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는 도쿄를 외로운 도시라고 했다.

봉 감독은 도쿄에 대한 인상은 외롭다는 것이었다. 인구 밀도는 높은데 반해 오히려 가장 외롭다는 느낌. 사람은 많지만 결국 아무도 없는 듯한 막연한 인상을 받았다.

그런 봉 감독이 말하는 도쿄를 세 명의 배우를 데리고 멋지게 표현을 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빠져들었던 영화는 레오 까락스 감독이 자신의 분신같은 드니 라방을 데리고 찍었던 ‘광인’였다. 광인이 도쿄 지하도에서 똥처럼 지내는 이야기.

그러나 인파 속 외로움을 영화로 만든 봉 감독의 히키코모리의 이야기 ‘흔들리는 도쿄’는 대단히 멋졌다. 이런 단편 초현실 적인 이야기가 이토록 여운을 남기다니.

도쿄에서 홀로 사는 주인공은 배달부와 절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빛이 싫어서 집밖에 나가지 않는 지가 십 년이 넘었다. 사람들의 얼굴을 보는 게 싫고 빛도 싫다. 그러다가 피자 배달부의 옷차림을 본 후 얼굴을 보게 된다.

주인공 마음의 흔들림을 일본 지진으로 표현을 한다. 그게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러다가 그 피자 배달부를 사랑하게 되고, 집으로 배달오지 않는 배달부를 찾아 10년만에 집 밖으로 나온 주인공이 보는 도쿄는 완전히 변해 있었고

관계라는 것이 전혀 형성 될 수 없을 것 같은 세상에서 주인공은 사랑의 버튼을 누른다. 그때 카메라는 아오이 유우와 카가와 테루유키의 얼굴을 천천히 보여준다.

이 옴니버스 영화들에 조연들도 출중하다. 고독한 미식가 씨부터 너무나 예쁜 얼굴을 지닌 이토 아유미와 개성 넘치는 배우 아라카와 요시요시(욧시는 좋아! 라는 말로 알고 있는데 요시요시는 좋아좋아 인가?ㅋ)등이 나온다.

도쿄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된 건 근래에 본, 이명세를 필두로 한 킬러스를 봤는데 끌리지 않는 거였다. 이상하다? 분명 내가 흥미를 가질만한 단편들로 묶인 영화들인텐데 그렇지 않았다.

이명세 전작 단편 영화, 유인영과 김성진을 데리고 찍은 ‘그대 없이는 못 살아’를 아주 재미있게 봤는데, 그럴거라고 봤는데 끌리지 않았다. 이상하다? 생각난김에 다시 오래전 옴니버스 단편들의 ‘도쿄’를 보게 되었다.

인간이 나무가 되고, 땅속에 광인이 살고, 모두가 집안에 틀어박혀 지내는 이야기는 또 봐도 재미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드라마 같은 일이다. 국내는 내란 쿠데타 문제로 하루도 편하지 않은데, 그 같은 일을 소설로 엮어낸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왕족의 에스코트에 극진 예우를 받았다. 한강은 수상소감에서 “어두운 밤에도 우릴 잇는 건 언어”라고 했다.


한국 사람이 책을 읽지 않는다고 했지만 2016년인가? 기준으로 한국은 세계 출판 7위였다. 아무튼 무지하게 책을 읽고 있다.


단지 읽는 사람이 계속이 읽는 것이다. 그 힘은 SNS에 있었다. 2, 30대 직장 여성들이 월급을 타면 책을 구입해서 읽고 그걸 SNS에 올리면서 문학이 알음알음 퍼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단한 힘을 가진다. 이번 집회에서도 20대가 압도적으로 나왔고, 그들의 외침은 평온하면서도 강했다는 것을, 세계 언론에서 보도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전에는 문예지나 계간지, 신문을 통해서 작가들이 새로운 작품을 발표하고 연재했다. 전쟁 중에도 책은 발간되었다.


티브이나 극장이 귀한 시절에는 사람들이 활자에 목을 맸다. 신문에 다음 회를 투고하던 소설가 황석영은 한 때 그 압박이 무서워 도망을 간 적도 있었다.


