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매직 - 두려움을 넘어 창조적으로 사는 법
엘리자베스 길버트 지음, 박소현 옮김 / 민음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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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청년들 중에 불안하고 가난하지만 창작혼에 불타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 있을까. 예전에는 이런 초상들이 그래도 약간의 존경을 받았다면 이제는 그냥 찐따 취급을 받지 않을까. 하지만 저자에게 창작은 경이로운 황홀이자, 자기 초월이고 자신의 존재 이유이다. 그 초월을 위해 대체 자신의 어디까지 희생할 수 있을까. 창작의 불확실성, 우발성은 내가 창작자다.’라는 정체성조차 위협한다. 다른 직업에도 성공 여부는 갈릴 수 있지만 그 성공 여부가 보통 정체성까지 위협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창작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변호하는데조차 훈련이 필요하다.(저자의 방법은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자신이 목소리를 낼 자격이 있다는 것을 기억할 것.매일 나는 **. 라고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다.) 예전에 <이끼>의 김태호씨가 강의 중에 한 말이 문득 떠오른다. 허영만 선생같은 대가도 새로운 신작을 할 때 부담을 느낀다는 것이다. 즉 지금껏 성공해 왔다고 다음 신작이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암울함과는 별도로 이 책은 한없이 가볍고 발랄하다. 아이디어가 정령처럼 자신의 숙주를 찾아 작가들 사이를 떠돈다는 발상도 재미있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를 읽지는 않았지만 이럴게 글질을 잘 하는지는 몰랐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의 잠재적 경쟁자를 양산하는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 창조적 삶을 격려한다. 마치 명견 래시가 드넓은 평원에서 활기차게 양떼를 돌보는 모습이 떠오를 정도로 책장이 발랄하고 쉽게 넘어간다. 저자가 말하는 창작자와 창조성과의 관계는 우아한 파티에서 만난 연인과 사랑을 만들어 가는 것과 비슷하다. 상대를 신뢰하고 헌신하여야 하며 인내하여야 한다. 예의를 갖추고 자신을 꾸밀 줄도 알아야 하고, 진실해야 한다. 연인에게 돈을 벌어오라고 다그치는 건 금물이다. 창조성에게 경제적 성공을 기대하지 말고 본인이 창조성을 부양하라는 얘기다. 당연히 창작한답시고 회사를 그만두거나 빚 내가며 비싼 돈을 들여 예술학교에 가는 것은 금물이다. 예술은 생존에 필수적이지 않지만 삶을 빛내는 보석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창작을 하면서 심각해질 필요는 없다. 목에 힘이 들어간 열정 대신 호기심으로 자신의 창조력을 진전시키라고 충고한다. (쉽게 말해 본인에게 재밌는 것을 찾아 그냥 그걸 하라는 얘기다.) 전제는 당신안의 보물은 발견되고 현현하기를, 당신이 예스라고 말하길 기다리고 있으며 당신의 본질 자체가 창조성이라는 것이다. 비단 창작자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싶은 사람이라면 참고할 만하다. 저자가 말하는 예술관이나 창작 태도를 보면 니체가 말하는, 천진난만하게 유희의 정신으로 영원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어린 아이의 비유가 떠오른다. 용기를 가지고 그 모든 비평꾼들의 입방아와 실패에도 신경쓰지 않고 그렇다면 한번 더를 외치며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자신의 삶을 향해 풍덩 뛰어드는 것. 예술가의 삶에 관심이 없더라도 저자의 입담 덕에 그냥 재미로라도 몇 번 더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에 나오는 예술가의 고뇌를 내적인 고뇌와 외적인 고뇌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내적인 고뇌는 창작과정에서 나오는 좌절감과 실망이다. 저자는 창작과정에서 좌절하는 것은 창작과정의 일부이고, 그것 때문에 포기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사랑이 그 정도였다는 뜻이라고 한다. 외적인 고뇌라면 결국 돈이고 성공이다. 저자가 내세우는 비장의 무기는 외부적인 성공과는 별개로 자신이 사랑하는 일에 헌신하는 일은 그 자체로 숭고하고 즐거운 일이라는 것이다. 어차피 비평가는 당신에게 관심이 없고 각자 제 갈 길이 바쁘다. 당신은 그냥 자신의 일을 즐기면서 하면 된다. 읽고 나면 즐거움 지상주의같은 느낌이 든다. 뇌과학적(?) 비유를 들자면 저자가 드는 창작의 장애물은 전부 좌뇌적인 느낌이다. 마이클 싱어가 명상 서적에서 말하는 쉴새없이 품평하고 비교하고 떠들어대는 목소리말이다. 저자가 하는 격려는 그 목소리에 굴복하지 말라는 것이다. 반면 저자가 창조의 즐거움을 묘사할 때 드는 초월이라는 단어는 우뇌적이다. 창작자의 기쁨이 마치 명상가가 자신의 자의식을 잊어버리고 열반의 기쁨에 드는 것같은 느낌이다.

