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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분단을 극복한 천재시인 백석
백석 지음, 백시나 엮음 / 매직하우스 / 2019년 3월
평점 :
윤동주가 사랑했다는 백석의 시집 『사슴』은 백석의 첫 시집이다. 시집 『사슴』이 발표된 해가 1936년이니, 당시 백석은 스물다섯이었겠고 윤동주는 스무 살 청년이었겠다. 시집 『사슴』은 발표 당시 백석의 이름에 유명세를 더해 준 시집이었다 한다. 『사슴』에 실린 시들을 살펴보니 <여우난골족>, <여승(女僧)> <수라(修羅)>등이 눈에 확~ 들어왔다.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의 마지막 행을 곱씹을 때 마다 <여승(女僧)>의 그 ‘서사(敍事)’가 주는 울림이 보랏빛이라면, ‘이것의 엄마와 누나가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는 <수라(修羅)>의 마지막 행이 주는 울림은 노란빛이다. 이 외에도 시인 백석이 주는 여럿빛깔 울림들이 얼마나 다양한가!
백석이 시집 『사슴』을 발표한 후 문단에서 유명해진 1936년 그 해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1938년)에서 '나타샤'라고 밝히고 있는 김영한(김자야, 법명 길상화)을 만났던 해이기도 하단다. 이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는 이야기가 많다보니 좋아하는 사람도 많고 자주 회자되는 시이기도 하다. 이 시집의 제목으로 선택받은 시이기도 한 이 시는, 흰색에 대한 감각적이고 환상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시이다.
흰색하면 떠오르는 또 하나의 시는 <흰 바람벽이 있어>(1941년)이다.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에 나오는 ‘프랑시스 잠’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만날 수 있는 시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보다 이 시를 읽다보면 흰 벽에 화자가 그려보는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와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과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지나가는 ‘…가난하고 높고 외롭고 쓸쓸하니…’란 그 ‘글자들’이 선명하게 들어차 더욱 인상적인 시이기도 하다.
다음은 <추야일경(秋夜一景)>이라는 제목을 가진 시의 전문이다
닭이 두 홰나 울었는데 / 안방 큰방은 홰즛하니 당등을 하고 / 인간들은 모두 웅성웅성 깨여 있어서들 / 오가리며 석박디를 썰고 / 생강에 파에 청각에 마눌을 다지고 // 시래기를 삶는 훈훈한 방안에는 / 양념 내음새가 싱싱도 하다 // 밖에는 어데서 물새가 우는데 / 토방에서 햇콩두부가 고요히 숨이 들어갔다
가을밤의 정취를 청각적, 후각적으로 담뿍 느낄 수 있는 시였는데 읽다보니 회화적인 구도로 시상을 전개하고 있는 김광균의 <추일서정(秋日抒情)>이 떠올랐다. 어떠한 주된 감각으로 그려내느냐에 따라서, 그리고 어떤 시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가을맛은 이토록 다르다!
이 시집을 통해 처음 접하고 알게 된 백석의 시들은 정말 많다. 모두가 ‘백석스러운’ 시들이다. 향토적 색감과 어휘가 시마다 풍성하다. 백석의 동시들은 또 어떤가! 특히 <개구리네 한솥밥>과 <준치가시>에서는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 좋았다. 하지만 동시 일부와 북한에서 발표된 시들에선 시인의 시상(詩想)마저 ‘제한’된듯하여 가슴 아팠다.
백석의 시를 한가득 담고 있는 시집을 줄곧 읽다보니, 백석의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들이 내 주변까지 물들이는 듯 느껴지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