 있는 취리히의 전통적인 행사다. 이 대회는 직경 8.7m로 세계에서 가장 큰 시계가 있는 성피터 교회, 샤갈이 죽기 전 선물한 스테인드글라스를 볼 수 있는 프라우뮌스터 교회 등이 있는 리마트강 일대를 한 바퀴 돈다. 베아트 가족은 3년 전부터 이 경주에 참가해왔다. 그동안은 늘 참여하는 데 의의를 뒀지만 이번에는 순위권 안에 들고 싶은 게 베아트의 욕심이다. 12월만 되면 다른 운동은 모두 좋아하면서 유독 달리기만 싫어하는 아이들을 붙잡고 “연습하자”고 조른다. 다니엘은 “취리히 사람들은 여름에는 절대 안 달려요. 여름에는 모두 호수로 풍덩풍덩 빠져들죠. 겨울이 돼야 그나마 달려요”라고 말했다.

12월6일 토요일 저녁에는 50km 떨어진 시골에 사는 할머니가 올라왔다. 베아트 가족은 전날 만든 그리티반츠 등 쿠키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주요 화제는 내년 여름 휴가다. 베아트 가족은 거의 매년 여름에 국외로 여행을 간다. 지난해에는 스페인, 올해는 모로코에 다녀왔다. 스웨덴 스톡홀름에서의 요트 여행도 기억에 남는다. 현관에는 베아트 가족이 각 여행지에서 주워온 돌들이 전시돼 있다. 추억의 장소이자 가족 전시관이다. 릴리아가 이번에 모로코에서 주워온 동물 발자국이 찍힌 돌을 가져와 할머니에게 보여준다. “이건 공룡 발자국일지도 몰라요.” 눈을 크게 뜨고 릴리아가 말했다. 그렇게 산타클로스 데이의 밤이 깊어갔다. 베아트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삶을 즐기는 것, 행복하게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런 인생관은 그가 사는 도시와도 무관하지 않아 보였다. 도시가 제공하는 다양한 갈 곳, 볼 것, 할 것 등의 영향을 받아 그는 한결 풍부한 삶을 살고 있었다.




 



낙후지역 개발 정책

비싼 집값을 잡아라


베아트가 원래 살던 곳은 취리히 도심 한가운데였다. 직장이 있는 베르트 부근에서 살던 그는 11년 전 둘째 티모가 생기면서 기존의 방 세 개짜리 1층 집보다 더 크고 좋은 집이 필요했다. 도심의 집값은 너무 비쌌다. 결국 베르트를 지나는 14번 트램 구간의 외곽에서 찾은 곳이 지금 살고 있는 제바흐다. 당시 집 가격은 90만프랑(11억여원). 지금은 이곳도 가격이 갑절가량 올랐다.

도심의 비싼 집값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취리히시는 어떤 정책을 취할까. 취리히시는 도시 곳곳을 면밀히 살펴 노후하거나 이미지가 나빠져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지역에 사람들이 다시 유입되도록 하는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도심 한가운데 있는 질강 부근이 대표적이다. 리마트강은 반호프역 앞에 있는 스필츠 광장에서 둘로 갈라지는데, 하나는 리마트강, 다른 하나는 질강이다. 13~14세기부터 리마트강 주변에는 프라우뮌스터 성당, 그로스뮌스터 성당 등 성당이 들어섰고, 17~18세기에는 은행들이 들어서면서 금융·산업·문화의 중심지가 됐다. 쿤스트하우스(취리히 미술관), 오페라하우스, 시청, 시의회 등 도시의 중요한 건물들도 대부분 이 리마트강 주변에 자리잡았다. 반면 질강 주변에는 비교적 싼값에 물건을 살 수 있는 가게들과 값싼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지나가다 보면 고치거나 보수가 필요한 낡은 집들이 더러 눈에 띈다. 취리히 도시계획국은 이 질강 주변의 노후한 건물들을 정책적으로 보수하고 있다. 이 작업은 그동안 군부대여서 개발되지 못했던 부지의 재개발과 맞물려 진행 중이다. 이 부지에 학교, 은행, 노인을 위한 거주단지 등을 짓고, 나머지 40% 부지에는 개인 사업자들이 짓는 아파트를 조성할 방침이다. 리마트 강변과 맞먹는 주변 환경을 가졌으면서도 비싸지 않은 주거단지로 개발하는 게 목표다. 현재 여러 건축가 등에게 아이디어를 받는 공모가 진행되고 있다.