신문사가 발칵 뒤집어졌다. 황석영은 어딘가 다른 지역으로 가도 우편으로 다음 회를 신문사로 보내곤 했는데 어느 날은 그냥 사라진 것이다.


그 소설이 장길산이었는데 74년 7월부터 84년 7월까지 2,000회가 넘는 동안 매일 연재해야 했으니 황석영은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그때 신문사의 황석영 전담 기자가, 제가 잡아 오겠습니다. 라며 황석영 소설가를 찾아 나선 사람이 지금의 대작가인 김훈이었다.

현재 아직도 손으로 모든 소설을 쓰는 작가는 김훈과 조정래 정도다. 황석영은 아직도 손으로 소설을 쓴다며 김훈 자씩 하며 너스레를 떨곤 했다.


어떻든 한국의 대작가들도 지면을 통해서 신작을 발표하고 연재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2019년인가 2020년인가 50돌이 되는 문예지 ‘샘터’가 사라졌을 것이다.


올해 7월에는 월간지 문학사상이 신인문학상을 중단했다. 나도 단편 소설이 계간 풍자문학에 실리면서 2년 동안 소설을 연재했다. 근데 코로나시기에 그 오래된 계간지가 폐간되었다.

이런 안타까운 현상이 계속 이어지는 건 비판이 가득한 문학을 정부 차원에서 지원을 끊어 버려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한강의 소식은 드라마 같은 일이다. “문학작품을 읽고 쓰는 일은 필연적으로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에 반대하는 일”라고 했다.


그리하여 오늘도, 이런 힘든 시기에 구석진 곳에서 등을 구부리고 홀로 글을 쓰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제일 바보 같은 사람들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들임을 잊지 말길 바라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에게 있어 아마 제일 많이 본 영화가 이 영화 ‘하나와 엘리스’가 아닐까. 한 서른번쯤 봤을까. 아무튼 얼마나 많이 봤던지 대사를 어느 정도 외우고 있었다.

이 영화를 여러 번 보면서 볼수록 새로운 상징이 드러나고, 모든 장면과 대사가 은유로 되어있어서 볼 때마다 영화가 손가락으로 나를 오라고 하며 이번에 숨겨 둔 매타포를 찾아봐 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 영화에 관한 것들을 인터넷을 뒤지고 뒤져서 많은 정보를 찾아봤다. 나는 단지 영화가 좋아서 여러 번 봤지만 한국에 진정한 하나와 엘리스 마니아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니아들은 하나와 엘리스 영화 촬영지를 따라 다니며 여행을 하고 흔적을 블로그에 남기기도 했다. 마니아들은 대단했다. 하나와 엘리스 둘이 함께 등교하던 사쿠라 나무 밑이나 마크에게 본격적인 거짓말을 하던 카페에서 사진을 남기고 기록을 했다. 그때 이야 이 사람들 정말 대단하구나 생각했다.

이와이 슌지는 다 아는 것처럼 아톰의 창시자 데츠카 오사무를 너무 좋아해서 영화 속에서 표현을 했다. 역 이름을 데츠카 오사무와 관계된 이름으로 한다던가, 창 밖으로 거대한 아톰 풍선이 천천히 지나간다던가. 아리스가 진학한 학교 이름 자체가 데츠카 고교다.

이 장면은 이와이 슌지를 좋아하는 봉준호 감독이 옥자에서 오마주를 했다. 이 영화에는 일본의 유명 배우들이 잔뜩 나온다. 전부 카메오나 조연으로 등장해서 하나와 엘리스를 스포트해준다.

엘리스 엄마로 80년대 최고의 아이돌 윙크의 멤버 아이다 쇼코, 엄마의 남친으로 아베 히로시, 발레 선생님으로 기무라 타에, 히로스에 료코와 오사와 타카코 그리고 이토 아유미 등이 나와서 보는 재미가 두 배다.

극중 하나의 집은 온통 꽃밭이라 보면서도 왜 꽃이 저렇게 많지? 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그 의문은 10년 후에 하나와 엘리스 2가 나오면서 풀리게 된다.

