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야 쥰.


한국 이름 길옥윤은 치대에서 재즈 음악에 심취해 1950년 초에 일본으로 가서 재즈와 색소폰에 빠져든다. 그는 52년 주일미군 캠프촌을 순회하는 악단을 조성하고 본격적인 색소폰 연주를 하며 음악 만들기에 돌입한다. 이때 자신의 이름 길옥윤을 일본 이름 ‘요시야 쥰’으로 바꾼다.


길옥윤은 지금에서 보면 천재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다. 주옥같은 노래를 계속 만들었는데 그 곡수가 무려 3500곡에 이른다. 호리호리한 몸으로 학생 같은 맑은 얼굴을 가진 길옥윤은 색소폰을 불 때면 혼을 실어 폭발하듯 음을 뽑아냈다.


‘사랑은 영원히’는 길옥윤이 만든 음악 중에 한 곡이다.


폐암과 척추암이 퍼져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던 길옥윤은 자신을 위한 마지막 콘서트에서 이혼해서 헤어졌던 패티가 ‘4월이 가면’을 부른다. 1998년 서울 등촌동 SBS 공개홀에서 열린 무대였다. 밤 9시 50분부터 1시간 30분 동안 생중계로 이어진 ‘이별 콘서트’였다.


이날 객석의 중간에 휠체어에 몸을 실은 길옥윤은 49년의 음악인생을 이 마지막 무대에서 정리를 했다. 사람들은 박수로 그를 향한 아쉬움을 말했고, 수많은 눈물로 그는 위로를 받았다. 패티가 ‘4월이 가면’을 부르고 나니 길옥윤이 신청곡이 있다며 “짧은 시간이었지만 알차고 기름진 시간을 함께했다. 헤어진 건 몸이었지 마음이 아니었다”라며 ‘사랑은 영원히’를 신청한다. 패티는 애틋하게, 특유의 목소리로, 아 길 선생님 이 곡은 너무 어려워요.라고 하지만 노래를 부른다.


못 부른다던 패티는 ‘사랑은 영원히’를 정말 세상에서 가장 멋지게 부른다. 휠체어에 앉아서 노래를 부르는 패티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길옥윤의 마음은 어땠을까. 패티가 20년 동안 무대에서 결코 부르지 않았던 ‘이별’을 눈물을 참아가며 부르고 난 뒤에 길옥윤은 “역시 옛 친구가 최고다”라고 했다. 패티는 인사를 하고 분장실로 돌아가 한없이 소리 내어 울었다.


‘사랑은 영원히’라는 노래는 1974년 제4회 동경 국제 가요제에서 14개국이 참가해 450곡이 나온 가운데 3위를 차지했다. 이 곡은 이별의 곡이다. 길 선생님과 패티의 헤어짐에 관한 노래다. 그러나 헤어지는 건 비록 몸이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다고 노래는 말한다. 두 사람의 애절함이 깃든 곳인 것이다.


길옥윤과 패티는 결혼하여 한 6년 정도 같이 살았다. 66년에 결혼을 한다. 주례를 김종필 총재가 맡았다. 72년까지 결혼 생활을 함께 한다. 두 사람은 1958년 일본에서 처음 만났다. 패티가 미 8군 가수 공연단의 일본 공연 때였다. 길옥윤은 당시 치과의사로, 색소폰 연주자로, 작곡가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길옥윤은 패티의 공연을 보자마자 아, 저 사람은 후에 대형가수가 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가수와 작곡가로서 만난 패티는 도도했다. 어디를 가나 다리를 꼬고 앉았고 인사도 먼저 하지 않았다. 아주 당돌한 아가씨였다. 스타는 좀 오만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패티는 당당했다.


시간이 흘러 1966년 패티의 어머니가 위독해서 미국에서 활동하던 패티는 한국으로 온다. 그때 길옥윤도 일본에서 한국으로 와서 다시 두 사람이 만나게 된다. 그때 처음으로 길옥윤이 패티에게 준 곡이 ‘4월이 가면’이다. 이 곡은 패티에게 바치는 프러포즈의 곡이었다. 그때의 길옥윤의 모습은 파릇파릇 청춘의 얼굴을 하고 야리야리한 체형에 포마드로 빗어 넘긴 헤어 스타일에 색소폰을 불었다. 반면에 패티는 도도하고 볼륨감이 넘치는 스타일과 말아 올린 머리가 상징처럼 되었고 얼굴에는 자신감이 흐르고 있었다.


‘4월이 가면' 이 곡을 받은 패티는 이건 길 선생님이 나에게 프러포즈를 하는구나, 아 나를 사랑하는구나,라고 생각하고 노래를 받고 패티가 먼저 결혼하자고 길옥윤에게 말을 해버린다. 두 사람은 아주 재미있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행복할 것만 같았던 결혼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창작의 고통에서 오는 영혼이 갉아 먹히는 불안으로 연명하는 작곡과 창작 연주의 매일은 길옥윤을 순간적인 쾌락의 세계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철저한 자기 관리와 절제의 생활이 습관이 된 패티김에게는 그런 그의 모습이 용납되지 않았다. 불행의 시작은 골이 깊어지고 두 사람을 갈라놓게 만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한 명의 딸이 있었지만 결국 헤어지게 된다.


그리고 98년 이계진의 사회로 마지막 콘서트 무대를 가진 길옥윤은 그 무대에서 패티의 ‘사랑은 영원히’를 듣고 미소를 그린 후 이듬해 3월에 저세상으로 간다. 길옥윤은 패티김과 작업을 많이 했지만 혜은이와도 많은 작업을 했다. 당신은 모르실 거야, 제3 한강교 등 정말 많은 곡을 남겼다. 길옥윤은 갔지만 예술은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있다. 그래서 예술은 길다.


나는 패티김을 좋아하는 어머니 덕분에 어린 시절에도 아침에 눈을 뜨면 집안에 패티김의 노래가 흐르는 것을 들으며 일어났다. 아침에 뉴스 소리 나 드라마 소리가 아닌 학창 시절에도 내내 오전에는 패티김의 노래로 아침을 맞이했다. 그래서 패티김의 앨범이 나이별로 있었다. 나는 패티김의 공연을 3번 정도 보러 갔다. 그 멋짐과 압도당하는 목소리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노래들을 따라 불렀다. 가수로도 활동하는 둘째 카밀라가 늘 엄마의 공연에서 함께 해주었다.


'사랑은 영원히'는 패티김의 버전도 좋지만 길옥윤의 색소폰 연주만으로 된 연주곡 버전도 참 좋다. 아마 사람들은 마음속에 헤어진 연이이나 절대 만날 수 없는 사람과의 헤어짐이 몸의 헤어짐이지 마음까지 헤어짐이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내가 쓴 패티 김 이야기들


https://brunch.co.kr/@drillmasteer/3149


https://brunch.co.kr/@drillmasteer/944


98년 SBS 마지막 무대에서 '사랑은 영원히' https://youtu.be/S7TG4iQ7n1U 영상출처: 천칼라CheonColor CC


사랑은 영원히 색소폰 버전 https://youtu.be/GF_jKYTjEhw 영상출처: 길옥윤 -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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