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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에세이 중에 ‘나는 쇠고기와 바다를 무척 좋아한다’라는 글이 있다. -바다라는 것은 역시 가까이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그 냄새를 맡으려 생활하지 않으면 진짜 좋은 점을 알 수 없는 게 아닐까? 쇼난이나 요코하마의 바다는 약간 지나치게 세련되어서, 그러한 ‘생활 감각으로서의 바다'가 타향에서 온 방문객에게는 완전히 전해지지 않는 구석이 있다-라는 구절이 있는 나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 이유는 집 근처가 바로 바닷가라서 그렇다. 매일 출근하기 전 이른 오전에 바닷가에서 약간의 글을 적는데 매일 바다를 보게 된다. 여기 바닷가도 해수욕장이지만 해운대처럼 굉장히 세련되지 않아서 소박하지만 꽤 운치가 있고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바다는 모름지기 매일 보면 바다의 변화나 흐름이 매일 다르기 때문에 그 자체로 흥미롭다. 


매일 보는 바다지만 매일 보기 때문에 매일 달라지는 바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어쩐지 매일 봐야만 알 수 있다. 그저 어쩌다가 보는 바다에서는 그 달라짐을 눈치채지 못한다. 바다는 가늘게 눈을 뜨고 꾸준히 봐야만 그러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생활 감각으로서의 바다가 아니라 다가가면 조만큼 가버리는, 마치 나 잡아봐라, 하는 것 같은 친숙하지 않은 바다가 되어 버린다. 십 년 만에 와서 바다를 보는 사람은 바다는 그대론데 나는 이만큼이나 늙었군,라고 한다. 그건 사람이 조금씩 늙어가지만 눈치채지 못하다가 십 년 후에 늙었다는 것을 아는 것과 비슷하다. 내가 늙어버릴수록 보석 같은 아이는 쑥쑥 커가니 늙었다고 흥! 할 수만은 없다. 


여기는 너무 대도시다. 사람들이 너무 많고, 차들도 너무 많고, 건물도 너무 높아졌다. 더불어 이렇게 거대한 도시 속에서 살아가려면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지치게 된다. 그 와중에 이렇게 바닷가가 있고 바다를 볼 수 있어서, 집의 문을 열고 기지개를 켜고 걸어가면 바다가 있기에 생활 감각으로서의 바다를 만끽하기에 조금은 느슨해질 수 있다. 


지방이라 당연하지만 사투리가 난무한데 몇 해 전부터는 카페의 직원들에게도 여행객들로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신기할 정도로 사투리를 들을 수 없다. 아마도 대도시화된 영향 탓이리라. 사투리를 쓰는 사람은 나 정도밖에 없다는 착각이 들 만큼 표준어를 쓰는 사람들이 예전보다 많아진 것 같다. “왜 이카는 데, 저거 두가, 아 거참 씨그랍네, 주께지마레이” 같은 말을 쓰는 사람은 바닷가의 장기방에서 장기를 두는 어르신들 정도다. 어르신들이 장기를 두는 장면을 구경하면 재미있는 경우가 있다. 훈수를 잘못 둬서 마치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심각해지기도 하고, 한 수를 옮기는데 너무 오래 걸려 또 전쟁이 나기도 한다. 전쟁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훈훈한 대통합으로 마무리를 한다. 


어떤 날의 바다는 사념이 가득하다. 4월이 되면 동네의 노인들이 나와서 볕을 쬐며 벤치에 앉아 미동도 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본다. 노인들의 등을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꼭 바다의 사념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또 어떤 날의 바다는 궤변을 잔뜩 늘어놓은 터무니없는 모호한 칼럼을 읽는 것 같다. 여기를 읽고 있는데 이미 읽었던 문장 같다. 또 길을 잃어 헤매는 바다코끼리의 울음 같기도 하다. 어떤 결락을 바다는 잔뜩 지니고 있다.


