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가끔 유튜브로 오래전 오락실 게임 채널을 본다. 갤러그라던지, 너구리 같은 게임들. 


아이들은 단음처럼 소박한 음향이 나오고 홀린 듯 동전을 밀어 넣으며 내 차례가 되기를 기다렸다. 동전을 넣는 순간 묘한 음이 들리면서 게임을 시작된다. 아이들(오락실을 차지하는 손님 대부분이 아이들과 학생들이었다, 왜 그런지 어른들은 오락실을 찾지 않았다, 아마도 어른들은 어린이였을 때 이런 게임 같은 것을 모르고 자라온, 그래서 기기 속 게임에 동전을 넣어가며 열을 올리는 아이들을 몽땅 호러블 한 것으로 간주했을지도 모른다)은 게임기의 손잡이를 잡는 순간 게임을 이기기 위해서 고군분투한다. 


게임을 하는 동안만은 진지해진다. 무서운 선생님의 수업시간보다 더 진지해진다. 동전을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동전이 내 손에서 게임기 속으로 이동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해서 오락기와 나 사이의 엔트로피가 증가한다. 눈에 드러나지 않는, 기묘한 흐름의 세계로 들어간다. 띠리리리 하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화면에 보이는 게임을 이겨야만 한다는 의지가 올라온다. 하지만 세상은 내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어린 시절에 알아 버리게 된다. 


단음의 똥파리들 소리가 미묘하기 달라지는 중독에 한차 한차 더욱 강력해지는 똥파리들이 나타날 뿐 결국에는 내 쪽에서 죽어야 게임은 끝이 난다. 절대 이길 수 없다. 아주 간단한 이치지만 우리들은 그동안 잘도 갤러그에 빠져서 져야만 하는 게임에서 승리의 목표 속으로 계속 달려들었다.


갤러그는 하면 늘지만 이기지는 못 한다. 똥파리들을 다 죽였을 때 나는 음향과 다 죽이지 못했을 때 들리는 음향의 차이가 있다. 하다 보면 회차가 두 자리를 넘기고 40차, 50차 까지도 도달하게 된다. 하지만 결국에는 지고 만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에잇 뭐야, 하고 넘기기보다 이 지기 위한 순차적 반복이 그리 나쁘지는 않다.


다음 회차를 위해 여러 번 이겨야만 하지만 한 번 져버리면 동전을 다시 넣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모아 놓은 주머니 속의 동전이 다 없어지도록 갤러그 입 속으로 집어넣었다. 지는 것을 뻔히 알고 있지만 동전을 소비해가며 도전을 했다.


인간의 인생이란 반드시 이기기 위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지기 위해서 오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이에서 어떻게 지는가 하는 방식에서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확정 지어질 수 있다. 바로 헤밍웨이가 간파한 것이다. 지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도전을 하고 실패를 맛보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

갤러그를 하기 위해 매일 삼사십 분씩 학교 앞의 오락실에 들러 동전을 밀어 넣으며 오늘도 지는 순간 가방을 울러 매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른들의 눈으로 보면 참 부질없는 짓이다. 그렇지만 게임을 하는 동안 조금씩 실력이 늘어간다. 그리고 동전을 밀어 넣는 횟수도 점차적으로 줄어든다. 게임에서 지고 나면 허탈해하고 고개를 숙이고 집으로 오지만 다음 날이면 어제보다 나은 회차를 넘기리라는 동기부여가 된다. 그리고 기대를 가지고 오락실의 문을 당당하게 연다.

어제까지의 풍요로움이 오늘 한순간에 먼지가 되어 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절망에 빠져 허덕이게 된다. 연애시대 은호의 말처럼 고요한 물과도 같은 일상에 작은 파문이라도 일라치면 우리는 쉽게 허덕인다. 우리 인생은 너무 약하여 금방 부서지는 장난감과 같다. 여러 번 이겨도 한 번 지면 모든 것이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나는 절대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지만 그런 일은 예고 없이 어느 순간 다가온다.


힘이 들지만 그럴 때마다 주머니의 동전을 꺼내서 갤러그 오락기에 집어넣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무너지기 전까지 그동안 쌓아놓은 개개인의 비교할 수 없는 금자탑이 있어서 다시 하면 된다. 오늘은 누구에게나 처음이라 힘들어서 질 수 있지만, 내일이 되어 다시 오늘을 맞이하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한 발 더 나아가 있다. 인생이란 꼭 이 기기 위해 치열하기보다는 덜 지기 위해 일상 하나하나가 소중하게 쌓인 것일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하루키는 그동안 홀리오 이글레시아스를 홀대하는 느낌을 꽤 적었다. 그 홀대에는 뭐랄까 일종의 질투가 담겨 있다. 다른 에세이에서는 여자들이 홀리오 이글레시아스가 노래를 부르면 모두가 티브이 앞으로 모여든다면서 투덜거리기도 했다. 아마도 아내인 요코(이름이?)마저도 홀리오 이글레시아스가 노래를 부르면 캔디 같은 눈망울로 빠져들어가니 투덜거릴 수밖에.


