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과의 관계가 깊은 나라들의 움직임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미국이나 러시아, 아랍에미리트 등 많은 나라들이 코비드 사태 진압의 도움을 받고 있다. 지난 30일 에티오피아의 아비 아흐메드 알리 총리가 한국과의 정상 통화를 요청했다. 아직 에티오피아는 26명의 확진자 밖에 없지만 아프리카는 본격적인 증가 추세로 넘어가고 있다. 그로 인해 문제는 막대한 경제 피해를 입고 있으며 예상되고 있다


아비 총리는 전화 통화에서 형제 국가의 대응을 보고 자부심을 느꼈다, 접촉자를 끝까지 추적해 치료하는 모범적 대응이 인상적이다며 한국의 발 빠른 대응을 극찬하는가 하면 대응 노하우를 구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했다고 한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에티오피아는 꼭 도와야 한다는 반응이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에티오피아를 반드시 도와야 하는 나라로 꼽았을까


에티오피아는 한국전쟁 당시 유엔을 통해 한국을 전투 지원했던 16개 국가 중 하나였다. 에티오피아는 과거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했을 때 국제연맹에 이탈리아의 부당한 침략을 알리며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외면당하고 1935년부터 1945년까지 이탈리아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이때의 아픔을 잊지 않았던 셀라시아 황제는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당한 이유로 침략을 받는 나라가 있다면 반드시 도와야 한다며 에티오피아 내부에서 일부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음에도 1950년 8월 파병을 결정했다


황제는 에티오피아군의 정예부대인 황실 근위대에서 지원자를 뽑아 ‘강뉴 부대’를 만들었다. 강뉴 부대의 강뉴는 ‘Kangnew’로 ‘혼돈에서 질서를 확립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셀라시아는 강뉴 부대 파병 전 부대를 향해 이같이 말했다


가거라!

살아서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고 전부 거기에 가서 모두 맹렬하게 싸워 전사하거라.

너희들의 죽음의 대가로 저들에게 ‘자유’라는 것을 안겨주어라.

우리 민족이 과거 이탈리아인들에게 무엇을 당했는지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그 고통을 뼛속까지 알고 있을 것이다.

짐도, 너희 모두도 잘 알고 있다.

그걸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면 그것은 침략자들보다 못한 더러운 위선자일 뿐이다


이렇게 황제의 명으로 한반도에 파병된 강뉴 부대는 6,037명. 3개 대대로 나뉘어 파병되었다. 121명의 전사자, 536명의 부상자를 낳았지만 단 한 명의 포로 없이 253번의 전투에서 전승하였다


강뉴 부대는 또 그들 자신의 월급을 모아 전쟁고아들을 돌보는 ‘보화원’이라는 보육원을 차렸다. 에티오피아 강뉴 부대는 한국과 미국의 부대표창을 모두 수여받았는데 이때의 의리를 잊지 않고 코비드 사태에 에티오피아를 도와주어야 한다고 한국인들은 주장하고 있다


현재 한국과 의리를 지킨 미국이나 아랍에미리트, 루마니아 등의 국가는 이미 지원을 받으며 사태를 통제하고 있고 한국의 우선순위에 들어있는 다른 국가들 역시 하나 둘 지원을 받으며 사태를 진압해 나갈 기미를 보이고 있다


한국을 무시하기만 했던 중국, 일본, 베트남, 스웨덴 등의 국가는 점점 걷잡을 수 없는 사태의 악화 속에서도 손 놓고 지켜만 보는 분위기가 짙어지고 있다. 보통 선진국이나 국가 간의 질서는 세계대전 이후 결정이 되었다


기존의 선진 국민이라 불리며 높은 수준으로 생활하는 선진국도 불같이 확장하는 감염병 앞에서는 질서가 무너지고 사재기와 이기주의가 만연하고 있다. 이 사태가 진정되고 난 후 세계의 질서 추이는 어떻게 어떤 식으로 바뀔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한국인이 이전만큼 무시당하거나 한국을 변방의 작은 나라로만 보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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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디 알렌의 영화는 어느 시점부터 마치 홍상수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홍상수는 배우고 똑똑한 지식인들의 찌질함을 대놓고 표방하는 반면 우디 알렌은 드러나지 않는 찌질함을 대사로 쏟아내는 것 같다. 인간 그 하나로 자신을 표출하기 힘들어서 과정에서 프로이트, 디킨즈, 토마스 홉스와 논리와 명료한 해석과 해법과 지성을 들먹인다