제반 지역도 마찬가지다. 이곳은 외부에서 취리히로 들어오는 대부분의 차량이 이용하는 고속도로가 지난다. 고속도로 소음으로 이주율이 높은 지역이었다. 취리히시는 또 다른 고속도로를 만듦으로써 소음 문제를 해결했다. 프란츠 에버하드 도시계획국장은 “차량이 줄어들면서 제반 지역의 삶의 질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취리히(스위스)=글·사진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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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물 같은 내 인생 [2008.12.19 제740호]
 
경제 종착역에 밀어닥친 불황 한파…
고물상 이향종(40)씨, 고물 수집상 이정오(55)씨, 고물 줍는 김순남(75)씨 스토리
 
 
 
▣ 안수찬 임주환 김정효


 
 

지난 12월10일 아침 8시, 부산 강서구 대저동 고물상 업주 김아무개(42)씨가 자신의 굴착기에 밧줄로 목을 매 자살했다. 현장에 남겨진 유서에는 “빚을 갚지 못해 채권자들에게 미안하다. 아내에게 고생만 시켜 미안하다”고 적혀 있었다. 김씨는 고철값 폭락으로 많이 힘들어했다고 주변 사람들은 전했다.

고물상을 짓누르는 것은 한국 경제의 구조적 위기다. 건설업과 제조업에 깊은 불황이 닥쳤다. 생산활동이 줄면서, 생산의 흔적인 고물도 사라졌다. 고물값이 폭락했고 고물상들은 생존의 위기에 처했다. 골목을 뒤져 고물을 줍던 노인들도 끼니 걱정을 하고 있다. 벼랑에 내몰린 ‘고철 인생’에는 한국의 경제사도 깃들어 있다. 이들 대부분은 60년대 이후 경제개발 시대를 떠받쳤던 노동계층이었다. 나이가 들어도, 세월이 바뀌어도 이들의 빈곤은 여전하다.

현대제철을 비롯해 크고 작은 제조업체가 밀집한 인천은 고철 인생이 모여사는 곳이다. 공장이 문을 닫고 고물상이 망하고 고물 줍는 노인들이 추운 겨울 거리를 헤매는 인천을 밀착취재했다. 고철 산업의 하층을 이루는 이들이 지난 반세기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대·중·소 규모의 고물상이 어떻게 서로 물고 물리며 불황에 신음하는지, 그리고 제철·제강업계를 주도해온 대기업들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3가지 층위의 이야기를 통해 경제위기 구조의 한 단면을 들여다봤다. 편집자


 
 


» 한 할머니가 지난 12월10일 인천의 한 고물 수집상에서 리어카에 실어온 폐지와 고물을 부려놓고 있다.
 
 
 


12월10일 오전 10시35분, 인천 서구 가좌동


1t 트럭에 시동을 건다. 동네 작은 고물가게들을 돌아다닐 시간이다. 백미러에 매달린 작은 십자가가 부르르 몸을 떤다. 사람들은 그를 고물상이라 부른다. 4년 전까진 마을버스 기사였다. 10년 전엔 택시 기사였다. 22년 전엔 농고 기계과 학생이었다. “아니, 그랬던 분이 어쩌다 고물상이 됐어요?” 이런 질문을 그는 들어보지 못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향종(40)씨를 고물상이라 부른다.



고물 종류가 많은 걸 사람들은 모른다


그가 모는 트럭 조수석에도 고물이 있다. 커피가 까맣게 말라 굳은 일회용 종이컵, 딸기 과즙이 들어 있던 우유팩, 별이 은하수를 이룬 사이다캔이 뒤섞여 있다. 일하다 가끔 마신 음료수의 흔적이다. 설탕물이 비릿하게 썩는 냄새가 난다. 고물이 수북이 쌓일 때까지 오른편 문은 열리지 않는다. 나중에 그것들을 모아 270평 공장의 한구석으로 옮길 것이다.

