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10년도 더 된 ‘아이팟 클래식‘으로 음악을 듣고 다닌다. 특히 조깅을 할 땐 폰은 없어도 ‘아이팟 클래식‘은 있어야 한다. 음악을 들으며 저 먼 앞으로 달려가는 기분이 꼭 상쾌하고 좋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굳어진 하나의 체제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는 말이 가장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음악이 있으니 달리는 시간과 거리가 단조롭지는 않다. 나쁘지 않다는 말이다. 내가 손을 뻗을 수 있는 나의 문화권을 조금이라도 덜 불행한 쪽으로 주파수를 맞춰 놓는 것이다.


아이팟 클래식을 처음 구입했을 때 사람들은 신기하게 생각했다. 시간이 훌쩍 지난 지금 아이팟 클래식을 보면 역시 사람들은 신기하게 본다. 처음과 현재의 신기한 결과는 같지만 이유는 분명히 다르다. 이 작은 기기 안에 몇 천곡의 음악이 들어가다니, 하며 신기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은 요즘 이런 걸로 음악을 들어? 불편하지 않아? 그래도 아이팟 클래식이라니 신기하네, 하며 본다.

 

그 이전에 몇 개나 몹쓸 기기로 전락해버린 엠피쓰리가 있었다. 또 그 이전에는 카세트 플레이어가 있었다. 요즘도 카세트 플레이어로 음악을 듣고 있는데 아직 카세트테이프가 많이 있고 잘 돌아가기 때문이다. 요컨대 장국영이라든가 라디오헤드 초기작이나 임펠리테리 같은 음악은 카세트로 듣고 있다.

 

음반을 구입했던 시기를 떠올리면 좋아하는 음반이 나오면 돈을 모아 레코드점으로 가는 발걸음은 가볍고 즐거웠다. 음반을 구입하는 행위의 세계에 한 번 발을 들여놓으면 쉽게 빼기가 힘들어져 버린다. 구입하고자 하는 음반을 구입하여 손에 꼭 쥔 다음 다른 음반들을 둘러보고 새로운 음반을 헤드 셋으로 들어본다. 집이나 학교 또는 내가 활동하는 반경 내에서 벗어나야만 할 수 있는 행위의 세계이기에 쉽게 발을 빼기는 힘들다. 무엇보다 그 세계에서 발을 빼기가 싫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음반을 구입하러 가는 레코드점이 한 군데여서 주인은 음반을 구입하지 않고 그저 음악을 듣기만 하고 나와도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사막의 전갈처럼 생긴 주인장은 나의 취향을 알아서 포스터를 간혹 주기도 했다. 그렇게 되려면 그 한 레코드점을 시간을 들여 들락날락거려야 하고 의도치 않게 그랬다. 후에 대형 레코드점이 생겨나고 백화점에도 레코드점이 들어와서 사람들을 현혹했지만 한 번 가던 곳에 계속 가는 회귀성을 보인 나는 그곳의 전갈처럼 생긴 주인장에게 꽤 사랑받았던 모양이었다.

 

주인장은 내가 좋아하는 팝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지만 클래식에 대해서는 조예가 깊었다. 밖으로 비어져 나온 스피커에서는 클래식이 늘 흘렀고 가끔 이런 클래식을 권해 주기도 해서 구입하기도 했다. 그때 구입한 음반이 모차르트 클라리넷 연주곡과 드뷔시의 음반이었다. 그 때문인지 아이팟 클래식 안에는 리스트와 드뷔시와 모짤트와 쇼팽의 몇 곡은 소장하고 있다.

 

유튜브가 발달한 요즘에 들고 다니며 유튜브로 음악을 접하고 듣고 볼 수 있는 환경 속에서 누가 아이팟 클래식으로 일일이 음악을 듣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아이팟 클래식에 마음을 처음 빼앗겨 버린 후로 그 마음 역시 쉽게 도망가지 않고 있다. 케이스를 벗겨내면 아직 새것 같다. 스크래치가 잘 가는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금 간 곳 하나 없이 아직도 구입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한 번도 떨어트린 적도 없다. 그러고 보면 대체로 기기나 카메라 같은 것은 아주 깨끗하게 사용을 하는 편이다. 아이패드는 보호필름도 부착하지 않고 사용하지만 구입했을 당시처럼 깨끗하다.

 

아이팟 클래식은 카세트테이프처럼 단종이 되어 더 이상 생산하지 않지만 손에 쥐고 있고 그것으로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나름의 존재감을 뿜어낸다. 음악을 듣는 방식은 오래전이나 지금이나 그렇게 변하지 않았다. 혼자 듣고 혼자 좋아하고 혼자 따라 부르곤 한다. 학창 시절에 음악을 남다르게 좋아했던 친구들이 몇 있었다. 그들은 나와는 다르게 형이나 누나의 영향을 받은 것에 비해 나는 어쩌다가 혼자서 음악을 듣게 되었고 찾아보게 되는 경우에 속했다.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매개가 라디오였기 때문에 라디오를 듣는 것에 필사적이었던 학창 시절이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닥치는 대로 들었다. 특히 팝을 들려주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주파수를 맞춰가며 수업시간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라디오를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친구들도 별로 없었다. 그런 나에게 아버지는 헤드 셋과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를 선물해주었다. 그때가 국민학교 6학년 때였다. 아버지는 내가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세계로 들어갈 것이라는 걸 알았던 것 같았다. 요즘이야 초등학생들이 유튜브를 하고 영상을 편집하니 음악 듣는 것쯤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 힘들지 몰라도 오래전에는 국민학생이 운동장 벤치에 앉아서 팝을 듣고 있으면 평범한 눈빛을 받지만은 않았다.


내 주위에는 적극적으로 팝을 듣는 사람이 없었기에 팝을 듣고 궁금한 것이 있어도 어딘가에 물어볼 만한 사람은 없었다. 요컨대 비틀스는 왜 4명인가, 어디에서 이런 노래를 만들었을까? 같은 궁금증은 그대로 가슴에 안은 채 혼자서 골똘히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고등학교 때 사진 부여서 암실에서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보낸 경우가 허다했다. 암실은 3학년 선배들의 것이었지만 일요일에는 차지할 수 있었다.


그때를 생각해보면 암실에서 아무한테도 방해받지 않으며 좋아하는 음악을 실컷 듣는다는 행복 때문에 일요일에도 학교를 자주 찾았다. 장국영의 노래를 들었고 토토의 노래를 들었고 스타쉽의 노래를 들었다. 음질은 그다지 칭찬할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럴 수 없는 곳에서 오롯이 홀로 음악에 빠져 있을 수 있다는 것과 좋아하는 사진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당시 나를 이루는 찬란한 세계였다. 사진부였기에 사진에 대해서 조금은 설명할 수 있고 사진을 찍을 수 있어서 축제가 되면 몇몇의 여학교에서 찾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공부는 나 몰라라 하고 여학생들에게 사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음악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존 세카다가 머라이어 캐리의 백 댄서에서 솔로 앨범을 냈는데 정말 좋은 것 같다,며 내가 다니는 레코드점과 음악 감상실에 데리고 갔던 기억이 있다. 여학생들 중에는 각 학교의 문예부나 음악부를 하고 있어서 그 뒤로 사진부와 교류를 했는데 마지막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이 없다. 아마도 지금은 학부형이 되어 잘 보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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