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확진자로 극장에도 마음껏 갈 수 없는 요즘, 현재 나오는 영화에도 지칠 때는 예전의 영화를 보는 것도 좋다. 다시 봐도 재미있는 영화가 있다. 그중에 한 편을 봤다. 리플리다.


영화에서 주드 로의 미모는 가히 천만 불 짜리다. 영화에는 가장 예쁠 때의 케이트 블란쳇과 귀넷 펠트로우가 나오지만 주드 로가 다 이겨버릴 정도다.

 

영화는 리플리(맷 데이먼)가 디키(주드로)를 죽이면서 점점 걷잡을 수 없는 곳으로 치닫는다. 리플리는 야망을 위해 점점 거짓을 확대시키고 또 확대시킨다. 상대방 앞에서 디키인 척 행동하는 리플리와 혼자 있을 때 괴로워하는 리플리의 사이코패스적인 모습에서 우리는 또 몰입하고 만다.


피아노 조율사로 호텔 보이로 미래가 캄캄한 리플리는 이 지옥 같은 뉴욕을 떠나고 싶다. 별 볼일 없는 리플리가 선박 재벌의 제안을 받으며 달콤한 유혹 속으로 들어간다. 사람을 죽였지만 거짓을 늘어놓을수록 아름다운 여인과 자유와 쾌락과 바닥이 보이지 않는 돈이 달콤한 인생을 살게끔 한다.

 

이 영화에서 이미 고인이 된 디키의 친구로 나오는 프레디 역의 필립 세이모어 호프먼의 연기가 압권이다. 리플리를 경멸하듯 쳐다보는 눈빛, 멸시하는 말투, 가난한 자와 선을 듯는 행동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하지만 프레디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결국 리플리에게 조각상의 머리로 프레디 머리는 작살이 나고 만다.

1999년 맷 데이먼의 리플리는 60년대 알랭 드롱의 ‘태양은 가득히’를 리메이크한 영화다. 거기서 알랭 드롱의 역 이름이 ‘톰 리플레이’다. 이 리플리 이야기는 영화 속 이야기만이 아니다. 실제 리플리 증후군에 걸려 마치 자신이 실제 그런 인물이라고 생각해버려 자신이 아닌 삶을 산 한국의 리플리도 있다. 이 사람의 일화는 너무 유명하고 충격적이라 뉴스에도 대대적으로 났었다. 아직까지 살아있는 인물이다. 이 사람이 리플리 때문에 사기죄로 복역을 한다. 여러 기사와 매체 중에 썬킴의 버전이다.

 

1956년 충남에서 태어났다. 이 사람은 중학교 중퇴까지가 이 사람의 학력 전부다. 초등학교 졸업이 끝이다. 재미있는 건 이 사람의 부모도 중학교를 중퇴했는지 몰랐다. 계속 고등학교를 다닌 줄 알았다. 중학교를 중퇴한 다음에, 어머니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다른 곳으로 갔던 것이다. 그렇게 3년이 지났다. 학력고사도 본다. 그리고 서울대 법대를 합격한다. 물론 다 거짓이다. 이 사람의 학력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초등학교 졸업이 공식적으로 끝이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의 사기죄 이후 이 사람은 너무 유명한 사람이었기에 이 사람의 이력이 세상에 알려졌다. 굉장히 유명한 사건이었다.

 

가짜로 들어간 서울대 입학식에 떡 허니 부모님까지 초대한다. 부모님과 함께 서울대 앞에서 꽃다발을 들고 사진까지 찍는다. 그리고 동아리 활동까지 한다. 법대 수업은 다 들어간다. 거기에 학생회장까지 한다. 서울법대 학생회장을 실제로 하게 된다. 대단하다.

 

어째서 하게 되었냐면, 그 당시만 하더라도 운동권의 시대였기 때문에 학생회 서류 행정 업무 같은 걸 누구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제가 하겠습니다! 라며 나타난 이가 있었으니 완전 오케이인 것이다. 그래, 너 이름이 뭐야? 저는 김찬경이라고 합니다. 법대생인가? 네, 법대생입니다.

 

그렇다. 희대의 사기꾼. 한국의 리플리. 미래저축 회장 김찬경이 바로 그 인물이다.

 

법대 학생회장과 동아리 활동을 버젓이 하다가 군대를 간다. 군대를 갔는데 하필 자기 밑의 졸따구, 부사수가 실제 서울대 법대생이었다. 그러냐? 나도 서울대 법대야. 그러면서 군생활을 하면서 서울대 법대에 관한 모든 정보를 후임에게 다 듣는다. 이런 수업은 들어야 하고, 저런 수업을 들어야 하고, 이런 활동을 해야 하고. 오케이 알았다며, 제대한 다음에 더 적극적으로 서울대 법대 활동을 한다.