그는 ‘공장’이라 부르고 사람들은 ‘고물가게’라 부르는 곳에는 작은 산맥이 있다. 물랭이산, 따데기산, 신쭈산, 스땡산, 고철산, 생철산, 파지산이다. 연한 플라스틱을 ‘물랭이’라 부른다. 딱딱한 플라스틱은 ‘따데기’다. 그걸 주워모으는 할머니들이 이름을 지어 붙였는데, 고물상들도 따라 그렇게 부른다. 이씨는 물랭이와 따데기 말고도 낡은 고철과 윤나는 생철을 구분해 쌓는다. 비철 중에도 수도꼭지처럼 값나가는 신주(황동)와 냄비처럼 흔한 스테인리스를 따로 모아야 한다. 많은 종류의 고물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그것들이 그의 눈에는 밟혔다. 부평역에서 계산역까지 마을버스를 모는데, 골목마다 고물이 쌓여 있었다. 일을 마치면 그것들을 주우러 다녔다. 마을버스를 몰며 한 달에 130만원을 벌었다. 고물을 팔면 하루에 몇만원씩 들어왔다. 대통령 탄핵을 반대한다며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던 2004년, 그도 운전대를 놓고 거리로 나갔다. 고물상 일을 시작했다.

그의 삶은 전쟁이다. 이긴 적은 별로 없지만, 모든 것을 잘 참아왔다. 땅을 빌려 고물상을 열었더니 공무원들이 나왔다. 민원이 들어온다고 했다. 냄새가 난다고 했다. 길 건너 주택가에서는 고기 굽는 냄새가 났다. 어느 날엔 산처럼 쌓아둔 고물이 몽땅 불탔다. 누가 불을 냈는지도 모른 채, 그 재를 치우느라 구청에 돈을 냈다. 그래도 이씨는 잘 참았다. 아침 6시에 일어나 밤 10시에 집에 들어갔다. 신용보증기금에서 5천만원을 빌려 공장 터를 다시 잡았다. 인천·부천을 거쳐 영종도 공항까지 돌아다녔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이씨도 참기 힘들다. 9월이 지나면서 모든 고물값이 떨어졌다. 1kg에 600원 하던 고철이 지금은 100원이다. 9월 이후 고철 거래는 완전히 끊겼다. 1kg의 파지를 30원에 사서 35원에 내다판다. ‘5원 떼기’ 장사다. 3t을 사고팔면 1만5천원이 남는다. 파지 장사로는 월 30만원을 겨우 번다. 공장세만 한 달에 170여만원이다. 감당이 안 된다.

스티로폼을 압착한 뒤 떡처럼 뽑아내 재생원료로 파는데, 그 돈으로 겨우 세를 낸다. 스티로폼은 무게가 나가지 않는다. 압착하려면 기술도 필요하다. 스티로폼을 다루는 고물상은 많지 않다. 이씨는 다행이라 생각한다. 근처 항구에서 나온 스티로폼 박스에서는 생선 비린내가 많이 난다. 압착할 때 스티로폼 타는 냄새도 비릿하다. 그래도 여기는 공장 지대라 냄새 난다고 민원 넣는 사람은 없다.


대운하를 파면 고철을 내다팔 수 있을까


소일 삼아 고물을 줍던 외환위기 때는 어려운 줄 몰랐다. 거리에 고물이 많이 나왔다. 카드 대란이 났을 때도 돌려 막아가며 버텼다. 이번에는 다르다. 같이 일하던 5명의 일꾼을 한 달 전에 내보냈다. 없는 사람끼리 서로 형편 봐주며 살아야 하는 법이다. 그냥 내보내지 않고 사정이 나은 다른 고물상 자리를 소개해줬다. 일꾼들이 몰던 1.4t 트럭도 한 대 팔았다. 한 달에 50만원씩 내던 지게차 임대료는 5만원 깎았다. “이제 안 쓸랍니다.” 이씨의 말에 지게차 주인은 군말 없이 가격을 낮췄다.

달리 직업이 없는 형님 내외를 불렀다. 형님한테는 200만원, 형수님한테는 100만원씩 월급을 준다. 대신 이씨는 지난 두 달 동안 아내에게 10만원을 갖다줬다. 중학교 2학년, 초등학교 5학년인 두 아들을 키우는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돈 있는 사람은 버티고 돈 없는 사람은 나앉는 수밖에 없다고 이씨는 아내에게 말했다. “이건 마비야. 예고 없는 타격이지. 위에 있으면 잘 모르겠지만, 우리 밑바닥 인생들은 금방 알잖아.”