하지만 결국 영혼이 움직이는대로 이성과 논리는 사랑이라는 기묘한 감정에 끌리게 되고 결국 속에 있는 찌질함이 드러난다. 찌질함이 나쁘냐?라고 한다면 또 잘 모르겠다. 찌질함은 옳고 그르고의 문제도 아니고 맞고 틀리고의 문제도 아니다. 찌질함이란 발을 디디고 있는 불확실성과 비슷하다. 찌질함으로 생활이 끊어지지 않고 죽 이어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찌질함 때문에 상대방으로 하여금 인상을 찌푸리게 해서 인생의 실패를 늘 안겨주기도 한다


찌질하다,를 찾아보면 ‘지지리도 못난 놈‘이란 뜻이다. 으이그 이 못난 놈은 찌질한 놈으로 통하는 것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 찌질한 놈들이 영화나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되어 나타나게 되었다. 우디 알렌의 영화들 속에는 찌질한 주인공이 자신의 사랑 또는 삶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많다. 또 주인공은 원래 사랑하는 사람이 늘 있다. 약혼자라든가 애인이라든가


찌질함으로 무장을 한 주인공을 좋아하는 약혼자는 새로운 사랑에 의해서 걷어 차이게 된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차이는 약혼자는 대체로 똑똑하고 현명하며 예쁘거나 잘 생겼고 차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주인공이 그들에게 버림을 받는 것처럼 영화는 흘러간다. 아주 교묘하게 영화를 잘 만드는 우디 알렌이다


우디 알렌의 초기작들을 보면 본인이 직접 등장하여 찌질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한국의 지지리도 못난 놈을 홍상수가 잘 만들어낸다면 아마도 미국의 찌질함은 우디 알렌이 아닌가. 그 와중에도 매직 인 더 문라이트 속에서 엠마 스톤이 몸을 살짝살짝 흔들며 춤을 추는 장면은 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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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모두가 믿기지 않았던 그날 홍콩에서는 장국영의 추모에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사스 때문이었다. 사스가 인류를 공포로 몰아넣었지만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고 장국영의 믿기지 않는 추모행렬에 동참했다.



17년이 지난 지금 그를 추억하는 사람들이 오늘도 마스크를 쓰고 있다. 장국영이 살아있었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은 걷고 장국영은 47살의 아름다운 나이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팬들의 곁을 떠났기에 언제나 그 모습으로 기억된다.


이반이었던 장국영은 금지옥엽에서 이반이 아닌 연기를 했다. 금지옥엽의 주제곡인 ‘추’는 내내 좋아서 유튜브 덕분에 왕왕 듣고 본다. 남자로 장국영을 깜쪽같이 속인 원영의가 피아노 앞에서 어설프게 연주를 하니 장국영이 피아노 앞에서 ‘추’를 부르고 비틀스보다 더 신나게 ‘트위스트 엔 샤우트’를 부른다. 우리의 기억 내면에 장국영은 그렇게 노래를 부르고 있다.


데이와 우희의 삶을 갈라놓는 것이 힘들었던 패왕별희의 도즈. 우희로서만이 패왕의 온도를 느끼는 인생이지만 변혁과 전통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두려운 병처럼 퍼지는 집단사고 속에서 무서운 건 자신 속에 있는 또 다른 자신의 도즈를 연기했던 장국영. 보는 동안 도즈의 감정에 휩쓸려 파도처럼 너울거렸던 패왕별희.


고등학교 시절 사진부 암실에서 주성치가 좋아서 가유희사 같은 시나리오를 꼭 써보리라. 가유희사 속에도 다정한 장국영이 나와서 주성치와는 또 다른 웃음을 줬다. 17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은 마스크를 꼭꼭 쓰고 다닌다. 마치 장국영을 추모라도 하듯이.


2020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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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되면 봄나물에 밥을 비벼 먹는 맛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그래서 짧은 봄이 야속하기만 하다. 제철음식만큼 맛있는 음식이 없지만 제철의 봄나물은 숟가락을 멈추지 못하게 한다. 그리하여 매년 봄이 지나면 여름에 죽어라 조깅을 더 해야 한다.


봄에 나오는 미나리도 맛있고 달래도 맛있지만 냉이가 가장 봄의 한가운데 서 있게 한다. 특히 된장에 무친 냉이는 봄날의 곰이 된 기분이 들게 한다. 냉이무침을 한 접시씩 먹어 치우는데 그렇게 먹지 않으면 다음 일 년을 기다리는 동력이 달리는 느낌마저 든다.