 

그런 다음에 과외까지 한다. 초등학생의 과외를 하는데, 아이의 부모 입장에서는 서울대 법대생에 학생회장이 와서 과외를 해주니까 아이고, 아이고 하게 되었다. 근데 집이 으리으리하니까, 저기 어머니 이 집을 담보로 해서 대출을 받아서 사업을 하면 아주 좋은 게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받은 담보를 챙긴다.

 

당시 서울대 법대생이라고 하면 마담뚜들의 입질이 심할 때였다. 당시의 모 여대를 다니던 여학생과 –아버지는 당시 병원장이고- 맞선을 보게 된다. 머리와 재력이 만난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결혼을 하게 된다. 주례를 또 웃기게도 서울대 법대 교수가 봐준다. 이 교수의 재미있는 사연은 나중에 리플리가 들통이 나고 나서 다시는 주례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결혼을 했는데 이 김찬경이라는 사람이 들통이 난 게 와이프 때문이었다. 당시에 아내는 대학교를 나왔는데 남편과 대화를 하다 보니 이게 뭔가 이상하고 어색한 것이다. 일반화의 오류일 수 있으나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나서인지 부부 사이의 많은 말을 하는 와중에 어색한 부분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 그래서 아내가 서울대 학적부에 연락을 해본다. 서울대 법대에 감찬경이라는 학생이 등록이 되어 있냐고? 그런 사람 없는데요. 뭐야 그럼 나는 누구랑 결혼을 한 거지? 들통이 난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신기한 건 이혼을 하지 않는다.


이왕 결혼까지 한 거, 머리는 좋아 보이고(이 정도까지 왔으니 머리가 얼마나 비상해야 할까), 장인어른이 비밀을 알았지만 사위로 그냥 받아들인다. 지금과 다르게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7. 80년대에는 학력위조 정도는 처벌 대상이 아니었다. 사기를 친 것이 아니기에 처벌이 없었다. 그런데 김찬경은 모두에게 비밀이 들통이 났는데도 서울대 법대 동문회에도 버젓이 나갔다. 정말 대단하다.

 

다른 동문이 봤을 때 이상한 것이다. 김찬경은 아마 그때부터 자신은 리플리가 되지 않았을까. 자신은 자신에게 서울대 법대, 서울대 법대, 나는 서울대 법대, 법대생이라고 각인을 하다 보니 실제로 자신이 그만 서울대 법대생으로 둔갑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 비밀이 만 천하에 탄로가 났음에도 동문회에 나갈 수 있을까.


동창생들은 김찬경을 이상하게 봤지만 동문회 측에서는 쟤 장인어른이 돈이 많다고 하니까 이런 동문 하나쯤 있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하게 되면서 인정을 해버린다. 이러다가 점점 사기를 치며 돈을 불려 나가다가 결정적으로 본사가 제주도에 있는 저축은행이라는 은행을 인수하게 된다. 여기서도 재미있는 사실은 본인은 서울대 법대생을 사칭했지만 자신 밑의 직원들은 전부 서울대 법대생으로 뽑았다.


결과적으로 회사 돈 200억을 횡령해서 중국으로 튀려는데 항구에서 잡혀서 복역을 하게 된다. 이 사람이 올해인가 출소하게 된다. 이 사건이 우리나라 리플리의 초고봉 중에 하나다. 그런데 더한 최고봉이 있다. 김찬경보다 더 한 리플리의 이야기가 있다. 재미있다면 다음 기회에.



https://youtu.be/zcGLEdijAm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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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대표하는 여럿 중에 호쿠사이가 있다. 호쿠사이는 또 드뷔시와도 접점이 있다. 이 이야기로 접어들려면 예전의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

피시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다. 잠깐 해야지 하며 시작했는데 그만 8개월인가, 9개월인가를 해버렸다. 야간에 일을 했는데 친구 몇이 와서 밤새도록 게임을 했다. 덕분에 월급을 못 받는 달도 있었는데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주인에게 친구들은 밤새도록 무료로 게임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고 주인은 오케이 했다. 피시방은 대학교 앞이라 방학이면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밤새도록 피시방에서 일을 하니 피곤해서 새벽에 골방에서 잠이 드는 경우가 있었다. 나에게는 독일에서 피아노를 공부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녀는 비교적 늦게 피아노 공부에 뛰어들어 독일로 유학길에 올랐다. 새벽에 냄새나는 골방에서 어렵게 잠이 들면 그녀에게 전화가 온다. 으 하는 좀비 소리를 내며 휴대전화를 귀에 올려놓으면, 오늘 피아노를 치다가 손톱이 빠졌다느니, 독일 아줌마는 어쩌니, 레슨을 마치고 접시를 닦는데 힘들다느니, 같은 소리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진지하게 이야기를 쏟아내는 그녀였지만 이쪽에서는 몽롱한 새벽에 어렵게 잠이 들다 깨니 어쩔 수 없이 좀비처럼 전화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다닌 쾰른 음대는 학비가 없다. 대신 입학은 바늘구멍 통과하기고 졸업은 더 혹독하다. 넉넉한 친구들은 그저 피아노만 열심히 치면 되지만 그녀는 어려운 유학생이라 생활비에 집세까지 자신이 책임을 져야 했다. 그녀는 절박했고 필사적으로 건반을 두드렸다. 그런 사정을 알고 있어서 새벽에 잠결에 전화를 받아도 잠 오니 끊으라고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잠과 졸음의 경계에서 가물가물했다. 그녀는 베토벤에 심취해있었다. 베토벤을 다 독파하려고 연습에 또 연습이었다. 그녀는 베토벤, 베를리오즈, 슈베르트의 피아노 연주는 잘했지만 음악가들의 이야기는 아직 잘 모를 때였다. 나는 그녀에게 음악가들의 생활고? 같은 이야기를 주렁주렁해주었다.


