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도 오는데 오늘 저녁은 아빠 오시면 떡국 끓여 먹자.


어릴 때 아버지가 회사에서 퇴근 후 집에 오시면 엄마의 떡국 밥상이 가끔 차려졌다. 떡국은 새해에만 먹곤 했는데 이맘때,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면 엄마는 떡국을 끓였다. 떡국이라는 게 별거 아니지만 새해에만 먹던 음식이라 평일에 한 번씩 해 먹으면 괜히 설레는 그런 느낌이 있었다.


나는 동생과 함께 우산을 들고 아버지를 마중 나갔다. 춥지도 덥지도 않아서 우산을 들고 동생과 아버지를 마중 나가는 시간은 즐거웠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 것도 없지만 어린이였던 우리는 즐거웠다.


집을 나서서 공터를 지나 골목을 내려가 도로를 건너 버스정류장까지 가는데 한 20분 정도 걸렸다. 그 시간이, 아버지 마중 나가는 그 길이 우리는 즐거웠다. 엄마는 동생을 잘 챙겨야 한다고 해서, 동생과 티격태격하면서도 나는 동생의 손을 놓지 않았다.


이렇게 비가 추적추적 주룩주룩 내리는 날에는 떡국이 먹고 싶다. 뜨거운 떡국을 먹고 속을 데우고 싶다. 얼음이 잔뜩 들어간 아메리카노로 식어버린 속을 따뜻하게 온도를 높이고 싶다.


우리는 버스가 정차할 때마다 이 버스에서 아버지가 내리나 내기를 하며 기다렸다. 부웅 버스가 지나가면서 도로 가의 물이 우리 쪽으로 튈 때에는 꺄악 하며 뒤로 물러나는 것도 즐거웠다. 어린이였던 것이다.


아버지가 늘 오시던 시간에서 늦어지면 동생은 초조해했다. 오빠, 왜 아빠 안 와?라고 하면 저 멀리서 오는 버스를 보며 저 버스다!라고 내가 말했고, 앗! 저 버스다!라고 따라 하던 동생은 여고를 가면서 기숙사 생활을 위해 집을 떠나, 대학교를 서울의 뚝섬 근처로 가면서 집에서는 완전히 떨어졌다. 한 녀석을 만나 결혼을 하고 조카를 낳아서 키우며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간 집에서 떨어져 살았던 동생이 조카를 낳자마자 고향 집으로 와서 몸을 추슬렀다. 동생은 자신의 몸에서 나온 새로운 생명이 꽤나 신기했던지 조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일하고 집에 와서 방문을 열어 보면 나란히 누워서 잠을 자는 꼬물이 조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다음 날에도 집에 와서 방문을 열면 비슷한 자세로 조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다음 날에도 집에 와서 방문을 열면 비슷한 자세로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폼으로 잠든 조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두 달을 거의 매일 비슷한 모습이라 사진을 매일 담아서 액자로 만들어 버렸다. 아버지도 조카를 보고 하늘로 가셨다면 좀 어땠을까.


우리는 우산을 쓰고 한 손에는 아버지의 우산을 들고, 저 버스에서 아버지가 내릴까 고개를 자라처럼 빼서 기다렸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번에도 버스에서 내리지 않고 더 이상 재미가 떨어진 우리는 비가 우산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다음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정류장에는 제과점과 슈퍼, 그리고 레코드 가게가 있어서 사각 스피커에서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자주 나왔다. 아마 레코드 가게의 주인이 바그너를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트리스탄은 적국의 장군이고 이졸데는 적국의 공주였다. 이졸데가 트리스탄의 상처를 치료해 주다가 사랑을 하게 되었지만 두 사람은 같이 있지 못하고 떠났다가 트리스탄이 먼저 죽고 이졸데가 죽은 자신의 연인 트리스탄 위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슬픈 이야긴데 바그너가 너무나 장엄하고 웅장한 슬픔으로 표현했다.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가장 잘 표현된 영화가 있다. '멜랑콜리아'가 바로 그 영화다. 우울하다면 이 영화를 보라고 말하고 싶다. 지구가 멸망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의외로 덤덤한 저스틴. 그에 비해 극도의 공포와 긴장으로 몸이 분열될 것만 같은 언니 클레어.

멜랑콜리아의 마지막은 지구가 멸망하면서 끝이 난다. 영화는 저스틴의 우울로 인해 그간 고통스러운 나날들이 지구의 멸망보다 더 힘들었기에 그 부서질 것 같은 고통이 끝난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이 든다.


그에 비해 언니인 클레어는 유복하게 잘 살고, 자상하고 꼼꼼한 성격으로 일상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갖추어서 생활을 하고 있다. 저스틴과는 대조되는 모습을 보이며 언제나 착한 언니, 완벽한 언니, 엄마, 아내로서 살아간다.


하지만 멜랑콜리아라는 거대 행성이 지구와의 충돌이 야기되자 두 사람의 심정이 반전된다. 클레어의 심리가 완벽하게 무너지는 시점이 그때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사회가 만들어 준 단단한 껍데기가 박살 나게 된다. 그에 비해 저스틴은 멜랑콜리아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면서 우울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인다.


삶이 망가져 있던 저스틴은 음식을 먹으며 활동을 하고 숲 속에 발가벗고 누워 비로소 자유를 느끼며 멜랑콜리아, 멸망을 받아들이는 자신만의 의식을 가진다.


영화는 숨은 장면이 많고 무척이나 철학적이다. 바그너의 음악은 니체를 말하고, 저스틴의 방에 걸린 그림들은 저스틴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 저스틴과 클레어 이외에 남편들과 저스틴이 우울에 깊게 빠지게 되는 경유는 모두가 저스틴과 가장 친밀한 것들에서 시작된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나의 내부를 안쪽에서부터 따뜻하게도 하지만 나의 내부를 안쪽부터 칼로 베어내기도 한다. 우울이라는 내면은 행성 충돌로 인한 멸망의 외부보다 더 거대한 고통이다. 지구의 멸망으로 인해 나의 깊은 우울 또한 끝이 난다. 이토록 기뻐했던 적이 있었던가.


두 시간이 넘는 동안 바그너가 온 마음을 휘두르고 영상 내내 미술품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든 영화 ‘멜랑콜리아’였다.


https://youtu.be/JCUdy1nUqrg


1장이 끝나갈 때 버스가 정차를 하고 아버지가 내렸다. 동생은 아빠 하며 아버지에게 갔고 아버지는 동생을 올려서 안았다. 아버지는 근육도 좋고 한 손으로 동생을 안아 올렸고 동생은 우산을 들었다. 어린 시절의 사진을 보면 동생을 아버지가 안고 있는 사진이 많다. 동생이 태어나기 전에는 내가 아버지에게 늘 안겨 있었다.


아빠, 오늘 엄마가 떡국햏따.


아버지에게 안겨 동생이 발음도 잘 안 되는 말을 했다. 오늘 저녁은 떡국이다. 따뜻한 떡국 한 그릇 먹으면 하릴없이 추억 속으로 젖어들 수 있다. 떡국에 계란 지단을 많이 올려 먹는 게 좋아서 엄마는 계란 지단을 많이 만들었다. 떡국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좋았다. 네 식구가 떡국에서 피어나는 연기에 흡착될 것 같았다. 양념간장을 조금 넣어서 휘휘 저어서 먹다 보면 아버지도 허허하며 이야기를 하고, 동생은 하염없이 어린이가 되어 재잘재잘거렸다.



아버지가 생각날 때 보는 웃긴 코믹 싱글벙글 영상 https://youtu.be/kcPVDWAT4p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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