냉이는 터프한 음식이다. 겨우내 꽁꽁 언 땅을 뚫고 올라와 생명을 노래한다. 봄에는 냉이무침에 밥을 비벼 먹는 것만큼 행복한 것은 없다. 따지고 보면 냉이 자체로는 식감이 좋은 것도 아니고 아주 맛있지도 않다. 오히려 뿌리가 씹혀 태어나서 생전 처음 준비 없이 냉이를 먹는다면 퉤 뱉어낼지도 모른다.


봄나물 무침은 의외로 조물조물 만들기가 까다롭고 맛을 내는 것도 어렵다. 그러므로 냉이가 된장과 만나 무침으로 상에 오르면 고단한 음식의 과정을 잊고 밥에 슥삭슥삭 비벼 된장찌개와 함께 먹으면 천상의 맛이다. 봄날의 냉이무침은 터프하지만 맛 좋은 음식이다.


냉이무침의 맛을 제대로 알려면 미각보다는 경험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봄마다 쌓이고 쌓인 경험치가 봄이면 냉이무침을 맛본다는 기대를 한껏 끌어올린다. 냉이는 오롯한 자연의 맛이다. 좋아한다고 해서 즐겨 먹지도 못한다.


그러니 짧은 봄날의 기간 동안 최대한 즐겨야 한다. 기껏해야 냉이지만 가격도 저렴하고 맛은 좋고 건강한 식품이라 훌륭한 음식이 된다. 냉이무침의 소박함이 입안을 풍부하게 하니 어찌 훌륭하지 않을 수 있을까. 냉이무침으로 버무린 비빔밥으로 세련된 목 넘김을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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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10년도 더 된 ‘아이팟 클래식‘으로 음악을 듣고 다닌다. 특히 조깅을 할 땐 폰은 없어도 ‘아이팟 클래식‘은 있어야 한다. 음악을 들으며 저 먼 앞으로 달려가는 기분이 꼭 상쾌하고 좋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굳어진 하나의 체제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는 말이 가장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음악이 있으니 달리는 시간과 거리가 단조롭지는 않다. 나쁘지 않다는 말이다. 내가 손을 뻗을 수 있는 나의 문화권을 조금이라도 덜 불행한 쪽으로 주파수를 맞춰 놓는 것이다.


아이팟 클래식을 처음 구입했을 때 사람들은 신기하게 생각했다. 시간이 훌쩍 지난 지금 아이팟 클래식을 보면 역시 사람들은 신기하게 본다. 처음과 현재의 신기한 결과는 같지만 이유는 분명히 다르다. 이 작은 기기 안에 몇 천곡의 음악이 들어가다니, 하며 신기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은 요즘 이런 걸로 음악을 들어? 불편하지 않아? 그래도 아이팟 클래식이라니 신기하네, 하며 본다.

 

그 이전에 몇 개나 몹쓸 기기로 전락해버린 엠피쓰리가 있었다. 또 그 이전에는 카세트 플레이어가 있었다. 요즘도 카세트 플레이어로 음악을 듣고 있는데 아직 카세트테이프가 많이 있고 잘 돌아가기 때문이다. 요컨대 장국영이라든가 라디오헤드 초기작이나 임펠리테리 같은 음악은 카세트로 듣고 있다.

 

음반을 구입했던 시기를 떠올리면 좋아하는 음반이 나오면 돈을 모아 레코드점으로 가는 발걸음은 가볍고 즐거웠다. 음반을 구입하는 행위의 세계에 한 번 발을 들여놓으면 쉽게 빼기가 힘들어져 버린다. 구입하고자 하는 음반을 구입하여 손에 꼭 쥔 다음 다른 음반들을 둘러보고 새로운 음반을 헤드 셋으로 들어본다. 집이나 학교 또는 내가 활동하는 반경 내에서 벗어나야만 할 수 있는 행위의 세계이기에 쉽게 발을 빼기는 힘들다. 무엇보다 그 세계에서 발을 빼기가 싫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음반을 구입하러 가는 레코드점이 한 군데여서 주인은 음반을 구입하지 않고 그저 음악을 듣기만 하고 나와도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사막의 전갈처럼 생긴 주인장은 나의 취향을 알아서 포스터를 간혹 주기도 했다. 그렇게 되려면 그 한 레코드점을 시간을 들여 들락날락거려야 하고 의도치 않게 그랬다. 후에 대형 레코드점이 생겨나고 백화점에도 레코드점이 들어와서 사람들을 현혹했지만 한 번 가던 곳에 계속 가는 회귀성을 보인 나는 그곳의 전갈처럼 생긴 주인장에게 꽤 사랑받았던 모양이었다.