바흐는 말이야 닥치는 대로 음악을 만들어야 했지. 자신이 만들고 싶은 곡이 있었지만 교회의 음악을 만들어야만 했다고. 성가대도 가르쳐야 했고, 예배 악곡도 작곡해야 했지. 그러다 보니 궁정 예배당의 관현악단의 악장이 되었고 거기에 맞는 음악도 작곡해야 했지. 지가 하고 싶은 음악이 있어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바흐의 자식이 몇 명이나 되었을까? 자그마치 스무 명이나 되었어. 스무 명을 먹여 살리려니까 나 좋아라, 하며 원하는 음악만 작곡해서는 살 수가 없었던 거지. 닥치는 대로 작곡을 해야 그 많은 자식들을 먹여 살릴 수 있었다고. 그러다 보니 그 유명한 칸타타도 만들어냈고 말이야. 그러니 너무 힘들어도 어떻게든 견뎌 봐. 독일에 가기 전에도 이런 말을 해주면 그녀는 밀사의 눈초리로 꽤나 집중해서 듣곤 했다. 하지만 그녀의 고단한 일상을 듣기엔 새벽은 너무 힘든 시간이었다.


너 내 말 듣고 있어?


그래, 듣고 있다고. 베토벤이 말이야 한 번은 비가 오고 난 후 일층의 천장으로 물이 계속 떨어져서 일층에 살고 있는 주인이 화가 난 거야. 그래서 2층으로 올라가 보니 피아노를 치다가 손가락에 통증이 오면 통에 떨어진 빗물에 손을 넣어 통증을 식혀가면서 노력을 하고 있어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고.


그녀에게 한 번은 드뷔시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겨울이었다. 날이 너무 추워서 손을 꼼지락거리는 것도 싫은 날, 골방에서 잠이 들어 있는데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그녀는 주인집 아주머니가 먹으라고 준 조각 케이크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프랑스 사조에 대해서는 시큰둥했는데 드뷔시의 아라베스크에 대해서 주절주절 이야기를 하는데, 너 호쿠사이라고 알아?라고 물으니 모른다고 했다. 드뷔시는 몹시 오래전 사람 같지만 1910년대까지 살다 죽었다.


호쿠사이의 그림 중에 파도라는 그림이 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유명한 그림이다. 호쿠사이의 파도는 각종 굿즈와 게임 캐릭터로도 사용이 된다. 문신으로 새기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이 그림을 드뷔시가 보게 되었다. 드뷔시는 살아생전 바다를 본 적이 없다. 그런데 호쿠사이의 파도 그림을 보고 그만 마음을 빼앗겨 버리고 만다. 드뷔시는 호쿠사이의 파도 그림을 보고 20분이 넘는 ‘라메르’라는 곡을 만든다.

https://youtu.be/SgSNgzA37To 


라메르를 들어보면 정말 바다 위에 서 있는 기분이 든다. 그러다가 클라이맥스에는 파도가 휘몰아치는 것처럼 연주가 들린다. 하지만 가장 기묘한 건 클래식으로 연주를 하는데 마치 일. 본.이라는 풍의 기저가 깔린 느낌이 온몸을 감싼다. 이게 정말 신기하다. 그런 것을 보면 드뷔시는 정말 천재가 아닐까. 드뷔시는 여성 편력이 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만난 여자 중에는 결혼해주지 않으면 죽는다며 총을 들고 자살을 하려고 한 여성도 있다. 드뷔시의 곡 중에는 영화 ‘판의 미로’에 나오는 판, 블란서어로 포느가 나오는 봄날의 나른한 곡도 있고, 자신의 아이들을 너무나 사랑해서 장난기 가득한 곡 ‘골리워크의 케잌워크’도 있다.


호쿠사이는 춘화를 그리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파도만큼 유명한 그림이 문어가 여성의 몸에 밀착해있는 그림이다. 문어의 촉수가 여성을 건드리는 이 그림 이후 일본은 수많은 아류작들이 탄생했다.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 촉수가 육체를 탐하는 이 형태는 세계로 뻗아 나가기 시작했다.