이른 오전의 바닷가에서 약간의 글을 작성한 다음 고개를 들면 바다가 눈앞에 늘 펼쳐져 있다. 그러면 멍해지는 시간을 보낸다. 하루키의 말처럼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것은 간단하다면 간단하지만 꽤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바다와 하늘이 몽땅 파랗게 질려 있는 경우가 있고, 구름이 달팽이보다 느리게 흘러 저기까지 가는 것을 멍하게 보다 보면 시간이 이만큼 지나가버리기도 한다. 파도가 밀려오는 모습은 언제나 사람의 시선을 잡아끈다. 마치 어항 속 붕어의 유영을 보는 것처럼 멍하게 바다를 바고 있으면 마찬가지로 뇌수가 팬케이크 반죽 같은 상태가 되는 것 같다. 정말 긴 털이 세 가닥 달린 손톱만 한 사마귀가 붙은 노인이 와서 빨대를 머리에 꽂아서 뇌수를 쪽쪽 빨아먹어도 흐응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멍해진다. 


흐린 날은 흐린 대로, 맑은 날은 맑을 대로, 겨울이면 겨울, 여름이면 여름에 걸맞게 인간은 멍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바다를 보며 멍해지는 재미에 빠지려면 매일 생활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바다를 봐야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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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글은 어딘지 모르게 전부 이어져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래서 하루키의 글을 읽다 보면 마치 하루키가 이런 말을 하는 것 같다. 저의 글은 모두 이어져 있으니 지치지 말고 꾸준하게 읽어주세요,라고 하는 착각이 든다.


추억이란 당신의 몸을 안쪽에서부터 따뜻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당신의 몸을 안쪽으로부터 심하게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이기도 합니다. 해변의 카프카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모두 이 추억으로 인해 행복하면서 고통을 받는다.


해변의 카프카에는 마치 하루키가 다시는 장편을 쓰지 않을 요량인지 철학, 클래식, 팝, 건축 등이 다른 장편에 비해 아주 세세하고도 많이 등장한다. 베토벤의 독보적인 모습을 시작으로 베를리오즈, 바그너, 리스트, 슈만을 지나 백만 달러 트리오의 루빈스타인(피아노), 하이패츠(바이올린), 피아티고르스키(첼로), 그리고 하이든의 협주곡 제1번과 피에르 푸르니에의 첼로 연주가 나온다. 이 모든 클래식을 한 번씩만 들어도 하루가 훌쩍 지나간다. 그중에서도 대공에게 바치는 베토벤의 대공트리오는 아아 이렇게 좋을 수가.


프랑수아 트뤼포의 유연한 호기심에 가득 찬, 구심적이면서도 집요한 정신과 장 자크 루소의 울타리, 안톤 체호프의 자립적인 개념의 필연성, 헤겔의 자기의식, 앙리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 헤테로(이형접합자), T.S. 엘리엇이 말하는 공허한 인간들, 소포클레스의 훌륭한 희곡 ‘엘렉트라’, 레드헤딩과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 괴테가 말하는 세계, 그리고 악의 평범성의 아돌프 아이히만까지 총 망라 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은 다무라 녀석이 숲속에서 혼자 고독과 싸우며 지낼 때 라디오 헤드의 ‘키드 에이’ 음반을 듣는 장면이다. 라디오 헤드의 모든 앨범을 좋아하는 나로서도 ‘키드 에이’ 앨범이 가장 좋았다. 이건 듣자마자 마치 연주도 노래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꼭 외계의 한 지점에 교신을 하는 듯한 음악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키드 에이 앨범은 중학생이 듣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다무라 녀석이라면 가능하다. 그 전경이 눈에 선하다.


인터뷰집 ‘작가란 무엇인가’의 하루키 편을 보면, 라디오 헤드가 KID A 앨범에서 자신을 언급해서 기분이 좋다는 식으로 인터뷰를 한 구절이 있다. 라디오 헤드는, 그러니까 ‘톰 요크’는 키드 에이를 기점으로 이제는 음악이 철학 덩어리가 되었다. 특히 ‘데이 드리밍’의 뮤직비디오는 정말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무척 재미있고 깊이가 있었다.


하루키는 해변의 카프카를 ‘태엽 감는 새’보다 더 복잡하다고 언급했다. 해변의 카프카는 인간의 죽음에 대해 깊게 고찰한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을 적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단둘이 마주하고 친구가 되어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누게 되면 하늘에서 수많은 전갱이가 쏟아지는 세계의 만물은 메타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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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는 코로나 사태를 보며 현 일본 정부를 작정하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일본 정치가는 최악이다. 자신의 언어로 말하지 못한다." 이 발언으로 현재 아베에서 스가로 이어지는 일본 정치인을 향해 폭격을 했다.