 

주인장은 내가 좋아하는 팝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지만 클래식에 대해서는 조예가 깊었다. 밖으로 비어져 나온 스피커에서는 클래식이 늘 흘렀고 가끔 이런 클래식을 권해 주기도 해서 구입하기도 했다. 그때 구입한 음반이 모차르트 클라리넷 연주곡과 드뷔시의 음반이었다. 그 때문인지 아이팟 클래식 안에는 리스트와 드뷔시와 모짤트와 쇼팽의 몇 곡은 소장하고 있다.

 

유튜브가 발달한 요즘에 들고 다니며 유튜브로 음악을 접하고 듣고 볼 수 있는 환경 속에서 누가 아이팟 클래식으로 일일이 음악을 듣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아이팟 클래식에 마음을 처음 빼앗겨 버린 후로 그 마음 역시 쉽게 도망가지 않고 있다. 케이스를 벗겨내면 아직 새것 같다. 스크래치가 잘 가는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금 간 곳 하나 없이 아직도 구입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한 번도 떨어트린 적도 없다. 그러고 보면 대체로 기기나 카메라 같은 것은 아주 깨끗하게 사용을 하는 편이다. 아이패드는 보호필름도 부착하지 않고 사용하지만 구입했을 당시처럼 깨끗하다.

 

아이팟 클래식은 카세트테이프처럼 단종이 되어 더 이상 생산하지 않지만 손에 쥐고 있고 그것으로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나름의 존재감을 뿜어낸다. 음악을 듣는 방식은 오래전이나 지금이나 그렇게 변하지 않았다. 혼자 듣고 혼자 좋아하고 혼자 따라 부르곤 한다. 학창 시절에 음악을 남다르게 좋아했던 친구들이 몇 있었다. 그들은 나와는 다르게 형이나 누나의 영향을 받은 것에 비해 나는 어쩌다가 혼자서 음악을 듣게 되었고 찾아보게 되는 경우에 속했다.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매개가 라디오였기 때문에 라디오를 듣는 것에 필사적이었던 학창 시절이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닥치는 대로 들었다. 특히 팝을 들려주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주파수를 맞춰가며 수업시간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라디오를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친구들도 별로 없었다. 그런 나에게 아버지는 헤드 셋과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를 선물해주었다. 그때가 국민학교 6학년 때였다. 아버지는 내가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세계로 들어갈 것이라는 걸 알았던 것 같았다. 요즘이야 초등학생들이 유튜브를 하고 영상을 편집하니 음악 듣는 것쯤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 힘들지 몰라도 오래전에는 국민학생이 운동장 벤치에 앉아서 팝을 듣고 있으면 평범한 눈빛을 받지만은 않았다.


내 주위에는 적극적으로 팝을 듣는 사람이 없었기에 팝을 듣고 궁금한 것이 있어도 어딘가에 물어볼 만한 사람은 없었다. 요컨대 비틀스는 왜 4명인가, 어디에서 이런 노래를 만들었을까? 같은 궁금증은 그대로 가슴에 안은 채 혼자서 골똘히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고등학교 때 사진 부여서 암실에서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보낸 경우가 허다했다. 암실은 3학년 선배들의 것이었지만 일요일에는 차지할 수 있었다.


그때를 생각해보면 암실에서 아무한테도 방해받지 않으며 좋아하는 음악을 실컷 듣는다는 행복 때문에 일요일에도 학교를 자주 찾았다. 장국영의 노래를 들었고 토토의 노래를 들었고 스타쉽의 노래를 들었다. 음질은 그다지 칭찬할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럴 수 없는 곳에서 오롯이 홀로 음악에 빠져 있을 수 있다는 것과 좋아하는 사진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당시 나를 이루는 찬란한 세계였다. 사진부였기에 사진에 대해서 조금은 설명할 수 있고 사진을 찍을 수 있어서 축제가 되면 몇몇의 여학교에서 찾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공부는 나 몰라라 하고 여학생들에게 사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음악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존 세카다가 머라이어 캐리의 백 댄서에서 솔로 앨범을 냈는데 정말 좋은 것 같다,며 내가 다니는 레코드점과 음악 감상실에 데리고 갔던 기억이 있다. 여학생들 중에는 각 학교의 문예부나 음악부를 하고 있어서 그 뒤로 사진부와 교류를 했는데 마지막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이 없다. 아마도 지금은 학부형이 되어 잘 보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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