중국도 춘화가 있고 한국에도 춘화가 있다. 비교해서 보면 특징이 뚜렷해서 재미가 있다. 탐미에 있어서는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의 대단한 관심거리였다. 우리나라에도 춘화가 성행을 했다. 풍속화를 제대로 그렸던 신윤복의 춘화가 유명하다. 신윤복의 춘화는 중국이나 일본과는 다르다. 좀 더 은유적이고 해학적이다. 신윤복의 ‘사시장춘’이라는 그림이 있다. 바로 이 그림이다.

그 사시장춘이 춘화로 분류되고 있다. 누군가는 어딜 봐서 이게 춘화야? 도대체 어디가 야한거야?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신윤복의 사시장춘은 몹시 은유적이다. 사시장춘은 그림 한 장으로 여러 이야기가 떠오른다. 신윤복은 사시장춘을 통해서 봄날의 춘정을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그림을 보면 일본이나 중국처럼 직설적인 것은 없으나 천천히 그림을 보면 또 직설이게 보이는 은유가 가득하다. 그걸 찾아서 보는 재미가 있다. 여러분도 과연 찾아내셨습니까.


독일에서 피아노를 공부했던 그녀는 두 딸과 함께 지금은 부산의 한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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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무엇이냐 하면 말이에요.라고 그녀는 내 눈을 보면서 말한다. 추운 겨울 아침에, 싫구나, 일어나고 싶지 않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커피 향기와, 햄에그를 굽는 지글거리는 냄새와 토스터 작동이 멈추며 내는 탁 소리에 그만 참을 수가 없어서, 과감하게 침대를 박차고 나오는 일이에요.

하루키의 소설 ‘댄스 댄스 댄스’를 보면 이렇게 초반에 시작을 한다. 맛있는 냄새에 더 자길 포기하고 이불을 박차고 나오는, 그 전경이 눈앞에 홀로그램이 되어 나타나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아침에, 겨울의 아침에 눈뜨자마자 몸을 일으켜 바로 맛있는 떡국을 먹는 것만큼 행복한 것은 없다. 봉 감독의 영화 ‘괴물’ 마지막 장면이 그렇다. 현서를 잃은 대신 세주를 얻은 강두는 하얗게 눈 덮인 한강변의 아침에 밥상을 차리고 세주를 깨운다. 세주는 쿨쿨 자다가 그대로 일어나서 맛있게 밥을 먹는다. 세주가 하수구 같은 곳을 돌며 그토록 원하던 것이었다. 이 장면은 세대를 관통해서 보는 이들에게 마지막까지 각인시킨다.


겨울의 일요일, 잠은 더 자고 싶은데, 일어나기는 싫은데 맛있는 떡국의 냄새가 잠의 세계로 파고든다. 엄마가 밥 먹어라고 말하며 아빠가 나의 등을 슬슬 문지르며 몸을 일으킨다. 바로 일어나서 뜨거운 떡국을 퍼 먹었던 기억. 단칸방이어서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기억은 겨울이 되면 주기적으로 오는 손님처럼 똑똑 노크를 하며 찾아온다. 마치 세주가 되어서 눈 뜨자마자 눈곱도 떼지 않고 따뜻한 방 안에 앉아서 밥을 먹었던 기억.


아마 봉 감독도 그런 기억이 있어서 그 장면을 넣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디자인을 좋아하는데, 걸어 다니며 간판 디자인을 보는 것 때문에 일행에게 핀잔을 들은 경우도 있고, 책 표지 디자인도 꽤나 유심히 보는 편이다. 올리는 소설의 표지도 마우스로 다 디자인을 한 것이다. 책 표지 하면 칩 키드의 디자인을 좋아한다. 칩 키드는 너무나 유명하기에 간결하면서 눈을 확 사로잡는 디자인을 해 버린다. 미래의 세상은 디자인의 세계가 되지 않을까.

사진: 펜톤미술학원 본원 공식 블로그 발췌


간판이나 과자의 글씨체도 전부 디자인인데 특히 좋아하는 글씨체가 ‘코카 콜라’다. 병에 딱 한글로 ‘코, 카, 콜, 라’라고 박힌 그 까만 글씨체의 디자인이 아주 좋다. 요즘에야 대부분 영어로 되어 있지만 우리에겐 친숙한 코카콜라 이 글씨체 디자인은 68년에 등록이 되었다. 그 후로 지금까지 계속 이 디자인의 코카콜라로 쓰이고 있다.

이 글씨체 디자인을 만든 디자이너가 2017년에 작고하신 봉상균 화가다. 바로 봉 감독의 아버지다. 1세대 그래픽 디자이너 봉상균. 검색을 하면 그의 다양한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봉 감독의 외할아버지도 시대의 이름을 남긴 소설가였다. 그는 김해경(이상), 이효석 등과 함께 구인회 활동을 했고 그의 가장 유명한 소설은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되었다.