홀리오 이글레시아스는 축구선수 출신답게 키도 크고  슈트도 잘 어울리고 무엇보다 기기 막힌 목소리의 스페인어로 특유의 억양이 들어간 노래를 부르면 누구라도 아 하게 된다. 홀리오 이글레시아스의 노래는 하루키가 좋아할 만한 타입이 아닌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홀리오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뚫고 나갔다.


그런 홀리오에게 엔리케라는 아들이 있다. 엔리케 이글레시아스. 엔리케라는 이름은 미국으로는 데이빗, 영국으로는 토마스 정도로 한국으로는 철수처럼 아주 흔한 이름이다. 그러니까 명자아키코쏘냐다. 홀리오는 아들인 엔리케와 아주 사이가 안 좋은 걸로 유명하다.


아마도 예측을 하자면 슈퍼 스타답게 전 세계를 돌며 금발의 섹시한 여성들과 풍문을 일으키다 보니 엔리케가 태어났고 이름도 귀찮다는 듯 그냥 '철수'로 해.라는 느낌이 강하다. 세계를 돌며 노래를 부른다며 아들 돌보기는 뒷전이었을 테니까 엔리케가 컸을 때는 아버지에게 대들었을 것이다. 이름도 이게 뭐냐면서, 아버지와 대등하게 놓였을 때 엔리케는 가수가 되었다.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지 정말 잘 생겼다. 아마 어느 시점을 넘어서는 아버지보다 인기가 더 좋았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꾸준하게 앨범 활동을 하고 있으니.


어쩐지 그래서 그런지 하루키는 엔리케가 인기가 많아진 시점부터는 에세이에 그렇게 투덜거리던 홀리오 이글레시아스에 대한 이야기도 없는 것 같다. 이제는 미즈마루 씨도 없으니 그에 대한 투덜거림도 들을 수 없고, 왠지 시간이 간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깊어가는 새해의 첫날밤 홀리오 이글레시아스의 노래를 들으며, 노래를 듣다가 조용필의 노래로 끝맺음을,,, 왜냐하면 홀리오의 노래 중에는 자연스럽게 조용필의 노래가 떠오르는 노래가 있거든. 사랑의 그림자 되어, 끝없이 머물게 하여 주오! 깊어가는 밤 조용필의 노래와 함께.

-2021. 1. 1. 



하루키는 이렇게 대놓고 홀리오 이글레시아스를 까고 있다. 아주 유쾌하고 위트가 넘치게 까고 있다. 발랄하다고는 하지만 당사자인 홀리오 입장에서는 뭐야 저 달리기만 할 것 같은 놈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하루키와 홀리오가 달리면 하루키가 질지도 모른다. 반평생 조깅을 해 온 하루키지만 홀리오는 축구선수 출신이기에 단거리는 대번에 하루키를 이겨 버릴지도 모른다.

하루키가 이토록 홀리오를 싫어하는 이유는 노래를 잘하기 때문이다. 더 큰 이유는 키가 크고 잘생겼다는 것이다. 게다가 외계 언어 같은 스페인어로 노래를 부르면 키, 잘생김, 목소리가 전부 어우러져 여자들에게 페로몬 같은 직설 화살을 날려 버린다. 부르는 노래들이 하루키가 좋아하는 노래가 아니라 더 홀리오를 깐다. 그러거나 말거나 전 세계 여자들은 홀리오가 마이크를 잡으면 열광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하루키가 펜을 잡았다고 해서 세계의 여자들이 열광하지는 않는다. 세계의 아무리 유명한 작가라도 결과물 하나를 만들어 내는 데는 시간과 노력을 요하고 어떤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고작 단상에서 말로 멋지게 몇 마디 하는 게 전부다.

홀리오를 보자. 야외 수영장에서 멋진 몸매를 드러내고 선탠을 즐기고 있다가 수영장에 서서히 어둠이 오고 음악이 흐르는데 그만 음향장비의 문제로 고요하게 되었다. 그때 홀리오가 일어나서 피아노 앞으로 가서 멋지게 연주하며 특유의 스페인어로 노래를 부른다. 여자들은 모두가 홀리오 앞으로 모여든다. 눈은 전부 초승달처럼 변해가지고.