 

딴지를 하나 걸자면 저자야 글쓰기에서 소명과 사랑을 찾아서 그것에 헌신하는 과정 자체에서 행복을 느꼈지만 그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특이한 일 아닐까? 자신만의 꿈이나 목표를 찾으라는 말이 텅 빈 말이라는게 이미 최근의 동향 아닌가.(예를 들어 <행복하게 일하는 연습>(코이케 류노스케,랜덤 하우스), <인생 반 내려놓기>(나카지마 요시미치,21세기북스)

사랑은 대상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라고(<올 어바웃 러브>(벨 훅스,책읽는 수요일) 인생에서 사랑하는 태도를 가져라, 라고 진행시킬 수는 있을 것 같지만 말이다. 또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과정에서 얻는 만족감이 너무 커서 결과는 말 그대로 무시해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머리로 상상은 돼도 체감은 되질 않는다. 오히려 그 정도로 몰입감과 만족감을 주는 일 자체를 찾기 힘든 것 아닐까. 생업을 유지하며 불륜상대를 만날 시간을 내듯 창작할 시간을 내라는데 말이 쉽지, 그건 창작의 씨앗이 짓밟히는 것 아닐까. 생업에 치여 창작자의 길을 결국 포기한 사람에게 네가 포기한 건 어차피 그 정도의 재능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건 가혹한 것 아닐까. 예전에 고독사한 영화감독이 떠오른다. 어쨌든 내 안의 창조성의 정령이 나를 기다린다는 저자의 망상(우리 모두는 각자의 망상 속에 산다는 저자의 말) 진실이기를. 유일하게 맘에 안 드는 것은 <씨크릿>류의 책을 연상시키는 북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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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탄생 - 불교 성립 이전부터 붓다 입멸까지
미야모토 케이이치 지음, 한상희 옮김 / 불광출판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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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학에 문외한이라 일본에서 저자의 학문적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본의 불교학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다. 저자가 말하는 일본 불교학계의 두 가지 관점이 있다. 하나는 불교 그 자체만 연구하는 것이다. 이런 방향은 불교 지상주의같은 느낌이라고 한다. 연구자들이 이미 승려이거나 불교신자라고 하는데 두 번째 관점은 일종의 비교 연구의 관점으로 불교와 당시 인도의 외도사상을 연구하는 것이다. 당연히 두 번째 관점이 합리적일 듯 한데 90년대 중반에 쓰여진 이 책에는 저자가 지지하는 두 번째 관점이 래디컬하다는 암시가 있는 것 같다. 불교를 윤회나 업 같은 종교적 관점으로 볼 수 있고, 철학이나 사상사적인 면으로만 조망할 수 있는데 이 책은 후자 쪽이다. 저자의 태도는 시종 환상과 신비주의를 버리라는 식이다. 대승불교가 지나친 선정(禪定)주의로 사마디를 신비화 신격화 했다는 것이다. 빤야 즉 지혜는 사마디와 원리적으로 관계가 없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선정에 드는 것은 재능이 있는 소수만 할 수 있는 것이고 이는 꼭 모든 축구선수가 메시처럼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지만, 재능이 없는 다수는 선정을 신비화하고 열반을 신격화했다는 것이다. 육사외도와 우파니샤드를 설명하는 책의 전반부만 내용이 거칠고 붓다의 생애와 불교의 성립과정을 서술하는 나머지 부분은 아무런 부담없이 술술 읽을 수 있다. 이미 알고 있는 붓다의 생애이지만 저자만의 해석이 가미되면서 새로운 재미를 준다. 예를 들어 라훌라는 늦게 낳은 것이 석존이 성관계에 혐오감을 가졌기 때문이라든지, 박정한 사람이 아니었으면 출가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문장에는 왠지 돌직구 같은 느낌이 있다. 이후 불교의 발전은 방편의 비대화라고 저자는 대승불교에 날을 세운다. 방편이 목표를 덮어버렸다는 것이다. 저자가 그리는 석존의 초상은 실용적 허무주의자다. 실용적이라는 의미는 어차피 의미없는 세상, 계율에 엄격하지 않고 도움이 되면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신경쓰지 않겠다는 게 석존의 태도였다는 주장이고, 허무주의라는 주장은 석존이 죽음과 허무주의를 지향했다는 주장이다. 때문에 생존욕구의 범위안에 있는 질문을 석존에게 묻는 것은 연목구어같은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허무주의라고 하면 왠지 부정적으로 들리는데 고엔카10일코스에서 늘상 듣는 말이 평정심과 아니짜(무상)이다. 한번은 모든 것이 아니짜고 평정심을 지켜야 한다면 희노애락이 사라지는 것 아닌가요? 라고 질문한 적이 있다. 답변인 즉슨 희노애락이 사라지는 대신 자비희사가 듭니다.라는 것이었다. 이 책은 허무주의의 설명에서 끝나고 내가 들었던 자비희사에 대한 언급이 없어 읽고 나면 글자 그대로 허무해진다. 삶은 살 가치가 없고 죽음을 기다리는게 최고라는 것이 석존의 원시불교의 가르침이라는데 힘이 빠지지 않겠는가. 저자 입장에서는 이것이 환상없는 진실이라고 생각할테지만 말이다.