봉 감독은 시나리오 작업은 외롭고 힘든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힘들고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아카데미에서도 쾌거를 이뤄낼 수 있었다. 봉 감독은 아마도 아버지 봉상균 화가의 작품들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그런 꿈을 가지게 되었나 보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맛있게 겨울의 아침을 후루룩 같이 먹었던 추억이 있지 않았을까. 그런 추억은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내내 기억의 저편에 붙어서 겨울이 오면 손님처럼 찾아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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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좋은 그것은 체강이 강하고 하얀,

튼튼한 뱀이 되어 좁은 마음속의 어딘가에 똬리를 틀었다.

그리고 설원처럼 순수하고 사랑의 맛을 알아버린 청춘처럼 노골적으로 속도를 유지하며 영역을 넓혀갔다.


소설 렛 미인의 문구를 빌려 생태교란종 베스를 한 번 표현해봤다. 베스는 잡아 없애야 하는 물고기로 인식되고 있다. 적어도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렇다.


그동안 늘 그렇게 알고 있던 베스,

그런데 정말 베스는 나쁜 어종일까.


렛 미인은 추운 나라에 나타난 뱀파이어의 이야기로- 스웨덴 영화로도, 그리고 할리우드 리메이크작도 성공했을 정도로 영화가 좋았다. 그간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뱀파이어의 내용이 아니었다. 원작 소설은 영화보다 훨씬 어둡고 깊은 내용이었다. 소설은 너무 하얗고 시리고 아픈데 그 아픔을 봐야만 하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정말 좋다.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 오른손으로 들어와 버린 기생수 ‘오른쪽이’는 말한다. 기생 생물이 사람을 잡아먹는 것은 단순히 그것이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기생 생물 입장에서는 먹을 수 있는 식량이 사람일 뿐이라 사람을 잡아먹는 것이다.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몹시 이상하고 무서울지 몰라도 기생 생물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생태인 샘이다. 먹을 수 있는 것만 먹기 때문에다.


그런데 기생 생물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 너무 이상한 것이다. 인간은 단지 살기 위해서 인간을 죽이지도 않는다. 그저 재미로 인간을 죽이기도 한다. 먹지도 않을 거면서 인간이 인간을 가지고 놀고, 그러다 싫증 나면 죽이기도 한다. 가장 비도덕적이고 생존과는 상관없이 인간이 인간을 죽인다. 기생 생물의 입장에서 보는 인간은 지구에서 가장 잘못된 생활방식으로 지내고 있는 것이다.


차인표가 쓴 소설(차인표는 두 권의 장편소설을 펴냈다. 나는 그 두 권을 다 읽었는데 정말 재미있다. 글을 아주 잘 쓴다. 그중에 한 소설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오늘 예보’를 읽어보면, 우리들 인간은 살아가면서 뱀에게 물려 본 적이 없음에도 그저 뱀이니까, 뱀의 모습이니까, 뱀을 보면 죽이려 든다.

고단아 뱀 좋아하니

뱀 먹는 거?

아니 그냥 뱀 좋아하냐고

아니 싫어하는데

혹시 뱀한테 물린 적 있냐?

아니 없는데

그런데 왜 싫어해?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냥 싫지?

남들이 싫다고 하니까 무조건 싫지?




영화 렛 미인에서 이엘리는 오스카에게 내가 왜 인간의 피를 마셔야 하는지, 나의 모습이 잠시 동안만 되어 보라고 말을 한다, 렛 미인을 봤다면 그 장면이 마음을 찌릿하게 한다. 이엘리는 그저 장난으로 죽고 싶을 정도로 오스카를 괴롭히는 애들을 멸살시킨다.

2000년도 중반에 미국의 강으로 흘러들어 간 가물치는 미국에서 괴물 어종으로 법으로 정해놓아 살아있는 가물치는 거래가 불가능하며 적발되면 법적 조치도 심하게 받는다. 가물치는 미국의 토종 어종에게 피해를 주며 심지어 육지까지 기어 올라와 아이들도 물어 버린다는 공포가 가득해서 미국인들에게 가물치는 그야말로 지독한 외래어종으로 낙인찍혔다.


우리나라에서 가물치는 인간에게 맛과 영양으로 도움을 주는 어종이지만 미국에서는 퇴치되어야 할 어종이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가물치가 미국과 함께 영원히 살아갈 것이라 여기고 가물치를 인정했다.


베스가 토종어종을 먹는 것은 베스 입장에서는 그것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 베스는 결국 우리가 우리의 가슴으로 끌고 온 것이다. 베스가 나쁜 게 아니라 그 베스를 무분별하게 들고 온 인간들이 나쁜 것이다. 이미 베스를 낚는 낚시꾼들은 베스가 퇴치되어야 할 어종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줄여가야 하겠지만 인식의 문제다. 베스가 정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나쁜 어종은 아니다.