제아무리 하루키라도 하루키에겐 그런 점이 없다. 아유 저 홀리오 정말 짜증 나. 요컨대 수려한 문장으로 사람들을 홀리는 허지웅이라도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피아노를 치며 투라이 리 멤버,를 부르는 성시경에게는 당해내지 못한다. 성시경이 눈을 그렇게 감고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순간 모든 여자들의 마음을 흠뻑 빼앗아버리고 만다. 아무튼.

하지만 어느 시점을 지나고 나서는 하루키는 이제 더 이상 홀리오의 흉 같은 건 보지 않는다. 독자로서 무척 아쉽다. 홀리오도 43년 생이니까 할아버지가 되었다. 하루키도 씩씩거리며 유쾌하지만 누군가의 험담을 늘어놓을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그래도 열심히 험담을 늘어놓을 수 있을 때까지 늘어놓아주세요! 이렇게 깜찍하고 발랄한 험담은 세상에 없을 테니까.

#무라카미하루키 #하루키에세이 #작지만확실한행복 #소확행 #나는그인기있다는가수가싫다 #MURAKAMIHARUKI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중요한 건 상상력.

상상력을 잃지 말도록 해요.

상상력을 버리는 순간 고리타분한 인간이 되고 맙니다.




한때 소녀였던 이들이 나이를 먹어버린 것이 서글프게 다가오는 까닭은 아마도 내가 소년 시절 품었던 꿈 같은 것이 이제 효력을 잃었음을 새삼 인정해야 해서일 것이다. 꿈이 죽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실제 생명이 소멸하는 것보다 슬픈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때로 매우 공정하지 못한 일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 위드 더 비틀스 / 무라카미 하루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하루키의 '포트레이트 인 재즈'는 2500원을 더 하면 이만 원이나 한다. 이 책은 하루키의 다른 책에 비해서 좀 비싸다. 하지만 와다 마코토의 그림을 볼 수 있고 하루키의 글까지 있으니 이만 원이 그렇게 비싸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책 겉표지도 다른 하루키의 에세이집과는 달리 무척 세련됐다. 손으로 만지면 그림이 만져진다.

하루키는 재즈 마니아인 만큼 우리가 모르는 재즈도 좋아하겠지만 이 책에서는 모두가 알만한, 대중적으로 좋아하는 재즈를 보다 쉽게, 보다 친근하게 말하고 있다. 고 생각된다. 음악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하기보다 인간을 주로 말하며 대체로 한 페이지 정도로 짤막하게 소개하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다.

처음으로 쳇 베이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하루키는 쳇 베이커를 제임스 딘을 닮았다고 했다. 얼굴도 그렇고 존재의 카리스마적인 면모나 파멸성도 아주 유사하다고 했다. 하지만 제임스 딘과 달리 쳇 베이커는 그 시대를 살아남았고 그것이 비극이라고 했다.

쳇 베이커의 평전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쳇 베이커는 어마어마한 양의 약을 했다. 그 양이 아마도 20만 명이 할 만큼의 양일 것이다. 쳇 베이커만큼 약을 많이 한 사람이 그룹 ‘머틀리 크루’의 ‘니키’다. 내 몸에 모든 화학실험을 다 했다고 할 정도로 약물을 많이도 했다.

전기를 읽지 않아도 에단 호크의 ‘본 투 비 블루’를 보면 쳇 베이커에 대해서 잘 알 수 있다. 하루키는 그의 음악에서 청춘의 냄새가 난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쳇 베이커는 나이가 들었어도 어쩐지 그의 음악에 이끌려 많은 여자들이 그를 사랑했다. 쳇 베이커의 여자 중에서는 친구의 딸도 있었다.

약 때문에 이가 몽땅 빠져서 연주한 곡들을 들어보면 그 힘 빠진 쓸쓸함이 그대로 연주에 묻어 나오기도 한다. 약 때문에 약하디 약한 인간이 되어버린 쳇 베이커. 그는 약물 때문에 정교함을 잃어가지만 대신 개성과 깊이가 생겼다. 

https://youtu.be/UOEIQKczRPY




///////////////////////////


하루키는 빌리 홀리데이에 대해서 여러 에세이에서 언급을 했다. ‘잡문집‘에서도,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에서도 또 잡지에도 빌리 홀리데이를 이야기했다. 초반에는 노래보다는 유명세가 먼저 하루키를 강타해서인지 시큰둥했지만, 가수와 팬이 함께 나이가 들어가며 같이 숙성되어 성숙하듯이 하루키는 점점 빌리 홀리데이의 음악에 심취하게 된다.