 
 


» 이향종씨: “이건 마비야. 예고없는 타격이지. 위에 있으면 잘 모르겠지만, 우리 밑바닥 인생들은 금방 알잖아.”
 
 
 

아침마다 기도하고 집을 나서는 이씨는 매일 천국을 생각한다. 그의 천국은 제주도에 있다. 고물을 모으며 따로 챙겨둔 골동품들이 있다. 옛날 미싱, 옛날 장난감, 옛날 일본칼, 옛날 소화기도 있다. 그걸 모아 제주도에 박물관을 열 것이다. 제주도에는 그런 걸 좋아하는 일본 관광객들이 많이 온다. 박물관을 열면, 일본 사람들은 이씨를 고물상이라 부르지 않을 것이다.

혹시 대운하를 파면 고철을 내다팔 수 있지 않을까, 이씨는 생각한다. 지난봄에 1천만원을 주고 사들인 고철 50t의 산에서 녹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이씨와 고향이 같은 정동영 민주당 대선 후보의 친구 되는 목사님의 아버님이 이씨의 옆집에 살았지만, 그는 지난 대선 때 이명박 후보를 찍었다. 운하 사업을 하면 경제가 나아진다는 말을 믿었다.

그러나 고향이 다른 것보다는 처지가 다른 게 문제였다. 대통령은 수출해서 나라를 세운 것처럼 말한다. 이씨는 밑바닥 사람들이 차곡차곡 고생해서 이만한 나라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돈 있는 사람들은 밑바닥 사람들 코빼기도 신경쓰지 않는다고 이씨가 말하는데, 밑바닥 동생에게 잠시 의탁하고 있는 형님이 장갑을 벗으며 다가온다. “점심 먹고 해야지.” 이씨 형제는 500원짜리 빵과 흰 우유를 하나씩 먹었다.


12월10일 오후 4시06분, 인천 부평구 십정동


마음에 드는 일만 일어나길 바랄 순 없는 노릇이다. 11월14일에 중간판매업자가 와서 집게차로 파지 2t을 실어갔다. 2만원이 이문으로 남았다. 이정오(55)씨가 한 달 동안 딱 그만큼 벌었다고 장부에 적혀 있다. 낡은 장부 표지에는 날래고 용감한 옛날 만화 주인공이 그려져 있다. 정의의 용사는 그날 이후 이씨의 고물가게를 찾아오지 않았다.

얼마 전 고물상협회 인천지부 월례 모임에 갔다. 어느 고물상이 자살했다더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워낙 형편이 힘드니 그런 낭설까지 떠도는 것이라고 이씨는 생각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는 게 그의 버릇이다. 가게 이름이 ‘겸손자원’이다. YH무역에서 일한 7년 동안에 대해서도 그는 겸손하다.


한 달 2만원, 너무 ‘겸손’한 이문


1972년 그는 가발과 의류를 만드는 공장에 취직했다. 서울 면목동에서 채석장을 하던 아버지 사업이 망했다. 다니던 공고를 중퇴하고 같은 동네에 있는 공장에 들어갔다. YH무역이었다. 그는 미싱수리공이었다. 여공들이 쓰는 미싱이 고장나면 그가 고쳤다. 한 달에 ‘오버타임’을 250시간까지 해봤다. 하루에 10시간씩 추가 근무를 했다. 그러면 월급이 50% 정도 더 나왔다. 입사 때 받은 월급은 5500원. 쌀 한 가마니 값이었다. 그가 돈을 벌자 식구들이 모두 좋아했다.

밤에는 새참이 나왔다. 수백 명 몫을 한 솥에 넣고 끓였다. 퉁퉁 불은 라면이 양은 사발에 담겨 나왔다. 식구들 얼굴을 떠올리며 먹었다. 새벽 4시에 통금 해제 사이렌이 울리면 버스를 타고 집에 들어갔다. 아침 8시까진 다시 출근해야 했다. 이씨는 그 시간도 아까웠다. 사무실에서 의자를 붙여 잠을 잤다. 회사가 잘나갈 때는 직원이 4500명이나 됐다. 대통령이 주는 수출공로탑도 받았다. 그런데 그 대통령이 죽기 두 달 전인 1979년 8월9일, 여공 200여 명이 신민당사를 점거했다. 위장 폐업과 감원에 항의했다.