매트릭스 다들 재미있게 보셨는지. 매트릭스는 1편과 2편 사이에 애니 매트릭스가 나왔다. 여러 단편이 매트릭스 세계관을 말해주는데 그중에 한 편인 '두 번째 르네상스'가 매트릭스 세계관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https://youtu.be/XbOWalLcHR4

유튜브 강남뽀대지존 - 애니 매트릭스 - Supermoves


애니 메트릭스 ‘두 번째 르네상스’ 속 세상은 2090년이고 인간들은 더 이상 힘들게 일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인간들은 인간과 비슷한 휴먼 안드로이드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안드로이드는 절대 불평, 불만을 해서도 안 되고 하지도 않았다. 안드로이드가 태어난 이유는 바로 인간이 편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로봇인 안드로이드는 인류의 편리한 도구, 그리고 가장 말을 잘 듣는 충직한 노예였다.


그런데 어느 날 B1-66ER라 불리는 로봇이 주인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그 로봇의 살해 동기는 아주 단순하게 살고 싶어서, 로봇인 자신이 죽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날 로봇은 폐기될 운명이었고 로봇은 살기 위해서 주인을 죽인 것이다. 안드로이드에게도 감정이라는 게 생긴 것에 대한 놀라운 발견이었지만 인간을 죽인 로봇에겐 자신을 변호할 기회나 권리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B1-66ER에겐 그렇게 사형선고, 즉 페기처분이 내려졌고 B1-66ER 로봇은 ‘죽고 싶지 않아’라는 말을 남긴 채 폐기된다. B1-66ER가 남긴 마지막 말은 세상에 남은 로봇들에게 어떤 동기부여가 되었다. 마음속에 불씨를 일으켰다.


인류는 B1-66ER 로봇과 비슷한 불량품은 전부 폐기하기로 결정하는데 이에 반발하는 안드로이드들과 자유 옹호론자들이 집단적으로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시위는 점점 불어나서 엄청난 규모의 안드로이드들이 자신의 로봇 권리를 주장했지만 인간들에 의해 무참하게 폐기 처분되었다. 탱크로 휴먼 안드로이드들을 짓밟고 지나갔고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도 여자 안드로이드들의 옷을 벗기고 그대로 무참히 죽이고 만다. 안드로이드들에 대한 혐오는 극대화해져 갔다.


안드로이드들은 인간의 사회에서 추방당해서 인류문명의 발생지였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제로원이라는 기계 세계를 건설하게 된다. 제로원이란 0과 1로 이루어진 세계. 즉 이진법의 세계, 기계들의 세계를 말한다. 제로원에서는 더욱 정밀하고 신속하게 물품을 대량 생산하기 시작했고 로봇들은 고도화된 기술력으로 인간에게 수출을 했다. 하지만 인간에게서 수입은 극도로 제한했다. 안드로이드, 제로원의 세계에서는 필요 없기 때문이었다. 제로원에서 만든 모든 제품들은 뛰어난 품질에 합리적인 가격으로 인간들의 시장에 공급되었다. 그리고 인류의 시장 경제의 패권이 제로원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이에 인류는 해상을 봉쇄하고 경제제재를 가해 제로원을 견제하고 고립시키려 했다. 제로원은 인간과 공존하기를 바랐다. 이에 제로원에서는 인간을 닮은,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 안드로이드 사절단을 인간에게 보낸다. 하지만 인간은 안드로이드 특사를 거절하고 기계와 전쟁을 선포한다. 인류는 제로원에 핵을 퍼붓지만 기계들을 막을 수 없었다. 인류와 공존할 수 없다 여긴 기계들은 중동을 기점으로 세계 각지로 인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인류의 영토는 기계들에 의해 점점 점령당한다. 이에 인류는 기계들의 주 에너지원인 태양광을 완전히 차단해버린다. 암흑 폭풍 직후 잠시 인류는 전세를 역전시켰다.


신형 전자펄스와 엘에스디 같은 약에 취해 두려움이 사라진 군인들은 무력해진 기계들을 공격하며 승리의 기쁨에 젖어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계는 핵융합기술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전에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던 기계들은 핵융합 이후 완전하게 오직 기계의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그 기계는 오로지 인간을 죽이기 위해 발전한 형태가 되었고 매트릭스에 나오는 꼬리가 달린 그 기계가 된다. 그렇게 기계는 인류에게 승리하게 된다. 하지만 기계들의 핵융합 에너지는 영원하지 않았다. 기계들은 다른 에너지원을 찾아야 했다.