빌리 홀리데이는 한때 지나치게 신격화되었던 적이 있어서, 나 같은 사람은 약간 짜증이 나 멀리하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좋을 그런 주변적인 일들에서 완전히 벗어나 허심탄회하게 음악 그 자체에 귀를 기울여 보면 역시 진지하게 노래를 듣게 만드는 멋진 가수임을 알 수 있다. 그녀의 노래에는 몸속 깊은 곳에서 자연히 배어 나오는 원액 같은 것이 들어 있어서, 청중들을 압도하고 감싸 안고 도취시키고 완전히 뻗어나가게 한다 –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 빌리 홀리데이에게 바친다, 중에서

그리고 잡문집에서는 빌리 홀리데이에 관한 경험담을 들려준다. 바를 운영할 때 흑인과 그저 친구로 보이는 여자와 함께 와서 늘 빌리 홀리데이의 음악을 신청하다 간 그 사람이 보이지 않고 여자만 와서 빌리 홀리데이의 음악을 그 대신 들어달라고, 그러면서 그 흑인이 음악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회상한다.

이전의 에세이에서 길게 서술한 것에 비해 이 에세이에서는 아주 짤막하고 간결하고 멋들어지게 빌리 홀리데이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나이가 들어서 들어보니 그녀의 음악이 얼마나 멋진 음악이었는지 알게 되어서 나이가 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하루키는 빌리 홀리데이의 음악을 ‘치유’가 아닌 ‘용서‘로 보고 있다. 내가 삶을 통해서 또는 쓰는 일을 통해서 지금까지 저질러온 수많은 실수와 상처 입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그녀가 두말없이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그것을 한꺼번에 용서해 주고 있는 기분이 든다고 했다.

이제 그만 됐으니까 잊어버려요.라고. 그것은 ‘치유’가 아니다. 나는 절대로 치유되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으로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용서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문장을 읽고 있으면 하루키가 신의 영역에 발을 걸치고 있다가 이제는 완전한 인간으로 들어와 버린 기분이다. 약간은 나약해 보일 수 있고 힘이 빠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욱 리얼리티 하고, 강인한 소설가보다 부드러운 시인에 좀 더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다. 하루키에게 말하고 싶다. 이미 그러고 지내고 있겠지만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된다. 고. 그리고 치유를 주려고만 하지 말고 이제는 받아도 된다고. 뭐 나 같은 놈이 말한다고 뭐 어찌 될 것은 아니지만. 하하하.


https://youtu.be/hexEUw60a-U

#무라카미하루키 #하루키에세이 #음악에세이 #하루키음악 #MURAKAMIHARUKI #포트레이트인재즈 #PortraitinJazz #무라카미라디오 #빌리홀리데이 #와다마코토 #그림이정말멋지지요 #튀어나와서막노래를부를것같지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가자미 구이를 하면 몸통 부분은 잘 발라서 어렸던 조카를 먹였다. 신중하게, 가시가 없는 부분이지만 그래도 만약을 대비해서 잘 발라서 조카의 밥 위에 올려 주었다. 그러면 조카와 조카의 엄마와 조카의 외할머니 모두가 나에게 어떤 존경의 눈빛을 보였다. 사실은 살이 많은 그 몸통 부분이 크게 맛이 없어서, 나는 가시가 많은 지느러미가 아무래도 내 입맛에는 맞나 봐. 하지만 이런 말을 내뱉을 수는 없다. 모두가 평화로운 길을 나는 택했다. 


가자미 구이에 백후추를 쏠쏠 뿌려 잘 잘라서 먹으면 참 맛있다. 후추를 쏠쏠 뿌려서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가자미 구이를 입 안에 넣어서 오물오물 씹고 있으면 꼭 옛날로 돌아가는 기분이 든다. 가자미에서 가장 맛있는 부분은 살이 많은 몸통 부분이 아니라 가시가 많은 지느르미 쪽 부분이다. 아주 부드럽고 기름기도 적당해서 후추와 잘 어울리며 자꾸 손이 가게 만든다. 단지 가시를 제거하고 먹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몸통 부분은 가시는 없지만 지느러미 쪽 보다는 맛이 떨어진다. 


