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라디오를 듣는데 날이 추워져서 집 정리를 하던 중에 크리스마스트리를 꺼내서 설치를 해버렸다는 사연을 들었다. 이 사연도 일주일 전의 일이다. 일찍부터 설치해서 길게 크리스마스 기분을 느끼고 싶다는 거였다. 이런 마음은 보통 어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어른들 중에서도 아직 아이의 마음을 놓치지 않고 있는 어른들이 그렇다. 그런 어른들이 크리스마스의 기분을 길게 끌고 가고 싶은 것이다. 라디오를 들으며 어쩜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월 중순이 지나면 나는 일하는 곳에 캐럴을 틀어 놓는다. 빙 크로스비, 넷 킹 콜, 루드 밴드로스, 팻 분, 머라이어 캐리 등 오래된 캐럴을 들으면 거짓말처럼 따뜻하다. 오래된 캐럴이 아니라 새로운 캐럴을 듣고 싶어도 언젠가부터 캐럴은 새롭게 잘 나오지 않는다. 시즌이 되면 매년 내놓았던 때가 있었다. 아무래도 겨울에는 크리스마스가 있고 시즌이 되면 그 예전을 떠올리게 된다. 오래된 캐럴은 하이얀 털로 품속에 들어있는 기분이다. 빙 크로스비와 팻 분은 서른 살 가까이 차이가 나는데 팻 분은 아직 살아있다. 개인적으로 이 두 사람의 캐럴이 주는 따뜻한 기분이 참 좋다.


대학생 때 자취를 했다. 그때에도 나는 11월부터 크리스마스 기분을 내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뭐야? 벌써?라고 했지만 막상 같이 분위기를 타곤 했다. 일찍부터 나의 자취방과 우리가 자주 모이는 곳에 장식을 미리 해놓고 캐럴을 듣곤 했다. 크리스마스가 되기 전에 학기가 끝나고 모두가 집으로 갔지만 그때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고 집으로 가자,라고 해서 자취를 하는 아이들 모두 남아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게 되었다.


느슨하게 해 놓은 장식도 촘촘하게 바뀌어 가고 본격적으로 캐럴을 매일 들으며 크리스마스 기분을 시즌 내내 느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기 전까지 매일 밤마다 맥주를 홀짝이며 우리는 희희낙락했다. 우리는 식영과, 건축과로 이루어졌는데 보통 매일 모이면 10명 가까이 되었다. 게 중에는 커플도 있었다. 걔네가 커플이 된 계기가 둘이 썸을 탈 때 내가 나의 자취방을 그 두 사람에게 내주었다. 그래, 어디 한 번 둘이 밤새도록 잘해봐,라고 해서 커플이 되었고 왕왕 자취방을 빌려주기도 했다. 이 부분도 지금의 나를 생각하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방을 그대로 내주다니, 맙소사다.


같은 과 친구 중에 술만 취하면 집으로 가지 않고 나의 자취방에서 하룻밤 자고 가던 놈이 있었는데 오전에 일어나면 깨끗한 나의 팬티를 입고 갔다. 근데 그 녀석은 나보다 덩치가 두 배가 커서 한 번 입고 세탁해서 나에게 되돌려주었지만 헐렁해져 버리는 일이 꽤 있었다. 나의 자취방에는 생활의 냄새는 소거되어 있었다. 나는 집에서 음식을 해 먹는다던가, 술을 마신다던가 그런 건 없었다. 음반이 조금 있었고 소설책이 조금 있을 뿐이었다. 커플 녀석들은 나의 자취방을 이상하게도 좋아했다.


그렇게 크리스마스이브가 되었다. 이브가 되었다고 해서 딱히 그 전날과 다를 건 없지만 분위기만은 최고조였다. 맥주가 가득했고 크리스마에 어울리는 음식을 준비하려고 여자애들과 우리는 분주했다. 주방에서 뭔가를 하려고 하는데 나의 자취방에서 커플로 탄생한 이 녀석들이 헤어진 것이다. 그날, 하필 그날 헤어진 채 여자애가 울면서 우리에게 매달렸다. 슬슬 불안했다.


식영과 애들이라 케이크를 만들 줄 알아서 외국에서처럼 같이 케이크도 만들고 쿠키도 굽기로 했는데 여자애들은 우는 그녀를 달래기에 바빴다. 그러다 점점 시간이 흘러 흘러 결국 케이크 만들기는 물 건너 가버렸다. 우리가 전부 모였을 ㄷ대는 술과 술과 술, 술만이 상위에 가득했다. 첫사랑의 아픔은 참 힘들다. 처음은 뭐든 정말 이상하다. 신은 인간에게 왜 이런 시련을 줄까. 그 시련에 우리까지 왜 집어넣는 것일까. 사랑 ㄷ대문에 행복한 기억은 왜 이렇게나 짧고 좁고 얕고 옅을까. 처음이 주는 기쁨은 크지만 슬픔 역시 감당하기 힘들다. 커플 중에 그 녀석은 집으로 가버렸다.


이제 음식을 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했다가 그 시련의 화살은 우리에게 까지 닿았다. 따가웠다. 하지만 우리는 주점을 하면서 부추전을 만들어서 팔았던 경험이 있다. 그래, 밀가루가 잔뜩 있고 고기도 있고, 냉장고에 부추도 가득 있으니까 부추전을 만들어 먹자. 그렇게 해서 크리스마스이브에 부추전을 잔뜩 부쳤다. 기름 냄새가 너무나 가득했다. 부추전이 맛있을까, 생각했지만 어떻든 만들어 놓고 나니 아이들은 젓가락으로 신공을 펼쳐 무슨 맛도 모른 채 부추전을 홀라당 먹어 치웠다. 부추전은 막걸리와 어울린다지만 맥주와도 잘 어울리고 소중하는 궁합이 잘 맞았다.


한쪽에서 전 부치고, 부쳐 내놓은 부추전은 바로바로 없어지고. 부추전을 구워 먹는 묘미다. 그때에도 캐럴은 빙 크로스비와 팻 분, 머라이어 캐리였다. 창문 하나 열면 너무나 추워서 오들오들 거릴 정도로 찬 바람이 불지만 창문 안쪽에서 우리는 아주 즐겁고 재미있게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만끽했다. 소풍 김밥처럼 그런 시간도 인생에서 아주 잠깐이다. 행복한 순간은 너무나 빨리 지나가 버린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의 행복한 감정을 가지고 여러 날들의 불행한 날들을 견딜 수 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추억을 많이 만들어 놓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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