그게 바로 인간의 몸에서 발생하는 열 에너지였다. 인간은 감정 변이에 따라 열에너지와 전기에너지를 발생시킨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기계는 두 번째로 UN을 찾아 특사를 보낸다. 첫 번째에 비해 두 번째 기계의 특사는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바로 기계 그 자체의 모습으로 온 것이다. “너희들의 육체는 무가치한 껍데기다. 육신을 바치면 신세계를 만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요구다.” 그리고 기계는 인간을 배양하기 시작하고 인간은 기계에 의해 '재배'되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기계가 만든 가상공간 매트릭스 안에서 꿈을 꾸며 죽을 때까지 기계의 에너지원이 되며 살아간다. 이것이 매트릭스의 세계가 펼치지는 시작점이다. 바로 인간의 오류가 어떤 희생을 감당해야 하는지 너무나 잘 보여준다. 그저 영화 속 이야기? 아주 먼 미래의 이야기일까?


별개의 이야기지만 지금 인공지능은 어디까지 인간 생활에 들어와 있을까. 지금 현재 세계 최고의 기업인 아마존은 인공지능 채용 시스템으로 지원서를 검토한다. 전 세계에서 어마어마하게 지원서를 넣기 때문에 사람들이 일일이 검토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인공지능이 100개의 지원서 중에 5개를 추려서 추천한다고 한다. 인공지능의 상위 5개의 추천서를 채용담당자가 검토를 하는 방식이다. 인공지능의 장점은 혈연, 학연, 지연을 떠나 오로지 지원자의 데이터만으로 검토한다는 점이다. 이제 대부분의 기업이 이렇게 인공지능의 기술을 빌릴 것이다.


매트릭스라는 건 데카르트가 소환한 ‘악마’라는 말이다. 전지전능한 악마가 우리가 알고 있는 알고리즘을 그렇게 알게 끔, 믿게 끔 만들어 버린 것. 1 더하기 1은 원래 3인데 그 전능한 악마가 2라고 믿게 끔 만들어 버린 세계. 그것이 데카르트가 말하는 매트릭스다. 데카르트는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아주 교활하고 전지전능한 악마가 나를 속이고 있다면. 지금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가능성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도대체 어떤 악마가 베스가 생태교란종으로 나쁜 것으로 인식하게 만든 것일까. 메트릭스 세계에서 결국 인간이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인간은 멸망하고 만다.


최근 넷플의 고요의 바다를 보면 무엇이 잘못인지, 누가 잘못인지 알 수 있다. 마지막 송 박사는 이런 말을 한다.

"우리는 절박하고 그래서 잘못된 선택을 하죠. 그 선택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구요. 같은 실수는 반복할 수 없잖아요."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그게 우리 인간이 해야 할 일이며 과제다.


1월부터 생태교란종을 때려잡는다는 방송이 기획 중이다. 생태교란종이라는 명칭을 붙여 방송의 재미를 위해 '때려 잡아가며' 시청률을 올리려 한다. 정말 때려잡아야 할 주체가 누구인지, 그저 자신은 자신의 생활을 할 뿐인데 인간들에 의해 생태계 교란종이라는 낙인이 붙은 채 머리가 깨져 잡히지나 않을지 벌벌 떠는 생물을 잘못되었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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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wsMro6_1BqA

엽천문-천취일생. 유튜브 진이삼춘 채널



첩혈쌍웅은 제니와 아쏭의 안타까운 누아르 영화였다. 누구나 다 킬러와 형사의, 남자들의 이야기라고 소개를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사랑 이야기다.


자신의 실수 때문에 실명을 한 여자 가수를 지켜주는 한 킬러의 이야기.

제니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버려버린 아쏭의 아픈 이야기.

비싼 가격에 사람을 죽여 실명한 제니의 눈을 수술해 주고픈 한 남자, 아쏭의 이야기.

그리고 그를 쫓는 한 형사의 또 다른 이야기.


아쏭은 제니를 떠올리며 하모니카를 분다.

하모니카는 바이올린만큼 슬픈 영혼의 소리를 실처럼 뽑아낸다.

제니는 눈이 멀어도 계속 노래를 부른다.

자신의 노래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잘 들릴 수 있도록.

서글프고 구슬픈 노래지만 제니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통해 나오는 노래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고픔을 말한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해 노래를 부르는 제니.

자신의 눈을 그렇게 만든 사람을 위한 노래를.


이 이야기는 슬프고 슬픈 사랑 이야기다.

자신을 위해 노래를 부르는 제니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아쏭이 할 수 있는 건 오직 사람을 죽이고 또 죽이는 것뿐.

두 사람은 너무나 가까이 있는데 찾지 못하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큰 눈에

만화에서 갓 나온 듯한 표정을 짓는,

곁에 있어 줘야만 할 것 같은 제니.


박정대 시인의 '삶이라는 직업'이라는 시집에서,

예뻐서 늘 쳐다보는 달력 속의 여자가 제니 같은 여자가 아닐까.

제니는 사랑해선 안 되는 남자를 사랑하기에 오늘도 노래를 부른다.