하루키는 27일 주간지 다이아몬드와의 인터뷰에서 “코로나 같은 사태는 처음이기 때문에, 정치가가 무엇을 해도 잘못하거나 전망을 잘못하는 건 피할 수 없다. 그런 실패를 각국의 정치가가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비교하면 일본 정치인이 최악이었다고 생각한다. 많은 정치가가 틀렸음을 인정하지 않고 변명으로 발뺌만 한다. 일본 정치가의 근본적인 결함이 코로나를 계기로 드러났다"라고 발언했다.


그리고 하루키는 지금의 총리조차 종이에 쓴 것을 읽을 뿐이지 않나, 자신의 언어로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하는 일본의 정치인은 최악이라고 강하게 발언했다. 스가는 에다 겐지 입헌민주당 의원으로부터도 “총리, 종이 보고 답변하는 것 좀 그만둘 수 없습니까. 관료들이 만든 답변서를 읽어봐야 국민에게 전달이 되지 않습니다. 저도 오늘은 종이를 안 보고 할 테니까 제발 자신의 언어로 답변해 주지 않으시겠어요?"라는 발언을 들었다.


하루키는 존 F. 케네디, 타나카 카쿠에이 전 일본 총리를 거론하며 이런 사람들과 비교하면 지금 많은 일본 정치인은 어떻게 봐도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 서툴다고 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사람이 실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하루키는 본인이 일본 정치계를 비판한 것은 사과가 없다는 것을 강한 이유로 들었다. 잘못된 스가의 정책을 질책하는 학자들을 배제한 스가에게 하루키는 학자나 예술가가 주류와 다른 발언을 하는 것을 막는 것을 지적했다. 세상의 유연성을 잃게 되는 꼴이라고 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도 말했지만 15년 4월 17일 교토통신과의 인터뷰에서도 “상대국이 ‘시원하게 한 것은 아니더라도 그 정도 사죄했으니 이제 됐다’고 할 때까지 사죄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라고 발언을 했다.


하지만 일본의 젊은 층은 왜 윗 윗세대가 저지른 잘못을 우리가 사과를 헤야 하느냐, 라며 역사에 대해 알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그에 대해 하루키는 역사는 연대의식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하루키는 우익들에게 ‘기사단장 죽이기’에 쓴 난징학살에 관한 구절 때문에 나라를 팔아서 돈을 버느냐 같은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일본은 또 노벨문학상 후보에 하루키를 추천한다. 대형 서점의 혐한 코너에는 책이 가득하지만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 소설은 배치하지 않은 서점이 많은 것 또한 이상하다면 아주, 정말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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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가 살고 있는 저택에 대해서 알아본 유튜브 채널이 있다. 이 글은 10만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는 유튜버 ‘안협소’ 채널을 보고 작성하게 되었다. 이 채널의 주인장이 말하는 하루키 이야기에 나의 의견을 덧붙였다. 더 궁금한 이야기는 안협소 채널에 가서 보면 더 많이, 더 정확히, 더 풍부하게 하루키의 소식을 접할 수 있다.

하루키는 외국을 떠돌며 소설을 쓰다가 50대에 현재 가나가와현 오이소에 정착을 했다. 코로나 이후 또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이곳에서 꾸준하게 글을 적지 않을까. 구글 맵으로 찾으면 하루키의 집을 볼 수 있다. 보통 유명인들은 구글맵에 자신의 집은 나타나지 않게 하는데 하루키는 그대로 노출을 시켜놨다.

하루키의 집으로 올라가는 길, 또는 하루키가 사는 동네는 신작 ‘크림’에 나오는 피아노 연주회가 열리는 동네의 풍경과 아주 흡사하다. 고급 주택들이 양옆으로 꽃처럼 피어있고 그 사이를 기분 좋은, 역시 고급 돌길이 죽 나있다. 고즈넉하고 평온한 느낌의 동네다. 정말이지 어떤 무엇인가에 방해받지 않고 글을 쓰기에 충분하다는 기분이 든다.

