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는 주차장의 차에 앉아서 또 한 번 웃음에 대해서 생각했다. 웃음을 짓지 않는다는 말을 어제 들었기 때문이다. 시동을 걸었다. 차는 오래되었고 수동기어다. 나의 차에서 자동은 고작 창문 정도다. 아직 카세트테이프를 넣어서 음악을 듣는다. 지금 꽂혀 있는 테이프는 장국영의 앨범이다. 장국영의 영화도 좋지만 나는 어쩐 일인지 그의 음악을 먼저 접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구매한 장국영의 앨범이 몇 개 된다. 카세트테이프로 말이다. 카세트테이프를 사람들은 오래되면, 또는 많이 들으면 늘어나서 듣지 못한다고 하는데 나는 대부분의 카세트테이프 앨범을 지금까지 잘 듣고 있다. 장국영뿐만이 아니라 맨하탄스, 스키드로우, 본조비, 이승환, 라디오 헤드 등 대부분 수없이 많이 들었지만 지금도 탈 없이 잘 듣고 있다. 음이 늘어지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내 생각에 카세트테이프의 음이 늘어나는 건 테이프의 문제가 아니라 그걸 트는 카세트 쪽의 문제가 아닐까. 전기로 돌아가는 전축이나 오디오라도 기계가 오래되면 문제가 생기는 법이다. 만약 한 가수의 한 앨범을 10년 넘게 계속 듣는다면 카세트테이프에 문제가 생길 수 있지만 여러 가수의 여러 앨범을 돌려가면서 듣는데 수많은 앨범을 매일 매시간 틀어버리는 건 오디오 쪽이니까 음이 문제가 있다면 카세트테이프를 돌리는 오디오 쪽이 느슨하게 늘어난 것이 아닐까.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위에서도 말했듯이 내가 가지고 있는 카세트테이프는 늘어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직도 잘 듣고 있다는 게 증거다. 특히 차에서 들으면 너무나 깨끗하고 좋은 음질로 음악이 들린다. 차는 오래됐고 카세트테이프지만 결과적으로 나오는 음악 자체는 좋다.     


 주차장에서 차를 몰고 나와서 늘 다니는 도로를 탄다. 징크스 같은 게 있다면 늘 보는 한의원이 문을 연 모습을 보지 않으면 그날 하루는 찝찝하다. 도로에서 반드시 한 번 멈추게 되는 신호등이 있다. 그 신호등은 항상 내가 가는 시간에 어김없이 빨간불이 된다. 거기서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한의원이 있는데 문을 열어 놓는다. 물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다. 일요일에도 일을 하는 나는 일요일에 문이 열린 모습은 본 적이 없다. 당연하게도. 어떻든, 평일에는 한의원 문이 열린 모습을 봐야 한다. 왜 그런지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징크스 같은 습관을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으므로 나 혼자만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은 누군가에게 말하는 게 아니다. 나 혼자 알고 있기에 비밀인 것이다.     

          

 한의원은 동네에 꼭 필요한 병원이다. 근육통이 심하거나 다리를 접질렸을 때는 신경외과보다는 한의원을 찾게 된다. 그리고 침을 맞고 물리치료를 받으면 금방 낫는다. 그러고 보니 나는 한의원에 안 간 지 십 년은 넘었다. 한의원은 동네 미용실 같은 분위기가 있다. 물론 다 그렇다는 건 아니다. 저기 보이는 문이 열린 저 한의원이 그렇다는 말이다. 한의원에는 40대 초반의 젊은 남자 한의사가 있다. 통통한 몸매에 씩씩하고 동네 어머니들에게 친절하게 설명하고 치료해 준다. 무엇보다 카운터에서 접수하고 보조를 해주는 직원들이 너무 좋아서 동내에서 인기다. 대기실에서는 미용실처럼 행복하고 즐거운 분위기가 흘러넘친다. 커피 향도 가득하다. 병원에서 행복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한의원은 닥터 오피스 중에서도 심각하지 않은 생활에 밀접한 치유를 하는 것이라 그런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다.    