거짓말이라는 걸 알게 되지만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는 자아처럼 영원히 거짓말을 계속 해줘도 괜찮은 마음의 마크와 이젠 모든 걸 비밀로 하고 가야함을 고하는 아리스가와 데츠코. 비록 거짓말로 시작된 사랑이었지만 거짓말을 하는 동안 정말 워 아이 니하게 되었어. 이젠 안녕.

이 영화가 탄생된 배경이 재미있다. 영화 속에 기획사에게 러브콜 받은 엘리스가 오디션장에서 키켓 초콜릿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 원래 이 영화는 키켓 광고용 단막극으로 이와이 순지가 극본 공모를 했다.

그때 사람들에게서 받아본 극본이 너무 좋았던 거였다. 그래서 죽 늘려 하나와 엘리스 영화가 되었다.

이와이 슌지는 대단히 꼼꼼하기로 유명하잖아. 하나와 엘리스를 보다보면 극에 드러나지 않는 마크의 감정도 그리고 마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지? 하는 것도 알 수 있다.

릴리슈슈 때 마지막 공연 장면에서 공연장에 들어가기 전 수많은 사람들을 연기하는 엑스트라 들에게 전부 다른 대사를 주었다고 한다. 엑스트라들이라 카메라에 잡히지 않을 수 있지만 혹시 잡힌다면 그 대사가 나올 수 있도록 전부 연기를 할 수 있게 했다.

혼자서는 밥 먹는 모습도 괴상한 아리스가와 데츠코의 한걸음 자아 나가가기 대작전 이야기. 20주년, 다시보니 더 재미있는 하나와 앨리스였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Effy 2024-12-23 0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최근에 재개봉 하면서 알게 됬는데 인생영화…

교관 2024-12-23 11:47   좋아요 0 | URL
아주 흠뻑 빠져서 보게 돼요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보게 되는 영화 중에 90년대 토이즈가 있다. 크리스마스로 시작해서 크리스마스로 끝나는 영화. 어떻게 이런 상상을 했을까 싶을 정도로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는 장면들과 배경 그리고 장난감들이 왕창 등장한다.

파스텔 톤의 예쁜 배경의 벽지와 자연과 건물을 보고 있으면 정말 어린이로 돌아가버린 착각이 든다. 거기에 로빈 윌리암스와 조안 쿠삭은 신체만 어른이 되어버린 어린이 같은 발상과 생각 그리고 행동으로 장난감 회사와 찰떡궁합이다.

뭔가 2014년 이후에 로빈 윌리암스가 나오는 오래된 영화를 보면, 특히 영화 속 로빈 윌리암스가 어린이처럼 해맑게 웃는 모습을 보면 어쩐지 밝은 슬픔이다. 이 영화에는 무엇보다 로빈 라이트의 젊을 적 모습을 볼 수 있다. 너무 예쁘다.

언제나 개성이 강한 역할만 한 것 같은데 이 영화에서는 로빈 윌리암스와 함께 마치 아직 덜 자란 어른처럼 이야기를 한다. 식당에서 돌고래 소리를 내는 모습이나 타조처럼 얼굴만 숨기는 행동은 재미있다. 그런 얼굴을 하고 말이다. 그런 얼굴이란 저세상 미모를 말한다.

그 외 존 쿠삭의 누나인 조안 쿠삭이 장난감을 사랑하는 로빈 윌리암스와 남매로 나온다. 이 집안 남매들이 전부 영화배운데 얼굴이 남자나 여자나 다 비슷한 것도(당연하지만) 신기하다. 또 초대 덤블도어가 죽는 바람에 2대 덤블도어의 마이클 갬본이 이 영화에서 최고의 빌런으로 나온다.

로빈 윌리암스의 작은 아버지로 나오는데 군인으로 최강 빌런이다. 엘엘 쿨 제이도 나오며, 제이미 폭스가 단역으로 잠깐 나온다.

