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 라고 거창하게 시작했지만 내가 그 이유를 알고 있지는 못하다. 어떤 책이든 읽기 전의 나보다 읽은 후의 내가 조금의 변화가 있거나 생각이 달라졌다면 그 책은 성공적이라고 본다. 소설도 마찬가지로, 소설을 읽기 전과 후가 전혀 변화가 없다면 그 소설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소설은 분명하지만, 허구다. 소설 속 이 허구를 비틀어서 현실을 직시한다. 내가 경험해보지 않았더라도 소설을 통해, 상상의 세계를 통해 그것을 조금씩 빨아들이고 습득할 수 있다. 마치 스펀지가 물을 먹듯이.
지금 정국이 요동치는 비상시국이다. 고요할 것만 같았던 2018년도에도 폭력 사태에 관한 뉴스가 흘러넘쳤다. 피범벅이 돼라 주먹을 휘둘러 아내를 죽인 남편의 사건도, 칼로 얼굴을 여러 번 찔러 죽인 피시방 사건도, 맘카페의 언어폭력으로 자살까지. 교촌치킨 회장의 친척이 주방에서 휘두르는 갑질의 폭력을 뉴스를 통해서 접했다.
이런 끔찍한 사건도 화면을 통해 뉴스로 보면 제삼자의 입장에서 안타깝고 애달파 하지만 뉴스가 지나가면 그걸로 보통 그만이다. 딱하고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우리는 당사자가 아니기에 그렇게 와닿지 않는다. 대한항공 갑질도 온 국민의 공분을 샀지만, 지금은 대부분 싹 잊었다. 나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잊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하트시그널이 나오면 거기에 집중하는 게 보통 우리다. 어쩔 수가 없다. 제삼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로 이런 문제를 잘 풀어내면 잊지 않을 수 있다. 잊지 않는 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게 진실이 되고 그 진실이 사실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루키의 ‘어둠의 저편’ 속 에리의 방을 보는 제삼자의 시점과 같다. 에리는 폭력으로 인해 그 방에 갇히게 되었다. 그 폭력이란 언어적이며 어린 시절부터 너는 예쁘다, 말 잘 듣는다, 물건정리를 잘하는 아이다. 어지럽히지 않는 아이다. 다른 아이와 다르다 같은 폭력이 에리를 그 방에 갇히게 했다. 벽 안으로 밀어 넣은 폭력. 언어폭력. 착한 콤플렉스를 지니게 만드는 폭력이다. 이런 폭력은 주체가 없다는 게 큰 문제. 가해자가 없다는 것이다.
독자는 에리의 방을 보며 에리의 안타까움을 느끼지만 단지 그뿐이다. 그건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가 뉴스를 통해서 폭력을 접하는 것과 비슷하다. 직접경험의 부재가 우리를 방관자로 만든다. 그러나 이 소설을 다 읽어가는 동안 서서히 에리가 당한 폭력, 그것이 부당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흡수하게 된다. 소설의 장점이다.
2025년 지금 각종 언어폭력이 SNS를 수놓고 있다. 언어폭력 중에서도 어떤 게 무섭냐면, 오히려 공격하고 음해하는 공격은 방어해야 할 논리가 비교적 적립되어 있다. A 유형은 이렇게 대처하고 B 유형은 이렇게 하는 매뉴얼이 있어서 그렇게 하면 된다. 하지만 어설프게 나를 위하는 사람. 내 편인데 나를 누르려거나 이기고 싶어서 빙빙 꼬는 사람. 칭찬인데 뾰족한 바늘이 들어가 있는 폭력이 더 무섭다.
소설 속에는 이런 수많은 유형의 인간들이 나오고 또 이야기를 통해 흐름을 파악할 수 있게 해 주는 것 같다. 순전히 나의 생각일 뿐이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