 

 엘토르 씨는 에스파냐계 사람으로 한국으로 시집온 딸의 육아를 위해 이곳에 왔다가 눌러앉게 되었다. 오랜 시간 동안 노력을 해서 국적을 취득했다. 보험이 가능하게 되었다. 한국말은 도저히 늘지 않지만, 한의원에 가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다. 아기를 많이 안고 본다고 허리가 아프거나, 다리가 아프면 한의원을 찾았고 거기서 따뜻하게 환대해 주는 직원들 덕분에 말이 통하는 친구 한 명 없어도 이곳이 너무나 좋다. 엘토르 씨는 “이렇게 좋은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니! 내가 사는 곳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에요! 딸과 사위 덕분에 말년에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어요”라고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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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들어오는 풍경이 천장이 아니었다. 분명 예전에는 아침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모습이 천장이었다. 천장의 기하학적 무늬가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보였다. 그리고 한참을 본다. 저런 무늬라면 건물의 벽면을 전부 기하학적으로 꾸미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다 보면 오늘이 시작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누워서 천장을 보고 있으면 타이머가 라디오를 틀어 주었다. 이른 오전에 나오는 라디오는 고요할 것 같지만 출근 준비를 하는 청취자들 때문에 오히려 소란스럽다. 그게 나쁘지는 않다. 어차피 일어나야 하니까. 라디오는 정오가 되기 전, 오전 10시부터 12시 사이에 나오는 음악이나 멘트가 고요하고 조용하다. 적요와 잘 어울리며 커피와도 궁합이 좋다. 그런 음악이 10시부터 12시 사이에 나온다. 그 시간이면 출근할 이들은 전부 출근해서 바쁜 아침 업무를 끝낸 후거나, 집에 있다면 청소를 끝냈을 시간이다. 그 시간에 듣는 라디오가 하루 중에서 가장 호수의 수면처럼 잔잔하고 평온하다.     


 그런데 요즘은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아이패드의 화면이다. 예전처럼 똑바로 누워서 눈을 뜨지 않고 옆으로 누워 잠에서 깨어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아침에 죄다 똑바로 누워 있다가 일어나는데 나는 옆으로 누워서 눈을 뜬다. 눈을 뜨는 것과 거의 동시에 아이패드의 라디오가 커졌다. 일어나서 약을 하나 먹고 물을 마셨다. 일어나서 화장실에 가서 변기에 앉아서 볼일을 봤다. 하루의 시작은 이렇게 변기에서 시작된다고 과언이 아니다. 밤새 소화가 된 음식 찌꺼기들을 밀어내는 것부터 하루의 시작이다.   

  

 한 아파트에서 하루 동안 나오는 인간의 배설물량은 얼마나 될까. 나는 그걸 자주 생각한다. 생각만 할 뿐 입 밖으로 뱉어내지는 않는다. 모두가 싫어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달력의 뒤편 같은 것이다. 아마도 한 아파트에서 나오는 인간의 찌꺼기 양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 도시에서 나오는 배설물의 양은 상상 그 너머에 있다. 만약 하루만 정화 처리가 막히거나 고장이 나면 도시가 끔찍한 모습이 될 것이다. 그게 이틀, 한 달, 일 년이 된다면 도시는 그야말로 지옥 그 자체가 되지 않을까. 한 집 안에서도 배설한 다음 변기의 물이 내려가지 않으면 큰일 난 것처럼 군다. 하물며 도시의 변기가 전부 막혀 버린다면 이건 정말 큰 일인 동시에 엄청난 일이다. 어째서 영화감독들은 재미없는 영화 말고 이런 영화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일까. 세상의 수많은 재앙이 있지만 인간이 배설해 놓은 인간 찌꺼기가 인간을 멸망시키는 이야기는 제대로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재빠르게 씻고 옷을 갈아입고 이불을 갠다. 이불을 개는 행위는 나에게 있어 일종의 쾌락 같은 것이다. 끌과 끝을 맞추어서 제대로 개 놓으면 이상하지만, 기분이 짜릿하다. 다른 것은 그렇지 않은데 이불은 끝과 끝을 맞추어서 칼처럼 개 놓는 게 좋다. 그렇게 습관이 되었다. 라디오에서 김성호의 노래가 나온다. 웃는 여잔 다 예쁘다고 김성호는 노래를 부른다. 김성호의 감성이 묻어나는 노래를 듣고 있으면 정말 웃는 모습이 다 예쁠 것 같지만 실은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 반대가 더 많다.    