무리한 사업 확장이 화근이었다.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서울 왕십리 콩나물 공장 자리에 미싱 석 대를 놓고 가발 공장을 시작했던 사장은 정부의 수출지원책에 힘입어 의류까지 다루는 큰 기업의 회장이 돼 있었다. 경기가 나빠지자 수출 기업의 회장은 공장 문을 닫고 혼자 미국으로 떠났다. 여공들이 사흘간 농성했는데 경찰이 강제진압했다. 노조위원장은 진압 과정에서 죽었다.

그 일은 역사책에도 남았다. 그때 이씨는 다친 사슴처럼 가만히 면목동 본사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남자들은 데모하러 가지 못했다. 회사에서 대기했다. 이씨는 손을 들어 얼굴을 쓸었다. “옛날 이야기하면 가슴이 아파.” 종업원들은 당연히 힘들었고, 회장도 할 만큼 하다가 손을 들었다고 그는 생각한다. 누구의 탓도 하지 않는다.

“아휴, 좋은 데 있던 분이 저희 같은 회사에 오시면 되겠어요?” 이력서를 넣는 공장마다 그렇게 이야기했다. 군인 대통령이 죽고 또 다른 군인 대통령이 취임하던 때였다. 사장님들은 YH무역에서 일했던 과거를 곱게 보지 않았다. 엔지니어라고 자부했던 이씨는 눈높이를 낮췄다. 하루라도 땀 흘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80년대에는 청계천에서, 90년대에는 안양공단에서 일했다. 10명 정도 일하는 작은 공장들이었다. 대부분 수출 기업이었지만 예전처럼 신나진 않았다. 이씨는 미싱사였던 아내를 그 시절에 만났다.


 
 


» 이정오씨: 두 아들이 중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에 이렇게 물었다. “우리가 공부 1등 하면, 엄마·아빠도 업계에서 1등 할 수 있나요.” 아내가 말했었다. “아들 학교 보내지 말고 그냥 연금 낼까요?”
 
 
 

공장이 돌아야 고철이 나올 텐데


장인이 운영하던 고물상을 1991년에 물려받았다. 장인이 몸져누웠다. 봉제업도 쇠퇴하고 있었다. 이씨는 트럭을 몰고 밖에 나가 고물을 모아왔다. 아내는 130평의 작은 가게를 지켰다. 도부꾼들이 리어카에 담아온 고물을 사들였다. 예닐곱 명의 도부꾼이 매일 아침 이씨 가게로 출근했다. 좋은 시절이었다.

그러나 옛날 일이다. 오늘 점심 무렵 이씨는 배터리가 방전된 1t 트럭을 고치러 차량 정비소에 다녀왔다. 5월 이후 가게 앞에 세워두기만 했더니 탈이 났다. 나가서 고물 모아올 일이 없다. 큰길 건너 인천공단이 있다. 그 공장들이 돌아가야 고철이 나온다. 공장 사장들은 문 닫고 도망가고 싶다고 말했다. YH무역 회장도 그때 그런 심정이었을지 이씨는 궁금하다.

아들 둘은 이제 대학생이다. 들어오는 물건 가운데 학습지를 골라 공부시켰다. 큰아들은 제대한 뒤 휴학 중이다. 작은아들은 막 입학했다. 등록금이 필요하다. 두 아들이 중·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에 이렇게 물었다. “우리가 공부 1등 하면, 엄마·아빠도 업계에서 1등 할 수 있나요?” 아내가 말했었다. “아들 학교 보내지 말고 그냥 연금 낼까요?” 외환위기 때 국민연금을 체납했다고 보험공단에서 전화가 왔었다. 20만원 연금을 내면 아이들 뒷바라지를 할 수 없었다.

