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의 스포일러)
시간의 블랙홀이 있는지 이 영화가 개봉한 지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벌써 2014년작이다. 톰 히들스턴이 시드 비셔스 같이 퇴폐 이미지의 미남 록스타로 나오고, weird(?)한 이미지로만 기억되던 틸다 스윈튼이 아 이렇게 예쁜 여자였구나, 싶다.(어째 치와와를 닮은 거 같다.) 이 영화를 다룬 리뷰는 ‘색다른 설정의 뱀파이어 영화’라는 정도밖에 찾지 못했다. 짐 자무시는 현대를 살아가는 ‘문명인 뱀파이어’라는 설정으로 ‘괴물 뱀파이어’라는 관습을 뒤트는 재기를 부려본 것일까. 2014년에는 그런 시도가 신선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렇다면 궁금해지는 게 왜 제목에 굳이 사랑이 들어가는 걸까. 피를 마시면 불멸하는 뱀파이어들도 꼭 사랑을 해야 살아남는다는 것인지.
아담과 이브는 교양있는 뱀파이어 커플이다. 아마도 지금이라면 기후운동에 진심인 ‘woke’ 나 트럼프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진보주의자들의 모습일 것이다. 음악에 재능이 있는 아담이 세상사에 너무 밝아서 비관적이라면 독서가인 이브는 질 낮은 쾌락주의가 아닌 좋은 의미에서 낙관적이다. 과거에 아담에게 큰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 짐작되는 사고뭉치 동생을 여전히 스윗하트라고 부르며 챙기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재밌는 장면은 동생이 흡혈귀로 변신하자 이브가 “21세기에 이게 무슨 짓이니”하고 동생을 타박하는 장면이다. 마치 현대의 진보적인 뉴요커(?) 정도가 인종차별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를 타박하는 모습과 겹쳐지지 않은가. 뱀파이어 이브는 이때 생명수 같은 혈액 보틀을 카펫위에 팽개칠 정도로 충격을 받는 모습이다. 수저 쓰는 현대인이 맨손으로 밥을 집어먹는 야만인을 본 것처럼 말이다. 동생 때문에 위기에 몰린 이들은 미국을 떠나지만 이제 안정적으로 혈액을 확보하지 못한다. 낯선 이국에서 굶주리기 시작하자 이브는 인간들을 보며 한탄하듯 말한다. “15세기 이후로 이 짓을 또 해야 하다니”.
제목의 함의를 고민하며 떠올린 하나의 생각은 감독이 -뱀파이어가 하나의 은유라면- 뱀파이어를 역설적으로 보통의 인간에 대한 은유로 사용한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지극히 교양있고 문명적인 인간이 자신의 생명이 위협받자 내면의 아만성과 폭력성을 드러내는 아야기의 은유 아닐까. 강신주 콘텐츠 주요 내용 중 하나가 “우리는 자족적인 존재가 아니다.” 라는 것이다. 우리는 살기 위해 먹어야 하고 타자의 생명을 뺏어야 한다. 살기 위해서 내 팔을 뜯어먹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때 강신주의 결론은 우리는 폭력의 정도를 따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타자를 대할 때 항상 윤리적인 고민과 성찰을 해야 함을 의미한다. 강신주는 100%의 순수와 비폭력은 결국 파시즘으로 귀결된다고 한다. 인간 존재의 조건은 그런 이상에 다다를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컴퓨터로 이 글을 쓰며 스마트폰으로 영화예매를 한다. 사회적 가치라는 측면에서 상반기 주말 내내 거리로 나가 집회에 참여했고, 가치있는 소비를 위해 프차가 아닌 동네카페에서 커피를 텀블러에 담아 마신다. 하지만, 내가 평소에 추구하는 가치들을 내 존재 자체가 위협받는 디스토피아같은 상황에서 어느 정도까지 추구할 수 있을까? 멀리 갈 것도 없이 내가 우크라이나 전쟁의 러시아 병사라면, 하다못해 예전 월남에 파병된 군인이라면 어디까지 인도주의나 평화주의를 외칠 수 있을까? 베트남 양민학살 같은 의제에 소위 진보언론이 지금 취하는 스탠스를 취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서 자신 없다. 적어도 내가 아는 인간이란 한없이 가벼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궁지에 몰린 이들이 괴물로 돌변하기 전(이 때 틸다 스윈튼 특유의 weird 이미지가 위력을 발휘한다.) 주고받는 대화는 곱씹어 볼수록 서글프다. 마치 침몰 직전의 타이타닉에서 연주를 했다는 악사들 같은 분위기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인간적인 것”을 끝까지 부여잡고, 곧 마주해야할 자신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외면하고 싶어하는 몸부림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이다. 동시에 이브의 마지막 대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폭력을 합리화하고 살아남겠다는 끈질김과-그 와중에서도- 달콤쌉싸름한 묘한 위트가 느껴진다. 그리고 살기 위해 오늘도 ‘을’들의 싸움을 벌이는 수많은 중생들에게 위안을 준다. 그러니까 당신도 살아 뭐 이런 느낌으로... 결국 폭력의 세상에서 그나마 사랑이라는 위안이라는 게 있다는 게 감독의 의도였을까. 적어도 이들은 서로를 사랑하며 긴 시간을 버텨냈고 버텨야할 운명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