 

모르는 사람이 나를 보며 웃음을 보일 때 가장 먼저 드는 건 경계다. 나에게 뭔가를 바라거나 물건이나 판매상품을 팔아버리려고 웃음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뒤에서 무방비로 들리는 타인의 웃음소리는 폭력에 가깝다. 웃는 모습이 예쁜 사람은 사실 잘 없다. 웃음이 예뻐지려면 훈련이 필요하다. 훈련 없이 예쁜 웃음을 짓는 사람은 정말 몇 없는 것 같다. 웃음이 어울리는 사람은 어린이들이다. 어린이 시기를 지나고 나면 웃음이란 상대방으로 하여금 몰이해와 경악을 유발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침에 나오는데 나를 모르는 누군가가 나를 향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악의는 없는 웃음이다. 나이는 60대 중후반 아주머니다. 물론 나는 저 아주머니를 모른다. 저 아주머니가 나에게 웃음을 보이는 건 아마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어서 웃음을 지어 보였을 것이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어도 남자들은 웃음을 잘 보이지 않는다. 웃음이 어색하기 때문이다. 나도 웃음 대신 아주머니에게 고개를 약간 숙여 인사를 건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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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다는 건 인간에게 어떤 의미일까.

어린이 때에는 걷기보다 주로 뛰어 다닌다. 높은 곳을 보면 오르려 한다. 미끄럼틀이 있으면 어린이들은 이상하지만 미끄럼틀을 기어 올라간다. 계단으로 오르지 않는다. 에너지가 넘친다. 그날 하루에 에너지를 전부 방출해서 방전이 된 다음에야 잠이 든다. 그래서 쿨쿨 잠을 자며 중간에 깨지도 않는다.

그러다가 어른이 되어 갈수록 뛰기보다 걷게 되고 나중에는 이 마저도 귀찮아 하게 된다. 나이가 들어서 뛰는 사람들은 급한 일이 있는 사람과 조깅을 하는 사람들 뿐이다. 일상에서 아이들처럼 뛰어 다니지 않는다. 하지만 두 다리가 있으니 늘 걷게 된다.

2018년 백영옥의 말과 글에서는 ‘어디에 살 것인가’ 칼럼이 실렸다. 백영옥은 쇼핑몰을 종종 걷는다. 미세 먼지 때문이다. 이상한 건 쇼핑몰 산책은 30분만 해도 피곤해진다는 것이다. 걷는 걸음걸이로 보면 공원을 걷는 것과 비교도 되지 않게 적게 걸었는데도 그렇다.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읽은 유현준 교수의 ‘어디서 살 것인가’에서 이런 문장을 만났다.

“우리가 걷고 싶은 거리가 어떤 거리인가에 대한 답이 있다. 걷고 싶은 환경이 되려면 걸을 때 풍경이 바뀌어야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쇼핑몰에 대형 서점이나 멀티플렉스 극장이 있는 이유는 ’변화하는 자연‘이 없기 때문이다. 계절을 바꿀 수 없으니 극장의 상영작이나, 서점의 책이라고 바꾸는 것이다. 쇼핑몰이 인테리어를 자주 리모델링하는 이유도 그런 맥락일 것이다. 라면 백영옥은 소설가는 뉴욕의 건축과 뉴욕에서는 서울보다 더 자주 걷게 되는 이야기를 한다.

걷는 것, 인간이 도심 속에서 걷는 다는 행위, 인간이 걷는 다는 것에서 사람은 어디에서 살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한다. 더불어 계절마다 시시각각 다르게 변하는 자연 속에서 걷는 것과 인공적으로 바꾸어주는 거대한 쇼핑몰을 걷는 것의 차이는 걸어본 사람만이 그 차이와 변화를 알 수 있다.

나 역시 십 년 넘게 트레드밀이 아닌 야외에서 조깅을 하고 있다. 계절의 변화를 알 수 있고 그날그날의 변화까지 느낄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사는 곳은 바닷가에 인접해 있고 강변도 있어서 조깅을 하거나 걷기에는 안성맞춤이다.