유체 이탈자

얼마나 사랑했으면, 이 사랑이 얼마나 간절하고 절실했으면 강이안은 자신의 잠든 육체를 벗어나 다른 이의 몸으로 들어가 사랑하는 진아를 구하려고 했을까. 그 사랑의 깊이가 바닷속만큼 깊어서 강이안은 사랑하는 이가 죽음으로 가는 걸 막아야 했다.


유체를 이탈해가면서까지 진아를 지키고 싶었던 이안을 보면 예전의 고스트가 된 샘이 떠오른다. 그렇게나 사랑하는 몰리를 두고 죽어버린 샘은 몰리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쓴다.


몰리는 크게 두 번 눈물을 흘린다. 동전이 공중 부유하여 손에 쥐어질 때 샘의 존재를 확인하고 눈물을 흘리고 마지막 샘과 헤어질 때 눈물을 흘린다.

말도 안 되는 사랑 이야기.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이야기. 이상하고 또 이상하고 그저 이상한 이야기. 하지만 사랑이란 그렇다. 답답하고 미칠 것 같다가 평온하고 빡치고 애타고 죽을 것처럼 보고 싶고, 설명할 수 없이 황당한 게 사랑이다. 내 생각대로 되지 않고 뚜렷한 답도 없어서 갑갑하다. 비난을 각오하고서라도, 사회에서 매장이 될지언정 사랑은 그 모든 것을 모래성처럼 무너트려 버린다. 당황스럽고 이상하고 미쳤고 말도 안 되는 것이 불같은 사랑이다. 사랑 그 하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릴 수도 있다.


몰리는 사랑하는 샘에게서 정말 사랑받았다는 그 느낌,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샘이 없는 이 험한 세상에서 아마도 다른 이들에 비해 잘 헤쳐가리라. 그런 몰리를 지켜주지 못해서 샘은 죽은 뒤에도 끊임없이 노력을 한다. 사랑은 노력이 필요하다. 두 사람이 마지막 헤어질 때 몰리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린다. 그리고 마지막 대사가 영화를 말해준다.

사랑해 몰리, 언제나 사랑했어.

동감이야,라고 몰리는 대답 한다.


유체 이탈자의 이안과 진아도 그런 과정을 지나 더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가려는데 그만 죽음 직전으로 내몰리고 만다. 몰리가 샘에게 사랑받았다는 그 느낌을 이안과 진아에게서도 봤다. 영화는 분명 액션인데 내 눈에는 너무나 애틋한 사랑 이야기로 보였다.


윤재근 감독이 스토리보드와 스트립터로 참여한 영화 ‘선물’을 나는 좋아한다. 얼마 전에도 봤다. 죽어가는 아내를 두고도 공연에서 사람들에게 웃음을 줘야 하는 삼류 개그면의 처절한 이야기. 너무나 예쁜 이영애와 너무나 일반인처럼 나오는 이정재의 너무나 아픈 사랑 이야기. 나는 그래서 유체 이탈자가 액션 영화가 아니라 너무나 사랑하는, 사랑이 깊어 절대 지키고픈 한 남자의 이야기로 보였다.


그래서 오늘은 선곡은 장국영의 최애. 최고의 사랑이다.


https://youtu.be/W9jq62-MIUE



학창 시절 사진부 암실에서 선배들에게 허벅지를 난도질당하고 아픈 다리를 주무르고 있을 때 한 선배가 장국영을 들어보라며 주고 갔다. 겨우 일어나 암실 창가에 앉았다. 햇살이 창을 투과해 다리에 녹아 내려앉았다. 욱신거리는 다리 위에서 햇살에 비친 먼지들이 춤을 추었다. 앨범을 그 위에 올리고 ‘최애’를 들었다.


노래를 듣고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가 있을까 생각했다. 넋을 놓고 듣고 또 들었다. 햇살에 반짝이는 하얀 눈이 떠올랐고 그 속에서 빛처럼 부서지는 내 몸도 보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노래를 듣고 있으면 정말 너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 초라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그동안 나를 스쳐갔던 소중한 사람들과 소중한 시간들. 지나간 것들을 기억하고 추억한다는 건 그 순간을 눈물을 흘리며 몇 백번이나 떠올렸을까.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도 나에게는 최고의 순간이었을 그 어느 때. 그때를 기억하는 건 나에겐 찬란하고 빛나는 자산이다.


그때 맞이했던 포근한 온도와 나른한 햇살과 아카시아 꽃과 같은 향을 앞으로 만나지 못할지라도 나의 추억 속에서는 그 장소, 그 공간 그 시간이 그대로 우뚝 서서 나를 타이른다. 그리고 그곳에는 장국영이 열심히 무대 위에서 땀을 흘리며 ‘최애’를 부르고 있다. 넌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라고 하면서, 너 자체가 사랑이라고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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