이 영화는 밝고 맑고 예쁘고 아기자기한 영화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영화 속에서 로빈 윌리암스와 사람들이 마그리트 그림으로 분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마그리트가 보기에는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실은 우울한 내면을 드러내는 그림들이 많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도 위에서 말한 최강 빌런인, 회사를 물려받은 작은 아버지가 전쟁이 종식됨으로 할 일이 없엇져 버린 탓에 그만 장난감 회사를 진짜 전쟁도구로 사용하려는 계획을 짠다.

이 당시가 아마도 세계적으로 어린이들의 관심이 장난감에서 컴퓨터 사이버 게임으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어린이들은 컴퓨터를 가지고 현재의 레인보우나 총질 게임의 시초가 되는 게임에 빠져들었다.

영화 속에서 장난감을 실제로 무기화 시켜 장난감이 총을 쏘고, 그 장난감을 컴퓨터를 보고 어린이들이 조종을 하게 만드는 게 작은 아버지의 계획이었다.

이에 로빈 윌리암스와 사람들이 대항하는 이야기다. 보다 보면 안 그런 것 같은데 이상하지만 슬픈 장면들이 많다. 장난감들이 총을 쏘고 맞아서 파괴되는 장면들이나, 로빈 윌리암스와 로빈 라이트의 모습들이 묘하게 슬프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영화는 볼거리가 아주 많다.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장난감들이 전부 등장하며 마지막 전투신은 많은 공을 들여서 촬영을 했다. 눈이 즐거운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영화 속에서 꼭 사회를 비판할 필요는 없지만 이 영화는 그저 재미있고 하하 호호 할 줄만 알았던 당시 사람들의 머리를 망치로 땅 때리는 영화였다.

마지막에 장난감이 쏜 총을 맞고 동생인 조안 쿠삭의 머리가 날아가는 장면에서는 아주 놀랐다. 그러나 그건 반전.

마지막 엔딩곡이 너무 좋으니 꼭 듣도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박경리 소설가가 손주를 업고 창문틀에 원고지를 대고 글을 썼다.


사위인 김지하 시인은 옥고를 치르고 외동딸인 김영주는 남편의 옥바라지를 하고 있어서 손주를 돌 볼 사람은 박경리뿐이었다.


아기를 업고 밥을 해 먹을 수 없어서 소설가는 마른 북어포를 뜯어먹어가며, 손주를 달래 가며 서서 글을 적었다.


글을 적으려면 불빛과 탁자가 있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절실함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은 인간이 가지는 잔인함, 그리고 무력함, 인간이 인간에게 행 할 수 없는, 더 없는 잔인함에 관한 이야기였다.


잔인함이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 감정이라 생각한다. 거기에 어떤 무엇에 의해 불이 붙으면 자제를 잃고 확 타오른다. 그리고 본성과 본능에 의해 움직이게 된다.


사고하거나 생각하기를 꺼려한다. 나 이외의 타인이나 모든 것은 악으로 간주한다. 한 마디로 비극이다. 비극도 이런 비극이 없다. 김약국의 딸들을 보면 잘 나타난다.


박경리 소설가는 글을 써야만 하는, 그리고 글은 써지기를 원하고 있어다는 건, 절실함을 넘은 어떤 계시 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건 초기 작품들이 한국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미망인의 이야기가 많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박경리는 비극의 중심에 있었다.


예술은 잔인하다. 예술은 고통스럽게 한다. 삶도 잔인하다. 삶도 고통스럽고 잔인하게 인간을 몰아세운다. 사위인 김지하 시인은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몰래 썼다. 타는 목마름으로 몰래몰래 썼다. 그 이름 민주주의여.


박경리의 딸 김영주 토지문학 재단 이사장은 박경리의 ‘토지’를 알리기 위해 생을 보냈고, 2019년 73년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김지하 시인도 코로나 시기인 2022년 5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


민주주의가 뭔지 희미하고 흐려질 때 다시 불러보는 민주주의여. 김지하 시인이 떨리는 손으로, 떨리는 가슴으로, 떨리는 치 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 민주주의를 오늘 밤에 큰 소리로 외쳐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