굳이 첩첩산골로 들어가서 자연인처럼 생활하지 않아도 쇼핑몰이 아니라 걸을 수 있을 때, 버스 두 세 코스 정도의 거리는 매일 걷는다면 걷기의 소중함과 위대함(까지는 아니지만)을 알지도 모른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은 언젠가 달리지 못하는 날이 온다. 그전까지 실컷 달리고 싶다. 그러려면 달릴 수 있는 거리의 공간이 있는 것에 살아야 한다. 달리기 위해서 자동차를 타고 먼곳까지 가야 한다면 그건 너무 힘들고 귀찮은 일이다.

그렇게 달리다가도 어느 날 이제 달리지 못하겠구나 하는 순간이 또 온다. 더 이상 몸이 달리는 것을 받아주지 않는다. 그때는 걸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걷지도 못하는 시기가 오면 이제 누워서 보내야만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인간의 생이라는 게 긴 것 같지만 지난 십 년을 보면 너무나 빠르게 지나간다. 한 시간은 지루한듯 한데 일 년은 금방이다.

매일 한 두 시간씩 잘 걸어 다닌다면 우리의 삶이 조금은 달리 보이지 않을까. 걷다보면 눈에 들어오는 풍경의 시야도 넓어지는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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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를 최소화해서 소설 쓰며 살아가는 이모와 인간관계가 이제 막 시작하려는, 엄마와 아빠를 사고로 잃은 조카의 동거 이야기


인간관계라는 건 미묘하고 어려우며 너무나 복잡하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우화의 강’으로 토해낸 마종기 시인의 시에서 그 강은 아름답고 고귀하지만 실제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골이 있고 그 골에는 불순물이 잔뜩 껴 있고, 타인과의 이해관계가 끈적거리는 타액으로 흐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는데 이 영화의 이모와 조카의 사이도 그렇다. 


서로 친밀해질 수 없는 그 사이를 조금씩 시간을 들여 천천히 간극을 좁혀 나가는 이야기.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아주 모호하다. 운무가 가득한 산길을 거니는 분위기라고 할 수 있다. 저 앞에 무엇이 있는지 가봐야 알 수 있다. 짐작으로는 알 수가 없다. 


대부분 자기 방식으로 자기 방식에 의한 표현법으로 상대방을 대하지만 언제나 성공하지는 않는다. 조카는 친구에게도 제일 먼저이고 싶고, 이모에게도 제일 먼저이고 싶지만 언제나 현실은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흐른다. 


이모는 죽은 자신의 언니와 너무나 안 좋게 자매 관계를 끊어버려서 조카라도 마음을 쉽게 열 수 없다. 가족은 언제나 힘인 동시에 짐이다. 마음을 여는 존재이지만 마음을 다치게 하는 존재가 가족이다. 


조카는 고민이 많다. 둘도 없는 친구가 고등학생이 되어 일 순위가 자신이 아닌 다른 애가 되고, 음악을 하고 싶어서 작사를 해서 이모에게 보여주면 바로 응답이 오지 않고 생각을 하는 모습에 고민이 많다. 왜 바로 칭찬을 하지 않지?


외향적인 성격이란 밝은 성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밖을 더 생각하는 성격이고 내향적인 성격이란 자신을 더 생각하는 것이라는 것에 이모와 조카는 다가가는 영화다. 


영화는 인간과 인간의 경계를 말한다. 그 경계가 질기기도 하고 연하기도 하다. 홧김에 시작한 불편한 동거가 시간을 들여 천천히 조금씩 타인을 통해 자신을 더 돌아보는 이야기. 자신을 보면 비로소 상대방이 보이는 이야기. 