하루키의 저택은 외벽이 나무로 이루어져 있는 3층짜리 건물이다. 저택 문패에는 이렇게 ‘시나몬 잉크 자료실 <무라카미>‘라고 쓰여있다. 어떻든 이런 곳에서 사람들과 부대끼지 않으며 일을 하니까 코로나에서 안심이다. 구글맵으로 저택의 사진만 보고 무작정 오이소로 찾아가는 한국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올바른 일인지 그렇지 않은지 모르겠지만 글을 쓰는데 방해는 안됐으면 좋겠다.

댄스 댄스 댄스 한국판이 출간되었을 때 한국 독자들에게, 소설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은 어떤 말이라도 좋으니 영어나 일어로 써서 문학사상으로 보내달라고 했을 만큼 하루키는 한국 독자, 특히 자신의 소설을 읽는 젊은 한국 독자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 하루키의 장편 소설 선 인세가 지금은 30억 정도라고 한다. 계약을 하고 수입해서 번역하기 전에 하루키에게 지급하는 계약금이 30억 정도인데, 예전에, 2013년에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당겨 올 때 선인세 16억 정도로 계약을 하려 했는데 판권을 못 가져왔다고 한다.

그러니까 세계의 온 나라에 하루키의 소설이 번역이 되어 출간되어 있으니 어마어마한 수입이 있을 것이다. 그것에 비해 사는 저택은 작지는 않지만 아주 크지 않다. 하루키의 저택에는 수입만큼 어마어마한 레코드판이 있다. 몇 면장이라고 한다. 아주 쓸데없는 이야기지만 하루키만큼 엘피판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이 문화 평론가 김갑수 선생인데, 쓸데없는 말이었다.

하루키의 저택에 있는 작업실 겸 음악실의 모습은 한 번 앉으면 나오기 싫을 만큼 하루키 음악에 대한 집요가 엿 보인다. 하루키는 무라카미 라디오에서 “사랑은 소중합니다”라고 했다. 일큐팔사에서 덴고와 아오마메도 사랑의 소중함을 말한다. 사랑이 없는, 또는 그 관계가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그런 종교에 빠져들게 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매킨토시를 좋아하는 하루키는 오래전 에세이에서 맥을 쓰는 것에 대해서 글을 적었다.

그리고 이 책, 아직 우리나라에는 나오지 않은 이 에세이에 지금 살고 있는 오이소에 대해서 적은 글이 있다. 그리고 사는 동네에서 자주 들리는 과자가게나 재즈 바에 대한 이야기도 있는데 하루키가 들린 그곳을 따라서 하루키의 팬들이 맵에 표시를 잘해두었다고 한다.

하루키가 사는 동네는 고급스러운 주택가지만 저 앞에는 바다다. 그래서 하루키가 들리는 가게들은 바다에서 아주 가깝다. 몹시 예쁘고, 아기자기하며 카페나 재즈 바의 경우는 또 상당히 프로스럽다. 하루키 덕분에 오이소의 이런 가게들도 꽤 장사가 잘 되는 모양이다. 어서 빨리 코로나가 끝나고 사람들이 많이 찾았으면 좋겠네.

마지막으로 달리기를 좋아하는 하루키는 매일 달린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는데, 동네 주민들은 하루키가 달리는 모습을 종종 본다고 한다. 그러니까 하루키를 만나려면 근처에 숙소를 잡아서 일주일 정도 머문다고 생각하고 하루키가 달리는 시간에 맞춰 동네를 달리다 보면 마주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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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평은 그 시기에 드물게도 자신의 오페라 무대를 가지고 자신의 노래로 자신의 공연을 했다. 중국 땅에 오페라를 알리고 싶었던 단평이었다. 오페라는 인간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사랑하는 사람의 손길 같은 것이었다.


단평을 좋아하던 운언은 단평의 공연을 늘 보러 왔다. 단평 역시 운언을 사랑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아름다웠고 뜨거웠다. 단평은 운언을 위해 ‘야반가성’을 작곡하려 하지만 완성에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언젠가 꼭 ‘야반가성’을 완성해서 당신 앞에서 불러 주리라 단평은 운언에게 약속한다.


단평과 운언의 사랑은 아름다웠지만 신분을 넘은 사랑을 했기에 두 사람의 사랑은 너무 위험했고 너무 험난했다. 사랑이란 절대로 불가능할 것 같았던 두 사람을 아름답게 위태위태하게 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사랑은 나날이 뜨겁게 불타올랐다.