통금 해제될 때까지 동상에 걸려가며 일했는데 나라가 우리한테 뭘 해줬느냐고 아내가 말한다. “일이 힘들다고 생각한 적 없이 열심히 살았는데, 이제 보면 잘못 살았지 싶다”고 말하는 아내는 대학생 아들 생각해서 이름을 밝히지 말라고 남편 이씨를 채근했다. 이씨의 큰 귓불이 발갛게 상기된다. 열심히 살아온 인생이니 자식들에게 부끄러울 것 하나 없다고 그는 생각한다. 겨울의 옅은 해가 일찍 졌다. 옛 미싱수리공은 옛 미싱사의 손을 잡고 19평 집으로 돌아갔다.


12월11일 오전 3시12분, 인천 남동구 간석동


까만 밤이 일직선으로 동네 골목을 가른다. 리어카 밑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걸어나온다. 할아버지의 걸음은 그보다 빠르지 않다. 이제 10여 분 걸어나가면 꽃밭이다. 네온사인이 번쩍번쩍 하는 것이 꽃밭이구나, 10년 전 고물 줍는 일을 시작하면서 김순남(75)씨는 그렇게 생각했다. 단란주점과 실내포차와 20년 전통의 해장국집을 지나며 그는 고양이처럼 조용히 주변을 살핀다. 키가 큰 아가씨들이 깔깔거리며 지나간다.


국가유공자, 왕년의 반공투사


불 꺼진 건물의 유리문을 민다. 다섯 번쯤 그러다 열린 문을 찾았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종이 박스를 깔고 앉았다. 신문지로 싼 유리병을 꺼낸다. 원래 그 병에는 새우젓이 담겨 있었다. 누군가 새우젓으로 김장을 했을 것이다. 돼지 머리고기에 새우젓을 올려 먹었을 수도 있다. 김씨는 새우젓 말고 그 병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은 쌀밥과 볶은 김치가 담겨 있다. 두 무릎을 곧추세우고 앉아 김씨는 밥을 먹는다.

“우리는…” 하고 시작하는 게 그의 말버릇이다. ‘우리’는 차가운 걸 좋아한다. 차가운 바닥에 앉아 차가운 밥을 먹으며 그가 말했다. ‘우리’는 짠 것도 좋아한다. 붉다 못해 까만 김치를 먹으며 그가 말했다. 요즘 나오는 맛소금과 진간장이 참 맛이 좋아서 그것 하나만 있어도 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더구나 ‘우리’는 식당에 들어가 밥 먹는 걸 싫어한다. 한 줄에 1천원 하는 김밥을 먹으려 24시간 분식집 문을 열면, 식당 아주머니는 주문받을 생각도 않고 잠시 실눈을 떴다가 내처 존다. ‘우리’도 사람인데 시답지 않은 대접받는 건 질색이다.

국가유공자로서, 왕년의 반공투사로서 그런 일은 견딜 수 없다.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난 김씨는 6·25 때 미 해병대 소속 8240 유격대에 자원 입대했다. 9·28 수복 직후 당숙이 송화군수가 됐는데, 중공군이 다시 밀고 오면서 가족 전체가 반동으로 몰렸다. 황해도 신천에서 국민학교를 다니다 만 게 그가 배운 것의 전부다. 신천과 송화는 6·25 때 서로 갈려 죽고 죽이는 일이 많았던 곳이다. 학교에 다니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었다. 배운다고 살아남는 것은 아니었다.


 
 


» 김순남씨: 목숨 바쳐 싸웠고 일했는데 왜 여전히 사는 일이 고단한지 김씨는 잘 모른다. 아주 오래 전부터 부자들은 그와는 다른 낙하산을 탔다.
 
 
 

혼자 남쪽으로 내려온 그는 이북 청년들과 함께 유격대에서 싸웠다. 바닷물이 짠지 신지도 몰랐던 그는 ‘양키 싸진’ 밑에서 해병대 훈련을 받았다. 낙하산을 세 번 탔다. 칼 두 자루가 낙하산을 떠받치고 있는 해병대 모자를 그는 새벽마다 고쳐쓰고 나와 리어카를 몬다.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국가유공자로 지정됐다. 근데 나라에서 주는 돈은 하나도 늘지 않아 서운했다. 매달 8만원이 나온다. 여기에 노인연금 8만4천원이 더 붙는다. 나머지는 김씨가 알아서 번다. 단칸 지하방에 사는데도 가스비 8만원, 전기세 5만원이 매달 나간다. 볕이 들지 않고 습한 지하방이라 전기와 가스를 안 쓸 수는 없다. 위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안 아픈 데가 없는 할머니 약값으로 20만원이 나간다.

