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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편지
정민.박동욱 엮음 / 김영사 / 2008년 10월
평점 :
중학교를 다닐 때에 집안 일로 인해 나만 떨어져 친척 집에 맡겨진 적이 있었다. 가족들이 사는 곳과는 아주 먼거리여서 시간 내어 보러 가기도 어려운 곳에 떨어져 있다보니 왠지 나만 버림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어린 마음에 한동안 속상함과 서글픔과 외로움으로 뒤척였는데, 그 때 처음으로 아버지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편지글 속에는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 없었지만, 구구절절 나의 걱정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 눈물 줄줄 흘러가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편지를 보고서야 혹여 내가 친척에게 눈치밥 먹을까봐 매달 쌀까지 부치고 계셨다는걸 알았다. 그 편지를 받기 전까지 계속 눈치밥을 먹고 있었더랬는데 말이다~.
이 책을 읽는 중에, 그 때 기억이 떠올라 코가 시큰거리기도 했다. 시대를 떠나 부모님의 자식 걱정은 모양새가 어찌 그리 똑같을까~. 이황, 백광훈, 유성룡, 이식, 박세당, 안정복, 강세황, 박지원, 박제가, 김정희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이들의 편지글을 담아 놓은 책이기에 처음엔 조금 무겁지 않을까란 생각을 가졌더랬다. 당시의 사회가 가부장적 유교 사회이기에 그런 생각을 더 했는데 책을 펼쳐 하나 하나 읽어 보니 처음 가졌던 그 생각과는 달리, 조선시대 지식인과 예술인으로 대표되는 그들의 편지글에선 권위적인 모습보다는 한 아들의 아비로서 살가운 부정이 물씬 흐른다. 때로는 훈계를 하면서도 걱정을 앞세우고 노심초사하는 마음에 애틋함이 느껴진다.
편지를 읽다보면 그 시절 풍속이 절로 그려지기도 하는데 안타까운건 가난이다. 전형적인 명문가 강세황도 어려운 가정 형편을 생각해 사후 자신의 제사상에 술을 올리지 말것을 다짐받는 글을 보면서 조금 놀라기도 했다. 벼슬길을 살면서도 가난으로 힘든 시절을 보내는 모습들이라니~.
이들 중에 읽는 내내 미소가 떠나지 않던 글은 박지원의 편지다. [연암선생서간첩]에 실린 30통 중에 11통만 소개하고 있음이 못내 아쉬울 정도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 연암의 편지글은 맛깔스럽기 이를데 없다. 직접 고추장을 담았다는 사실도 놀라운데, 그렇게 담근 고추장 한 단지랑 볶은 고기, 말린 고기, 곶감을 챙겨 보냈건만, 아들이 그걸 받아 놓고 어째 가타부타 맛에 대한 얘기가 없자 투덜 대며 보낸 또다른 편지글에 미소가 절로 고인다. 영.정조 당시에 시서화 삼절로 칭송을 받았다는 강세황의 편지글에선 일상 생활에서 필요한 물품들에도 관심을 가지고 살피는 모습을 만날 수 있고, 추사 김정희의 편지글 속에선 난을 제대로 치는 법을 세세히 알려주기도 하는 등 예술가 다운 면모가 엿보인다. 백광훈의 편지글에서 눈길을 끈 대목은 과거시험장에 들어갈 때 초장에서 혹 서로 도와주자고 권하는 자가 있어도 절대 들어서는 안된다는 당부의 글이다. 그때도 부정시험을 치러 합격하기도 했구나 싶어 흥미로웠다.
[요즘 서울의 젊은이들은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처럼 다만 효과가 빠른 것만 취하고 빨리 되는 방법만 찾는다. 성현의 책은 높은 시렁 이에 묶어 두고, 날마다 영리하게 남을 기쁘게 할 자질구레한 글만 찾아다가 훔쳐서 슬쩍 바꿔 시험관의 안목에 들어 합격을 이룬자가 많다.]
유성룡이 여러 아들에게 보낸 편지글 속에 쓰인 글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지금의 세태와 다르지 않아 헛웃음이 나왔다. 쪽집게 학원이다, 쪽집게 과외다 해서 유명세 좀 있는 사람에게 몰려 다니고, 그 또한 효과는 있어서 합격을 하기도 하지 않는가~. 아들들 바탕 공부 소홀을 탓하는 유성룡의 편지글에 지금 2008년을 사는 우리가 뜨끔하다. 사람 사는 세상....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 보니, 돌고 돌아 해 아래 새 것 없다~싶기도 하다.
며느리에게 접부채와 참빗을 직접 챙겨 보내는 살가운 모습의 이황, 비리를 보면 참지 못하는 자식 성정에 노심초사하여 말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하는 박세당, 병자호란이 일어난 이듬해에 포위된 남한산성에서 아우와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가족들 걱정으로 초조한 이식, 누이를 무지몽매한 채 내버려 두지 말라며 <내범>과 한글을 가르치라 당부 하는 안정복, 유배지에서 쓴 편지를 통해 유배 생활을 가늠해 볼 수 있었던 박제가의 편지까지... 각각의 색깔이 조금씩 다르고, 편지를 보내는 상황이 조금씩 다른 아버지들이였지만 그들의 편지 속에 하나같이 빠지지 않고 들어 있는 글은 과거시험을 치르기 위한 공부 방법들과 독서에 대한 글이다. 입신양명을 위한 독서가 아니라 평생의 반려로 삼을 의미를 터득하기 위한 독서가 되어야 함을 아버지들은 인생의 스승이 되어 아들에게 전한다.
독서에 대한 그들의 생각과 공부 방법을 읽다 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데... 자식을 향한 기대와 염려, 사랑과 훈계를 담은 옛아버지의 편지글을 읽는데 지금 우리의 아버지 모습이 겹쳐지는건, 변하지 않는 '아버지'라는 이름이 갖는 모습이 아닐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