 

ps. 고엔카 코스에서는 정화라는 말을 쓴다. 그 느낌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갈애라는 것은 마치 콜라를 마시고 싶은 욕구같은 것 아닐까. 내 눈 앞에 마개를 막 딴 차가운 콜라병이 김을 풍기면서 있는 것이다. 이 때 내 마음에 드는 욕구는 단순히 물을 마실 때의 욕구와 다른 느낌일 것이다. 이런 욕구에서 벗어날 때, 긴장에서 벗어날 때 오는 청정한 마음 같이 있지 않을까. 저자가 그린 붓다의 초상이 사람을 힘빠지게 하는 것이라 아쉬운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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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게 일하는 연습
코이케 류노스케 지음, 박현미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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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번뇌의 대상이 아니라 수행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충고. “머리만 헛돈다라고 라는 문장에서 저자의 문제의식에 대한 감을 잡을 수 있다. 구체적인 행동은 없이 머릿속에서 이리저리분별판단만 하면서 머릿속 스토리는 점점 자가증식을 하고 감정과 불만도 자가발전한다. 명상 서적에 종종 등장하는 ‘머릿속 감옥에 갇힌다라는 표현은 자기만의 에고와 생각에 갇혀 스스로를 괴롭힌다는 느낌을 준다. 저자의 해법은 마음과 몸이 완전히 일치해 맞물려 움직이면 어떤 일을 하더라도 점점 충실감을 맛볼 수 있고,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일을 알아차림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일에 대한 불만으로 허황된 목표를 세우고 구름속에 있기 보다 당장의 눈 앞의 현실에 충실할 때 오히려 삶이 변화할 기회가 생길 것이라는 주장이다. 약간 거부감이 드는 것은, 어쩌면 명상일반에 대한 비판일 수도 있는데 모든 것을 자기책임으로 자기잘못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사회구조의 잘못은 없을까? 저자는 가혹한 근무환경에 책임이 크다라는 한 문장으로 끝낸다. 물론 잘못된 환경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다는 관점이 궁극적으로 주체적인 자유로 향하는 길일 것이다. 또하나 짚고 싶은 것은 근무시간에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마음과 신체를 일치시키는 알아차림을 하는 게 생각외로 쉽지 않다는 게 나의 경험이다. 그건 아나빠나 사티를 해보면 안다. 눈 감고 호흡에만 집중하는 것도 한 두 호흡을 넘기지 못하는데 심지어 일하는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다. 몸의 감각을 알아차리며 매 순간 '현존'하는 것 자체가 만만찮은 수행 내공을 필요로 한다는게 내 짐작이다. 저자의 주장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신에게 솔직하고, 지금 여기 이순간에 현전하며 일에 임하라정도가 될 것 같다. 뭐 그러면 많은 일도 거뜬히 해 낼 수 있다고 한다. 저자의 해법이 너무 나이브하다는 느낌도 들 수 있지만 읽고 나면 스님이 쓴 책 답게 평온함과 낙관적인 기분을 주는 미덕이 있다. “우리는 마음의 작용과 그를 통해서 나오는 언어’, 나아가 신체의 움직임’, 이 세 가지가 일치하지 않을 경우 마음의 안정을 잃게 되고 이 때문에 더욱 큰 번뇌가 생겨 괴로워진다. ”...“내가 지금 이렇게 쓰고 있는 언어의 내용 중에 스스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없다. 어디선가 읽었던 것을 생각 없이 주절거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모두 내 자신의 체험 속에서 끌어내서 확실하게 실감했던 것만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고 미망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마음이 신체와 언어와 완전히 일치해 있는 상태여야만 우리는 최고의 충실감을 약속받을 수 있다.(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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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을 짊어진 사람들 - 대물림되는 트라우마의 비밀을 찾아서
