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 그릇으로 살아나다!
박영봉 지음, 신한균 감수 / 진명출판사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책을 덮고나니 내 생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주방에서, 사용하고 있는 그릇들에 새삼스레 눈이 간다. 가볍고 깨질 염려도 없어 내가 선호했던 플라스틱 그릇들, 반지르르하고 깔끔한 색상이 마음에 들어 구입했던 본차이나 그릇 세트들을 보며, 저자가 말하던 글귀가 떠오른다. '그릇은 정성스레 다루지 않으면 깨어짐으로 자신을 주장하는 법인데, 아무리 집어던지고 밟아도 멀쩡하니 죽은 그릇이 아닌가. 살아있는 요리를 닮을 재간이 없는 것들이다.'라고 표현한 플라스틱이나 멜라민 수지 용기들, 그리고 도자기라고는 하지만 천편일률적이여서 생기도 없고 특별한 표정도 없이 항상 나의 식탁에 오르는 그릇들이라니...... 

뼈를 깎는 노력으로 요리를 해도 그것을 담을 그릇이 죽었다면 소용없다. 나는 살아있는 그릇, 죽은 그릇이라고 말한다. 그릇을 선택하는 것이 번거롭고 엄격하다고 말하지는 말라. - 로산진 / 133쪽
내게 낯선 이름, 기타오지 로산진! 책을 읽고나서야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게 되었는데, 이 책은 요리 이야기와 그릇 이야기가 아닌 서예가이며 전각가였고, 도예가이며 요리사이기도 했던 로산진의 삶과 예술혼, 그리고 그가 남긴 수 많은 작품들에 관한 이야기다.
일흔 여섯의 나이로 작고한 그의 생애동안 20만점 이상의 작품을 남겼는데 마흔이 넘어서 시작된 도예가의 길이였다고 하니 참으로 놀랍다. 생활 자체가 장인의 삶이였던 로산진의 일대기를 읽어 가며 그의 장인 정신과 맞물린 천재성이 부럽다. 비록 성정이 불같으며 독설가여서 여러 사람들을 적으로 두기도 했다지만, 그의 작품에 대해서만큼은 천재라는 소리를 듣는 로산진의 작품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가치도 커지고 있단다. 

평범하지 않았던 그의 삶을 적고 있는 많은 이야기들 중, 스무살 시절~ 잠깐 회사 생활을 했던 때에, 귀중한 골동품 그릇에 자신의 점심을 담아 먹었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귀히 보관되어 눈으로만 즐겨야한다고 생각했던 골동품이, 그게 그릇이라면 생활 속에서 식기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발상이 얼마나 톡톡 튀는지... 그 때가 스무살 즈음이라니, 타고난 미식가라 봐야 하겠다.
절대 미각과 예술적 감각으로 요리와 그릇에 대한 인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사람, 로산진...자신의 삶 동안,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에서 한치 양보도 없이 그 길을 추구한 그가 남긴 글이 마음을 울린다.
사는 목적이 섰다면 즐겨라. 
옛 작가들은 도를 즐겼다. 
도자기 장인은 도자기를 즐겼다.
때문에 도자기를 위해서라면 고통도 즐겼다. - 로산진
 

한국의 사발과 도자기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는 로산진, 우리의 도예기술을 연구해서 자신의 그릇에도 응용했다는 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한쪽으로는 마음이 착잡해진다. 일본 요리에 혁명을 일으키고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려 놓은 로산진의 영향으로 아주 작은 식당에서도 도자기를 대부분 사용하고 있다는데, 그가 흠모했다던 우리의 사발과 접시들은 어데로 가고, 우리의 식당에서 만나는 건 스텐레스 그릇과 플라스틱 그릇들일까~! 

아름다운 도자기라고 하면 청자와 백자만을 생각했던 내게 이 책은, 대칭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고, 투박하지만 운치 가득한 사발이 얼마나 멋스러운지 알게 해준 책이기도 하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엔, 우리 흙으로 빚은 사발과 접시들이 천연덕스럽게 내 마음을 비집고 들어와 앉았다.
우리 흙으로, 우리의 나뭇재로, 우리의 마음으로 빚어낸 그릇들이 오롯이 상 위에 오르고 차의 향이 거기서 오르기를 바란다. 버릴 것 없는 마음을 가진 그릇은 깨어지면 흙으로 돌아갈 뿐 쓰레기장을 헤맬 일도 악취로 남을 일도 없이 그저 그대로 돌아가는 그릇. 내 아이들의 밥그릇과 접시에서 그런 자연의 순리가 배어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 1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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