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다는 건 인간에게 어떤 의미일까.
어린이 때에는 걷기보다 주로 뛰어 다닌다. 높은 곳을 보면 오르려 한다. 미끄럼틀이 있으면 어린이들은 이상하지만 미끄럼틀을 기어 올라간다. 계단으로 오르지 않는다. 에너지가 넘친다. 그날 하루에 에너지를 전부 방출해서 방전이 된 다음에야 잠이 든다. 그래서 쿨쿨 잠을 자며 중간에 깨지도 않는다.
그러다가 어른이 되어 갈수록 뛰기보다 걷게 되고 나중에는 이 마저도 귀찮아 하게 된다. 나이가 들어서 뛰는 사람들은 급한 일이 있는 사람과 조깅을 하는 사람들 뿐이다. 일상에서 아이들처럼 뛰어 다니지 않는다. 하지만 두 다리가 있으니 늘 걷게 된다.
2018년 백영옥의 말과 글에서는 ‘어디에 살 것인가’ 칼럼이 실렸다. 백영옥은 쇼핑몰을 종종 걷는다. 미세 먼지 때문이다. 이상한 건 쇼핑몰 산책은 30분만 해도 피곤해진다는 것이다. 걷는 걸음걸이로 보면 공원을 걷는 것과 비교도 되지 않게 적게 걸었는데도 그렇다.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읽은 유현준 교수의 ‘어디서 살 것인가’에서 이런 문장을 만났다.
“우리가 걷고 싶은 거리가 어떤 거리인가에 대한 답이 있다. 걷고 싶은 환경이 되려면 걸을 때 풍경이 바뀌어야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쇼핑몰에 대형 서점이나 멀티플렉스 극장이 있는 이유는 ’변화하는 자연‘이 없기 때문이다. 계절을 바꿀 수 없으니 극장의 상영작이나, 서점의 책이라고 바꾸는 것이다. 쇼핑몰이 인테리어를 자주 리모델링하는 이유도 그런 맥락일 것이다. 라면 백영옥은 소설가는 뉴욕의 건축과 뉴욕에서는 서울보다 더 자주 걷게 되는 이야기를 한다.
걷는 것, 인간이 도심 속에서 걷는 다는 행위, 인간이 걷는 다는 것에서 사람은 어디에서 살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한다. 더불어 계절마다 시시각각 다르게 변하는 자연 속에서 걷는 것과 인공적으로 바꾸어주는 거대한 쇼핑몰을 걷는 것의 차이는 걸어본 사람만이 그 차이와 변화를 알 수 있다.
나 역시 십 년 넘게 트레드밀이 아닌 야외에서 조깅을 하고 있다. 계절의 변화를 알 수 있고 그날그날의 변화까지 느낄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사는 곳은 바닷가에 인접해 있고 강변도 있어서 조깅을 하거나 걷기에는 안성맞춤이다.
굳이 첩첩산골로 들어가서 자연인처럼 생활하지 않아도 쇼핑몰이 아니라 걸을 수 있을 때, 버스 두 세 코스 정도의 거리는 매일 걷는다면 걷기의 소중함과 위대함(까지는 아니지만)을 알지도 모른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은 언젠가 달리지 못하는 날이 온다. 그전까지 실컷 달리고 싶다. 그러려면 달릴 수 있는 거리의 공간이 있는 것에 살아야 한다. 달리기 위해서 자동차를 타고 먼곳까지 가야 한다면 그건 너무 힘들고 귀찮은 일이다.
그렇게 달리다가도 어느 날 이제 달리지 못하겠구나 하는 순간이 또 온다. 더 이상 몸이 달리는 것을 받아주지 않는다. 그때는 걸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걷지도 못하는 시기가 오면 이제 누워서 보내야만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인간의 생이라는 게 긴 것 같지만 지난 십 년을 보면 너무나 빠르게 지나간다. 한 시간은 지루한듯 한데 일 년은 금방이다.
매일 한 두 시간씩 잘 걸어 다닌다면 우리의 삶이 조금은 달리 보이지 않을까. 걷다보면 눈에 들어오는 풍경의 시야도 넓어지는 것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