갈리트 아틀라스 지음, 신동숙 옮김 / 정신세계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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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이나 심리상담 사례를 케이스별로 소개하는 구성이라 현장감이 있고 몰입감이 있다. 쉬운 문장과 단순한 구성에다 챕터별로 내용이 떨어지기 때문에 가독성이 좋다. 후생유전학이란 분야가 있긴 하지만 예전에 조상의 트라우마가 대대로 유전된다는 것을 신비주의 비슷하게 풀어낸 책이 있는데 이 책은 그것보다 지그문트-안나 프로이트, 도날드 위니컷 같은 이름이 더 자주 등장한다.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는 패턴이 있고 그것은 부모와 가족관계의 정신역동에서 비롯된다는 관점이다. 인간의 무의식은 조상이 실패한 지점에서 조상과 자신을 동일시 하며 실패를 치유하려고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한계를 가진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애도할 수 없게 한다. 결국 저자는 과거를 애도하고 미래로 나가라고 말하는 것 같다. 심리학이나 정신분석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책에 등장하는 저자의 작업과정과 사례 등을 참고해서 관련 분야의 분위기를 맛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여튼 모두 알고 싶어한다. 자기 인생이 왜 요모양 요꼬라지인지 말이다. 치유라는 단어는 언제나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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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일하는가 - 오너와 직원 모두에게 필요한 질문 테드북스 TED Books 12
배리 슈워츠 지음, 박수성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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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봤던 후루야 미노루 만화 <두더지>의 한 장면이다. “1억원 줄 테니까 똥 먹으라고 하면 먹을 수 있어요?” “5천만원에도 할 수 있어” “오오 반액으로~”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은 인간은 일터에서 돈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센티브는 오히려 타인에 대한 헌신 같은 다른 미덕을 몰아낸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가 열거하는 좋은 일의 특징은 의미와 목적의식, 재량권, 도전가능성, 다양성, 계발 기회 등이다. 인간이 일터에서 만족으로 얻을 때는 소명의식과 신념, 의미가 있을 때다. “저 사람은 돈만 보고 일해라는 말에는 분명히 평가적인 요소가 들어 있다. 하지만, ‘인간은 일하기 싫어하고 돈에 의해서만 움직인다는 이데올로기는 일에 대한 노동자의 재량권을 줄이고 관리자의 통제를 강화한다. 그리고 이렇게 변한 일터는 노동자가 돈만을 추구하게 만드는 일종의 자기충족적 예언처럼 작동하며 일이란 것을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으로 만든다. 저자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의 자기충족적인 실현이다. 인간의 본성은 고정된 것으로 발견되기 보다 주변환경과 이데올로기에 의해 발명된다. 어떤 사회의 일에 대한 이데올로기가 일은 원래 하기 싫은 것이고 인간은 돈만으로 움직이며 통제하지 않으면 일을 하지 않는다라면 일터의 환경은 거기에 맞게 설계될 것이고 인간의 본성은 그러한 믿음대로 실현될 것이다. 개인적 의견으로는 결국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게 되어 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자못 비장한 70년대 느낌의 주장을 들으면 인간의 뇌(변연계, 신피질, 구피질 등) 가 수직통합되어 있다는 뇌과학 서적의 비유가 떠오른다. 욕망도 이렇게 수직통합되어 있는 거 아닐까. 마치 게임 스테이지 클리어하면 더 높은 빌런이 나오는 단계적 구성(의미같은 건 둘째치고 먹는 게 먼저야!) 이 아니고 의미추구와 단순한 생존욕구가 수직으로 통합되어 있는 것이다. 먹고사는 게 먼저지 무슨 의미 같은 배부를 소릴 하고 있어, 같은 주장은 그래서 넌센스다. 먹고사는 문제는 바로 의미추구의 문제로 연결될 것이다. TED북스 시리즈라는데 테드 강연 듣고 났을 때처럼 왠지 긍정적인 기분이 든다. 얇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알찬 내용으로 군더더기 없이 핵심을 전달하며 독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모든 일은 다양성, 복잡성,기술 계발, 발전이라는 요소를 포함하도록 구성될 수 있다라고 낙관적으로 말하는 부분에서 특히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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