영화는 만화 원작으로 이렇다 할 사건이나 이벤트가 없다. 그럼에도 거의 두 시간 삼십분이 넘는 시간이 지속되어서 지루할 수 있다고 생각되지만 나는 흐뭇하게 봤다. 이젠 연예인이 아니라 진정 배우가 된 각키와 조카 역의 이코이의 세대차이나는 동거 이야기 ‘위국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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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렌 코번 원작의 시리즈다. 늘 그렇듯이 보는 내내 빠져들어 아주 흥미롭다. 이 작가의 스타일을 조금 알게 되었다. 패턴이랄까 등장인물들의 비밀스러운 과거와 진실을 파헤치고픈 주인공들 그리고 자식들이 나오며 부모와 마칠을 겪는 사춘기들이라 비밀스러운 사건에 휘말리고 부모들은 자기 자식을 지키기 위해서는 친구고 뭐고 다 필요 없다는 식의 개인주의적 위선을 보인다. 대체로 시리즈 대부분이 그렇다. 그런데 상상력이 대단해서 그런지 시리즈를 잘 만들어서 어떤 시리즈를 보더라도 훅 빠져든다.

이번 시리즈 역시 폴란드 시리즌데 봤던 배우들이 왕창 나오기에 같은 배우를 돌려 가면서 이 원작자의 시리즈에 나오나 싶었는데 지난번 ‘숲’ 시리즈의 뒷이야기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때 주인공의 어린 딸 카야가 고등학생이 되고 친구가 죽으면서 ‘숲’ 시리즈에서 주인공이었던 검사 아빠는 여기서는 뒤로 물러난 조력자 같은 조연으로 등장하고

학생인 딸 카아야 주인공 한 사람으로 중심에서 사건에 접근한다. 부모는 자신의 자식이라 자식에 대해서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한다. 우리나라 ‘백설 공주에게 죽음을’ 드라마와 비슷하다. 자식들의 실수, 잘못, 비밀 때문에 사건이 일어난다.

내가 라디오를 매일 듣는데 라디오에서는 초등생 아들이 엄마 생일 맞아 처음으로 아침에 계란 프라이를 해줬다며 행복한 사연이 소개되는 반면 스레드에서는 아들을 처음 키우는데 도대체 아들은 왜 그러냐 하도 씻지 않아서 욕실에서 몸 샤워하라고 했더니 머리 팔 다리 빼고 몸만 씻고 나오질 않나, 머리 감으라고 했더니 머리 중간에 물만 묻히고 나와서 마찰이 늘 일어난다는 이야기

그 밑에 댓글에 아들 셋 키우는 맘인데 그 시기를 지나면 반 친구들 사춘기 냄새난다며 자신에게도 날 거라며 욕실에서 한 시간 넘게 있는다며 사춘기 아들과의 마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이런 문제는 당사자는 힘들고 짜증 나고 숨막히지만 자식이 있는 가정이라면 늘 거쳐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부모가 자신을 너무 간섭하고 감시한다고 느껴 탈선을 하게 되면 문제가 커진다. 특히 요즘처럼 청소년 도박에 빠지기 쉽고, 약물에 노출이 많은 지금은.

우리 집 애를 잘 아는데 우리 집 애는 그러지 않는다. 친구를 잘못 만나서 그렇다는 이야기를 꼭 한다. 우리 애의 잘못입니다. 우리가 책임지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부모는 없다. 모두가 남의 탓이고 내 자식은 깨끗하다고 한다.

아무튼 이 시리즈 역시 6부작으로 깔끔하게 끝나고 시작은 죽음으로 출발하여 많은 등장인물의 복잡한 사건이 나오며 하나씩 떡밥의 회수가 된다. 내가 할렌 코번의 시리즈를 뒤죽박죽으로 보고 있는데 만약 이 시리즈를 먼저 보고 숲 시리즈를 봤다면 좀 망했겠지.

일부 어른들의 문제라면 유아기든 사춘기든 자신도 겪었다며 현재의 사춘기 애들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한다. ‘위국일기’에서 다 너를 위해서 모두에게 엄마의 죽음을 알렸다는 선생님 식이다. 자식은 부모를 속이려 들고 부모는 자식의 모든 것을 다 알려고 한다.

이 시리즈는 미스터리지만 부모 자식의 심리가 잘 표현되었다. 그게 미스터리 스릴러라서 더 재미있다. 마지막에 다 사건이 마무리되고 5분 정도 남겨두고 거기서 반전에 반전이 나온다. 이 시리즈에도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전부 의미가 있는 캐릭터인데 초등생 어린 딸까지 마지막에 한 건 해 버리는 ‘홀드 타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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