그가 고향의 처녀를 만나 결혼하던 40여 년 전, 통행금지에서 제외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공무원, 기자 그리고 연탄배달부였다. 몸에서 풀 냄새가 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서울 마포구 만리동에 연탄가게를 냈다. 쌀도 팔았다. 가난한 사람들은 연탄과 쌀만 있으면 해마다 닥쳐오는 겨울을 살아냈다. ‘송화상회’는 한 달에 4500장씩 연탄을 팔았다. 결혼 축의금이 100원 하던 시절, 연탄 100장을 1천원 받고 팔았다.

1966년 연탄 파동이 났을 때, 한 가구당 연탄 20개씩만 사야 한다고 나라가 법을 정했다. 구청에서 가택수색을 나와 더 사모은 이를 잡아갔다. 동사무소에서 확인증을 받아 연탄공장에 가면 정해진 수량만큼 연탄을 받았다. “빌어묵을 양반, 늙어 죽도록 연탄 장사나 하시오.” 주문이 밀려드는데 연탄을 대지 못했다. 만리동 달동네의 아주머니가 욕을 해댔다. 연탄으로 밥 지어 먹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만리동 동장은 수완을 발휘해 매일 세 끼니 열한 명의 식구들 밥을 해낼 만큼 연탄을 구했다.


값나가는 고물을 이제 내놓아야 하나


남한테 머리 숙이지 않고 뛰어다니면 돈이 되는 그 일이 그는 좋았다. 여름철 석 달만 놀면 1년 벌이를 걱정하지 않았다. 다섯 달을 놀게 됐을 때 그는 조금 걱정이 됐다. 일곱 달을 놀았을 때, 그는 연탄가게를 접었다. 석유곤로로 밥을 짓고, 프로판가스로 요리를 하더니, 도시가스까지 집집마다 들어왔다. 외환위기가 닥친 1997년, 그는 인천으로 왔다. 전쟁 때 월남한 고향 사람 몇몇이 모여사는 동네였다.

1972년부터 몰던 연탄 리어카 두 대를 함께 끌고 왔다. 할머니들은 힘이 없어 리어카를 끌고 싶어도 끌지 못한다. 유흥업소에서 종이박스와 플라스틱 병과 고철이 나와도 모두 담아가지 못한다. 김씨에게는 36년 된 리어카가 두 대나 있다. 새벽 3시에 나와 저녁 6시까지 리어카에 고물을 담아 모은다. 그런데 올가을부터 재미가 적다. 손가락만 조금 쑤시고 몸은 여전히 견딜 만한데 일감이 줄었다. 종이도 줄고 고철도 줄었다. 어제는 하루 두 번 리어카로 고물을 실어 날랐는데 1만1천원을 받았다. 그제는 9천원이었고, 그그저께는 4500원을 받았다. 매달 40만원을 벌었는데 요즘은 20만원을 겨우 넘긴다.

폭과 길이가 2m쯤 되는 큰 전자저울에 리어카를 올려놓을 때마다 김씨는 구부정한 허리를 억지로 펴고 눈금을 본다. 김씨의 고물을 사주는 작은 가게에서 석 달째 매달 10만원씩 빌렸다. 그 30만원을 언제 갚을지 알 수가 없다. 목숨 바쳐 싸웠고 일했는데 왜 여전히 사는 일이 고단한지 김씨는 잘 모른다. 아주 오래전부터 부자들은 그와는 다른 낙하산을 탔다. 그가 연탄을 배달할 때도 부자들은 석유곤로로 밥을 지었다.

지하방 앞에 모아둔 값나가는 고물을 이제는 내놓아야 하나, 김씨는 생각한다. 시래기 말린 것을 걸어둔 시멘트 담벽 아래로 냄비, 프라이팬, 세숫대야, 밥솥, 버너, 비디오, 음료수캔, 커튼 지지대 등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해병대 모자, 리어카 그리고 이 고철들이 70여 년을 살아낸 김씨에게 남겨진 재산이다. 따뜻한 기운도 없는 겨울 아침 해가 그의 굽은 허리를 타고 떠올랐다.


글 안수찬 기자 ahn@hani.co.kr·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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