하지만 운언은 집에서 점찍어 놓은 곳으로 혼인을 가게 되었다. 운언은 그게 싫어 도망가려다 붙잡히고 만다. 그날 밤 한 무리들에 의해 단평의 극장은 불에 타고 단평은 죽는다.


팔려가다시피 시집간 운언은 처녀가 아니라는 이유로 남편에게 폭력을 당하고 집에서 쫓겨난다. 운언은 불타버린 극장에 매일 와서 단평을 기다리다 미쳐간다.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흐른다.


10년 후 다 쓰러져가는 극장에 새롭게 나타는 극단이 공연을 하려 하지만 실력이 엉망이었다. 실력이 검증되지 않으니 사람들에게 외면받을 수밖에 없다. 공연에서 주인공 역의 위청은 노래 실력 때문에 고민이 많다. 그때 위청에게 의문의 남자가 암막 뒤에 나타나 로미오와 줄리엣을 공연하라고 한다.


그 의문의 남자는 죽은 줄 알았던 단평이었다. 단평은 10년 전 불에 타 죽은 게 아니라 한 무리의 남자들이 운언과 단평의 사랑을 방해하기 위해 단평의 얼굴에 염산을 뿌리고 극장에 불을 낸 것이었다. 단평은 염산 때문에 얼굴의 반이 흘러내렸지만 죽지 않고 극장에 숨어 살며 야반가성을 완성시키고 있었다.


위청은 대면하지 않았던 단평의 말대로 로미오와 줄리엣을 공연하면서 고음이 되지 않는 부분은 단평이 무대 뒤에서 대신 불러주었다. 단평이 노래를 부를 땐 운언을 생각하며 슬픔을 가득 채워 설움과 그리움을 담아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며 단평은 눈물을 흘린다.


얼굴의 반이 없는 단평은 매일 미친 여자의 모습으로 극장에 나타나는 운언 앞에 나가지 못했다. 반이 흘러내린 얼굴로 앞에 나설 수 없어서 죽고 싶었지만 그것마저 여의치 않았다. 왜냐하면 운언에게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단평은 얼굴의 반이 날아가 버렸고 운언은 정신의 반이 날아가 버렸다. 그렇지만 위청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위청이 죽은 단평으로 착각한다. 사랑에 눈이 멀어 미쳐갔지만 운언 앞에 모습을 보일 수 없었던 단평은 위청을 통해 운언에게 야반가성을 들려 주려했다.


하지만 자신의 얼굴에 염산을 뿌린 조 씨가 운언에게 총을 쏘게 된다. 총을 맞고 쓰러진 운언을 보고 그들 앞에서 단평은 절규한다. 마침내 운언 앞에 나타난 단평은 반이 없는 얼굴로 10년 동안 운언을 위해 만든 ‘야반가성’을 불러준다.


밤이 깊어서야 나와 당신은 비로소

영혼을 활짝 열고 꾸밈없는 마음을 내어 놓습니다

부드러운 입맞춤은 한밤중에

음악이 되어 당신의 마음에 다가갑니다

별님에게 간청합니다

달님이 증인이 되어 주세요

일생을 다해서라도 기다리겠습니다

언젠가는 제 소망이 이루어져서

당신과 함께 영원을 찾아 날아갈 것입니다


반만 살아있는 얼굴의 단평과 두 눈이 보이지 않는 운언은 세상의 고통과 불행을 다 가지고 행복한 길을 떠난다. 사랑은 그런 거라, 진부한 ‘진정한 사랑’이라는 건 그런 거라, 목매고 목숨을 걸 만한 거라고, 어디가 망가지고 부서지고 보이지 않아도 사랑을 찾아가는 거라 알려주었던 단평과 운언의 사랑. 영화 야반가성이었다.



https://youtu.be/SaVIEThrg_M  야반가성 뮤직비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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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장국영의 기일이다. 그랬다. 믿기지 않았던 그날 홍콩에서는 장국영의 추모에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사스 때문이었다. 사스가 인류를 공포로 몰아넣었지만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고 장국영의 믿기지 않는 추모행렬에 동참했다.


