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현관문을 열고 나오면 우리 아파트에는 복도에 늘 맛있는 냄새가 머물러 있다. 도대체 어떤 집에서 하루는 짜파게티, 하루는 김치찌개, 하루는 고기를 굽는 걸까. 오늘은 달걀프라이 냄새가 엘리베이터를 못 타게 했다. 아는 맛이라 그런지 계란프라이의 냄새는 위장을 쥐어짠다. 평일의 아침은 느긋하지 않다. 하지만 이 냄새는, 프라이팬 위에서 기름에 노릇하게 익어가는 그 냄새는 나를 안달 나게 만든다.
나에게는 나의 친구와 결혼을 한 영국 친구가 있다. 이름은 죠. 죠가 하루는 달걀이 맞는지 계란이 맞는지 물었다. 둘 다 맞다. 왜 이렇게 완전히 다른 단어를 두 개나 사용하나?라고 물어서 내 멋대로 대답을 했다. 계란은 가정집에서 가족들끼리 계란으로 만든 음식을 먹을 때 계란이라 부르고, 달걀은 식당에서 달걀로 만든 음식을 주문할 때 달걀이라고 부른다고 말해버렸다. 그랬더니 의심 적게 봤지만 뭐 어때. 달걀이나 계란이나.
그래서 한 번 찾아보니 둘 다 ‘닭이 낳은 알’이지만 계란은 한자가 있다. 그러나 달걀은 한자가 없고 온전하게 우리말로 되어 있다. 이를 두고 한때 방송에서 계란을 달걀로 순화해서 바꾸려고 한 바가 있지만 현재는 둘 다 똑같이 사용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바뀐 음식이름이 몇 개 있다. 기묘하고 괴랄한 이름으로 바뀐 자장면이 있고, 도무지 머릿속에 형태가 떠오르지 않는 닭볶음탕. 닭도리탕은 뾰롱하며 음식이 화악 떠오르는데 닭볶음탕은 뭐야.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달걀 사진을 보여주며 뭐냐고 물으면 달걀이라고 하는 사람이 많을까 계란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을까. 이거 한 번 실험해 보면 재미있다.
박찬일의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를 보면 달걀을 몹시 좋아하는데 주치의에게 달걀을 많이 먹으면 안 된다는 말을 듣고 달걀에 대한 아쉬움을 말했다. 달걀은 삶은 계란으로 먹으면 맛있다. 나는 삶은 달걀을 매일 2개씩 먹는다. 그게 한 끼다. 삶은 달걀은 포만감을 준다. 보통 달걀 요리라고 하면 어딘가에 곁들여 먹는 음식이라는 느낌이 강하지만 삶은 달걀은 오롯이 그 자체의 맛으로 즐길 수 있다.
예전의 영화를 보면 기차에서 삶은 달걀을 입에 가득 넣고 사이다를 먹는 장면이 많았다. 아주 슬픈 삶은 달걀이 나오는 영화가 ‘삼포 가는 길’이다. 그 속에서 젊은 문숙이 연기하는 백화가 먹는 삶은 달걀이다.
황석영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삼포 가는 길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설원과 문숙의 활달한 모습이 잔상을 따라 계속 맴돈다. 웃으며 소리를 지르고 거칠게만 살아와서 거침없이 욕을 하고 미친 것처럼 만개한 꽃과 같은 백화를 보면 마음 깊은 곳에서 슬픔이 올라온다. 백화에게는 어떠한 특질이 있다.
신들린 것처럼 문숙은 연기를 한다. 그 당시를 보면 세련된 대사에 세련된 영상이다. 삼포 가는 길의 이야기를 빛나게 하는 건 문숙이다.
뭐? 화냥년? 그래 난 화냥년이다. 화냥년이야. 더러운 년이라구. 더럽고 썩고 썩은 년이라고. 난 너희들 사내놈들한테 살이 빠지도록 팔고 사는 년이라고. 그게 왜 내 잘못이냐고, 왜!라고 울부짖은 백화의 모습에 보는 이들은 빠져들고 같이 무너진다. 익살스러운 대사도 많다. 백일섭과의 대화는 웃음의 포인트가 많다.
야, 너 몇 살 쳐 자셨냐?