가자미 구이는 아버지가 좋아했다. 아버지는 가자미를 구우면 지금의 나처럼 몸통의 살을 잘라서 동생과 나의 밥 위에 올려 주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가시가 많은 부분을 끙끙 발라 먹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쪽이 훨씬 더 맛있어서 아버지는 우리에게 몸통을 발라서 먹였을 것이다.라고 애써 생각을 한다. 그러고 보면 치킨도 터벅살 보다는 날개가 맛있고 돼지도 부속물이 더 맛있는 경우가 있다.


가자미 구이도 그런 연장선 상에 있을지도 모른다. 잘 구워진 가자미를 잘라서 오물오물 먹고 있다 보면 금방 사라지지만 이 짧은 시간은 좋아하는 시간이다. 드라마 ‘멜로가 체질’에 이런 대사가 있었다. “사는 게 그런 건가? 좋았던 시간 약간을 가지고 힘들 수밖에 없는 대부분의 시간을 버티는 것. 조금 비관적이기는 하지만 혹독하네. 혹 독 하다. 그건 부정할 수 없지만 좋은 시간 약간을 만들고 있는 지금이 너무 좋아”. 이 서럽고 강하고 유약하면서 바늘 같은 대사는 가자미 구이를 먹고 있는 나에게 와서 박혔다.

 
하지만 지금 느끼는 가자미의 맛이라는 건 그저 가자미의 맛이다. 아버지가 밥 위에 올려 주었던 가자미 구이의 맛은 아니다. 그 속에는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앉아 밥을 먹었던 추억이 기억 속에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다. 거기에서 오는 맛은, 지금의 지느러미의 맛있는 부분의 맛이 아니라 추억 속 몸통의 맛이다.


내가 만약 아버지가 된다면 내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매일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같이 할 자신이 없다. 가족이 밥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다는 건 지구가 도래한 이래 가장 행복한 순간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극히 평범해서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아무나 누릴 수 있는 순간이 아니게 되었다.


그래서 유튜브로 ‘시골 가족’의 식사를 보면 마음이 편하다. 지금의 유튜브는 돈을 벌기 위해, 불빛을 보면 달려드는 나방 같은 인간들로 북적이는 곳이 되었다. 이것이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도 모르는 유튜버들이 판을 치는 곳이다. 얼마 전에 죽은 사람을 가지고 조회수를 올리는 인간도 있고, 죽은 아이와 영적 대화를 나누었다고 해서 조회수를 올리는 인간도 있다. 이미 시궁창이 되어 버린 지 오래된 곳이 유튜브다.


나방이 하늘을 덮어버린 곳이기는 하지만 그 사이에서도 나비는 있다. 시골 가족 유튜브는 한 가족이 둘러앉아 그저 식사를 할 뿐이다. 과하거나 축소나 확장 없이 한 가족이 밥상을 놓고 빙 둘러앉아 소박한 밥 한 끼를 먹을 뿐이다. 시골 가족의 밥상에는 강요가 없다. 엄마가 미역국을 금세 먹고 나면 막내가 많이 남은 자신의 미역국을 엄마에게 건네준다.


이 소박하고 조용한 한 끼 밥상을 보는 것으로 봉인되어 있는 내 추억이 실타래가 풀리듯 열리게 된다. 내 아버지는 평일의 저녁은 어떻든 가족과 함께 먹으려고 했다. 그리고 일요일 아침도 늘 밥상에 빙 둘러앉아 같이 먹었다. 그래서 동생과 나는 아버지가 오는 시간에 맞춰 버스 정류장까지 마중을 종종 나갔다. 동생의 손을 잡고, 놓칠세라 꼭 쥐고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갔다. 어느 광고에서 '마중'이란 '마음이 오는 중'이라고 하던데 고개가 끄덕여진다. 아버지가 오는 버스의 번호를 맞춰가며 우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에서 내리는 작업복 남자들을 유심히 보곤 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내리면 동생은 뛰어가서 안겼다. 그리고 저녁은 빙 둘러앉아 밥을 먹는다. 그 속에 가자미 구이가 자리 잡고 있다. 


일요일 아침에 눈을 뜨면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떡국에서 오르는 김이 꼭 하얀 실뱀장어처럼 보였다. 눈을 비비고 일어나면 어머니는 마른 김에 밥을 싸주었다. 어린이였던 우리는 그걸 간장에 좀 찍어서 먹었다. 떡국을 좀 떠먹고 동생은 뭐라 뭐라 종알종알거렸다. 그리고 밥 위에 가자미 구이를 아버지가 올려주었다. 한 입, 두 입. 그렇게 먹는 동안 우리는 성장했고 어른들은 쪼그라들었다. 이런 이야기는 늘 신파로 흘러가지만 추억은 조금 신파여도 괜찮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