작년에도 그랬고 18년이 지난 올해도 그를 추억하는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추모할지도 모른다. 장국영이 살아있었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은 걷어 치우고 장국영은 47살의 아름다운 나이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팬들의 곁을 떠났기에 언제나 그 모습으로 기억된다.


이반이었던 장국영은 금지옥엽에서 이반이 아닌 연기를 했다. 금지옥엽의 주제곡인 ‘추’는 내내 좋아서 유튜브 덕분에 왕왕 듣고 본다. 남자로 분해 깜쪽같이 장국영을 속인 원영의가 피아노 앞에서 어설프게 연주를 하니 장국영이 피아노 앞에서 ‘추’를 부르고 비틀스보다 더 신나게 ‘트위스트 엔 샤우트’를 부른다. 우리의 기억 내면에 장국영은 그렇게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있다.


데이와 우희의 삶을 갈라놓는 것이 힘들었던 패왕별희의 도즈. 우희로서만이 패왕의 온도를 느끼는 인생이지만 변혁과 전통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두려운 병처럼 퍼지는 집단사고 속에서 무서운 건 자신 속에 있는 또 다른 자신의 도즈를 연기해야 했던 장국영. 보는 동안 도즈의 감정에 휩쓸려 파도처럼 너울거렸던 패왕별희.


학창 시절 장국영의 영화보다는 노래를 더 많이 좋아했다. 장국영의 모든 노래가 좋았다. 고교시절 사진부 암실에서 주성치와 장국영의 가유희사 같은 시나리오를 써보리라, 라며 선배들이 빠져나간 암실에서 조금씩 시나리오를 적어보기도 했다. 가유희사 속에서 장국영은 주성치와는 다른 매력으로 웃음을 주었다. 18년이 지난 지금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꼭꼭 쓰고 다닌다. 마치 장국영을 추모라도 하듯이.


장국영의 영화는 자주 볼 수 없었지만 장국영의 노래는 자주 들을 수 있었다. 장국영, 영어 이름은 레슬리. 대부분 영화 속에 나오는 장국영을 좋아하지만 나는 장국영의 노래가 좋았다. 레슬리가 부르는 투유는 늘 한국을 자주 찾았던 장국영의 모습이 떠오른다. 손바닥에 한글을 적어 이선희와 함께 노래를 부르고, 이소라의 프러포즈에 나와서 함께 찍은 사진을 이소라는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앨범을 몇 개나 가지고 있었는데 커버를 잃어버려 직접 써서 커버를 만들기도 했다. 앨범은 다 잃어버리고 두 개 정도 남아있다.  왜 소중하게 다루지 않았을까. 


장국영의 목소리에는 늘 옅은 비애가 서려있다. 그 목소리가 노래가 되었을 때 알 수 없는 끌림에 딸려가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장국영이 신나게 부르는 노래도 어딘지 모르게 슬픈 비를 맞는 기분이다. 


https://youtu.be/WSfj9ieBfog 장국영 투유 라이브



학창 시절 사진부 암실에서 선배들에게 허벅지를 난도질당하고 아픈 다리를 주무르고 있을 때 한 선배가 장국영을 들어보라며 주고 갔다. 겨우 일어나 암실 창가에 앉았다. 햇살이 창을 투과해 다리에 내려앉았다. 욱신거리는 다리 위에 앨범을 올리고 ‘최애'를 들었다.


그때 노래를 듣고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가 있을까 생각했다. 넋을 놓고 듣고 또 들었다. 햇살에 반짝이는 하얀 눈이 떠올랐고 그 속에서 빛처럼 부서지는 내 몸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노래를 듣고 있으면 내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 초라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그동안 나를 스쳐갔던 소중한 사람들과 소중한 시간들. 지나간 것들을 기억하고 추억한다는 건 그 순간을 눈물을 흘리며 몇 백번이나 떠올렸을까.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도 나에게는 최고의 순간이었을 그 어느 때. 그때를 기억하는 건 나에겐 찬란하고 빛나는 자산인 것이다.