흥, 화류계에서 누가 나이 따져서 언니 동생하는 줄 아나? 마신 술잔하고 사내 숫자로 셈하는 거야, 요 병신아.
농땀, 미얀마얀 재송해용. (치마를 들춰 올리며) 어때 마음에 들어?
헤헤 지랄로(백일섭의 특징을 잘 말해주는 대사다).
같은 대사들이 재미있다. 마지막 달걀을 주는 장면은 참 촌스럽지만 슬픈 장면이다. 백화가 받은 삶은 달걀은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삶은 달걀이다. 백화는 삶은 달걀을 먹으며 꿋꿋하고 거칠게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욕쟁이 백화와 풋풋한 점순의 모습을 동시에 지닌 채.
삼포 가는 길은 춥고 고되기만 하다. 발가락은 눈밭에 빠지는 바람에 떨어져 나갈 것 같지만 함께 삼포로 가는 일행이 있어 참고 견딜 수 있다. 하지만 그토록 바라던 삼포는 이미 사람이 살 수 있는 안온한 곳이 아니었고 낯설기만 한 곳이 되었다. 또다시 뜨내기의 길만이 앞에 놓일 뿐이다. 마치 하루키의 주인공들을 보는 것만 같았다. 지금 이렇게 하는 모든 일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처럼. 일상에서 밀려나버린 주인공은 나의 모습인 동시에 내 주변의 모습이었다. https://youtu.be/F2k8ZFPRXa4
〈삼포 가는 길〉 블루레이 출시 기념 주연배우 문숙 특별 인터뷰 "마지막 장면은 검열 때문에 들어간 거예요"
그리고 근래에는 마녀의 김다미가 삶은 달걀을 기차에서 입 안 가득 넣고 우물우물 먹었다. 그렇게 먹다가 목으로 넘기면 버석하고 갑갑한 목을 메이게 하며 조이는 자극을 준다. 이 기분이 미묘하게 삶은 달걀의 맛을 더 살린다. 그때 필요한 건 탄산! 사이다가 필요한 것이다. 쏴아아아아. 캬아.
요네하라 마리의 ‘미식 견문록’을 읽어 보면 서문에서도 [아버지가 삶은 달걀 껍질을 까주신다. 내가 하나를 먹으면 또 하나를 까주신다. 아, 얼마나 행복한지. 그 달걀도 홀랑 입속으로 넣는다] 달랑 두 줄이지만 요네하라의 글 속에는 미소를 짓게 만드는 위트와 추억이 있다.
신기하게도 인간이 언제부터 달걀을 먹었는지 모른다고 한다. 확실한 것은 달걀이 인간계에 들어옴으로 해서 요리의 신기원이 열렸다고 박찬일은 말했다. 과자, 아이스크림에는 반드시 들어간다. 노른자와 흰자로 분리되는 두 가지 다른 성질 덕분에 인간의 화려한 미식의 세계가 바다처럼 펼쳐진 것이다. 크렘 브륄레, 슈크림, 커스터드를 넣은 샌드가 노른자의 마력이라면, 한없이 부풀어 올라 미식의 허영을 충족시켜 주는 수플레, 중독성 강한 마카롱 같은 과자는 흰자의 무한 변신으로 가능해졌다고 한다.
달걀 프라이의 진수는 예전의 중국집에서 웍으로 튀겨낸 프라이다. 달걀이 기름에 들어가자마자 놀라서 튀겨진 듯, 흰자의 겉은 바삭하게 그러나 질기지 않고, 노른자는 밑면으로부터 윗면까지 익힌 정도가 그러데이션으로 퍼진, 그래서 웰던에서 레어까지 노른자의 층위가 만들어진 프라이가 정녕 달걀 프라이인 것이다. 오로지 볶음밥에 같이 놓을 수 있는 진정한 중국집의 숨은 맛이었다.
언젠가부터 중국집 볶음밥이 대부분 프랜차이즈화 되어서 머리 밥은 볶아 놓고 있다가 주문이 들어오면 그때 데워서 스크램블과 짜장으로 볶음밥의 이상한 맛을 가려 버렸다. 짜장 따위는 감히 중국집 볶음밥에 낄 수 없는 존재였다. 오직 달걀 프라이와 후추가 들어간 달걀국이었다. 그런 동네 중국집을 찾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