그때 맞이했던 포근한 온도와 나른한 햇살과 아카시아 꽃과 같은 향을 앞으로 만나지 못할지라도 나의 추억 속에서는 그 장소, 그 공간 그 시간이 그대로 우뚝 서 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장국영이 열심히 무대 위에서 땀을 흘리며 ‘최애’를 부르고 있다. 넌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라고 하면서, 너 자체가 사랑이라고 하면서.


https://youtu.be/W9jq62-MIUE 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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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활짝 웃게 만드는 것도 가족, 나를 크게 울리는 것도 가족이다. 가족을 부정하는 사람도 있고, 가족을 맹신하는 사람도 있지만 가족은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들고 더 불행하게 만든다. 가족은 나를 덜 행복하게 하거나 덜 불행하게 하지는 않는다.


영화 ‘남매의 여름밤’은 그런 가족에 관한 이야기다. 남매의 여름밤은 그렇게 남매의 기억 속에 추억으로 단단하게 자리 잡아 시간과 멀어질수록 생생하게 떠오를 것이다.


영화를 관통하는 이야기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늦었다며 잠을 깨운다, 지각이라는 불안감에 후다닥 일어나 가방을 메고 마당으로 나가니 밤인 것이다. 그렇게 여름밤, 아버지는 나를 놀렸다. 누구나에게 다 있을 법한 이야기, 여름밤의 선명한 기억은 박제가 된 채로 나이를 들어 버렸다.


영화 속에서 누나지만 아직 어린 옥주의 힘듦을 위로해 주는 말을 내뱉는 더 어린 동주.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동주가 누나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위로의 말은 고작 “라면 끓여줄까?”였다. 진정으로 괜찮냐고 물어봐 주는 건 가족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동주는 그저 친구가 좋고 노는 것이 좋은 어린이지만 누나 옥주와 싸우고 난 후 옥주가 소리 질러서 미안하다고 하니 "우리가 싸웠나?"라고 무심하게 말한다. 


이런 장면은 나를 대입하게 된다. 나와 여동생도 어린 시절에는 이런 것으로 종종 싸우고 붙어있었다. 하지만 긴 시간을 돌아봤을 때 그건 너무나 미약하리만큼 짧은 시간이었다. 조카를 데리고 일 년에 몇 번 집에 오면 어린 시절의 앨범을 꺼내 들어 보며 그때를 웃으며 이야기한다. 옥주와 동주는 서로 맞는 구석이 하나도 없지만 결국에는 모기장으로 들어오라고 해서 같이 잠을 잔다. 남매가 여름밤을 같이 보내는 시간은 그리 몇 번 되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의 연기가 연기가 아니라 너무 실제 같아서 보는 내내 옥주와 동주에게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창을 타고 들어온 그 여름의 햇살. 여름밤의 달빛. 할아버지가 듣던, 전축에서의 노래. 할아버지의 부재가 남긴 존재의 증명은 결국 옥주의 눈물을 터지게 만든다.


영화를 보는 동안 옥주와 동주의 가족을 보는데 이상하게 나의 유년시절 깨끗한 여름밤 기억을 들여다보는 기분이다. 죽지 않으면 따라다닐 어린 시절의 지독한 선명한 여름밤의 기억. 그 기억을 통해서 현재가 힘들지만 어떻게든 삶을 지탱하게 만드는 동력일지도 모른다.


영화 ‘남매의 여름밤’은 남매인 옥주와 동주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아직 어린이의 마음을 가진 채 그만 미숙한 어른이 되어 버린 남매, 아빠와 고모인 병기와 미정의 여름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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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 2021-03-30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끝까지 못봤네요. 다시 봐야지 하고는. 남동생이 제 아들이랑 이미지가 겹쳐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어요. 마지막엔 눈물이 터지는군요. 저 할아버지를 보고, 열한 살 아들이 묻더군요. 엄마, 아빠도 나중에 저렇게 돼? 초점 없고 굼뜬 늙은 할아비 모양새가 아들 눈에 이상해 보였나봐요. 연기인지 리얼인지 구분이 안되는^^;;

교관 2021-03-31 12:48   좋아요 0 | URL
아드님이 귀엽습니다. 그때에만 할 수 있는 질문이고 그때에만 가질 수 있는 궁금함인 것 같아요. 그때를 또 지나고 나면 어른이 되어서 할 말을 속으로 삼킬지도 모르니까요 ㅎㅎ. 활달하고 운동 잘 하고 싸움도 잘 하고 노래 잘 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도 엄청 많다고 전해주세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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